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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박 이데올로기-- 난 이 사회를 떠나 '시민의 나라로' 가련다.

장백산-1 2008. 12. 7.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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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박 이데올로기 -난 이 사회를 떠나 시민의 나라로 가련다-
번호 184234  글쓴이 jamin20 (jamin20)  조회 1436  누리 316 (316/0)  등록일 2008-12-5 20:35 대문 31 추천

 

명박 이데올로기
(서프라이즈 / jamin20 / 2008-12-05)


1. 우리들을 위한 신은 있을까

 

<21그램>이란 영화가 있다. 숀 펜과 베네치오 델 토로, 그리고 나오미 와츠 등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나와서, 자신에게 할당된 고통에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는 이야기이다. 거기서 델 토로는 집보다 교도소에 있는 시간이 더 긴 생활을 하다가 기독교의 품으로 귀의한다. 흔히 말하는 대로 개과천선을 한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장난의 운명인지, 그는 교통사고를 저지르게 되고, 생활에서 오는 고통에 더해 이젠 죄의식에서 오는 고통까지 감당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그가 묻는다. "난 정말 마음을 고쳐먹고 똑바로 살아보려 하는데, 왜 신은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 겁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왜 맘 잡고 잘살아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그런 해꼬지를 하는가? 그건 한마디로 그와 그가 믿고자 하는 신이 서로 코드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이게 뭔 소리여? 신앙생활도 코드가 맞아야 하는 감? 맞아야 한다. 리만 브러더스와 소망교회 신 정도로는). 델 토로는 이해를 못한다. 다 알고 있는 신이 그러면 안 된다. 왜 안 되는가?

 

그건 델 토로가 지극히 '인간적으로', 고쳐 말하면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서 신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과 똑같이. 고통을 회피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그런 사람에게 신의 높고 거룩한 뜻을 보여주는 건 가혹하다. 좀 무분별하게 보인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신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면 그 방법밖에 없을 듯싶다. 영혼의 안식과 마음의 평화는 굳이 신이 아니더라도 목사가 다 알아서 한다. 목사가 신의 뜻을 다 헤아리고 거기다 인간들의 수준까지 친절하게 헤아려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심문관'처럼 신도들에게 꼭 알맞은 처방을 내린다. 그 처방은 바로 이것이다. <개인 신경증에서 집단 신경증으로.>

 

만약 신이 있다면, 그리고 그 신이 편협한, '어떤 지역의 공동체만을 위한' 신이 아니라면, 이렇게 프로이트가 지적하는 대로 종교라는 집단 신경증으로 도피해서 자신을 우상으로 삼아 숭배하는, 실제로는 모독하는 행태를 보고 마냥 잠자코 있기는 힘들 것 같다. 그렇다고 특별히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어서 (다 죽여 버릴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나중엔 모르겠지만) 그저 집단 신경증으론 수습이 안 되는 고통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델 토로가 목사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교회는 약속을 위반한 것이다. 어떻게 찾아간 교횐데. 이놈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게 너무도 한심스럽고 지긋지긋해서 찾아갔건만, 고통 해소는 고사하고 가혹한 운명이라고 이름 붙여야할 사태가 들이 닥치다니, 델 토로에게 교회는 뭐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동안 팔아먹던 신앙이라는 신경안정제는 뒤로 감추고 이젠 신과 정직하게 대면하시라고 말해줄 것인가? 자신들도 지금껏 정직하게 대면해 본 적 없는 신을?

 

카프카가 이런 말을 했다. "물론 신은 있지. 다만 우리들을 위한 신이 아닐 뿐이지" 카프카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내 마음대로 해석하면, 신을 믿을 땐 절대로 '우리들을 위한 신'을 믿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들을 위한 신'은 그 신을 믿는 집단을 호강시켜 줄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대가를 요구한다. 그 대가는 다름 아닌 신 그 자체의 부정이다.

 

이런 역설이 발생하는 이유는, 당연히 '우리들의 신'이 우리를 만든 게 아니라 우리가 우리들의 신을, 아니 우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우리들 바깥에 있다(따라서 바깥을 생각하지 못하는 자, 신을 입에 올리지 말라. 듣는 진짜 신 괴롭다). 난 솔직히 그 바깥에 신이라고 불리는 인격적인 존재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거기에 '타자'라고 불리는 나와 다른 것들이 있다는 것은 안다.

 

그래서 타자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아니, 아니다. 난 예수와 같은 윤리학자가 아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건 좀 다른 얘기다(타자를 사랑하고, 신을 제대로 만나는 건 각자가 알아서 하자. 난 나도 잘 못하는 걸 남에게 강요할 정도로 뻔뻔하지 않다). 아니, 좀 다른 게 아니라 많이 다른 얘기다.

 

 

2.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이 사회에 미래는 없다?

 

<21그램>을 만든 감독이 그전에 만든 <아모레스 페로스>라는 영화도 있다. 이 역시 훌륭하다고 생각되는데, 여기에 보면 예전에 멕시코 혁명 전사였던 청부살인업자와 낮에는 할인점에서 근무하고 밤에는 강도를 하는 '직업이 많은' 사람이 나온다. 이만하면 갈 때까지 간 것 아닌가? 아, 좀만 기다리면 우리도 그곳에 갈 수 있다.

 

언젠가 이런 말을 본 적이 있다. "나라 망하는 게 별건가? 대낮에 부자들을 터는 걸 보고도 사람들이 가만히 있거나 오히려 박수친다면 그게 나라 망한 거지" 그렇다. 다른 나라에게 주권을 강탈 당하는 것만이 나라 망하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안 망하더라도 도저히 이데올로기적 수단만으로는 통합이 불가능할 정도로 계급의 '양극화'가 진행된다면 그 사회는 망하는 것이다. 20대 80 사회도 아니고 텐프로도 아니고 1%를 위한 정권이라는 말이 나도는 만큼 우리 사회가 망하는 길은 강남대로처럼 넓고도 활기차게 뻗어있다.

 

(사회는 망해도 모두 망하는 것은 아니고 망하더라도 끝나는 것은 아니다. 삶은 지속된다. 영화 속처럼, 진하게. 강도짓하면서, 개싸움하면서, 청부살인하면서. 삶은 계속된다. 그것도 그냥 계속되는 게 아니라 삶에 더욱 철저해지면서 계속된다. 너무 커다란 삶의 무게에 짓눌려 되돌아 볼 틈도 없이. 이성복의 유명한 시 구절처럼,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으면서, 아니 무지하니 아프지만 아프다고 하면 그 동안 버텨왔던 힘마저 잃을까봐.)

 

이제 우리는 '우리 안의 이명박'에 의해 대통령이 된 이명박이 자신에게 주어진 계급적 임무를 충실히 하는 걸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보라, '파시스트적 속도'로 심각한 망국적 상황을 향해 질주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지구를 까꾸로 돌리는 슈퍼맨처럼 분기별로 10년씩 시대를 되돌리고 있는 모습을. 아, 뒤집혀진 '오래된 미래' - 그렇다면 이명박이 만들어가는 사회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죽 망해 있었다. 다만 망해있었다는 걸 몰랐을 뿐이다. 왜 몰랐을까? 그건 희망이라는 환상 때문이다.

 

지젝이라는 철학배우가 자주 드는 예가 있다. 신은 그저 죽기만 한 게 아니라 항상 이미 죽어있었는데, 다만 그걸 알지 못했을 뿐이라고. 그런데 인간이 '원죄의식'을 떠맡으면서 그의 죽음/없음을 면제해 준 결과 자신이 있는 지 착각한다고. 즉 신은 우리들의 '죄의식' 속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어쩐 일인지 스스로 '죄의식'을 떠맡아 신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걸 기를 쓰고 막는다. 왜 그럴까?

 

왜냐하면 신이라고 하는 '큰 타자'의 비존재가 알려지면 자신의 정체성도 마구 흔들리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그 큰 타자들의 비존재를 환상으로 틀어막으면서 유지한다. 환상이 자신의 '검은 입'을 드러내면서 정체성을 흔들어대는 것은 - 솔직히 좀 두려운 일이긴 하지만 - 나쁘기도 하고 좋기도 한 일이다. 먼저 좋은 건 자신의 분열을 인정하고 그걸 감당해내면서 껍데기뿐인 사회적 정체성이 아니라 '진정한' - '진정한'이라는 말뜻은 그 딴 건 없다는 것이다 -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철학적으로 두꺼운 삶'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고, 나쁜 건 그렇게 되면 검은 구멍을 찾아 막는 일에 대부분의 정력을 소비해 사회적 위신 저하는 물론 생활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너무 안 흔들린다는 데 있다! 사람이고 사회고 죄다 콘크리트처럼 통합되어 있다. 그건 이 사회가 우리로 하여금 조금의 흔들림도 용납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생활전선의 전사로만 살아가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흔들리면 죽는다. - 아, 정말 무서운 사회다. 호들갑인가? 아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회는 그냥 사람들이 모여 관계를 맺고 생활하는 공간이 아니다. 국가와 자본이 한 덩어리가 되어 엄청난 물리력을 휘둘러대는 시장이 우리 사회다. 일명 '시장 전체주의 사회'.

 

우리가 사회 혹은 현실을 기술하는 말을 보자. 완전 느와르다. 유치한 조폭 세계, 유치해서 더 무서운 조폭 세계. 우르르 몰려다니며 최소한 남들 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사회라는 큰 형님 - 큰 타자가 무슨 보복을 할 줄 몰라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세계. 이런 큰 형님의 사회는 조직원, 아니 구성원들로 하여금 공포심을 불어 넣어 딴 생각을 하는 걸 가로 막는다. 즉 구성원의 의식이 사회라는 큰 타자의 존재를 더욱 굳건히 해 준다. 죄의식이 신을 근사하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벌한 사회에 대한 공포심이 사회를 더욱 튼튼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건 모두 가짜다. 이 놈의 신과 사회라는 큰 타자들이 우리에게 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보호해준다고? 먼저 말했듯이, 보호해준다는 '의식'만 준다. 죽은 놈이 뭘 어떻게 해주고 망한 사회가 뭘 어떻게 해 주겠는가? 해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큰 타자들이 허당이라는 걸 직시하고 마구마구 흔들려야 한다. 우리를 감싸주는 신은 없고, 사회도 없다. 이게 진실이다. 더 이상 사회가 망했다는 걸 직시하는 것 보다는 (혹은 '통합된 사회'라는 건 없다는 점을 직시하기 보다는) 그래도 이 사회엔 희망이 있다는 환상을 갖는 게 삶을 이어가는 데 유리한 상황이 아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특히 '나도 열심히 살면 저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이 사회에 미래는 없다.

 

 

3. 족같은 놈이거나 존만한 놈

 

명대사가 많은 영화 <넘버3>를 보면 너무나도 민족주의적인 우리의 재떨이가 이런 말을 한다. "일본놈들은 딱 두 종류야. 족같은 놈들하고 존만한 놈들." 사실 일본놈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의 구성원들은 족같은 놈이거나 존만한 놈이다. 이건 모든 사회에 가로 처져있는 계급적 적대의 일반적인 표현이다. 우리는 각각 서로에 대해서 족같은 놈이거나 존만한 놈이다. 난 우리 사회의 지배세력들을 보고 족같은 새끼들이라고 욕을 하고 그들은 나같은 서민들을 보고 존만한 놈들이라고 경멸한다.

 

보통 족같은 놈들한텐 도덕성을 문제삼고, 존만한 놈들한텐 능력을 문제 삼는다. 족같은 놈들은 잘 살지만 인간성이 못된 도둑놈들이고 존만한 놈들은 착하지만 인간이 덜 떨어진 병신들이다. 이 둘 사이에 대화와 이해가 가능한 공통 감각이란 없다. 존만한 놈들에게 족같은 놈들의 부패는 인간성의 상실이지만 그들에게는 탁월한 생존 능력이고, 족같은 놈들에게 존만한 놈들의 무능력은 못나서 못해먹는 병신짓이지만 그들에게는 도덕성을 위해 넘어설 수 없는 최소한의 경계선이다.

 

(족과 존이 너무 많이 나와서 노약자와 임산부, 청소년들에게 좀 미안하지만 그걸 '못된'과 '못난'으로 바꾸려니 아무래도 미진해서 그냥 쓴다. 따지고 보면 족과 존도 완화된 표현 아닌가. <넘버3>에서 최민식이가 하도 욕을 하니까 한석규가 그런다. "아주 조슬 입을 물고 사슈" 요즘 청소년들 보면 정말 발을 입고 물고 다닌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가 괜히 그런 게 아니다. 언어는 사회적 분위기를 그대로 따른다. "너는 왜 그렇게 욕을 하니?" "지금 상황은 욕지거리가 가장 적확한 표현이어서 그런데요" 우린 할 말이 없다. 욕을 자제할 수 있는 개인적 인격수양도 오로지 각개약진으로 획득해야 하는 사회와 교육시스템에서 갖은 욕설의 만발은 거의 자연발생적이다.)

 

물론 족같은 놈과 존만한 놈은 계급 적대에 따른 이념형이다. 이러한 이념형에 우리 사회의 실제 역사적 과정을 대입해보면 보다 현실감있는 인간형들이 나온다. 만약 누가 나에게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특성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난 '식민성'이라고 하겠다. 그 식민성의 결과, 우리 사회에 너무도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그만큼 모자란 것은 '공공성'이다. 온갖 버블을 양산해내며 넘쳐나는 '식민성'과 사회의 어느 공적기관에서도 찾아내기 힘든 '공공성', 이런 상황 하에서의 민주주의? -정말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다.

 

'식민성' 만땅과 '공공성' 부재의 역사적 과정 하에서 우리의 꼴통스런 지배 세력은 계급 적대에 따른 이념형들을 통합해내는 위대한 과업을 달성해 낸다. 그렇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부패했으면서도 무능력한' 집단들이다. 그들의 어릿광대, 이명박을 보라, 정말 존만한 게 - 쥐새끼만한게 - 조까튼 짓을 하고 자빠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유일하게 갖춘 능력은 '사적으로 해처먹는' 기술 뿐이다. 아무리 많은 부가 축적되어도 여전히 생존의 차원에 묶여 있는 그들의 식민지스런 멘탈리티 덕분에 우리 사회의 모습은 아무런 가치도 담보할 수 없게 그야말로 형해화되었다.

 

난 언젠가 한겨레 칼럼을 읽다가 가슴을 친 적이 있다. 그 중 한 대목은 이렇다. <일찍이 프란츠 파농은 "식민지 나라의 민족 부르주아지는 처음부터 서구 부르주아지의 타락을 추구한다"라고 지적했다. 저개발국에서는 진정한 부르주아지를 찾아볼 수 없고, "탐욕스럽고 게걸스러운 신분, 옛 식민지 권력이 베풀어주는 몫을 받아먹는 데 혈안이 된 비열한 계층만이 존재한다. 이 졸부 중간층은 위대한 이념을 만들어낼 능력도 없고 창의성도 없다"라고 식민지 부르주아의 타락상을 질타한 바 있다.>

 

이 탐욕스럽고 게걸스럽고 비열한 계층, 우리가 모시고 사는 지배 계급의 성격이 이렇다. 정말 가슴 아프지 않은가? 이들이 지배하는 국가기구, 이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시장, 그리고 이들이 지배하는 교회라는 사이비 공동체. 이들은 근대 사회를 구성하는 삼요소를 모두 장악하고 있다. 역시 그들의 어릿광대, 우리들의 귀여운 = 존만한 이명박 대통령은 그냥 된 것이 아니다. 건설사 사장과 국회의원, 시장, 그리고 교회 장로까지 조까튼 삼위일체가 한 몸에 구현된 인물이 아니고선 그들의 어릿광대가 될 수 없다. "(미국의) 하나님이 보시고 좋다 하시더라"

 

앗, 여기에 한 분이 더 계시다. 누군지 다 아실 것이다. <넘버3>에서 안석환이 그런다. "너희 둘 다 에이스지. 아마 에이스 원 페어 들고 포커치면 돈 잃을 일 없을 거다" 한나라당은 좋겠다. 에이스가 두 장이라서. 이번엔 경박하고 희극적인 이명박이 하고 다음엔 심각하고 비극적인 유신 공주가 하면, 정말 게임에서 질 일이 없겠다. 덕분에 우리들은 올인 당하고 꽁지 쓰고 잠수타고, 인생 참 두꺼워 지겠다.

 

<알몸 박정희>의 저자 최상천 교수는 김재규의 행동을 두고 아무리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도 과하지 않다고 하는데, 그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난 종종 다른 상상을 해 본다. 물론 박정희가 죽었으니 하는 상상이고, 역사적 사건의 복잡다단한 관계망을 무시하는 단순한 상상이다. 만약 그 때 혹은 그 후에라도 우리 시민들의 손으로 직접 박정희의 '모가지를 잘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최소한 박근혜를 보면서 치르는 심적 고역은 불필요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 분이 아주 가끔은 큰 웃음을 선사해 주시기도 한다. "여기 약 35년 동안 불철주야 나라 걱정 때문에 잠을 못 주무시고 계시는 나라 걱정의 달인, 수첩 박근혜 공주를 모시고 몇 말씀 나누겠습니다. 그날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보고를 듣고 첫 마디가 '휴전선은 이상 없나요?'였다는 데 사실입니까?" "네")

 

어처구니없는 건, 일본이 막판에 원자폭탄 2방 맞았다고 자신들이 마치 전쟁의 피해국인 양 구는 것 - 전쟁은 지들이 일으키고 분단은 우리가 당했는데 - 과 비슷하게 박정희가 유신 막판에 부하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고 그 딸내미가 마치 비극의 주인공인양 행세하는 짓거리다. 정작 비극의 주인공들은 아직까지도 피눈물을 삼키며 소리도 못 내고 울고 있는데. - 얼마 전 신문에 꼴통들이 역사 강의를 하면서 박정희 시대엔 사회가 혼란스럽지 않았다고 하자, 누군가 친절하게 박정희 재임 기간 220개월 동안 105개월이 계엄령과 위수령 등 비상사태 상황이었다고 가르쳐 준다. 여기서도 드러난다. 꼴통 새끼들은 그 직업에 관계없이 무식하고 도무지 염치가 없다.

 

 

4. 우리 사회의 피해 의식은 전염병, 불행하게도 발병자를 동경하게 만든다

 

우리의 지배 꼴통들이 특유의 탐욕과 비열함으로 족같음과 존만함의 통합을 이룩해 낸 결과 존만함을 기본형으로 하는 우리 서민들도 비슷한 통합을 이루어 낸다. '사적으로 해처먹는 기술'을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저지르는 통에 나머지 사회 조직원들이 나눠 먹어야 될 파이는 대폭 줄고 최소한의 인간적, 심리적 여유를 위한 물질적 기반은 크게 침식당한다. 하여 우리 서민들도 덩달아 족같아지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존만함 위에 족같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덧붙여질 때 우리는 매일 매일 피해의식과 위악으로 똘똘 뭉쳐진 동료와 이웃들을 만난다.

 

도처에 포진해 있는 위악적인 인간들, 사회의 정글화. 가히 근대국가 출현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상적으로 상정됐던 홉스적 야만 상태의 현실적 출현이라 할 만하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하지만 심리적으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맞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투쟁은 만인이 아니라 우리 존만한 서민들 사이에서만 일어난다. 그건 아무 경쟁도 치르지 않고 단지 친일했던 할아버지를 둔 '재수 좋은' 놈들이 거져 먹고 날로 먹는 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과 그런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 이건 악의적 선전이다. 역사 이래 그딴 건 없었다.

 

(누구도 자신이 원해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고, 자신의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나는 사람도 없다. 그리고 부모의 영향이 절대적인 종적 특성까지 고려하면 태어나면서 정해지는 행운과 불행의 불균형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 사회가 진보하기 위해선 - 진보한다고 믿지 않으면 논의를 진전시키지 힘들므로 - 최소한 태어날 때 집어든 패가 전 인생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패가 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게 진보고 민주화 아니겠는가. 사회적 시스템을 통해 행운의 불균형을 완화시키는 것, 이런 측면에서 따지고 보면 인간의 역사와 문명은 명백하게 퇴보했다. 소위 말하는 원시 사회들, 클라스트르가 말하는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들은 이렇게 야만적이지 않았다.)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진다는 선전이 자신의 악의를 십분 발휘해서 사람들을 농락하는 경우가 우리의 교육, 아니 우리의 입시 행사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모든 학생을 문답 고사로 일렬로 세우는 게 공정한 경쟁 방식이라는 말엔 그냥 웃자. 심각한 건 그 방법이 모든 학생의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는 중요한 의식이라는 말에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사람들마저 고개를 끄덕인다는 점이다. 물론 문답고사가 신분을 결정하면 안 되고 결정하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태어나면서 신분이 결정되는 일이다. 문답고사로 서울대 들어가는 일은 어떤 계급에겐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 설사 문자 그대로 꼴통이어서 대학을 못 들어가도 그들에게는 하등 문제될 게 없다. 살인적인 경쟁 이전에 아예 경쟁이 없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꼴통 지배 계급들이 이런 족같은 입시 제도에 목숨을 거는 건 다른 이데올로기적 이유가 있다. 그건 경쟁이 이루어진다는 환상을 통해서 피해의식을 내면화하고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위악적 행태들을 보편화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문제는 매일 매일 마주치는 존만한 놈들의 족같은 행태가 아니다. 또한 피해의식과 위악스런 행태가 불러오는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손상이 문제가 돼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느끼는 경멸감과 혐오감은 대부분 상대방이 처해있는 궁색한 입지에서 나오는 것이지 인간 고유의 특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흔한 말로, '알고 보면 그리 나쁜 놈이 아닌 놈'에 해당하지 않는 놈은 거의 없다. 물론 싫은 새끼는 싫고, 재주 없는 새끼는 재수 없다. 그래도 중요한 건 그들의 행태가 아니라 구조, 그 행태를 통해 사회적인 냉소와 혐오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구조다.

 

피해의식의 내면화, 따지고 보면 이게 이명박을 대통령에 당선시킨 일등 공신이다. 홍세화처럼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 운운하며 한심해하면 정말 한심하다. 보라, 우리의 의식이 사회적 존재를 배반하지 않을 재간이 있는지. 앞서, 죄의식이 신의 공백을 막고 공포심이 조직의 균열을 막는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다. 의식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은 조작이다. 자신의 안정을 위해서 상황을 조작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의식의 기능이다. 우리 작은 딸내미처럼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은 조금 뒤집혀야 한다. 의식이 사회적 존재를 규정하진 않지만 그 존재를 정당화한다. 여기서의 의식을 피해의식으로 봐도 좋다. 단지 피해의식은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넘치는 욕망까지 정당화한다.

 

하기야 이 사회는 우리들이 '내 욕망의 정당성'에 대해 변명할 거리가 너무나 많다. '세상이 이렇게 생겨먹었잖아!' '이 놈, 저 놈 안 그러는 놈들이 없잖아!' 세상이 이렇게 생겨먹었고 안 그런 놈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해석이다. 안 그러는 놈들 많다. (이 곳에는 더 많다 ^^) 피해의식은 필연적으로 실제 피해 여부와 상관없이 피해를 받았다고 여겨지는 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필요 이상의 욕망과 과잉 행동을 양산한다. 거꾸로, 과잉 행동이 없는 피해의식은 피해의식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지배 꼴통들의 피해의식이 어느 정돈지 가늠할 수 있다. 그 탐욕과 게걸스러움, 그 과잉행동장애. 그들은 일본놈들보다 더 일본놈스럽고, 미국 새끼들보다 더 미국스런 욕망을 가지고 있다. - 박정희는 술 먹고 기분이 좋으면, 일본 육사 장교복 꺼내 입고 긴 칼 휘둘렀다는 데, 맞나? - 그렇다면, 맞다. 우리 사회의 피해 의식은 전염병이다. 이 전염병은 불행하게도 그 병을 옮긴 강력한 발병자를 동경하게 만든다.

 

내가 박정희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것은, 아니 그가 죽은 방식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것은, 그의 '비극적 공백'이 자꾸 그걸 메워줄 대리인을 갈구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일본놈보다 더 일본놈 같은 지배 꼴통과 미국의 근본주의자들보다 더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환자들은 물론이고 피해의식이라는 전염병에 옮은 많은 서민들까지 자신들의 존재와 욕망을 정당화해주는 박정희 망령, 그 망령을 뒤집어 쓴 사이비 무당들을 필요로 한다. 가히 박정희는 뉴라이트 새끼들이 떠받드는 대로 '민족의 아버지'가 아닐 수 없다. 아버지가 죽으면 안 된다. 우리가 죽는다. 아버지가 없으면 안 된다. 우리가 없어진다.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영혼이 평안해지고 마음이 안정된다. 아멘, "자 그럼 다시 재테크 상담하러 나가볼까"

 

이명박과 박근혜가 괜히 한나라당의 에이스였던 게 아니다. 이명박의 '원대한 경제적 비전'과 박근혜의 '끝없는 나라 사랑'이 합쳐진 게 박정희 아닌가. 사실에 있어서 이명박의 '게걸스러운 탐욕 - 권력욕'과 박근혜의 '의뭉스러운 야비함'이 합쳐진 게 박정희 아닌가. 장준하가 말했던 유일하게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 인간, 박정희. 하지만 그가 신격화되어 아버지로 추앙받는 나라. 세상엔 공짜가 없고, 역사에선 더더욱 그렇다. 우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자신의 부풀어진 욕망에 대한 대가를. 마침 경제도 아름답게 빛나던 거품이 걷히고 앙상한 알몸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시파, 나는 이명박 찍지 않았는데." 어차피 마찬가지다. 아마 지난 대선 땐 노무현이 다시 나와도 이명박에게 졌을 것이다. 하지만 잘 된 측면도 있다. 적나라해지지 않았는가. 아, 여기서 우린 왜 진보주의자들이 노무현을 그토록 싫어하는지 알 수 있겠다. 개량주의자 노무현은 망한 사회의 참 모습을 가림으로써 인민들이 계급 의식을 고취할 기회를 빼앗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엄습하는 불안감은 뭔가. '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 전망', '보이는 파시즘과 안 보이는 민주주의'.

 

 

5. 거품 욕망과 질식사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대가

 

우리들은 크게 두 가지에 대해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나는 '우리도 강남처럼'을 외치며 '거품으로 뽀대나는 라이프 스타일'을 동경했던 욕망에 대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그 거품 욕망에 의해 질식사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해서이다. 욕망에 대한 대가는 지금도 치르고 있고 앞으로 더욱 혹독하게 치르게 될 것이다. 그건 감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한답시고 그냥 죽어가는 민주주의까지 내버려둔다면 남는 건 뻔하다. "너에게 영원히 식민지 신민으로 살기를 명한다."

 

뭐, 민주주의가 죽어가고 있다고? 뭐가 죽어 가는가? 우린 보통 선거로 대통령을 뽑았고, 삼권분립이 되어 있으며, 언론의 자유가 세계 최고 수준이고, 정당들은 활발하게 싸우고 있고, 법에 의거해서만 시민들을 때려잡는데, 뭔 난리들인가? 좋다, 사실을 말하자, 우리가 민주주의를 죽이고 있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가 우리를 죽이고 있다. 박제화되고 우상화된 절차적, 형식적, 표면적 민주주의가 우리들의 '정치적 욕망'을 질식시키고 있다, 즉 소위 말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전부인 양 자리 차고 앉아 '내가 민주주의'라고 외치고 있다. 신은 쭉 없었고 그 자리에 우상만 즐비했듯이, 우리에겐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없었고, 그 대신 이식된 '민주주의적 제도'만 있었다.

 

이 '민주주의적 제도', 간략히 말해 대의제가 사실은 사회를 전체주의화하는 데 기여하는 주범 중 하나다. 히틀러의 예에서 보듯, 보통 대규모의 경제 불황과 그 불황에 불안해하는 사람들의 보통 선거가 합해지면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파시스트가 등장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긴 말 필요 없이, 지난 우리나라 대선과 총선이, 경제 불황도 아닌데 불황이라고 조작하는 세계 최고의 언론 환경과 피해의식에 따른 불안감을 찌라시들에 의지해 달래 온 보통 선거권자들이 공모해 이룩한 '이대한 선택' 아닌가. 이제 정말 대규모 공황 상태가 도래했으니 다음 대통령은 박근혜가 따 논 당상이다. 우리가 그 때까지 견딜 수 있다면.

 

대의제가 민주주의의 전부가 되면, 정말 앉아서 코 베이는 황당한 사태를 매 번 겪게 된다. 지난 촛불 국면을 한 번 보자. 이명박의 쇠고기 수입 결정은 그의 자동화된 종미 의식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다. 미국보다 더 미국다운 그는 정말 우리 국민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잘 생각해서 과잉 행동을 일삼는 인물이다. 이 과도한 짓, 미국의 단백질을 우리에게 이식하려는 짓거리가 저항을 불러왔다. 아무리 미국산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렇지, 미친 소 단백질을 우리 아이들에게 - 아이들은 우리들에게 - 이식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잘 알다시피, 이 미친 짓에 처음 반응을 보인 이들은 중 고등 학생들이었고, 가장 두르러진 활약을 보인 이들은 '유모차 부대'라고 불리는 아줌마들이었다.

 

많은 얘기가 있었지만, 촛불 시위에서 새로운 점은, 최근 방한한 랑시에르가 '정치적인 것'이라고 이름붙인, 기존의 정치에서 억압되고 배제되었던 세력의 출현이었다. 아무도 그들을 대표하지 않는 집단인 중고생들에 의해 시위는 촉발되었고, 역시 공공영역에서는 완전히 배제된 아줌마들과 그의 가족들에 의해 시위가 주도되었다. 아마 먹거리 문제가 아니었으면, 그것도 아이들의 먹거리 문제가 아니었으면 아줌마들의 참여는 미약했을 것이다. 소위 '정치'라는 놈이 자체 논리에 따라서 아줌마 = 우리들이 정치에 관심을 둘 여력도 없이 위악스럽게 살아가는 제일 원인, 즉 우리들 욕망의 핵인 아이들을 건들지 않았더라면 그런 전면적인 저항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촛불은 잦아들었다. '정치적인 것'이 '정치'에게 진 것이다(말이 나온 김에, 랑시에르는 여기서의 '정치'를 '치안'이라고 하고 정치는 따로 정의한다). 다른 말로 하면 민주주의가 대의제 민주제도에 의해 납작하게 밀린 것이다. 이명박이 우리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한 일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냥 쌩까기. 강적이다. 그가 믿은 건 명박산성처럼 한 치의 틈없이 매끄럽게 콘크리트 포장된 이 민주적 제도다. '난 국민들에 의해 직접 뽑힌 대통령이다' 우리는 멈칫할 수밖에 없다. 반복하지만 이 껍데기지만 상징적인 민주적 제도를 뒤흔들기 위해선 우린 흔들리는 걸 너머 부셔져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참고로 랑시에르 인터뷰 기사 한 대목을 옮긴다. 그가 정의하는 정치는 이렇다. "공동체 조직에 대해 사유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치안이란 공동체 내에서 각자에 맞는 자리, 직무, 정체성들을 자연적으로 분배하는 일종의 총체성이다. 곤봉이나 총을 든 경찰은 치안 논리의 결과에 불과하다. 치안 질서에서는 출생, 부, 나이, 지식, 종교 등이 통치를 하기 위한 자격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그것은 대개 과두정치나 전문가들의 통치로 귀결된다. 반면 정치는 치안 논리에 따라 정해진 사회 집단의 정체성으로부터 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주체인 '인민'은 사회학적으로 식별가능한 집단이나 주민들의 총합이 결코 아니다. 정치란 오히려 각자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할에 맞서 하나의 '보충'으로서 공통적인 것에 참여하는 인민의 힘을 가리킨다. 정치는 정부 또는 선거 같은 대의 체계를 뛰어넘는 활동이 벌어지는 도처에 존재한다. 민주주의란 통치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다고 간주되던 자들이, 모두에게 속한 통치할 수 있는 역량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반대로 민주주의를 합의를 실행하는 국가 형태나 특정한 사회적 삶의 형태로 간주하는 것은 정치를 제거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헌재의 종부세 위헌 판결까지 살펴보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가히 환상적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하긴 헌재가 감히 왈가왈부 할 수 없는 신탁을 내린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고 - 관습헌법보다는 부부의 (솔로에 대한) 평등권이 그래도 덜 '서프라이즈' 하지 않은가 - 앞으로도 더 얼마나 이어질지 모르니 좀 참을 일이다. 헌재 늙은이들이야 뭐, 검사 새끼들도 있는데. 다만, 시파, 근엄한 척, 권위있는 척, 공정한 척, 연출 좀 안 했으면 좋겠다. 부탁이다. 들어주기 힘든 부탁인 거 알지만, 난 비위가 약한 사람이라서 웩웩 거리다 속이 많이 상한다.

 

때마침, 인터넷에서 책 구경을 하다가 적절한 언급을 발견했다. 최근 출판된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라는 책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따다 옮긴다. - 이렇게 편하게 글을 써도 되는 거야? - <기본적으로 정치의 사법화 현상은 사실상 정당정치, 민주정치의 실패에 따른 현상이다. 나아가, 정치의 사법화 역시 그 자체로 순수한 삼권분립의 작동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행위자들 사이에서 나타난 전략적 행동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정치의 사법화 현상은 인민의 의지를 무기력하게 만들거나, 정치적 책임을 무기력하게 하기 위해 나타난다. 독립된 사법부가 그런 가공할 만한 무기가 될 때, 대표와 책임 그리고 민주적 경쟁 원칙은 무기력해지고 민주주의는 위협을 받는다. "판사들이 독립적이라 해서 항상 자의적이지 않고 공정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다. 만약 법을 해석하는 일이 독단적인 관료들의 배타적 영역이 되면, 민주주의는 반드시 위협받게 되어 있다.">

 

 

6. 다시 위협받을 만한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에 없다. 있는 건 우리가 앞으로 창출해야 할 민주주의뿐

 

반드시 위협받게 되어 있다? 아니 다시, 위협받을 만한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에 없다. 있는 건 우리가 앞으로 창출해야 할 민주주의뿐이다. 그래, 어떻게 만들어낼까? 일단 오늘은, 균열과 분열을 통해서. <넘버3>에서 이런 말을 한다. "넌 뭘 하든 하지마라." 최민식이가 한석규에게 한 번. 그리고 한석규가 최민식에게 또 한 번, "검사님은 뭘 하든 하지 마세요. 모난 돌이 정을 맞는데나 어쩐데나" 우리의 꼴통 지배 세력과 우리의 관계가 꼭 이렇다. 우리가 이명박들에게 해줘야 하는 꼭 맞는 말은 뭘 하든 하지 마라다. 하지만 그들은 하지 말라는 거 다 한다. 그거 하려고 정권 탈환했다. 아마 대운하도 할 거다. 솔직히 우리가 그들이 하는 짓거리를 쫓아다니며 막을 수는 없다. 대신 그들이 하라는 거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걸 할 수는 있다.

 

작년인가 나온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이라는 책>이 있다. 그걸 읽어보면 어느 정도 시원하면서 한편으론 굉장히 답답하다. 소위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꼭 체득해야 할 '문화적 문법'의 '자연스러운 괴물스러움'이 잘 정리되어 있어 시원하지만, 그 텍스트가 우리 사회의 괴물스러운 풍토를 어쩔 수 없이 지시하므로 답답함이 불려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 책에선 우리들 행태의 근본적 문법의 구성 요소로, 현세적 물질주의, 감정 우선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권위주의, 갈등회피주의를 꼽고, 이어서 파생적 문법의 구성 요소로, 감상적 민족주의, 국가중심주의, 속도지상주의, 근거없는 낙관주의, 수단방법 중심주의, 이중규범주의 등을 적시해 놓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문화적 문법의 뿌리를 살펴보면,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유교의 막대한 영향과 식민지 이래 전해오는 '식민성',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개발독재 시대의 불안과 불신이 우리들 내면에 자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들이 이런 행태를 보이는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물론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러면서 치러야 하는 대가도 있는 법이다. 우리가 이렇게 생존에 '몰빵'하면서 치룬 대가는 삶이 삶이 아니게 비루하게 된 것이다. 예전에 기형도가 그랬다. "사는 게 이런 것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족같고 존만한 놈이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 난 이명박들과 화해하자고 하는 게 아니다.

 

'이런 것이어서는 안 되는 삶'을 어느 정도 탈피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식민성'을 걷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난 나도 잘 못하는 걸 남에게 강요할 정도로 뻔뻔하다). 그러면 일본놈들이 아니라 우리의 꼴통 새끼들이 '조센징'하며 웃는다. 존만한 놈이라고 비웃음을 당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소중한 부분을 걸 줄 알아야 한다. 곧 흔히 말하는 사회적-상징적 정체성의 분열을 감수해야 한다. 분열을 감수해야 체제에 균열이 생긴다.

 

이제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말자, 직장 생활 너무 열심히 하지 말고, 가족 너무 소중히 여기지 말고 자식들 너무 끔찍이 사랑하지 말자. 자식에게 기대도 하지 말고. 너무 효도 하지 말고, 제사 꼬박꼬박 안 모셔도 되고, 친구는 자주 만나되 쓸데없는 동문회같은 데 나가지 말자. 그리고 교회 댕기지 말자. 특히 대형 교회, 꼭 다녀야겠다면 각종 명목의 헌금내지 말자. 뉴라이트 먹사 새끼들만 좋아한다. - 난 정말 때때로 전지한 존재가 아니라 정의를 아는 하나님이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우리들만을 위한 신을 바라면 안 되는지 알면서도 하도 열 받아서.

 

다음은 개신교 목사이자 신학자인 틸리히가 했던 말이다. 목사라면 이 정도 말은 해야 하지 않는가? <참담한 투쟁 속에서 쟁취된 자율은 당연지사로 항상 받아들여져 온 자율처럼 그리 쉽게 굴복되지 않는다. 사람이 한 번 가장 거룩한 권위들의 금기와 관계를 끊으면 그는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또 다른 타율에 굴종할 수는 없게 된다. 우리들의 시대에 있어서 그 같은 굴종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일어나기 쉬워졌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전통적 권위를 둘러싸고 있는 공허와 회의주의의 당연한 귀결이다. 싸움을 통해서 얻어지지 않은 자유, 희생을 치르지 않은 자유는 쉽게 버려지고 만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난 솔직히 체질적으로 심각함을 싫어하는 사람인데,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면 정말 피가 거꾸로 흘러 다니는 걸 느낀다. 난 솔직히 무지하니 게으르고 무지하니 쾌락을 탐하는 놈인데, 이명박은 이런 나를 뒤집으려 하는 묘한 재주를 가졌다. 역시 세월을 뒤집는 데는 명수다. 난 젊었을 때도 이렇게 젊지 않았는데, 나로 하여금 한 명의 민주 시민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게 만들다니, 고마운 구석도 있는 놈이구나. 근데 너무 호기롭게 말하는 거 아냐?


 

 

ⓒ jamin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