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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계(3) - 육식(六識), 괴로움을 내가 만들었다고?

장백산-1 2024. 11. 22. 14:50

십팔계(3) - 육식(六識), 괴로움을 내가 만들었다고?

 

똑같은 소리를 듣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며, 같은 음식의 향기를 느끼면서 좋다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똑같은 것을 보더라도 저마다 자기 방식대로, 자기 욕심대로 바깥 대상을 차별적으로 분별 인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상을 분별해서 인식하는 의식이 육식이다.

 

똑같이 등산을 하더라도, 건축업자는 나무의 쓰임새만 보며 걸을 것이고, 사진작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에 담으려 하고, 꽃 연구가는 꽃에만 눈길이 갈 것이다. 또한 마음이 괴롭고 우울한 사람은 숲길 또한 음침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행복한 사람은 생기 있는 숲과 달콤한 공기, 맑은 자연을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이처럼 식(識)이라는 분별심으로 세상을 의식하게 되면, 저마다 자기의 의지와 바람, 욕심과 탐욕이 원하는 것들을 기반으로 대상인 명색(名色)을 인식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 식대로, 자기가 만들어 놓은 대상을 인식할 뿐이다. 이처럼 육식(六識)은 환영에 불과하며, 허망한 의식이다.

 

그래서 수많은 경전이나 법문들에서는 ‘분별심을 버려라’하는 무분별의 가르침을 설파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식으로 인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하기 때문이다. 왜곡해서 볼 때, 왜곡된 자아관[안계 내지 의계]과 세계관[색계 내지 법계], 인식관[안식계 내지 의식계]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로 인해 온갖 비교, 판단, 분별이 생겨남으로써, 우리 삶에 괴로움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괴로움은 사실 진짜 괴로움이 아니라 내가 괴로움이라고 분별, 왜곡하여 인식한 것일 뿐이다. 이렇게 현실을 육식이라는 분별로 왜곡해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면 괴로움은 연기하지 않는다.

이것을 지혜라고 하며, 유식불교에서는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했고, 뒤에 공부할 팔정도에서는 ‘있는 그대로 본다’고 하여 정견(正見)이라고 한다.

 

글쓴이 ;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