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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의학의 정기신(精氣神) 삼보론(三寶論) 실험3

장백산-1 2009. 10. 31. 23:24

다음 아고라에서....^^

 

 한의학의 정기신(精氣神) 삼보론(三寶論) 실험3

 

1; 해서는 안 될 실험

정(精)을 낭비 한다

 


2; 해야만 할 실험

정(精)을 보존 한다.

 

하하~! 웬 이런 싱거운 실험요? 글쎄요? 일단 아래를 읽어 보세요,^^

 




 

불법승은 주지하시다시피 불교의 삼보(三寶)이다. 깨달은 각자와 그로부터 나오는 법과 그 법에 의지하여 수행하는 무리의 셋은 불교의 세가지 보물이다. 승가의 넓은 의미는 법다이 수행하는 모든 구도자이다. 출가 승려에만 국한된 의미로 해석하면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마치 자가 치료로 자신을 치료하는 행위는 의료행위가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축소시킬 필요는 없다. 법을 공부하면 수행자요 건강에 예민하게 적용되는 율법을 지키면 훌륭한 의사이다.

 

 




국법만 하더라도 단지 사법기관에서 공적으로 처리하는 사법관만이 법을 운용하는 것이 아니요 평범한 시민도 지켜야 할 룰이 법이다. 당연히 사법기관의 관리들은 더 법에 철저해야한다. 때문에 법을 어길 시에는 예외 없이 사법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처벌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성직자는 예외가 아니라 실은 더 종교의 법도에 철저한 사람들이다. 그렇지 못하면 성직자들을 의지하면서 공부해 나아갈 명분이 없어진다. 의료행위도 마찬가지이다. 의료인이 건강의 유지법을 모르고 행한다면 비웃음을 사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의료인보다도 더 건강한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 비법은 공유하고 싶어서 대중들은 청취를 하고 싶어지게 마련이다.

 

 




건강강의는 의료인의 전담물이 아니다. 시시해 보이는 속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배를 위하지 목을 위하지 말라,,,여름에 찬물도 씹어 먹어라...또한 여름에 삼복더위의 뙤약볕 속애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고 들어 온 남편에게 강계소주 한잔(생강과 계피를 넣은 소주)을 그것도 요새처럼 차갑게 해서가 아니라 따끈하게 한잔 먼저 들게 하고 나서 이제는 시원한 보리밥에 풋고추를 들게 하는 지혜도 의학이다. 건강의 지혜는 다 의학의 범주에 속한다.

 

 




지리학적으로 전통적으로 특이한 건강법이나 약물이 역사적으로 내려 왔다면 이것 또한 지혜의 산물이다. 더구나 약식동원이라는 명제를 놓고 보면 음식의 선택이 곧 약의 선택과 둘이 아니라는 지혜도 전해오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체조 안마 등등의 상식화와 요가 참선에 이르기까지 정신 건강조차도 스스로 관리하는 분야는 단순히 의료인이 다 관장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거꾸로 고지식한 의료인의 두뇌에 탄력성을 불어 넣어주기도 하는 자극제이기도하다.

 

 


지구촌의 남자 여자를 막론하고 잠시의 쾌락을 주체 못해서 코풀듯이 풀어버리는 허접해 보이는 정(精)으로 치부하는 낭비와 명상가의 수행적 보존의 차이는 이제 아시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허망한 건강 원리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산다~~!! 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왜 외치는 지는 필자가 느끼는 위기감에서입니다. 강호 제현께서는 간간히 그 열불 나는 정치 경제 문화의 소용돌이 현장에서 한 번 자신의 건강을 되돌아보시길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은 천주교의 삼위일체론이다. 셋이면서 하나라는 일견 모순된 것 같은 논리가 종교에서는 당연한 영적인 이론이다. 그러나 이는 의학에도 적용된다. 한의학의 삼보(三寶) 역시 그 삼보(三寶)가 일체이다. 한의학의 삼보(三寶)는 정기신(精氣神)이다. 정(精)과 기(氣)와 신(神)은 셋이면서 하나이다. 결국은 나뉘어질 수가 없다. 정력 기력 신력이 실은 하나이면서 셋이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정력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종종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여하튼 옥탄가 높은 휘발유를 기(氣)에 비유한다면 가스처럼 발열율이 높은 것은 신(神)에 해당된다고나 할까? 그럼 저질의 경유가 정(精)에 해당한다고 하면 어찌 경유 없는 휘발유가 있을 것인가?

 

 



다른 예로서 흔히 정(精)은 숯과 같은 탄소의 원형에 비유가 된다. 그리고 신(神)은 다이아몬드에 비유가 되곤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두 가지의 귀천을 잘 아는 우리들은 그 원소는 같은 탄소라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데 있다. 말하자면 귀한 보석의 원료는 싸구려 원소와 동일하다는 말이다. 정(精)을 낭비하면 기력도 없고 더구나 신력(神力)을 기대할 수가 없다. 물론 유물적으로 음식의 소화는 당연히 정(精)의 기화(氣化)는 물론 기(氣)의 신화(神化)에 기초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불충분한 이 전환과정은 다른 종류의 에너지 고양법을 생각해내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속성의 발효법 비슷한 정(精)의 활성화를 기도하는 법이 나오는데 곧 침과 뜸 지압류의 법 등과 신선도의 호흡법과 선가의 관심법 등등의 고급 수행법을 총망라하여 다 건강의 지혜에 속한다고 하겠다. 호흡의 바람으로 아래의 정(욕)을 바로 승화시킴은 곧 정공법인데 천하게 낭비하여 버린 정(精)을 다시 건질 수는 없다. 이래서 고래로 한의학 혹은 신선도에서 심지어 명상가의 모든 곳에서는 정(精)을 낭비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그런데 이 정(精)에는 꼭 욕이 붙어 다닌다. 기욕이나 신욕이라고 하는 말은 없어도 정(精)에는 과감히 정욕의 욕자가 따라 다닌다. 아마도 인간으로서 참기 힘든 욕망이라서 그런 모양이고 실은 본능이라는 치장 하에 합리화를 시키는 경우가 흔히 있어 왔다.

 

 


우리의 바이오리듬으로 보아도 감성리듬의 28일 주기 자체가 실은 이 정욕의 흥망인데 어떤 때에는 이 정력이 삶의 원천입네 하면서 과장된 평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실은 이 정력이란 그러한 성적인 힘이 아닌 일종의 강한 추진력이다. 의지력이다. 특히 굳은 의지의 지(志)는 신장경락의 주관인데 이 경락이 소음(少陰) 군화(君火)라고 하는 우리의 긍정적이고 감성적인 쾌락의 은근한 열을 주장하고도 있다.

 

이 군화는 심장경락에도 붙는 단어인데 수소음 군화는 심경락이고 족소음 경락은 신장경락이다. 바이아그라가 실은 심장 약으로 개발되었는데 실패했으나 이상하게 그 부작용(?_)이 오히려 역으로 지상을 강타한 경우만 봐도 이 심장약이 은근한 정욕의 열을 상징하는 족소음의 감성리듬을 자극하는 약으로 되었다. 12경락과 12간지는 일관된 맥락이 있는데 이 족소음 신경락에 속하는 동물인 쥐(子)를 보라! 어두운데서 즉 음지에서 활발하지 않은가? 즉 음중지양이니 어느 정도는 족소음 신경락의 에너지는 우리의 은근한 정욕과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경전에 ‘신(腎)자는 작강지관이니 기교(技巧)가 출언’하고 등등의 어려운 말이 나오는 데, 이는 신경락이 바로 강하게 작동되어서 기교의 원천이라는 이야기이다. 굳은 뜻으로 밀어붙이면 저절로 달인의 기교가 나오는데 이의가 없다.

 


그래서 정력은 곧 기교의 원천이고 굳은 뜻의 아들이다. 그래서 사려가 깊은 마음이 나오는 데 이것이 건강을 지키는 지혜이다. 지이존변자위지려야(志而存變者謂之慮也)라는 말은 굳은 뜻을 잘 보존하여 변화무쌍하면 곧 사려(思慮)의 려(慮)가 나오는 데 이 경지가 기력(氣力)의 단계가 아닌가?

 

더 나아가 인려이처물자위지지야(因慮而處物者謂之智也)라 즉 사려가 깊은 단계에서 사물을 대함에 응하는 정신이 곧 지혜(智慧)의 지(智)인데 이것이 곧 신력의 단계라고 규정할 수도 있다.


 

12간지의 동물에 쥐를 취상하는 이 족소음 신경락은 침뜸 지압의 시술을 하기 좋은 위치가 많다. 특히 기경팔맥 중에 무술인들이 꼭 통하고 싶어하는 충맥과 이 신경락은 모든 경혈 동시에 일치하는데 무슨 깊은 뜻이 숨어 있지 싶다.

 

 


열심히 읽으신 분들을 위한 팁; 건전한 정(精)의 원천인 족소음 신경락의 지압점(침뜸 보다 안전한)

 


발바닥의 용천혈(여러개 발바닥 사진 참조), 내측 복숭아 뼈 안쪽의 태계혈(두번째 사진 참조), 거기서 위로 올라가서 존재하는 부류혈(맨 위의 사진 둘 참조)을 강추합니다. 방향은 항상 아래에서 윗쪽입니다. 경락이 가는 길의 방향 따라 지압을 하면 보하는 효과가 있습니다(영수보사).

 

후기; 노자의 삼보는 자(慈) 검약(儉約) 불감위선(不敢爲先; 감히 남의 앞에 나서지 않는다)이라는 데 좀 앞서서 나서는 듯 부끄럽습니다.

 

 

한의학 지구촌 특파원 드림

출처 : 金烏김홍경을 사랑하는 사람들
글쓴이 : 정심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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