자기계발과 마음공부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장백산-1 2019. 12. 15. 22:04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지(止 ; 가만히) 관(觀 :생각해서 보다) 수행’의 개요 오롯이 담긴 일상생활 용어


지(止)와 관(觀)은 북방불교의 중요 수행 방법으로 생활불교 속 진언과 유사해

지(止)와 관(觀) 수행법은 집중력 향상에 그치지 않고 실질수행으로 나가는 힘 담겨


사마타(samatha)와 위빠사나(vipassanā)는 남방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이다. 이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북방불교에선 지(止)와 관(觀)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지관(止觀) 수행법은 북방불교에서도 중요한 수행법 가운데 하나이다.


지(止, 사마타)란 수행함에 있어서 밖으로는 일체의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안으로는 분별하는 일체의 생각에 흔들리지 않은 채 마음을 특정의 경계에 쏟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관(觀, 위빠사나)이란 ‘지’의 수행을 통해 얻은 고요한 마음의 상태에서 바른 지혜를 끌어내어 이 세상 모든 것을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관찰해가는 것을 말한다. 지관수행법은 흔히 흙탕물을 가라앉혀 맑힘(止)으로써 맑아진 물속을 들여다볼(觀) 수 있는 것에 비유되기도 한다.


‘지’는 초선부터 제4선까지 색계(色界)의 4가지 선정인 사선(四禪)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 욕계(欲界)를 벗어나 색계(色界)에 접어들면 욕망(欲望)은 사라졌지만 일상생활에서의 사유작용(思惟作用)은 여전히 계속되며 욕망에서 벗어났다는 희열감과 행복감을 느끼게 된 것을 초선(初禪)이라 한다. 그 다음 일상적인 사유작용도 가라앉고 집중된 마음의 상태인 삼매(三昧)에 머물게 되는데, 삼매로 인한 희열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제2선(第二禪)이다. 그리고 제3선(第三禪)에 접어들면 모든 희열감과 행복감이 사라지고 단지 평정된 마음(平常心)에 머물음으로써 바른 생각(正思惟)과 바른 지혜를 갖출 수 있게 되며, 제4선(第四禪)에 접어들면 제3선(第3禪)에서 갖추어진 모든 것들이 완성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사선(四禪)의 마음상태에 대해선 경전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는데, 수행하는 이들은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자신이 어느 단계에 와있는지 점검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관(觀 : 위빠사나)’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알고서 바라보는 것인 여실지견(如實知見)을 통해 성취될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사념처(四念處)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사념처(四念處)란 수행자가 자신의 존재상황을 철저히 대상화 시켜놓은 상태에서 몸(身), 느낌(受), 마음(心), 법(法)으로 분류될 수 있는 존재일반이 생겨나(生) 머물다(住) 달라지고 쪼개져서(異) 사라지는(滅) 과정을 지긋이 주시함을 말한다. 수행자는 사념처를 관찰함으로써 정신적인 현상 물질적인 현상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은 항상하지 않다는 무상(無常)의 이치를 깨닫게 되고, 그래서 무상으로 인식된 괴로움(苦)를 바탕으로 무아(無我 : 나라고 하는 실체는 없다)를 간파함으로써 궁극에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날(解脫, 자유롭게 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차단속직원이 멀지감치서 다가오는데 차문을 열려고 차키를 찾아도 보이지 않는지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는 친구에게 건네는 ‘야 좀, 가만히 생각해봐!’라는 말, 이 말속에 지와 관(止觀) 수행의 개요가 오롯이 담겨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물론 천태지의 선사를 만나 복잡다단해진 지관 수행의 방법이'가만히 생각해봐'에 모두 들어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지(止, 가만히)하고서 관(觀, 생각해서 보다)해 보라 말인 셈이니 그리 터무니없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와 유사한 생활불교 말로는 원효 스님께서 한 마디 진언만 외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고 하셨던 ‘나무아미타불’이 있고, 고난의 티베트 민족을 끌어 안고 있는 진언인 ‘옴마니반메훔’, 그리고 일본의 일련 스님에 의해 창시되었다가 창가학회에 의해 제창된 ‘남묘호렌게꾜’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과 비교해 봐도 지관수행의 생활어인 ‘가만히 생각해보다’는 집중력을 길러주는 한 마디 진언(眞言)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 수행(修行)에까지 나아가게 하는 실행력이 분명 덧대어 있다.


그렇다고 맨날 ‘가만히 생각해보라!’거나 ‘가만히 생각해보자!’를 되뇌기만 한다고 그 실행력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순하게 가만히 생각해보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욱 효과적인 ‘가만히’와 ‘생각해보다’가 될 수 있을까?를 궁리하다 결국엔 더 나은 선지식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사선(四禪)에 근거하고 사념처(四念處)를 행하는 지관수행에 들어설 때 생활불교는 수행불교로 올곧게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16호 / 2019년 12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