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부부의 갑을관계

장백산-1 2022. 2. 14. 15:26

 

부부의 갑을관계

2022.02.11

 
 
 

“내가 항상 여보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나는 당신 곁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언제든 떠날 수 있어. 그러니까 우리 서로 옆에 있을 때 잘하자.”

“알았어. 내가 더 잘할게.”

 

신혼 초부터 지금까지도 나는 종종 뜬금없이 남편에게 저런 소릴 하곤 한다. 늦은 결혼을 선택할 때, 혼자보다 둘이 행복하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기에 혹시라도 결혼 생활에서 행복이 사라지면 나는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나는 나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남편에게 말했었다. 그러니까 너는 나한테 더 잘하라고 나의 행복을 책임져 달라고 말이다.

진심이었지만 참 오만한 말이었다.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결혼 생활에서 기다리고 있을 두려움에 대한 방어기제였을지도. 지금도 부부가 함께함으로 서로 더 행복해야지, 함께함으로 더 힘들어지는 관계라면 신중하게 고민해봐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없지만, 부부란 이름으로 내게 남편이 생기고, 아내라는 역할이 주어진 이후에 비로소 많은 것을 알게 됐다.

 

결혼생활에는 행복 외에 고려해야 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걸, 심지어 모든 요소들은 너무 얽혀 있어서 하나만 간단하게 빼고 다시 채울 수 없다는 것과 그래서 부부에게 행복만 찾을 겨를도 없다는 것도.

 

그리고 사실 나는 알고 있다. 남편이 나를 나보다 더 많이 사랑해서, 그걸 내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내가 저런 말을 해도 남편은 나한테 (아직) 정이 떨어지거나 나한테 서운해 하지 않고, 더 많이 사랑한다고, 더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말해줄 거라는 것을. 나는 지나치게 계산적이고, 밀당만으로 심히 지치는 30대의 연애를 풀버전으로 그것도 다양한 타입으로 버라이어티하게 경험한 대한민국의 여성으로서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 관계에서는 내가 갑의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을. 그래서 남녀 사이에서 갑이 할 수 있는 말이나 행동들을 서슴없이 하고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행복 운운하지만, 결국 그래서 남편이 ‘너의 행복을 내가 책임져 줄 순 없어. 그러니 너의 진짜 행복을 찾아서 훨훨 날아가’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실은 떠나지도 못할 거면서, 나도 남편이 없인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부부 관계 이전에, 연인 사이에서도 많이 벌어지는 있는 일들. 둘 다 서로를 원하기에 혹은 필요로 하기에 곁에 있는 것이면서도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는 묘하게 갑을 관계가 정해지고, 그 관계에 의한 규칙이나 습관들이 정해진다. 을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 상대에게 더 맞추게 되는 상황이 잦아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당연한 것들이 많아진다. 아주 친밀하지만 위험한 관계의 시작이다. 이 세상에 그 무엇도 당연한 관계는 없다.

 

이제는 남편의 무한한 사랑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나의 행복을 남이 책임져 줄 수 없다는 것을, 부부는 가장 친밀하지만, 일순간 남이 될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관계라는 것을 안다.

사랑의 크기를 눈에 보이는 척도로 잴 수 없고, 서로의 갑을관계를 정하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지만, 나이 마흔이 넘었어도 여전히 미성숙한 존재인 나는 언젠가 남편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거나, 남편이 못마땅할 때, 저런 말을 또 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래서 나는 너를 떠난다는 게 요점이 아니라 같이 행복하자는 것에 방점을 찍고 싶다. 이것을 위해 나도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우리가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서.

-잔별-  https://brunch.co.kr/@asterion/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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