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는 닦는 것이 아니다
도는 닦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닦아서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닦아서 이루는 것은 다시 무너질 것이니 이는 곧 성문(聲聞)과 같다. 그렇다고 닦지 않는다고 하면 그는 곧 범부와 같다.
본래부터 있던 것이 지금도 있을 뿐이니(本有今有), 수도(修道)나 좌선(坐禪)은 필요치 않다. 수도나 좌선에 의지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다.
선을 좇아가고 악을 멀리하며, 공(空)을 관(觀)하고, 선정에 들어가는 것은 모두 조작(造作)에 속한다. 바깥으로 좇아 이리저리로 구하게 된다면 점점 도에서 멀어지기만 할 뿐이다. 다만 이 세상을 대상으로 여겨서 헤아리고 분별하는 마음만 없게 하라. 한 순간의 허망한 생각이 곧 이 세상에 태어나고 죽는 뿌리가 된다. 다만 한 생각이 없으면, 삶과 죽음의 뿌리가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위없는 보물을 얻는 것이다.
✔ 선어록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우리가 불법을 공부하고 수행해 온 바와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수행이야말로 불교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여겨왔는데, 어째서 선어록에서는 수행하지 말라, 도를 닦지 말라고 할까?
참된 도는 닦아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유금유(本有今有), 본래 있던 것이 지금도 역시 있는 것이다. 도는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타고난 본성이다. 누구에게는 있고 누구에게는 없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는 더 많이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평등하게 완전히 주어져 있다.
그러니 도는 닦는 것이 아니다. 닦아서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생사법(生死法)이지 불생불멸법이 아니다. 닦아서 만들어 내는 것은 다시 무너지는 것이니,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은 전부 생사법이다. 이 불법은 생사법이 아니라 불생불멸의 법이다.
도에는 닦을 것이 없다. 그렇다고 닦지 않는다고 하면 그는 계속 범부 중생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닦아도 안 되고, 닦지 않아도 안 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선이다. 이것이 바로 선의 실천이고, 참선이다.
마음공부, 선, 참선, 도라는 것은 의식, 알음알이, 분별심의 길이 아니다. 무분별의 길이고, 헤아림이 끊어지는 길이다. 의식, 분별심은 언제나 이것, 아니면 저것을 원한다. 이법(二法)을 좋아하지, 불이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법은 ‘이것’ 아니면 ‘저것’ 하고 딱 정해져 있어서, ‘이것을 행하라’, ‘이 길만 따라 가면 된다’라고 똑 부러지게 둘 중에 한 길을 택해준다. 그것이 분별의 길이요, 이법(二法)의 길이다.
그러나 불법은 불이법이다. 둘 중에 하나에 발 딛고 서게 하지도 않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하지도 않으며, 어느 한 쪽에 머물지 못하게 한다. 의식이 갈 길을 꽉 막아 버리는 것이다. 분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의식은 도대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바로 그것이 불법이고, 선이고, 도이며, 마음공부다. 의식과 분별이 설 자리를 전부 다 빼앗아 버린다.
불법과 불교교리를 보라. ‘이것이다’, ‘이것만이 진리다’라고 결정적으로 정해 놓는 것이 없다. 무유정법(無有定法), 정해진 법이 없는 가르침이다. 무주(無住), 머물지 말라, 무위(無爲), 애쓰지 말라, 무집착, 집착하지 말라, 무상(無相),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 무상(無常), 항상 하는 것은 없다, 무아(無我)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불성, 자성, 본래면목이랄 것조차 없다 등으로 끊임없이 우리의 분별의식이 어느 한 쪽에 딱 머물거나, 집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조리 빼앗아 버린다.
그런 방법으로 분별심을 조복시키려는 것이다. 억지로 분별심을 버리라고 윽박지르거나, 분별심을 없애는 수행을 통해 끊임없이 갈고 닦아서 결국 생각을 다 없애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방법은 거의 효과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법문을 통해, 분별의식이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그래서 법문을 듣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법문 내용을 계속해서 해석하고 분별하고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법문을 들으면서 저절로 머리는 쉬어진다. 저절로 헤아리고 분별하는 버릇이 줄어들고, 그냥 듣게 된다. 판단하면서 이해하면서 듣는 것이 아니라, 그냥 듣는다.
드디어 분별심이 조금씩 조복 받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식의 직지인심의 법문이 중요한 것이다. 그저 법문만 들었을 뿐인데, 저절로 분별심이 조금씩 쉬어진다. 선지식은 끊임없이 분별심이 쉬어질 수밖에 없는 법문을 지속적으로 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문을 잘 듣는 사람은 법문을 들었는데도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전혀 모르게 된다. 법문을 듣고 났는데도 아무런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분별하고 듣거나, 기억하며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법문을 잘 듣는 방법이다.
법문을 잘하는 선지식도 마찬가지다. 이해가 쏙쏙 가게 법문을 하는 법사는 법문을 잘하는 법사라고 할 수가 없다. 들어도 들어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콱 가로막히게 법문하는 분이 바로 선지식이다.
이것은 수행이 아니다. 그저 법에 대한 관심과 발심이 있으니, 법이 있는 곳을 저절로 찾아가게 되고, 저절로 법문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함이 없는 함이고, 수행 아닌 수행이며, 무위의 공부다.
여기에 무슨 좌선이나 수도가 필요한가? 이것이 수행이라면 수행이지만, 이것은 수행이라고 할 것도 없다. 하는 것이 없으니까.
선을 좇아가고 악을 멀리하려고 애쓰거나, 공을 관하고, 선정에 들려고 노력하는 것들이 모두 조작이고 유위라서 참된 법이 아니다. 바깥으로 좇아 이리저리로 구하게 된다면 참된 법과는 점점 멀어진다.
다만 헤아리고 분별하는 마음만 없게 하라. 한 순간의 허망한 분별의식과 생각이 곧 나고 죽는 중생의 뿌리가 된다. 이 한 생각 분별심이 사라지면 삶과 죽음의 뿌리도 사라지고, 부처님의 위없는 보물을 얻게 된다.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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