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비평 수업을 들어서 교수님이 문학비평가세요...
본강의를 끝내고 프로젝터를 켜시더라고요.
뭘까 했는데 프로젝터에 전원이 들어오고..
아직 완전히 전원이 켜지지 않아서 약간 흐릿하게 한글파일 화면에 뭔가 떠 있는데..
점점 짙어지는 화면에 어떤 글이 떠 있는데 한 문구가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요.
"원망하지 마라."
교수님께서 수업에 유서를 보여주신 건...
현대에 와서 명맥이 끊긴 절명시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어요.
그 옛날..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정치인, 지식인들... 억울함 혹은 자신의 잘못.. 혹은 국가적인 비극 앞에
스스로 책임을 느끼고 자결을 택하셨는데.. 그 때 돌아가시기 전에 희대의 글 하나씩 남기고 가셨잖아요.
그런데 현대사로 접어들면서 사실상 그런 이들이 없었다고..
책임 있는 정치인과 지식인의 결단...
그 전통을 고인께서 살리셨다고 하더라고요.
당신께서는 시를 의도하고 쓰신 게 아니지만,
구체적인 설명 없이 간결하고 명료하게 그리고 정제된 언어들이 시의 성격을 가졌고,
그렇게 볼 때 고인의 유서는 명맥이 끊겼던 그 옛날 선비들의 절명시로 보인다고...
한줄 한줄마다 고인의 고통이 절절히 스며들어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원망하지 마라'는 말처럼 어떤 회한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그야말로.. 어쩌면 그 순간 고인은 정말 극한의 고통을 느끼면서도
세상에 원망이나 회한을 남기지 않고 훌훌... 떠나버린 것 같다고 하셨어요.
유난히도 '간결한 문장'이 그걸 의미하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사람이 미련이나 원망이 남으면 말이 구구절절 늘어진대요...
그런데 유서에는 그런 게 없다고..
그래서 더욱 더 선비정신이 느껴진다고 하시더라고요...
김수영 시인이 시는 온몸으로 쓰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유서는 더더욱 시적이라고....
죽음을 다해 쓴 것이기 때문에 더욱 절절하고, 더욱 의미 있다고 하셨어요.
수업 시간에 유서를 쓴 게 불경스러운 일일수도 있지만,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과연... 당신다우셨다는 생각이 드네요.
책임 있는 지식인, 지도자의 결단......
모두 회피하려 하고 뻔뻔하게 사는 세상에서
고인은 그 자리의 책임감을 정말 무겁게 느끼셨던가 보다..
그저 자신의 부귀영화, 개인적인 명예욕으로 노리는 그 자리가
실은 어떤 의미의 자리인지 아시고... 진정 그러한 마음으로 임하셨나 보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밤이 되니까 자꾸 교수님의 그 말씀들이 떠오르네요..
보고 싶습니다....
+) 덧붙임... 댓글로 <오래된 생각이다> 말씀해 주셔서-
저희 교수님은 문장 순서상 <오래된 생각이다> 라는 게
"작은 비석 하나만 세우라"는 문장에만 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유서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오랜>이 아니라 <오래된>이라는 것에서 고인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고..
그 말씀을 들으니 어쩌면..
고인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전부터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셨던 게 아닌가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