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아상(我相) ‘내가 최고야’라며 자신을 높이고 자만하는 마음

장백산-1 2019. 12. 21. 02:23

아상(我相)


‘내가 최고야’라며 자신을 높이고 자만하는 마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서 ‘나입네’하는 생각 갖는 것이 아상(我相)

고정불변 하는 실체 없다는 무상론 무아론 강조하는 의미


어느 스님의 법문이 좋고  그분이 하는 경전반 강좌가 좋아서 수년을 쫓아다니다 언제부턴가 그 스님 방으로 들어가 차까지 곁들이며 얻어듣는 '소참법문' 덕분에 절에 다니던 재미가 쏠쏠치 않다고 생각하던 한 처사님이 어느 날 갑자기 그 스님으로부터 ‘자넨 아상(我相)이 아직 남아있어!’라는 말을 그 처사가 들었다면 기분이 어떨지는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법 경직되어오는 안색을 애써 숨기며 ‘내가 그리 건방졌나? 하심한다고 했는데…’라고 여기기 십상이다.


아상(我相)은 국어사전에 ‘자기의 처지를 자랑하여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마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기실은 어렵고도 복잡한 철학적 의미가 듬뿍 담긴 말이지만 이미 우리말과 우리의 실생활에는 사전의 내용대로 정착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말에 들어와 정착한 ‘아상(我相)’은 ‘금강경’의 사상(四相) 가운데 하나로 언급된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아상’이란 표현은 다른 경전이나 교리서에도 적잖게 언급되어 있지만 ‘금강경’이 조계종의 소의경전이자 가장 널리 읽히는 경전이기 때문에 그리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금강경’ 한문본에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의 순서로 나온다. 금강경에는 ‘나입네’ 하는 생각(我相)과 ‘나는 축생이 아닌 사람입네’라는 생각(人相)과 ‘사람들은 무리지어 함께 살아가는 중생입네’라는 생각(衆生相)과 ‘우리는 목숨을 지닌 존재입네’라는 생각(壽者相) 등의 네 가지 생각(四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므로 대승수행자는 이 네 가지 생각(四相)를 없애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설해져 있다고 흔히 풀이된다.


그런데 ‘금강경’ 범어본을 어원학에 근거해 풀이해보면 제법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순서가 아상・중생상・수자상・인상으로 되어있다. 의미도, 아뜨만(ātman)을 고정불변의 실체로 여기는 생각을 아상(我相)이라 하고, 중생(sattva)이란 상태를 고정불변의 실체로 여기는 생각을 중생상(衆生相)이라 하고, 자이나교에서 지와(jīva)를 고정불변의 실체로 여기는 것을 수자상(壽者相)이라 하고, 불교의 한 부파였던 독자부에서 뿟갈라(pudgala)를 고정불변의 실체로 여기는 것을 인상(人相)이라 하는 등으로 풀이된다. 기실 사상(四相)은 브라만교에서 고정불변의 실체로 여긴 아뜨만을 위시하여 그 후에 여기저기서 아뜨만 대신 ‘이것이 참다운 고정불변의 실체이다!’라고 들고 나온 것들이니, 사상(四相)을 없애야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 그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론(無我論)의 거듭된 강조일 뿐이다.


육조 혜능대사는 아상(我相)을 재물・학문・출신성분 등을 바탕으로 한 우월심이라 정의하는 등, 사상(四相)에 대한 다양한 시각은 부지기수이다. 그래도 그 가운데 법문 때 들으면 귀에 들어올 만한 최근의 것을 하나 들어보자면, 아상(我相)은 내가 최고야 하며 자만하는 마음이요, 인상(人相)은 나와 남을 차별하는 마음이며, 중생상(衆生相)은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모른 채 ‘나는 못난 중생인데 뭘’하는 마음이요, 수자상(壽者相)은 ‘그래도 한 세상 살아가는 목숨을 지닌 존재여’ 하는 마음이라는 풀이이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할지니[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而生其心)]’는 ‘금강경’의 또 다른 명구로 늘 회자된다. 이 문구의 범어 가운데 ‘와스뚜’란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 의미는 ‘변화무상(變化無常)한 흐름의 한 단락을 고정된 실체로 인식하여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사상(四相)’이란 용어가 생겨나서 무럭무럭 성장하다 지금까지 왔으니 그 어느 시점만을 딱 지적하여 ‘이게 사상(四相)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또한  ‘와스뚜’에 걸리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당신은 아상(我相)이 아직 남아있어!’라는 말이 ‘금강경’이 저술되었을 때와 혜능대사 때와 2019년 어느 사찰의 큰법당에서 각기 달리 이해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만약 ‘사상(四相)’이란 것을 변화무상(變化無常)한 흐름을 지닌 하나의 논리적 생명체로 본다면 사상(四相) 또한 여러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말이다.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17호 / 2019년 12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