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서 참선한고 부처되나?
남악 회양(南岳懷讓, 677~744)선사는 마조 도일(馬祖道一, 709~788)이 법기(法器)임을 알아차리고 마조에게 물었다.
“대덕은 무엇 때문에 좌선(坐禪)을 하는 것이오?”
마조 도일이 대답했다. “부처가 되려고 좌선을 합니다.”
남악 회양은 기왓장 하나를 가져와 마조 도일 옆에서 기왓장을 갈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마조 도일이 남악 회양에게 물었다.
“기왓장을 갈아서 무엇을 하려 하십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 하오.”
“기왓장을 간다고 어찌 거울이 되겠습니까?”
“기왓장을 갈아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그대는 좌선을 한다고 어찌 부처가 되겠는가?”
이에 도일이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가 끄는 수레가 가지 않는다면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아니면 소를 때려야 하는가?”
도일이 대답이 없자, 회양이 말했다.
“그대는 좌선을 배우려고 하는가? 좌불(坐佛)을 배우려고 하는가? 만약 좌선을 배우려고 한다면, 선은 앉거나 눕는 것이 아니다. 좌불을 배우고자 한다면, 부처는 정해진 형상이 없다. 머무르지 않는 법에서는 취사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그대가 좌불을 흉내 내려 한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다. 만약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깊은 이치에는 통하지 못할 것이다.”
✔ 남악 회양(南岳懷讓, 677~744)과 마조 도일(馬祖道一) 다의 아주 유명한 일화다. 좌선을 해서 부처가 되려고 하는 것은,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악은 앉아서 좌선을 하는 것을 통해 부처가 되려고 하는 마조의 치우친 견해를 타파해 주기 위해 소와 수레의 비유를 든다. 소는 마음이고, 수레는 몸이다.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소를 때려야지, 수레를 때려 봐야 소용없듯이,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마음공부를 해야지 몸으로 앉아 있는 모습에 집착하는 몸공부를 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말은 좌선이 다 쓸모없다는 뜻이 아니라, 마조의 마음속에서 앉아서 좌선하는 것에 대한 집착심, 그것을 통해서만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타파해 주고자 함이다.
마음공부, 참선은 앉아 있는 것과는 무관하다. 마음공부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고, 참선 또한 바른 법이 있는 회상에 참여하는 것이다. 앉아 있는 것만이 참선은 아니다. 참된 선은 앉거나 눕거나 하는 모양과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모습에 집착한다. 단정히 앉아서 오랜 시간 동안 꼼짝 않고 있어야 수행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것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가장 큰 오해다. 바로 그 점을 남악회양은 설해주고 있다.
법당에 가면 부처님이 단정하게 앉아 계신다. 그 좌불(坐佛)을 보고 부처를 흉내 내려 하는 것인가?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깊은 이치에 통할 수 없다. 앉거나 눕거나, 혹은 어떤 특정한 모습이나, 특정한 수행법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머무는 바가 없는 무주(無住)의 법이 아니고, 취사선택의 법일 뿐이다.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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