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탈종교화의 의미

장백산-1 2022. 3. 21. 22:49

1. 연재를 시작하면서 : 탈종교화의 의미

 

세계적 탈종교 현상, 기복 종교와 유신론 종말 의미

인본주의와 과학적 세계관에 철학·신학적 도전 이어졌지만
신학자들 ‘기독교 성경’ 뒤에 숨지 않고 신학 심화 발전 시도
빈 상자에 보석 있다는 믿음 버려야 진리로부터 자유로워져

 

17세기 들어서면서 데카르트(1596~1650)는 “진리는 이성의 영역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고, 포이에르바(1804~1872)는 “종교적 신을 버렸다”고 선언했으며, 니체(1844~1900)는 “신은 죽었다”고 공언했다. 톰 알타이저(1927~2018)는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했다. 인본주의와 과학의 발전 속에서 신학자들은 성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신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신학의 심화 발전을 시도했다.

 
 

오늘날 세계적 현상인 ‘탈종교화’는 두 가지 다른 층위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개별 종교별로 나타나는 탈종교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문명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탈종교의 문제다. 물론 이 두 층위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전자의 문제는 주로 맹목적 믿음을 강조하거나 이기적 욕망을 정당화하고 부추기는 기복적 종교에 대한 실망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문명사적 관점에서 탈종교가 의미하는 바는 ‘유신론’(有神論)적 종교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런 점에서 보자면 탈종교는 되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적 문명사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유신론적 신관, 특히 만물을 창조하고 주재하는 초자연적 유일신(唯一神)에 대한 문제는 지난 사오백 년 이상 꾸준히,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요컨대 인본주의(人本主義, Humanism)와 과학적 세계관의 등장이다. 학문과 예술의 재생(再生)을 뜻하는 르네상스가 그 시발로서 그 근저에는 교회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인간성의 재확인, 곧 르네상스적 인본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인간 이성과 합리성이 강조된다. 이제 진리는 신앙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영역으로, 데카르트(1596~1650)는 “참된 세계인식은 신의 은총이 아닌, 자연적 인간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18세기는 서구문명에서 과학적 세계관이 등장했던 시기다. 흔히 계몽(enlightenment)으로 일컬어지는 이 시기는 과학기술과 인본주의가 결합하면서 인간의 자연이성과 인류 진보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갖게 된 시기다(불교의 깨달음을 어둠 속의 빛을 뜻하는 ‘enlightenment’라 하고 해탈을 해방을 뜻하는 ‘liberation’으로 번역한 데에는 서구 지성사의 이러한 과정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유물론적 사상에 입각해서 자신의 ‘종교적 신’을 버렸다고 선언한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1804~1872) 그리고 “신은 죽었다”를 공언한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의 등장은 서구 지성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1960년대에는 톰 알타이저(Thomas J. Altizer, 1927~2018) 등 미국의 젊은, 급진적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소위 사신신학(死神神學, Death of God theology)까지 등장하였다.

이와 같은 철학적, 신학적 도전에도 불구하고 서구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깥으로는 해외 선교, 안으로는 미국의 경우 보수공화당과 정치적 동맹을 맺거나 사회적·경제적 약자를 돕는 사회복지적 활동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기독교가 오늘날까지 생존할 수 있었고 사회적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기독교 신학 자체의 심화와 발전을 통해서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본주의와 과학의 발전이라는 도전 속에서 신학자들은 성경을 방패로 삼거나 교회 안으로 숨어들지 않았다. 중세 이래 오랜 세월 쌓아왔던 신학적 축적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자신들의 전통적 신관을 부정하면서 성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 신을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만들어 왔다.

그 과정에서 신학자들은 동양의 종교 특히 불교에서 많은 지적·종교적 영감을 받았고 신학자들도 그 사실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한국에서 스테디셀러인, 오강남교수의 ‘예수는 없다’ 그리고 길희성 교수의 ‘보살예수’와 같은 책들은 신학의 이러한 심화·발전의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전히 강단 신학과 목회신학의 수준 차가 있고 특히 한국의 경우 그 격차가 더욱 크긴 하지만 유신론적 종교의 한계나 문제점 그리고 초자연적 유일신관의 문제는 진보적 강단 신학 내에서는 이미 극복되었고, 신학적으로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탈종교 현상과 맞물리면서 진보적 강단 신학에 대한 일반 신자나 평신도들의 관심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웃 종교인 기독교 내에서의 이러한 노력과 변화가 우리 불교인들에게 주는 교훈은 결코 작지 않다. 근대 이후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와 근본주의적 행태를 보이는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시달려 온 한국의 불교인들로서는 마땅찮게 여길 수도 있겠으나 탈종교 시대에 불교가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기독교 신학이 걸어온 길은 좋은 시사점이 될것이라 생각한다. 다음과 같은 비유가 적절할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두 아들에게 예쁘게 장식된 상자를 주면서 말했다.

“이 상자 안에는 너희들이 평생 풍족하게 살 수 있는 비싼 보석이 들어 있다.”

상자는 잠겨있었고 아버지는 “열쇠는 없으며 너희들 스스로의 힘으로 열쇠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식들은 상자를 열 수 있는 열쇠를 찾아 백방으로 다녔다. 마침내 열쇠를 찾아 상자를 열었으나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알아챘다. 아버지는 애초에 빈 상자를 주셨다. 하지만 나는 그 동안 상자를 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자물쇠와 열쇠에 관한 많은 기술들을 익혔고 그 기술이면 이제 평생 남부럽지 않게 잘 살 수 있다. 그 아들은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길을 갔다. 그러나 다른 한 아들은 그렇지 않았다.

“아냐 아버지가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어.”

그는 빈 상자를 뒤집어보고 털어보기도 하면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상자를 여전히 귀하게 들고 다니면서 이따금 씩 빈 상자를 열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들을 현혹해서 상자 속의 ‘없는 보석’을 담보로 돈을 빌리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사람들도 그것이 빈 상자임을 알게 되어 더 이상 돈을 빌릴 수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여전히 언젠가는 보석이 ‘짠’하고 나타날 것이라는 미련을 안고 곤궁하게 살아가고 있다.

빈 상자는 유신론적 종교, 더 좁게는 초자연적 인격신에 대한 신앙의 종말을 상징한다. 내 자신으로서는 성서해석을 운운할 신학적 지식이 없어 얼마 전 길희성 교수의 강연에서 귀동냥한 지식을 소개하고자 한다. 길 교수에 따르면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요한복음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의 구절에서 ‘자유’는 ‘종교로 부터의 자유’를 뜻한다고 했다고 한다. 내 비유로 말하자면 ‘종교’란 상자 안에 있다는 보석에 대한 믿음이고, ‘종교로부터의 자유’란 상자가 비어있음을 알고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길을 가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석 유영모 선생(1890~1981)의 ‘없이 계신 하느님’이란 표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624호 / 2022년 3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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