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뿌리 역사를 찾아서!!!

[스크랩]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장백산-1 2010. 5. 29. 00:24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천부경 이야기는 몇 년전 전라남도 보성의 문덕 깊은 산골에 위치한 天鳳寺에 약 1년여 생활하며 그 곳 주지 스님이신 □□스님으로부터 틈틈이 들은 천부경 이야기를 대담 형식으로 새롭게 엮은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려주신 스님은 전라도 보성 분이며, 여러분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드리는 이는 경상도 대구 사람입니다만, 대담의 어투는 사투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중간 중간 내용을 살리는 일부분만 본래의 어투를 실었습니다. 또한 일부 내용은 천봉사를 간혹 다녀가신 몇몇 스님에게서 따로 들은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모두 대담의 내용으로 흡수하였습니다. 천부경 이야기에는 <천부경>의 해석뿐만이 아니라 잘 알려진 불경인 <반야심경>(생략)과 근대의 한 스님이 편찬한 <보리방편문> 및 우리 전래의 <홍익사상>에 대한 풀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묘한 진리를 내포한 어려운 經典이나 聖典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다정한 할아버지의 사랑방 얘기를 옮겨 듣는 듯한 편안한 풀이와 이야기에서 우리 자신들 본래의 채취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를 시작하며…

천봉사(天鳳寺)는 광주에서 보성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가다 몇 년 전에 세워진 ‘서재필선생 기념관’을 지나서 바로 나타나는 문덕(文德)으로부터 막다른 산골길로 약 3㎞ 들어간 곳, 천봉산(天鳳山)의 자락 못미쳐 예전 고려시대 사찰터에 세워진 자그마한 현대식 가람이다.

몇 년전 충청도 월악산에서 시작하여 강원도와 경기도 그리고 전북과 전남을 거친 6개월 간의 긴 여행을 끝으로, 송광사의 천자암 및 몇몇 말사에 공부방을 알아보던 중에, 지금의 서재필선생 기념관(그 때는 승주호를 끼고 있는 산등성이의 너른 벌판이었다) 앞 삼거리에서 문덕 내동에 계신 어느분의 트럭을 얻어 탄 것이 인연이 되어 천봉사로 공부방을 정하게 되었다.

네가 경상도 대구 놈이라고? 이 절은 본래 학생을 받지 않는 절이라, 여기 어디 근처에서 왔다할 것 같으면 당장 되돌려 보내겠다만… 그래, 덕분에 전라도 진짜 인심도 어떤지 알아볼 겸, 네가 있고 싶은 기간동안 마음 편하게 지내거라!

천봉사 창건주 홍보살님의 이 한 마디로 약 1년 여에 걸친 그 곳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절의 식구는 주지 스님 한 분과 보살님 두 분, 그리고 방학 때 와있던 학생과 간간이 묵어가던 몇몇 스님이나 신도가 전부였다.

천부경 이야기는, 천봉사에 묶은지 제법 시일이 지나고 또한 주지 스님의 저녁 법회에 빠짐없이(自意냐구요? 물론 他意였죠! ‘빠진다’는 것은 곧 ‘下山’이라는 말과 동일하게 취급된다고, 예전에 기거했다던 학생이 귀뜸해 주더군요) 들어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님의 몇몇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었고, 그러다 그 얘기들의 끝으로 그 이야기를(당시 저로서는 그저 불경이나 밀경 가운데 하나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접하게 되었다.

유비의 삼고초려가 실감날 정도로 ‘스님, 천부경 얘기 해주세요!’를 연발한 끝에 겨우 겨우 그 얘기들을 모두 들을 수 있었는데, 그렇게 어렵게 들은 얘기들은 그 때도 그랬거니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편안하고도 소중한 기억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대담 중에도 틈틈이 나오는 스님의 몇 마디 말로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첫 인사를 대신한다.

너도 지금 안경 척 걸쳤지! 천부경은 안경이야, 그저 눈 나쁜 사람이 쓰면 앞이 조금은 훤히 내다 보이는 안경일 뿐인게야. 천부경을 무슨 도술이나 통하는 경전입네 하고 달달 외기만 하면 신통력이 통한다는 항간의 소리는, 바로 안경을 걸쳐보니 안보이던게 보이거든! 그렇게 보이니까 그 안경을 얼른 벗어 제단 위에 놓아두고 시끌벅적 신으로 섬기는 꼴이나 마찬가지인 게지. 안경을 쓰고 잘보인다고 삘삘거리며 돌아다니기만 하면 뭐 허냐? 안보이던게 보이면 그만큼 더 낳은 일을 해야지 안경 값을 하는 게지!

뭐? 그럼 천부경만 읽으면 누구나 일률적으로 모두 +1이 되는게 아니냐고? 야 이놈아, 앞이 도무지 깜깜인 봉사에게 1백만원짜리 안경 걸쳐줘봐라, 그게 무슨 소용이것냐? 그러니 너도 좋은 안경 찾을 생각하지 말고 네 눈부터 띠울 생각혀라! 무엇이 털 끝 만큼이라도 보여야 안경이건 민경이건 소용이 있지!

첫 번째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구름입니다.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01

① 오늘 풀이할 대목 : 一始無始一

[구름] 스님, 오늘이 벌써 천부경 얘기 해 준다고 하신지 일주일째 입니다.

[스님] 그놈, 처음 내가 ‘얘기 해 주랴?’ 할 때는 들은둥 마는둥 하더니, 이제는 몸이 좀 달았단 말이지? 오냐 들어오너라.

사실, 처음 스님께서 천부경 이야기(정확히는 천부경 해석)를 해준다고 했을 때는 그저 잘 알려지지 않은 불교 경전이거니하여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보름 전부터 원문을 꼼꼼히 대조하며 읽어내리기 시작하던 <한단 고기>를 우연히 이리 뒤적 저리 뒤적하다보니 스님이 말씀하던 천부경이 있는게 아닌가? 사실 <한단고기>도 그 당시 나에게는 생소한 책이거니와, 더욱이 천부경은 그 책에서 처음 보고서야 불교 경전이 아님(?)을 처음 알았을 정도로 역사 지식에 손방이었다.

[구름] <한단고기>라는 책에 보니 천부경이 수록되어 있던데, 천부경이 불교 경전이 아닌 모양이죠?

[스님] 어? 이놈 봐라! 나는 유식해서 몸이 달은 줄 알았더니, 오히려 무식의 소치로 몸이 달은게구나.

[구름] 천부경은 불교 쪽이 아니고 오히려 한국 전통 도가 쪽의 경전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던데, 스님이 천부경, 천부경 하시니까 사실 그 점도 궁금하던데요?

[스님] 야, 이놈아! 편가르지 마라! 좋으면 좋으게고 나쁘면 나쁜게지, 무슨 네것이 있고 내것이 있냐? (혼자 말씀으로: 사실, 좋은 거 나쁜 거라고 하는 것도 편가르는 거지만) 이 곳 사람이 이 곳에서 생겨난 말을 좋아하는데, 그것이 정상이냐? 아니면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네가 정상이냐?

[구름] 스님은… 이 구름의 수준에 맞게 대해주셔야죠. 저는 여기에 있는데, 스님은 한참 위에서 야단만 치면 어떡합니까?

[스님] 옆에서 야단 치거나 밑에서 야단 치면 그게 야단 치는 게냐? 같이 노는 게지! 야단 맞기 싫으면 빨리 올라와, 올라와서 같이 놀게…(웃음)

나는 불교 집안인 관계로 간혹 절을 다녀본 경험은 있었으나, 천봉사에 들어온 뒤부터 창건주 홍보살님의 엄명(?) 때문에 하루 한 차례씩 주로 저녁 예불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만 했다. 절이 민가와 많이 떨어져 있고 또한 개인 사찰의 성격을 지닌 곳이기에 평일에는 하루 종일 사람의 그림자라곤 절에 기거하는 학생 둘(어떤 때는 나 혼자)과 보살님 두분 그리고 스님뿐이었다.

저녁 예불 때는 절 식구 모두 참여하는데, 예불이 끝나고 스님 설법이 시작되면 적어도 한 시간씩 지속되었다. 처음에는 사실 지겨움에 몸이 틀리더니만, 설법 중에 자리를 뜨면 그 다음날 홍보살님의 호통아래 절을 떠나야한다는 귀뜸 때문인지, 한 두달 지난 뒤로는 스님이 출타 중이어서 며칠 비우기라도 하면 은근히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구름] 스님, 천부경 이야기…

[스님] 가만있어 봐! 지금 하는 게 모두 천부경 이야기여!

[구름] 예? 이런 이야기들이 천부경에 있다구요?

[스님] 요즘 젊은 놈들은 똥이라면 꼭 똥인 줄로만 안다니까?

나의 큰형은 대학생 3학년 때인가? 겨울 방학 때 지리산 암자에 시험 공부하러 들어갔다가, 그 한 철을 불교 공부만 실컨(?)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 스님을 은사 이상으로 섬기며 대구와 서울을 들락날락 거리기 바쁜데, 그런 형님이 언젠가 하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절에서 스님하고 얘기할 때는 마음을 열어 둬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닫아 둔 생각과 마음 때문에 혼 깨나 날거다. 물론 좋은 스님을 만났을 때에 국한되지만…’

그러고는 천부경과 전혀 상관없는(물론 구름의 수준으로 판단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잠시동안 하시더니,

[스님] 오늘은 여기서 끝이다!

[구름] 어? 천부경 얘기는 한 말씀…

‘씀’까지 나오다가 나도 모르게 얼른 입을 닫았더니,

[스님] 야… 오늘 1밀리미터 올라왔다, 겨우 1밀리미터.

하셨다. 진짜 그 날은 그렇게 스님 방에서 물러 나왔다.

이게 오늘 이야기 전부냐구요? 예! 오늘 이야기는 죄송하지만 여기가 끝입니다. 조금 섭섭하십니까? 사실 저도 그날 스님 방을 나오며 제법 섭섭했거든요. 제 수준(?)으로는 한 마디도 듣지 못하고 나온 셈이니까요.

두 번째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구름입니다.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02

① 오늘 풀이할 대목도 : 一始無始一

며칠 동안 손님도 오고 또한 스님께서 출타 중이어서, 그 주일 주말에야 겨우 스님 방에 슬그머니 들어갈 수 있었다. 말도 않고 씩 웃으며 들어 서서 자리에 않아 입을 열려고 하니 스님께서 대뜸,

[스님] 그 처음에 一始無始一이라 하였으니, 여기에서 一이란…

[구름] 예? 무슨 말씀인지…

[스님] 야 이놈아 너 지금 천부경 얘기 들으러 들어온 것이 아니냐?

[구름] 예 그렇습니다만, 갑자기…

[스님] 며칠 건너뛰었겠다 하였으니 지금 얘기하면 귀에 쏙쏙 박혀서 들어갈 것이니 뜸들일 것 뭐 있냐? 바로 시작하지.

[구름] 아- 예, 예!

책이나 무엇을 펼치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앉아서 내가 녹차를 한 잔 다려 내는 동안 얘기가 술술 이어졌다.

[스님] 一始無始一을 그저 말로서 풀이하면 ‘하나에서 시작되지만 시작되는 그 하나도 본디 존재하지 않는, 즉 없는 것이다’라는 뜻이 된다. 앞뒤에 운을 붙여서 좀 늘이자면 ‘일체 만물 삼라만상의 모든 것은 하나에서, 이것과 저것의 둘이 아닌, 음과 양의 둘이 아닌, 본디 하나에서 처음 비롯된 것인데, 그러면 그 하나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단지 허상일 뿐이니 그것 또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풀이된다. 알겠냐?

“알긴요, 알면 스님하고 같이 놀게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가는 실제로 내 뱉었다가 쫓겨나지 싶어서 묵묵부답으로 있었다.(‘놀게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1편을 보신 분을 아시죠?)

[스님] 그래, 그래서 알았다 할 것 같으면 니가 여기 앉고 내가 거기 앉아야지.

녹차를 내고, 잠시 손님이 다녀가는 동안 쉬었다가 다시 얘기로 들어갔다.

[스님] 서양 천체 이론에 빅뱅(Big Bang)이라는 게 있지? 그 이야기를 거꾸로 들고 보면 그 말이 바로 ‘一始’인게야. 빅뱅이 한 점에서 어마어마한 폭발을 이루어 모든 것이 생성되었다는 얘기라고 나 도 언뜻 들었는데… 내 말이 맞긴 맞냐? 네가 그런 서양 이론은 더 잘 알 것 아니냐?

[구름] 예 맞습니다!

아주 확고하게 대답했다. 어물쩡했다가는 얘기가 끊어질 것 같기에…

다음 내용은 스님의 말씀이 같은 내용을 설명하며 조금 길게 이어지기에 필요 없는 구름의 伴奏(?)를 빼 버렸다.

[스님] 그러니까 서양 놈들은 뭔가 터지는 순간부터 설명을 한 셈이고, 우리 조상은 그 순간 이전의 상태부터 설명한 것이 바로 ‘一始’인 셈이야. 그러니 어차피 그 말이 그 말인 셈이지.

서양 귀신 얘기 나왔으니 그 쪽으로 잠시 말머리를 돌려보자.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무슨 축지법이니 비공술(飛空術)이니하여 사람이 초능력을 쌓으면 그렇게 된다고 했지. 그래서 그런 능력으로 이런 저런 일도 해내고 말이야. 그런 것을 흔히 동양의 신비니 뭐니 하고 말을 하니, 그 말은 바로 그런 것이 서양에는 없었다는 말이 되는 셈이지. 그런데 그게 근래에 벌어지는 일을 살펴보면 오히려 그 방면에서는 동양이 뒤떨어져도 한창 뒤떨어져. 무슨 말이냐고? 축지법을 예로 들어봐라! 수십년 산속에서 축지법 익혀서 만약 실제로 쌩쌩 뛰어다닌다고 하자, 그래봐야 그 한 몸으로 끝이야. 그렇지만 양인들은 그럴 시간에 서로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여 자동차란 것을 만들었어. 그러면 연구해서 만든 사람 혼자만이 그것을 타고 다니냐? 아니야,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그 혜택을 보고 있는 게지. 그러면 비공술이 무엇과 대비되는지 알겠지? 결국 서양의 보편성에 동양의 신비주의는 단지 신비주의 그것으로 초라한 패배자의 은둔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

각설하고, 一始, 즉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근본 자리’ 곧 절대의 ‘하나’ 에서 시작되었지만, 無始一, 그 시작되는 ‘절대의 하나’ 자체도 본디는 존재치 않는 허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절대(絶對)’라는 것은 한문의 표현 그대로 상대(相對)라는 개념이 끊어진, 음과 양의 개념이 없는,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 성립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없다’라는 개념은 <반야심경> 속으로 몇 발자국만 들어가다 보면 쉽게 접할 수 있어. 그래, 언제 <반야심경>도 얘기해 줘야겠구나.

또, 예! 하고 똑똑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관심은 오로지 지금하는 얘기가 끊어지지 말고 이어지기만 바라고 있었기에 나온 대답일 뿐이었다.

[스님] ‘없다’는 개념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물건이 선방(禪房)에 가면 접할 수 있어. 바로 ‘부처 잡는 몽둥이’라는 것이지.

그게 뭐냐고? 참선을 하다보면, 특히 스승이 없거나 옳은 스승 없이 그저 열심히만 하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환상 같은 형태로, 물론 당하는 사람은 똑똑한 현실로 느껴지겠지만, 큰 보살님 또는 부처님이 눈앞에 나타나서 ‘너 수고했구나, 이제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다’ 하는게야. 그러면 온 몸에서 환희가 치밀어 오르고 또 기쁜 마음에 그 말을 그대로 받아 들이면 심한 사람은 밖으로 뛰어나가서 그 기쁜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려 한다는 게지. 그러면 그게 무엇인지 아냐?

스님은 손가락을 하나 펴서 오른편 머리에 대고 빙글빙글 돌렸다.

[스님] 그러면 그 순간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바로 ‘無’라는, 아니라는 의미의 ‘非’가 아닌, 絶代의 無를 인식해야 하는게야. 사실 無도 일반적으로 有의 相對가 되기는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無는 有無의 相對 개념을 지닌 無가 아닌 絶代 개념의 無를 말하지.

그런데 그런 비몽사몽간에 공부를 똑바로 못한 놈은 그 순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정신적인 능력이 따라주지 않을 때 써먹는 것이 바로 ‘부처잡는 몽둥이’인 게지.

그러나 또 그걸 너무 휘둘기만 하다 보면 또 이렇게 돼!

또 스님은 손가락을 하나 펴서…

[구름] 그러면 불교에서 말하는 절대의 無와 천부경의 無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그러자 스님이 하신 대답은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03에 실려 있습니다. 얘기가 너무 길어서 여기에서 끊은 것이 아니구요, 실제로 이 때 광주에서 손님이 오셔서 진짜 끊어졌던 것이거든요.

세 번째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구름입니다.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03

① 오늘 풀이할 대목도 : 一始無始一

스님 방에 들어온 뒤의 이런 저런 과정 생략하고 두 번째 이야기의 꼬리에 세 번째 이야기의 머리를 이으면…

[스님] 바로 그놈이 그놈이야! 불교에서 말하는 無를 쉽게 비유하자면,

그러고는 스님께서 ‘이건 비유가 약한 것인데… 또한 잘못 알아 들으면 엉뚱하게 생각이 굳어질 수 도 있고. 그렇지만 알아 듣기 쉬우니 이렇게 얘기 하는 게다’라는 전제를 달았다.

[스님] 사람이 죽었다, 살았다 라고 말을 할 때 ‘죽다’와 ‘살다’는 상대 개념이야. 그러나 그런 개념은 ‘살다’ 쪽에서 볼 때의 개념이지. 내가 살아있으니까 살고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되고, 그 반대 되는 개념으로 ‘죽다’라는 인식이 성립되는 게야.

그러면 만약 '죽다' 쪽에서 볼 때의 개념은 어떨까? 죽으면 생각, 즉 개념 자체가 소멸 되어 버려. 단지 識이 남아 있을 뿐이지, 생각이 끊어진 상태이니 ‘죽다’ 또는 ‘살다’의 그러한 개념이 성립되지가 않는게야.

여기에서 識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고 물었다가 거짓말 조금 보태 그 날 두세시간은 고생만 엄청했다. 그래도 그 때 들은 몇마디 말이나마 여기에 적고 싶지만 솔직한 내 답변은 ‘도무지 무엇을 들었는지도 기억이 나지가 않으니 전해 드릴래야 드릴 수가…’이다. 하기야 구구단 외는 아이에게 싸인 코싸인 하였으니… 그러한 내 반응을 보시더니 그 때부터 얘기가 조금은 쉬워져 내 귀에 쏙쏙 들어오는 것이 많아졌다.(아마 내 수준을 아신게지…)

[스님] 그것처럼 有無라고 할 때는 실은 그 주인이 有일뿐, 無는 有가 가진 생각일 뿐이야. 無로 자리를 옮겨오면 그 상대 개념으로 有가 있는게 아니야. 마치 죽음에 직접 자리하면 삶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 처럼 말이야.

천부경의 無 또한 有無의 개념이 아닌 절대의 無로서, 모든 만물이 생성되었다고 말한 ‘一’이라는 그 자체가 본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부연하여 말한 것이야.

그렇게 보면 오히려 서양의 ‘빅뱅’이라는 한 마디가 천부경의 ‘一始無始一’보다 사실을 간결하고 가깝게 말한 것인 셈이지.

단지 ‘빅뱅’이라 말하였으니, 이것을 천부경 식으로 표현하면 ‘始’ 단 한 글자가 되는 게야. ‘시작하였다’라는 셈이지.

그런데 우리 조상은 그 앞에다 형용사로 ‘一’을 달아 놓고는 그것을 그냥 놓아두면 틀린 말이 되거던? 그래서 부연하여서 설명해 준 것이 바로 ‘無始一’이야.

곧, 一始無始一 = 始 = 빅뱅이 되는 셈이지.

그러니까

모든 것은 ‘하나에서 시작되었으니…’와

모든 것은 ‘한 점에서 빅뱅하여…’와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에서

‘하나에서’, ‘한 점에서’, ‘하나님으로부터’는 곧 형용사 또는 허사(虛辭)인 셈이야. 즉, 모습을 달리하고 있을 뿐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야.

생겨남, 생성, 천지창조 등등…

그러한 사실을 말해 놓고 또한 그 실체도 바로 잡아 놓은 것이 바로 천부경의 첫 구절인 ‘一始無始一’이야.

여기까지 올 동안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나는 그날의 이야기가 끝나고 방을 나서면서야 시간이 많이 지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 有無, 無有, 有無하니 사실 지금 이 글을 정리하는 저도 왔다갔다 합니다. 그런데 스님은 자꾸 왔다갔다 해야 운동(?)이 된데요.

네 번째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구름입니다.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04

② 오늘 풀이할 대목은 : 析三極無盡本

이 날은 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먼저 궁금했던 한 가지를 질문 했다.

[구름] 스님, 제가 천부경을 해석한 다른 몇몇 서적들을 보니까 첫머리부터 스님께서 해석하신 방향과는 전혀 다르게 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어떤 책에는 천부경 자체를 하나의 주술적인 經文으로 보아서 단지 외우기만 하라고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런 해석들은 틀린 것이라고 보면 됩니까?

여기에서 스님의 ‘안경論’(1편의 끝에 잠시언급된 얘기입니다)이 나왔다.

안경론에 곁들여, 천부경에 대해 해석의 방향을 달리하고 있는 항간의 몇몇 서적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스님] 그러니까, 그러면 그런 책들이 틀린 것이고 지금하는 내 얘기가 맞는 것이냐? 혹은 내 얘기가 틀리고 그런 책들이 맞는 것이냐? 그런 질문 또한 어리석은 것이야!

천부경은 금방 먹을 수 있게 이미 잘 차려진 음식은 아니야! 오히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담을 수 있는, 훌륭한 그릇이라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겠지. 훌륭한 그릇에 조금은 맛없는 음식을 담았다고해서 그런 음식을 음식이 아니라 말할 수는 없는 게지. ‘그 음식은 맛이 없다’라고 말한다면 몰라도…

이렇게 비유하면 알겠냐?

내 얘기가 네 귀에 쏙쏙 들어오고 또한 앞 뒤 사리를 따져 봐서 흠 잡을 데 없는 훌륭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그러한 내 얘기가 올바른 천부경의 유일한 해석이냐? 아니야! 그것은 단지 그릇에 담겨져 있는, 자네 입맛에 딱 맞는 맛있는 음식일 뿐이야. 그러니 자네도 내게서 요리 강습 열심히 듣고 가서 자네 나름의 맛깔진 음식을 만들어 봐야 하는 게야.

또한 그렇게 해 보는 것이, 천부경이 한낮 먹어 치우면 없어지는 음식으로서가 아니라, 누구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담아서 서로 그 음식을 권해 볼 수 있는 훌륭한 그릇으로서 가치를 하는게지. 모든 훌륭한 경전들이 그렇듯이 말이야…

천봉사 창건주 홍보살님의 음식 솜씨는 요리 전문가를 능가한다.

육류 한 점 들어가지 않더라도 특별식으로 짜장밥이 나오면 염치불구하고 두 세 그릇은 보통이었고, 반가운 손님이라도 온 날이면 공양(식사) 시간에 나오는 반찬은 정결하면서도 그 맛이 서울의 여느 요리집 못지 않았다.

[스님] 지금 시간이 그럴 때도 되었다만, 너 지금 한창 배고프겠구나.

그런 스님 말씀 끝에서 언뜻 스님도 시장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홍보살님이 오랜만에 직접 음식을 만드는 날이다. (그래서 스님도 ‘음식, 음식’ 했나?)

[스님] 오늘은 어디 할 차례냐?

[구름] 겨우 한 구절 넘겼으니…

[스님] 겨우라니! 그 한 구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요 전부라고 그렇게 누차 얘기해 줬더니만, 며칠 동안 헛들은 게구나!

왁! 또 이 방정맞은 입이 실수를…

이 순간에 ‘실수’라고 변명했다가는 더 혼쭐나는 것 정도는 이제 배웠다.

이럴 때는 조금은 심각하게, 그리고 진짜 반성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애교도 조금 곁들인 반쪽 웃음을 웃고 있는 게 上策이었는데…

[스님] 또 본의 아니게 무심코 나왔다고 말하려고 그러지. 本意가 딴 것 이냐? ‘무심코’가 굳어지면 나도 모르게 本意가 되는 게야.

(야! 오늘은 분위기가 양호하게 넘어가려 하네? 휴 - 살았다!)

[스님] 析三極無盡本이라 하였다. 먼저 析三極이란, 나누면 셋으로 歸着된다는 뜻이니, 즉 絶對의 근본자리인 그 ‘하나’를 나누어 보면 결국에는 세가지 모습으로 귀착(極)되게 된다는 뜻이다.

그 세가지라는 것이 뭐냐고?

기다려! 무슨 일이든지 너무 결과나 답변에 집착하지 말고 느긋하게 과정을 즐기며 결과나 답변이 자기에게 찾아오기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야.

근본자리, 또는 그 근본자리에서 생성된 ‘하나’를 나누어 보니 결국에는 세가지의 모습으로 귀착되었다 하였는데, 그러면 그 ‘하나’는 그럼으로써 없어진 것이냐?

그에 대한 해답이 '無盡本'이야.

풀이하자면, 그렇게 나눔을 무한히 행한다 하더라도 그 근본의 자리 또는 그곳에서 생성된 ‘하나’는 닳아 없어지지는 않는다, 즉 모두 소멸되어 없어지는 일은 없다는 것이지.

이 때 내가 한 마디 거들었다. 딴 게 아니라,

[구름] ‘근본자리’ 또는 ‘하나’라는 것이 본디 존재하지 않는 절대의 ‘無’라고 앞에서 말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입니까?

하니, 스님께서 웃으며 ‘1.5 밀리미터…’하셨다.(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히히… 아시는 분은 알텐데. 그러나 요거 한 번 더 써먹었다가 구름이 혼쭐난 얘기는 뒤에 가다 보면 보입니다.)

[스님] 그렇지. 無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해 여러 곳에서 絶對의 無를 누차 설명한 것은 불경의 반야심경에서 無를 거듭 말하고 있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야.

이번 구절은 앞뒤의 구절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내용이라 하였다.

이 곳에서 언급된 그 ‘세가지’라는 것도 이 구절에서 설명할 것이 아니라 다음 구절에서 설명할, 아니 다음 구절의 전체를 포괄하는 내용이라 했다.

그 세가지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말을 조금은 조금하게 몇 번 드러내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스님] 내가 광주 다녀올 때까지 알아 둬, 숙제다!

여러분은 궁금하시면 요 위쪽(아래쪽?)에 올라와 있는 글을 마저 읽으시거나, 혹은 이 글이 올라오는 당일 날 이 글을 읽는다 하더라도 하루나 이틀만 기다리면 궁금증이 풀리겠지만, 저는 그 때 무려 일주일 동안 숙제(?)하느라 끙끙거렸습니다. 다음날 아침이면 다녀올 것 같이 나가서는 일주일 후에 돌아오시더라구요. 스님이 말씀하시던 광주가 나는 전라도 광주인 줄 알았죠…

다섯 번째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구름입니다.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05

③ 오늘 풀이할 대목은 : 天一一地一二人一三

하나에서 생성되었다는 그 세가지가 무엇인가? 그 해답은 천부경을 한 번 훑어본 사람이라면 쉽게 얻을 수 있다. 바로 天·地·人인 것을 그 다음 구절에서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끙끙거렸던 것은 천·지·인 세 글자를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천부경’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지닌 어마어마한(?) 경전이 어떻게, 마치 중학생이 구구단을 대하는 듯한, 이렇게 평이한 내용으로만 이어지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 안에 엄청난 내용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내 생각과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스님] 천부경 안에 엄청난 내용이 숨어 있을 것이라 여겼다고? 하기야, 그런 착각아닌 착각이 어떨 때는 심심찮게 커다란 결과를 건지는데 있어서 추진력 구실을 할 때도 있지.

그렇지만 네가 한 말 가운데 그 ‘엄청나다’는 것이 단지 자극적인 ‘엄청남’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게야. 예를 들어 한 나라의 임금이 엄청난 일을 했다고 할 때, 우리는 통상 그 임금이 무슨 옆 나라를 점령해서 영토를 10배로 넓혔다든지, 혹은 세계사에 길이 남을 무슨 문화적인 업적을 남겼을 경우만 생각하는게 보통이야. 물론 그런 경우에 엄청난 일을 했다는 표현이 틀린 것은 아니지.

그러나 어쩌면 ‘엄청남’의 본질은 오히려 자극적이지 않고 평범하며 편안한 모습에서 발견되는 것일게야. 괜스레 말을 이리저리 꼬아서 말하는 내 입 아프고 듣는 네 귀 아프게 하지 말고, ‘無爲’ 또는 ‘擊壤鼓腹’이라는 단어로 뒷말을 대신하면 알아먹겠지?

[구름] 그러니까 스님 말씀을 정리하면, 천부경이 쉬운 것은 마치 無爲나 擊壤鼓腹의 겉을 보는 것과도 같지만, 그것이 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커다란 노력이 필요하고, 또한 그렇게 제 모습이 갖추어지면 그것을 곧 ‘엄청남’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스님] 시방, 무슨 공책 정리하냐? 말은 나보다 더 비비꼬고 있네… 알았으면 그냥 넘어가!

학교 교육에서 객관식 찝어먹기 교육이 식민지 교육의 기본이라하여 차츰 주관식 교육으로 옮겨가고 있다던데, 내가 받았던 교육은, 심지어 대학 교육의 일부분까지 철저한 객관식 고르기 교육이었다. 그러다 문교부 혜택의 끝머리에서 조금 익힌 주관식 사고방식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기에, 지금도 무엇을 ‘논’(田이 아닌 論을 말하는데, 이 글자를 대할 때마다 골치부터 아픈게 사실입니다)할 때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객관식 틀에 그 論點을 억지로 맞춰 놓으려는 버릇이 길러졌던 것 같다.

[스님] 자, 햇볕 좋은 날 방안에 마주앉아 서로 비비꼬고만 있지 말고, 술- 술- 얘기나 풀어보자.

앞서 얘기한, 나의 큰형이 모시고 있다는 스님은 예전에 무슨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이 대목, 즉 ‘술- 술-’ 정도의 운이 떨어지는 대목에서는 하던 얘기가 뚝 끊어지고 ‘穀茶’가 대령되어야 뒷 얘기가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면 한 밤중이라도 산길을 따라 마을까지 왕복 2시간을 뛰다시피 다녀와야 했다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나는 행운아다. 스님은 곡식으로 만든 茶가 아닌 순수한 茶만을 좋아하시니…

[스님] ‘三’이 천·지·인을 가리킴은 너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無’라는 글자가 애를 먹이듯이, <천부경>에서는 어지럽게 널려있는 숫자들이 속을 썩이는데, 같은 ‘一’이라도 그 위치에 따라서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먼저 그 대략의 뜻을 풀이하면, 天一一은 ‘하늘은 絶對의 근본자리 하나에서 처음으로 생겨났음’을 의미하며, 地一二는 ‘땅은 絶對의 근본자리 하나에서 두 번째로 생겨났음’을 의미하며, 人一三은 ‘사람은 絶對의 근본자리 하나에서 세 번째로 생겨났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앞서 있는 세 글자 一은 첫 구절의 一과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며, 天一一의 두 번째 一은 地의 二 및 人의 三과 더불어 순서를 나타내는 글자로 쓰인게야.

무슨 無爲니 擊壤鼓腹이니 하며 한 차례 연설을 들었건만, 이 구절의 설명을 듣고나서는 본래의 의아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근본자리, 즉 빅뱅은 이해를 했다손 치더라도, 그곳에서 첫 번째로 하늘이 생겨나고 두 번째로 땅이 생겨나고… 하는 것이 과연 무슨 경전의 얘기랄 수가 있는가? 그저 자연의 현상을 설명한 것 뿐이지 않는가? 그래서 용감하게 물었다.

[구름] 그러면 천·지·인이 그렇게 순서대로 생성된 데는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그저 자연현상을 설명했다고 한다면 너무 평범하지 않습니까?

[스님] 또 서둔다, 서둘어.

[구름] (아이고 스님, 웬… 무슨 입을 못 열겠네요. - 물론 혼잣말)

[스님] 네가 금방 네 입으로 ‘자연 현상’이라 했지?

바로 그거야! 이 천부경은 무슨 교훈이나 철학을 적어 놓았거나 도술을 부리는 주술을 적어 놓은 것이 아니야. 그러한 것 이전의 모습, 아니 그러한 것을 모두 포함하는 모습인 ‘자연의 현상’을 글로 옮겨 놓은 것이야.

여기서 말하는 自然이란 흔히 일컫는 산과 들이란 의미의 自然이 아니라 글자의 본 의미로 풀이되듯이 ‘스스로(自) 그러한(然)’ 우주 전체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야. 누군가에 의한, 혹은 무엇인가의 힘에 의해서 어떻게 되어지는 것이 아닌, 스스로 그렇게 되는 현상, 즉 自然의 현상, 지구의 자연이 아닌 우주 전체의 현상이자 본래 모습을 그 생성의 첫머리부터 글로서 표현해 놓은 것이 이 천부경인게야. 첫 구절에서 빅뱅인지 배뱅인지 꼬부랑 글을 써가며 한 얘기를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겠지.

처음부터 너무 결과를 앞당겨 얘기하면 중간이 싱거울테니, 이 부분은 천천히 얘기하자꾸나.

오늘 얘기는 여기서 마칩니다. 또 광주에서 손님이 찾아 왔냐구요? 아닙니다. 이날은 스님 방에서 제법 길게 얘기가 이어졌는데, 이 부분, 즉 ‘천부경은 시공을 포괄하는 우주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라는 스님의 말을 여러분에게 전해드리고 싶어서 단락을 맺는 것입니다. 왜, 무슨 연속극에서도 중요한 장면에서 갑자기 이상한 자막이 나오지 않습니까. “다음 회(回)를 기대하십시오!”라고…

여섯 번째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구름입니다.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06

③ 오늘 풀이할 대목도 : 天一一地一二人一三

‘천부경은 우주 自然의 모습을 표현…’ 어쩌고 하는 얘기가 아주 중요한 대목이라며 무슨 광고 같은 것까지 넣어가면서 지난 회(回) 끝에 강조 했었지만, 사실 그 당시는 그게 귀에 들어왔던 것이 아니라, 하나(근본자리)에서 천·지·인이 차례로 생겨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가 더욱 궁금했다.

성급하게 묻다가는 또 핀잔만 들을 것이 뻔하기에 이빨을 꽉 깨물고(?) 그에 대한 대답이 나오기만 기다렸다.(그렇게 이빨을 꽉 깨무는게 차츰 버릇이 되다보니, 나중에는 ‘천부경’을 공부하는 건지 ‘인내심’을 공부하는 건지 분간이 안 가더군요)

[구름] 반야심경에서는 ‘無’라는 한 글자를 통해 많은 것을 얘기하고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러면 천부경에서는 반야심경에서 ‘無’자가 하는 역할을 一,二,三 등 나열된 숫자가 대신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까?

[스님] 그렇지,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숫자에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실어 놓았다고 해야 하겠지. 그래서 천부경에서는 나열된 숫자들에 포함된 의미를 정확히 짚어 보는 것이 어쩌면 올바른 해석의 전부인지도 모른다는 게야.

네가 읽는다는 <한단고기>라는 책과 함께 요즘 심심찮게 입에 오르내리는 책 가운데 <규원사화>가 있는데, 그 책에 복희씨가 전했다는 ‘倚數觀變’이란 법칙에 대해 말해놓은 부분이 있다. ‘의수관변’에서 ‘의수’라는 말을 풀어쓰면 그대로 ‘숫자에 의지하여…’가 되는데, 곧 지금 우리가 말하는 ‘숫자에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싣는다’는 것과 통한다고 볼 수 있지.

[구름] <한단고기>에 대한 의견 가운데 僞書라는 의견이 더 지배적인 것 같습니다. <규원사화>도 그와 비슷한 유형의 서적이라면 그 안에 수록된 내용 자체도 후세 사람들이 꾸민 것이라 볼 수 있잖습니까?

[스님] 그렇게 따진다면 천부경도 근자의 사람이 현재까지 밝혀진 우주의 이치를 절묘하게 숫자 개념을 이용하여 재배치한 글이라고 볼 수가 있겠지. 그래 놓고선 옛 글이라 했을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지.

그렇지만 위,진서로 판가름한 뒤 버리고 취하는 흑백논리보다는, 흰색은 흰색으로 그리고 검은색은 검은색으로 두루 즐길 줄 알아야 하는 게 참된 지혜인 게야. 적어도 네가 고서 판별가가 아니라면…

<규원사화>는 그 날 그 자리에서 그렇게 듣게된 뒤로 지금까지 나에게는 소중한 책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게 되었다. 지금은 스님의 말씀에 현혹(?)이 되어 그런지, 누가 흰색이라면 새하얀 것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고, 누가 검은색이라면 까무짭짭한 것이 그 나름대로 애정이 가곤 한다. 위에서 말한 ‘의수관변’의 법칙에 대해 <규원사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천지의 깊고도 묘한 이치는 숫자에 의지하여 그 변화를 살펴볼 수 있음을 미루어 깨닫고, 사람들이 의지하여 따를 만한 법칙을 새로 만드니, 이것이 곧 역리(易理)의 근원이다.(<揆園史話 太始紀>)

[스님] 一一, 一二, 一三이라 할 때 뒤에 붙은 一,二,三은 단순하게 보면 첫번째,두번째,세번째라는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러고는 나를 쳐다보고 한 번 의미 있는 미소를 지은 뒤,

[스님] 똥이라면 그저 똥인 줄만 아는 단계는 지났겠지?

하시며 다소 얼기설기한, 그러면서도 정리된 논리와 같은 말로서 一,二,三의 숨은 얘기를 풀어놓으셨다.

[스님] 천·지·인 셋 모두가 근본자리인 ‘하나’를 그 근본자리로 하여 태어났음은 앞에 나란히 나열된 ‘一’자 셋으로 알 수 있을 게야. 그러면 그 근본자리에서 태어날 때 셋이 한꺼번에 태어나지 않고 차례로 태어났음을 뒤에 나열된 一,二,三이란 세 글자에서 알 수가 있는데, 그것이 단순히 장남,차남,막내임을 나타내는 정도인가?

그건 아니야. 근본자리를 기본으로 하되, 그 셋 상호간에도 서로 연결되어 있는 고리가 존재하고 있어.

먼저 天이 태어났지? 즉 天이 생성되었단 말이야. 그런 다음 地가 태어날 때는 天과는 전혀 상관없이 근본자리로부터 마치 天이 생겨나듯이 地가 생겨난 것인가? 그렇지 않아. 天이 생겨나자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생겨난 것이, 그 반대급부의 모습으로 근본자리로부터 생겨난 것이 바로 地인 게야. 마치 陽이 생성되자 그 반대급부로 陰이 생성되듯이, 마치 有가 인식되자 그 반대급부로 無가 인식되듯이 말이야. 陰과 無가 陽과 有에서 생성된 것은 아니듯이 地 또한 天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라 근본자리인 ‘하나’에서 생성된 것이야.

천·지가 생성되면서 가지는 一,二의 時差性에는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

밝음이 있으면 그제서야 어두움이 있게되는 것이며, 선이 있으면 그제서야 악이 있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구름] 명암과 선악이나 음양의 생성에는 시차성이 없다고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스님] 사실 여기서 ‘시차성’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는 않다. 단지 가장 가까운 표현일 뿐이야. 마치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絶對의 無처럼…

본 의미의 시차성을 달리 표현해 보마. 음과 양이 꼬리를 무는 형상인 太極이 있지? 태극에서 음을 밑으로 잡아 내리면 어떻게 되냐? 그 즉시 그 자리를 양이 대신 올라가서 차지하게 되지않냐? 그렇게 음이 자리를 비우면 그 곳에 양이 대신 자리하는 그것의 시차성와 같다고 보면 될 것이야. 달리 말하자면, 물체에 빛을 비추면 그 건너편에 그림자가 생기지? 그 때 빛이 비춰지면서 곧장 그림자가 생기는 그것의 시차성으로 보아도 되는 게야.

그러한 본래 의미의 시차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불교에서 말해지는 것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예를 들자면, 어떤 빛이 물건을 비춰서 그림자를 생기게 했다고 할 때 그 그림자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겠냐? 빛을 더 밝게 한다? 아니면 그 반대편으로 또 다른 빛을 비춘다? 그러면 그림자는 일부는 없어지겠지. 그러나 해답은 그 물건을 치우는 것이야. 궁극적으로는 빛 자체를 치우는 것이고…

[구름] 만약 빛 자체를 치운다면 그것은 그림자보다 더 짙은 그림자가 생기는 꼴이 되잖습니까?

[스님] 빛은 ‘有’, 그림자는 有의 반대급부인 ‘無’, 그러면 빛을 치우면 나타나는 더 짙은 그림자, 즉 어둠은 무엇이 되겠냐? 그것이 바로 絶對의 ‘無’인 셈이야.

[구름] 그러면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시차성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까?

[스님] 야, 이 놈아! 네가 내 하는 말 막아놓고는 되려 재촉하면 어떻허냐!

스님의 이 한마디에 나는 꿈에서라도 깬 듯이 깜짝 놀랐다. 사실 이제까지 스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세 마디 가운데 한 마디는 거의 꾸지람에 가까운 핀잔으로 이어졌기에 그 쪽으로 신경을 쓰느라 어떤 때는 본 얘기의 흐름도 간혹 놓치곤해서 엎친데 덥친 격으로 혼이 나곤 했었는데, 이상하게 이 날은 뒷 부분으로 넘어오면서 마치 무슨 철학 강의실이라도 되는 듯이 기복이 없는 스님의 말소리에 나 자신도 죽은 듯이 빠져들었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 한 마디에 나는 본래의 경계태세(?)로 돌아오게 되었다.

[스님] 二,三의 생성에 나타나는 시차성은 곧 빛과 그림자와 같이 그 둘 사이에 상호 연관성을 가진다고 함으로써, 하나의 생성은 나머지 하나의 생성을 의미하고 또한 하나의 소멸은 나머지 하나의 소멸을 의미함을 말하고 있는 게야.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방식과도 통하는 바가 있는데, 구름 너도 이런 말 간혹 들었지? 진실로 미움을 버릴려면 사랑의 마음도 버리고 궁극에는 그 마음 자체도 버려야 된다는… 그게 바로 그림자를 없애려면 물건을 치우고 궁극에는 빛 자체를 치우라는 말과도 같은 게지.

만해 한용운선생의 시에는 언제나 이중 내용을 담고 있다고 들어왔다. 님을 그리워하는 시에서 그 님은 단순한 님이기도 하면서 님으로 형상화된 그 무엇을 항상 그림자(어쩌면 그것이 본질인지도 모르지만) 처럼 깔아놓고 있다 하였다. 스님의 말씀대로라면 천부경의 내용들도 그렇게 얕은 겉과 깊은 속을 함께 지니고 있는 셈이다. 겉은 감각적으로 쉽게 이해될 수 있지만 그 속을 이해하자면 도무지 안개 같음은 처음 천부경을 듣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도 별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구름] 그러면 一,二가 상호 연결고리를 가지듯이 三도 비록 근본자리에서 생성된 것이지만 앞선 一,二와 상호 연결고리를 가졌다는 것입니까?

[스님] 요놈, 얘기를 그냥 재촉하면 핀잔 듣지 싶으니까 이제는 아주 지능적으로 재촉하고 있네? 오냐, 오늘은 얘기도 길어졌고 그렇다고 끝머리 얼마 남겨 두고 그만 두기도 그렇고 하니 마지막 부분을 간략하게 말하마.

三인 人은 천·지가 생성된 뒤에 생긴 셈이니 여기에도 시차성이 적용된 것이다. 천·지는 근본자리 그 자체를 모태로 하고 있다. 그러나 人은 비록 근본자리에서 생성되었지만 그 모태는 근본자리가 아니고 天과 地인 점이 다르다. 즉 근본자리에서 천·지로 나뉘어진 뒤 그 천·지가 다시 하나로 합쳐진 것이 人이 되는 셈이다. 오늘은 여기서 끝!

[구름] 예? 스님, 짧아도 너무 짧은 것 같습니다.

[스님] 人이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그에 비해 너무 짧은 것 같냐? 걱정마라 천부경 뒷 부분에 그 본래의 내용이 나오니, 그 곳에 가서 자세히 얘기 해주마.

이 날은 제법 늦은 시간까지 스님 방에서 얘기가 이어졌다. 스님께서는 예순을 훨씬 넘긴 연세지만 새벽 예불은 한 차례도 거르지 않는 듯 했다. 우리 집안이며 나 개인적으로도 불교와 오래 전부터 인연을 맺고 있었지만, 평소 유원지를 겸하고 있는 사찰은 물론 제법 깊은 산사에서조차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목탁 소리며 독경 소리에 대해 이상스럽게도 그다지 호감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천봉사에서의 몇몇 기억 가운데 가장 맑게(‘맑다’는 표현이 이상할 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느낌에서는 가장 적절한 표현인 듯하다) 남아있는 것이 바로 스님의 새벽 도량송 소리이다. 새벽 4시를 조금 넘어 선 시간이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목탁 소리와 함께 내가 머물던 방에서 조금 떨어진 대웅전 앞에서 시작되는 맑고도 낭랑하기 그지없는 도량송 소리는, 그러면서도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지금껏 남아있다.

그렇게 새벽이면 어김없이 도량송이 울려퍼지는 산사에서는 저녁 9시가 곧 자정인 셈이다. 아예 8시 이후에는 발걸음도 조심해야 했던 그 곳에서 그 날은 늦은 10시가 훨씬 지나서야 스님 방을 나섰다.

오늘 얘기는 별로 재미가 없는 듯 합니다. 글을 정리하며 다시 읽어 보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날은 왜 그렇게, 무슨 애인의 고백이라도 듣는 듯이 잠시나마 이 재미없는 이야기에 빠져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곱 번째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구름입니다.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07

④ 오늘 풀이할 대목은 : 一積十鉅

스님의 출타로 얘기가 며칠 쉬는 동안 스님과 예전부터 알고 계셨다는 어느 스님 한 분이 와서 며칠 묶었다가 갔다. 그 스님도 연세가 주지 스님과 엇비슷하였으며, 주지 스님처럼 전통사상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단 며칠이었지만 워낙 인적이 드문 산사였던 까닭에 쉽게 스님과 친해질 수 있었고, 그러다보니 몇 얘기 건너서 천부경이 화제에 오르게 되었다.

[구름] 그렇지만, 제가 알고 있기로도 지금의 천부경은 본래 한문이 아닌 옛 글로 기록되어 있던 것을 뒤에 한문으로 옮긴 것이라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든하나(81)라는 숫자를 너무 강조하면서 천부경의 본래 가치를 그 숫자에 싣는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여든하나라는 숫자는 본래의 천부경과 상관 없는 것이 분명한데 말입니다.

그 스님은 천부경 얘기가 나오자마자 줄곧 천부경이 한문 81자로 이루어져있는 점에 대해 굉장한 가치를 부여하며 계속 그 쪽으로만 얘기를 몰고갔다. 상형문자인 한문에서도 근본을 나타내는 ‘本’자를 破字로 풀이하면 八十一(즉, 이 석자를 겹치면 곧 本이 된다는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부경은 처음부터 한문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옛 글로 기록되어 있던 것을 뒤에 한문으로 옮겼다고 하였으니, 한문으로 옮긴이가 천부경의 오묘한 이치를 파악하여 그 뜻을 나타내기 위해 81자로 맞추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원래의 천부경에서 한 걸음 발전한 것이면 발전한 것이지 본래 천부경의 가치로 판단되어 질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고 또 그렇게 대답하였다.

[스님] 그래서 네가 뭐라고 대답했냐?

그날 그 스님에게 답한 내용 그대로를 며칠 후 돌아오신 스님에게 말씀드렸다.

[스님] 이놈이 이제 한 글자 안다고 두 글자 아는체 하네?

갑자기 등골 아래로 싸늘한 기운이 올라와서 머리 뒷끝이 쭈삣 섯다. 천부경 얘기를 시작하면서 줄곧 핀잔이니 꾸중이니 하였지만 그것이 봄날의 따뜻한 바람이었다면 그 날 그 한 마디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는 엄동설한 같은 것이었다.

[스님] 무엇을 배우는 놈이 되려 아는체 하면 그 識에 막혀서 아무 것도 배울 수 없어! 너는 지금 속으로 ‘대화 가운데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의견’이었다고 대꾸하려 하겠지만, 너의 그 말투에는 ‘이제 나도 천부경을 조금 아는데’라는 식의 아집이 숨어있어. 겨우 한 두 구절 듣고 난 뒤 그런 아집이 생긴다면 정작 천부경의 본 의미를 들을 때 쯤이면 이미 꽉 막혀 있을 텐데, 그런 네 귀로 무엇을 듣겠느냐.

識이 무엇인지 그 때까지(사실은 지금까지) 확실한 개념이 없었던 까닭에 꾸중을 들으면서도 이것 저것 모두 무슨 의미인지 모른채 영문없이 듣는 꾸지람 같아서 속이 조금 상했었는데, 이어서 나온 스님의 한 마디에 속상했던 마음이 부끄럽다는 생각으로 돌변했다.

[스님] 실컨 애를 써가며 뚝딱 뚝딱 요리를 만들고 있는데, 너는 양념 몇 방울 튄 빈 그릇을 들고 나가서 남에게 자랑하는 꼴밖에 더되냐?

그 날은 그렇게 몇 마디 꾸지람을 더 들은 뒤 조용히, 그리고 슬그머니 스님 방에서 빠져 나왔다.

따라서 오늘 얘기도 여기가 끝입니다. 천부경 얘기는 한 마디도 없다고요? 아-따, 이게 다 천부경 이야기라니까요.(이 말투도 스님에게 들켰다간 또 한 번 혼쭐 나겠지만… 사실 그 날 그 분위기에서 천부경의 ‘천’자라도 어디 꺼낼 수 있었겠습니까?)

여덟 번째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구름입니다.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08

④ 오늘 풀이할 대목은 : 一積十鉅 無匱化三

[스님] 햐! 이 부분은 나도 가물가물한데...

一積十鉅에 접어들면서 그 후로 몇구절은 늘 이 말씀이 꼬리처럼 따라 붙곤 하였다. '가물가물' 앞에 멀뚱멀뚱하게 앉아서 듣고 있는 사람은 그러 면 '어둠캄캄'임은 물론인데, 그 어둠캄캄을 통해 말을 전해 듣는... ^^

[스님] 예전에 孔子가 물가에 서서 '水也, 水也' 했다더구만. 그랬더니 그 단순한 4자의 기록에 후세 사람들이 엄청난 사상과 철학을 쏟아 부어놓고는 그것들을 모두 공자의 사상인양 서술하고 있고, 또한 그 글을 읽는 사람들도 그쪽으로 생각을 몰고가고 있고...

몇 년 전, 중고 테레비젼 상점 주인같이 생긴, 약간 헤벨레한 백남○ 무언가가 작품이랍시고 99개의 고물 테레비 아무렇게나 쌓아놓고는, 기자가 왜 하필이면 '99'라는 숫자냐고 묻는 질문에 그 양반 한다는 말이 '젊었을 때 화투판에 끼어들어서 다른 것 은 모두 한 번씩 잡아보았는데 요놈의 9땡은 잡아보지 못해서..' 라고 했다더구만. 그 말을 빌미삼아서 많은 사람들이 그 99라는 숫자에 아주 심오한 인생철학이라도 들어있는양 해석하고 난리 던데...

사실 그 사람에게는 단지 잡아보고 싶었던 9땡일 뿐일 게야! 그 99에 심오한 철학을 심는다면 그것은 심는 놈의 철학일꺼고.

모든 옛 성현의 말에 엉겨붙은 살점들이 모두 그러한 셈이지.

뼈를 잘 만들어 세워 놓으면 살점들은 제 스스로 붙어들게 마련 이야.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무엇이 뼈인가, 무엇이 살 점인가, 뼈는 바로 서 있는가, 살점은 뼈에 맞게 잘 붙어있는가 하는 것을 옳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게야. 물론 뼈가 중요한 만큼, 붙어있는 살점도 함께 중요하지. 그렇게 둘이 조화를 이루 어서 하나의 참된 생명체가 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생선까시 같은 뼈에 고래살점 붙여놓은 놈, 뼈도 없는 곳에 살점만 덩거러니 얹 어놓은 놈, 그게 詐欺이고 迷信인 셈이지.

응? 뼈는 올바르게 있는데 살점은 한 점도 없는 것? 그것은 신경 쓸 필요 없어. 언젠가는 포동포동한 살이 오르기 마련이 니까. 무엇보다 그런 것은 사람에게 詐欺만은 치지 않으니...

네 표정을 보니, 왜 즉각 一積十鉅로 들어가지 않고 사설이 길어지냐 이건데, 사실 이 후의 몇 구절은 가물가물해서 본디 뼈라는 것을 찾지를 못하겠거든. 살점은 대충 붙일 수가 있는 데, 뼈에 의지하지않은 살점이야 떼어놓은 비계덩이일 뿐이지.

여기서 저기까지 건너 뛰랴? 아니면 흘려라도 들을래?

이런 질문이 나올 때마다 즉흥적인 대답이 아닌, 한 박자 늦추어 잠시 대답을 내려놓았다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제 어느정도 몸에 익혀가고 있었 다. (그래야 또 야단 맞지않으니...)

[구름] 들려 주십시오. (뜸들인 대답치곤 너무 간단했나요?)

[스님] 그럼 일사천리로 달려보자.

그래, 여기 이 두 구절은 그래도 앞과 연결되어 있으니 조금은 낳구나. 一積十鉅라 함은 '하나가 쌓여서 充滿의 열이 되는 것' 을 말하는 것이다. 글 전체에서 같은 한일(一)이더라도 몇가지 모습을 지닌다고 앞서 말했었지. 여기서의 一은 절대자리를 가 리키는 '하나'가 아니라, 미약하고 작다는 의미로서 이해된다.

'작은 것이 모여서 큰 것이 된다.' 언급할 가치도 없는 당연한 논리이지. 너나 나나 그 당연한 것을 지키고 가꾸어가지 못해서 항시 바른 길에서 어긋나게 되는 것이야.

즉, 세상의 물질이 너나 할 것 없이 그 밑거름은 세포나 결정 체로 되어 있고, 세상의 모든 사상이나 철학이나 종교라는 것은 너와 나의 한 푼 '생각'에서 비롯하여 모습을 갖추는 것이니...

쏟아지는 내용들이 286으로는 어렵고 386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아서 내딴에는 제법 긴장하여 듣고 있으려니, 이어지는 말을 중간에서 멈추고는 스님께서 내 얼굴을 빤히 보시며...

[스님] 왜? 갑자기 말이 어려워지는 것 같냐?

허허, 그것은 네게 설명하는 나도 확실히 모르기 때문일꺼야. 봉사가 코끼리 더듬으며 설명하려니 당연히 말도 더듬어 질 수 밖에. 더듬는 말이라도 이어보자꾸나.

세상의 이치는 작은 하나가 차근차근 쌓여서 충만한 열이 되 듯이 그 어디도 특별난 것이 없는 것이니, 그것은 마치 종교라고 불리는 위대한 사상이라 할지라도 지금의 네 마음에서 처음으로 시작되는 初發心과 같은 가녀린 마음이 그 뿌리가 됨을 말하며, 그 실체 또한 그러한 마음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왜? 3류 불교 소설에 나오는 땡초 설교 같냐? 바로 그거야. 황금도 맑은 하늘 구름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변소 갔다 온 더러운 발로 디디고 있는 땅속에 있을 뿐이듯이, 특별난 곳에 서 엄청난 것 찾으려고 하지말어, 찾아지는 엄청난 것은 환상뿐 이니까. 그저 평범한 곳에서 평범한 것을 주워서 평범하게 지켜 나가면 그 결국의 모습은 바로 비범한 것이 되는 것이지.

일(1)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 열(10)을 채우고자 하면 누구나 구(9)를 찾아다니게 마련이야. 그러나 구(9)는 없어! 차근차근 쌓 아갈 일(1)이 있을 뿐이지.

[구름] 그러면 이 구절의 천부경에서 의도하는, 즉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바로 그것입니까?

오랜만에 글을 드리면서 오늘은 너무 잠오는 것 같죠? 뭔가 나올려니 또 끊는다구요? 그것은 바보상자 연속극 주특기인데... 중요한(아니, 제가 중요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꼬리에 붙이려니 왠지 밑지는 것 같아서 다음 편의 머리에 붙이기로 했습니다. ^^

아홉 번째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구름입니다.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09

④ 오늘 풀이할 대목도 : 一積十鉅 無匱化三

아래에 이어지는 스님 야-그, 요거 중요한 겁니다. 분명히 시험에 나올 겁니다(?). 어렵진 않습니다, 286에 2메가 정도면 충분히 이해가 될겁니다. (사실은 '復習'입니다. 앞에 이미 나왔었거든요.)

[스님] 전통적으로 不立文字라하여 언어나 문자에 대해 그 가치를 인정하 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낸 문자 가운데 이 한 단어 만큼은 그 가치를 인정 받아야 할 것 같어.

바로 '자연(自然)'이 그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저 단어로 서 일컬어지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한문 자체로 해석되는 의미를 가리키는 것이야. 즉, '스스로(自) 그러하다(然)'라는 의미로서의 '자연'을 말하는 게다. 앞서 한 얘기하고 똑 같다고? 중요한 건 시험에도 두 번 나오는 법이야...

부처님이 깨달은 눈으로 이 세상을 보니, 누가 혹은 그 무엇이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 모든 일이며 현상들이 '스스로 그러하더라' 라는 게야.

천부경 전체에 면면히 흐르는 일관된 분위기가 바로 깨달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마음과 아주 흡사해, 아니 바로 그 자체 라고 말할 수 있어.

세상의 처음은 어떻게 어떻게 시작하였더라...

그 세상은 어떻게 어떻게 변화하였더라...

그 세상은 어떤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더라...

즉, '내가 보니 그렇더라'라는 아주 덤덤한 서술일 뿐이야. 그런 서술형이 아니면 어떤 형식을 뛰냐고? 그럼 예를 들어, 一積十鉅를 성경에서 한 번 찾아 볼까? 바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되, 그 결과는 창대하리라' (맞냐?) 라는 말이 그것에 해당되지. 둘은 똑 같은 현상을 설명하고 있지 만, 그 분위기에서 뚜렸한 차이가 하나 있어.

一積十鉅가 그저 담담한 설명이라면, 성경의 그 말은 아주 선동 적이야. 앞의 것은 '차근 차근 쌓여가던 것이 결국에는 훌륭한 결 과에 이르더라'라면, 뒤의 것은 '차근 차근 쌓아 봐라, 그 결과는 엄청날 것임을 내가 보장한다. 한 번 해 봐라!'라는 식이지. 왜 그런 차이가 나냐고? 초식동물 다스리는 법하고 육식동물 다스리는 법하고 같을 수야 없을테지, 않그렇냐?

[구름] 예? 갑자기 웬 초식,육식 동물은...

[스님] 이 놈이 말 솜씨가 조금 늘었길래 머리속도 조금 뚫린 줄 알았더니 내가 이제까지 원맨쑈 한 것 아니냐?

[구름] 아닙니다. 비록 아직까지 멍멍하기는 하지만, 모든 내용을 여기에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빙글빙글 돌리지는 않았다) 차곡차곡 넣어 두었으니, 천천히 곱씹어 보고 또 곱씹어 보면 깨일 날이 있 을 것입니다. 제가 워낙 선천적으로 형광등이라서... ^^

[스님] 그래, 네 놈 말 솜씨가 늘은 것은 사실이야. ^^ 꼭 육,초식에 불필요한 주석을 달아주어야 겠냐?

보통 이럴 경우에는 '쫀심'이 상해서 마음이 찌들어버리기 마련인데, 같 은 말이라도 스님의 핀찬은 그 분위기가 오히려 마음을 푸근하게 하였다.

[스님] 사육사가 동물을 기를 때 토끼에게는 풀을 주고 호랑이에게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를 주겠지. 이렇게 말하면 알아 듣겠냐? 그럴 경우에는 풀이나 생고기에 집착하지 말고, 그 두 동물들을 먹여 살리려는 사육사의 마음을 봐야 하는게야. 이제 알겠냐?

[구름] (깜빡, 깜빡, 깜빡) 아, 예! 알겠습니다. (정말?)

[스님] 이 구절을 끝맺어 보자꾸나.

하나가 쌓여서 충만의 열이 되는 것이니, 천.지.인의 세 가지 또한 실은 모습을 지니지 않은 무형의 것이 변화하여 이루어졌음을 말 하는 것이다. 一積十鉅 無櫃化三, 이제 되었지?

'되었지?'라는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어떻게 '안되었습니다'할 수 있겠습 니까. 그저 메모리에 잘 기억을 해 두었다가 곱씹어 보고 곱씹어 볼 수 밖 에요. 그런데 어째 無櫃化三은 덤으로 언근슬쩍 구렁이 담넘어 가듯이 지나 간 것 같죠? 구렁이 담넘어 가듯이 슬- 슬- 슬-

열 번째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구름입니다.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10

⑤ 오늘 풀이할 대목은 : 天二三地二三人二三

몇 년전 반야심경을 처음으로 꼼꼼히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을 때 無 라는 글자가 하도 많기에 헤아려 본 적이 있었다. 내용은 도무지 뜬구름에 오리무중이니 無 자가 몇자인지라도 알아 두는게 남는거라고 생각해서...

물론 헛툰 것은 머리에 넣어 두어봤자 오래 갈 리가 만무하다. 그런데 천부경 얘기를 듣기 시작하면서부터 드문드문 있는 며칠만의 한 차례 얘기마당이 끝나면 그 다음 마당에 들어설 때까지 혹시나 싶어서 (역시나 였지만) 천부경을 오르내리며 내 딴에는 도를 ㄸ는 척 해보아도, 오리무중은 양반이고 말 그대로 어둠캄캄일 뿐이었다. 반야심경의 無 자는 한 글자일 뿐이지만, 천부경의 숫자는 1에서 9까지 무려 아홉가지 종류가 요소 요소마다 배치되어 나를 괴롭히고 있으니...

예전에 미분이와 적분이하고는 도통 친해 놓지를 않아서 숫자만 봐도 멀뚱멀뚱 낯설기만 한데, 게다가 같은 1이라도 두세 얼굴을 가졌다더니, 이제는 2라는 놈마저도...

[스님] 여기서의 二는 앞에 나온 地一二 때의 二와는 또 다른 뜻이다.

위험(?)을 무릎쓰고 잽싸게 끼어들기를 했다.

[구름] 스님, 그런데 같은 一 혹은 二가 여러 가지 뜻을 가진다는 것은 어쩌면 그 글을 보는 사람의 관점일 뿐이지, 천부경 본래의 뜻 이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천부경 자체에는 그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해 놓지를 않았는데...

(구름이 오랜만에 한 건 했는가?)

[스님] 그래, 그거 좋은 질문이구나.

(와! 동포에 계신 조국 여러분, 구름이 한 건 했습니다!)

[스님] 그런데, 너는 어느 각시를 사랑헐 때 산술적으로 사랑의 정도가 숫치로 나와야 허냐? 예를 들면 79점은 사랑실패, 80점은 성공.

(어? 급선회...)

[스님] 물론 네 말처럼 본 뜻과 전혀 다른 해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듯이, 천부경을 하나의 음식으로 보지않고 하나의 그릇으로 봐야 한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 질문은 필요 치 않겠지.

(윽! 역전타...)

[스님] 어차피 사랑놀음이나 생각놀이 처럼 수치로 가부를 결정짓거나 문자로 흑백을 논하지 못하는 것들은, 결국에는 의지해야 하는 것이 '느낌'이라는 것이다. 말이나 글로써 있지도 않은 실체를 궂이 묘사하려면 오히려 허상만 생길 뿐이니, 그래서 不立文字 라 하였던 것이야. 그래서 천부경에서도 군더더기 없이, 있는 현상 만을 말해놓고 있는 것이고, 나는 거기에다 최소한의 살 점 만을 붙이고 있는 셈이지. 살점을 붙일 때 내가 인식하는 천부경의 모습은 바로 마음에 와닿는 '느낌'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가 없어. 나도 천부경 흉내를 내자면 '보니까 그렇더라'인 셈이지...

(어쩐지- 쉽게 한 건 했나 싶더니...)

[스님] 그러니까, 얘기를 들으면서 '천부경 내용이 그렇구나'라고 생각하 지 말고, '저 땡초놈이 천부경을 저렇게 보는구나' 이렇게 생각하 란 말이야.

너! 같은 내용을 세 번이나 말하도록 시키면 중도에라도 바로 책걸이 들어간다, 알았지?

('책걸이' 아시죠? 책 한 권 모두 마치면 하는 떡잔치. 그러니까 정신 없이 자꾸 헛소리하면 얘기 해주지 않겠다는 말씀이었어요. 이러니 제가 예/복습 안하고 배기겠습니까? 정신 안차리고 배기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어느날 나도 모르게 퇴학 당할 판인데...)

[스님] 여기서의 二는 앞서 '絶對'를 가리키는 天一과 地一의 一에 反해 '相對'를 의미하는 글자이다. 앞선 문장이 '對가 끊어진 근본자리 에서 하늘과 땅과 인간이 차례대로 생겨났다'라는 의미였지? 이 문장은, 절대의 근본자리에서 생겨난 천.지.인은 자신들이 태어난 뒤에 자리하고 있는 相對의 세상에서 각기 세가지의 모습 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하늘(天)은 상대의 세계(二)에서 明運暗의 모습을 지니고, 땅(地)은 상대의 세계(二)에서 生育死의 세가지 모습을 지니고, 사람(人)은 상대의 세계(二)에서 性精命의 세가지 모습을...

과학으로 밝혀진 이 세상의 모습을 간단히 묘사하자면 이렇다.

최초의 화이트 홀, 최후의 블랙 홀, 그리고 그 중간의 과정.

천부경의 전체 모습 또한 그것과 비슷하지.

一始의 一, 終一의 一, 그리고 주로 숫자로 형상화 된 중간 과정.

여기 相對의 세계에서 천.지.인이 지니고 있는 세가지 모습 또한 그러한 우주 전체의 모습과 닮은 꼴이라고 할 수 있지. 시작하는 明과 生과 性, 마치는 暗과 死와 命, 그리고 그 중간에서 運用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運과 育과 精...

드디어 골치가 찌끈 찌끈, 바로 한문이 날 것으로 왔다갔다 하기 때문 이다. 한문세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벽한 한글세대도 아닌 나로서, 한문세대 강사님의 일사천리 강의를 듣자니 실속없이 고개는 '끄떡끄떡'과 '꺄우뚱꺄우 뚱'을 반복하지만, 결국에는 혼란만 남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대충 암기하며 듣고 있어야지, 잘 미끌어지는 곳에서 만약 잘못 브레이크를 걸었다가는... (사실 이 부분은 봉사가 설명해주는<?> 재미도 없는 곳이니, 어차피 어둠캄 캄일바에야 어쩌면 일사천리가 제격인지도 모릅니다.)

[스님] 하늘의 밝음(明)으로 인해 땅에서 만물이 남(生)이니 그로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性)로나마 모습을 갖추게 되고, 하늘은 그 기를 운용(運)시킴에 땅은 그 기운을 받아 만물을 기르게 (育)되고 그로서 인간은 보다 완벽(精)하게 되어가는 것이며, 하늘이 그 빛을 어둠(暗)으로 바꾸면 땅 또한 만물을 거두어(死) 들 이기에 그로서 인간은 ......

오늘 여기서 끝입니다. 왜 밑도 끝도 없이 잘라먹냐구요? 말하는 사람도, 그 말을 이렇게 쓰는 사람도, (아마도) 그 글을 읽는 사람도 시커먼 구멍 바라보고 눈 말똥말똥 뜨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니, 끄트머리 대 충 한 마디 잘라먹는다고 뇌파에 별 변화 있겠습니까? (실은, 들은 것도 까먹었고 아무리 봐도 몰라서 못 적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열 한 번째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구름입니다.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11

⑥ 오늘 풀이할 대목은 : 大三合六生七八九

이 대목, 즉 大三合六에서부터 成環五七一 까지는 애초에 스님께서그냥 건너 뛰려고 하시는것을, 요즘 몸도 건강치 않으신데 잘못 건너 뛰시다가 다리를 삐기라도 하시면(?) 덧난다며, 강력 하게 말린 덕분에 그 대충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스님] 그럼, 여기 이 부분부터 요기 요 부분까지는 佛家에서 말하는 말투 를 사용하여 그 대강을 일러주마.

예! 라고 대답하며 아무 의미도 없이 가볍게 웃는 얼굴을 하였더니,

[스님] 웃지마, 이눔아! 그래, 솔직히 나도 모르기 때문에 내 앉은 자리를 비빌 언덕 삼아 대강 얼버무리려한다. 그러니 그냥 건너뛰자고 하 하지 않았더냐?

[구름] 아닙니다, 스님. 언감생심, 어떻게 제가... 건너 뛸 곳을 건너 뛰지 않아 혹시 발이 저려 그러신게 아닌지...

[스님] 도둑이 제 발 저렸냐? ^^ 그래, 저린 김에 아예 뛰어가자꾸나.

大三에 合六하면 生七八九라, 큰 세가지에 여섯가지를 더하면 칠팔 구가 생성된다고 하였다. 큰 세가지가 천지인을 가리킴은 쉽게 알 수 있을 테고, 거기에 더해지는 여섯가지란 곳 地水火風空識을 말 하는 것이다. 地水火風의 地는 토양(土壤)이라 생각하면 천지인의 地와 구분할 수 있겠지.

천지인은 제 각기 따로 노니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이 연결되어 움직이는데, 그 세가지의 본체를 바탕으로 하고서 거기에다 地水火 風의 유형의 기운과 空識이라는 무형의 기운이 더해짐으로서 비로 소 七識과 八識 및 九識이 생성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七八九識이라 일컬으면 그 주체가 천지인 가운데 사람이 되는데, 천부경에서는 여기서부터 끝나는 부분까지 그 주인공이 사 람 하나로 통일되어 묘사되고 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은 뒤에 그 자식을 위해 묵묵히 희생하며 뒤로 물러서 있듯이, 천지도 인간 을 낳은 뒤에 그 최고의 자리를 인간에게 내어주는, 아니 歸一이라 는 최대의 과제를 인간의 어깨에 올려놓은 뒤 묵묵히 뒤에서 지켜 보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당하겠지. 흡사 부모가 자신이 이루지 못 한 것을 자식에게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이야...

(시방부터 나오는 무슨 空이니 識이니, 또는 八識이니 九識이니 하는 것에 대해서는 구렁이 담넘어 가겠습니다.)

[구름] 그러면 天地는 人이 歸一을 이룸으로서 자연적으로 歸一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천지도 그 자체의 별다른 귀일 과정을 거 치게 되는 겁니까?

[스님] 별 걱정 다하네! 꼭 제 앞가림 못하는 놈이 남 앞가림 걱정부터 하는 법이라더니. 질문이라고 했으니 대답을 들려줘야 하겠다만, 그렇다는 대답이 나 아니라는 대답 그 어느 것도 결국에는 별 의미가 없을 테니, 대신 지장보살 얘기나 들려주마, 아마 답변이 될테니.

그러고는 이런 얘기를 들려 주셨다.

[스님] 지장보살께서 깊은 수행을 하시다가 그 끝에, 열어 젖히기만 하면 해탈의 근본자리에 들어서는 문의 고릿쇠를 잡은 채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되었어. 무슨 생각에 빠졌냐고? 해탈의 문고리까지 잡은 보살이 빠진 생각이 무엇인지 너나 나나 어찌 알것냐? 대충 짐작 만 해둬.

아뭏튼 그렇게 깊은 시름에 빠져 있었더니 한 줄기 젓대 소리가 들린게 아니고, 난데없이 문 안에서 부처님의 목소리가 들리더란 말이야? 공자 가라사대가 아니라 부처님 가라사대, '너 거기서 기다릴래, 아니면 안에 들어와서 기다릴래?' 라는 음성이...

도무지 무슨 말씀을 허시는 건지...

한 번 잘못 뱉은 거짓말 숨기려, 덧붙여 거짓말하고, 또 부풀려 더 큰 거짓말로 덮어 씌우고 하는 것은 (저도 사실 유경험자이기에) 이해가 가지만, 덧셈 문제 이해시키려고 곱셈 문제 가르치 고 그것도 모자라 미분이와 적분이까지 끌어오는 것 같아서...

그러더니 스님께서 비장의 무기(?)라며 다음 얘기를 꺼내시더라구요. 무어냐구요? 별 거 아니에요! 별 거 아니더라구요. 소문 난 잔치집에 먹을 거 없다잖아요.

열 두 번째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구름입니다.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12

● 오늘 풀이할 대목은 : (작은 천부경 이야기)

[스님] 너, 우리의 고유한 이념이 있지? 무언지 아냐? 무슨 승공통일이니 멸공통일이니, 그런 것 말고.

이건 또 갑자기 무슨 야-그인가? 수업시간(?)에 긴장을 안할래야 안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렇게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스님의 질문 때문이다. 질문 그 자체는 쉬울지 모르지만 워 낙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향과는 엉뚱하게 여기저기서 낱말을 끌어들여 뒤섞 어 놓으니, 그렇다고 긴장만 해서는 더더욱 멍하니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으 므로 스님 말대로 마음을 열어놓고 얘기를 듣긴 하였지만, 어디 마음을 열어 놓는다는게 쉬운가? 그 말 부터가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것을...

[구름] 예, 홍익인간 정도...

[스님] 정도...가 뭐냐? 정도...가! 똥이면 똥이다, 된장이면 된장이다. 모르면 모른다, 알면 안다. 이렇게 대답 못하냐?

(글쎄, 멍하니 앉아 있다가는 날벼락이 떨어진다니깐요!)

[구름] 예, '홍익인간'입니다!

결국 답안은 정확히 맞추었지만, 스님은 어김없이 그 답안이 작성된 과 정을 설명들은 다음에야 그 답을 인정하실 태세였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던 지 연필을 굴려서라도 25% 확율로 찝어낸 답이 맞으면 그것으로 전체를 인 정받는 교육으로 길러진 머리로는 이런 상황에 부딪치면 곤혹스러운 것이 사 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천부경을 듣는 동안 천부경 얘기 자체에서 얻은 소중 함 만큼이나 이렇게 곳곳에서 단련되다 길러진 그 무엇이 소중하게 느껴지기 도 한다.

[스님] 옛날에도 천자문을 달달 외우게 한다든지, 사서삼경을 달달 외우게 한다든지하여 지금과 같이 외우기식 교육이었지만 지금과는 그 근 본이 달라. 지금처럼 좋은 것 나쁜 것 안가리고 속도 없이 껍데기 만 외우는 것은 기계나 할 일이지 그게 사람이 할일이냐?

이정도 얘기가 번져버리면 듣고 있는 나로서는 그 얘기의 처음이 어디서 시작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끌려다니기만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님은 항상 그 끝을 잃지않고 아무리 돌아서라도 정확히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그 러면 그 때서야 나는 정신이 들곤 했다.

性通光明, 在世理化, 弘益人間.

우리가 흔히 상투적인 표어처럼 듣던 이 구절을 들어 스님은 <작은 천 부경>이라고 말씀하셨다. 아니, 정확히 스님의 말씀 그대로를 옮기자면,

[스님] 어디, 이 글을 가지고 작은 천부경으로 요리를 한 번 해 볼까?

그날 그렇게 시작한 홍익인간 얘기로 하루의 수업시간을 몽땅 채웠다.

먼저, 참고삼아 <삼국유사>에 나오는 홍익인간 언급 부분을 옮기면 다 음과 같다.(원문은 생략허께유!)

옛날 환국(인)의 지차 아들 환웅이란 이가 있어 자주 나라를 가져볼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지망하더니,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 래로 삼위태백 땅을내려다보매 인간들에게 크나큰 이익을 줌 직한지라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보내어 여기를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 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오니 여기를 신시라 이르고 그를 환웅천왕이라 했다. 그는 바람 맡은 어른, 비 맡은 어른, 구름 맡은 어른들로써 농사와 생명과 질병과 형벌과 선악을 맡 게하고 무릇 인간살이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에 살면서 정 치와 교화를 베풀었다.

(오늘은 완전히 진짜 수업시간 같습니다. ^^)

'인간들에게 크나큰 이익을 줌 직한지라'와 '세상에 살면서 정치와 교화 를 베풀었다'라는 이 얘기가 과연 어떻게 변할 것인가? 구름의 토를 달지않 고 연이어서 스님의 얘기를 풀어놓으면 다음과 같다.

[스님] 性通光明은 곧 性은 光明과 통한다고 하였으니, 마음은 明暗과 相對 를 벗어난 절대의 빛과도 같음을 말하는 것이요, 在世理化는 곧 세 간에 있으면서 이치로서 교화한다 하였으니, 천상이나 지옥이 아닌 인간세계에 있으면서 이치로서 교화하여 나아간다는 것이요, 마지 막으로 弘益人間은 곧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하였으니, 널리 인 간을 이롭게 함이 궁극적으로 완전하게 근본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방편을 말하는 것이다.

性通光明은 천부경에서 밝힌 一始無始一과 一終無終一 및 중간에 나오는 心本太陽昻明과 통하는 개념이며, 在世理化는 一積十鉅와 통하는 개념이다. 나머지 弘益人間은 천부경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 을 밝혀 놓은데 반해 홍익인간이란 인위적인 수행의 한 方便을 말 한 것이므로 서로 공통되는 부분은 없다.

이제는 한 글자 한 글자 뜯어서 해부해 보자꾸나.

性은 그 글자의 형태를 보면 마음을 가진 생물이란 뜻인데, 곧 인간을 포함한 모든 有情衆生이 지니고 있는, 아직은 바른 깨달음 을 얻지 못한 마음을 性이라 한다. 이 性은 모든 유정중생에 있어 서 그 스스로의 相에 얽매여서 온갖 모습의 형상을 나타내게 하는 그 근원처가 된다.

通은 서로 통한다는 의미에서, 앞뒤의 것이 매번 찰나와 찰나에 서는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는 뜻과 함께, 영원히 이어지는 시간 속 의 향후 어느 찰나의 시점에서는 완전히 동일해 질 수 있다는 가능 성이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동일해 질 수 있다는 가능성의 시 점>에서 <동일하다는 결과의 시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행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또한 의미하고 있기도 하다.

光明은 절대의 근본자리, 곧 바른 깨달음을 얻은 마음의 본래 모 습을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밝음이란 밝음과 어두움이라는 相對 가 끊어진 絶代의 모습을 지닌 밝음을 의미하는 빛이다. 또한 그 절대적인 밝음의 존재 자체도 부정한다는 의미에서는 <반야심경> 에서 일컫는 절대의 無와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在世라 하였는데, 유정중생이 머무는 모든 경계를 크게 셋으로 나눌 때에는 天界와 地界 및 人界로 나눌 수 있다. 근본자리로 돌 아가고자 하는 수행 과정에 있어서는 이러한 삼계 가운데에서 오직 인계만이 앞으로 나아가는 정진이 가능한 곳이다. 무릇, 비록 선업 이 충만하여 천계에 몸을 드러내었다 하더라도 그곳에서는 단지 선 업 만큼의 복을 누리다가 결국에는 인계의 제자리로 돌아와서 새로 이 수행하며 근본자리로 돌아가고자 정진해야 한다. 악업으로 인연 지어지는 지계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어느정도 수용이 가능한 고 통이 따름으로 인해서 수행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고, 또한 근본 자리로의 회귀본능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人界 즉 世界 에서의 수행이나 교화가 그 수행이나 교화로서의 본 모습을 지녔다 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안끼어든다고 했더라도 궁금한 것은 짚고 넘어가야죠?)

[구름] 그러면 불교에서 일컫는, 천계에서 수행하는 보살은 그 수행이 의미 가 없습니까?

[스님] 그 점이 바로 인도에서 깨달음을 말하는 가르침과 우리나라에서 깨 달음을 말하는 가르침의 차이야! 그러나 실제적인 내용에서는 차이 가 없어.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 <어서 선업을 쌓은 뒤에 빨리 죽어 서 천계로 와서 편안하게 수행하라>는 말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어, 그저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하라, 그러면 어떤 결과가 있을지는 말 해줘 보았자 소용도 없을테니 네가 그 단계에 도달해서 직접 느껴 봐라>는 말은 많은지 몰라도. 그러니까 그 차이점을 단지, 현실이 너무 절망적이기에 희망을 갖게 한다거나 혹은 좋은 일이나 수행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하라고 꼬드기는 말이라고 본다면 인도의 가르 침이나 우리의 가르침이 차이가 없지. 차이가 있다면 당연히 둘 가 운데 하나는 미진하거나 거짓된 것일터이고.

理化는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마땅한 이치>로서 행하며, 그 표현 양식은 바로 敎化임을 말하는 것이다. <마땅한 이치>라 하였 으니, 모든 일에서 기적이나 의외를 인정하지 않고 어떠한 일의 果 에는 반드시 근원이 되는 因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더함도 덜함 도 없이 인연으로 지어진 만큼만 果報에서 나타남을 말하는 것이 다. 그러니 果가 있으면 因이 있었음을 의심하지 말고, 因이 있으면 果가 있을 것임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지.

弘益人間이란 위에서 말한 理化, 즉 이치로써 교화하는 구체적인 행위의 방편으로써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 이야. 궁극적인 利他는 利己와 다르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利己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利他의 완성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지.

내가 완벽하게 근본자리에 들어와 완착하기 위해서는 나 하나 만의 歸一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뭇 무리들의 완전한 歸一이 이루어진 뒤에라야 만이 더불어 나의 완벽한 歸一이 이루어지게 되 는 것이야. 일체의 有無情衆生들이 모두 해탈로써 근본자리에 들기 전에는 절대로 먼저 근본자리에 발을 들이지 않으리라는 서원을 세 우고 땅으로 변화하여 버티고 있는 地藏菩薩이야 말로 利他로 昇華 된 가장 철저한 利己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性通光明은 모든 것과 이어지는 근본자리를 내보이는 것이니 本體論을 밝힌 것이요, 在世理化는 근본자리로 돌아가는 바 탕행로를 말하는 것이니 實行論을 밝힌 것이요, 弘益人間은 그러한 바탕행로에서 행해지는 최상의 방편을 일컬은 것이니 方便論을 밝 힌 것이다.

어때요, 우리 스님 요리 잘하시죠? 홍익인간에서 넘어온 지장보살님 얘기가 지난번 물음의 답으로 어떻게 구렁이 담넘어 가듯이 스리슬쩍 넘어가는지는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그렇다고 천부경 잠시 쉬고 딴 얘기 하는게 아니구요,'아, 이게 다 천부경 얘기라니까요!'

열 세 번째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구름입니다.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13

● 오늘 풀이할 대목도 : (작은 천부경 이야기)

(지난번 얘기에서 달아서 이어 씁니다.)

[스님] 한적한 사찰에 들어오다 보면 간혹 이런 글귀가 눈에 뜨이지? 靑山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天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그저 좋은 얘기로만 들리지? 그래, 그저 좋은 얘기일 뿐이야.

땡중의 좋은 법문이 별거더냐? 해질 무렵 산을 걷다보면 언덕을 넘어서다 눈에 들어오는 석양도 좋은 법문이 될터이고, 비온 뒤에 맑디맑은 숲을 머리에 인 푸른 산도 좋은 법문이 될더이며, 장마 끝에 피어오르는 뭉개구름도 더없는 법문이 될터인데.

그게 무슨 법문이냐고? 그것이 지장보살님 법문이 아니고 무엇이 며, 그것이 천상의 많은 보살님네 법문이 아니고 무엇이냐? 영겁의 세월을 저렇게 떡 버티고 앉아서 온갖 풍상 다 겪으며 잔소리 한 마디 없이, 오늘도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내며 靑山이 하는 법문이 <말없이 살라>는 법문이며, 영겁의 세월을 저렇게 높이 서서 모든 욕된 것을 다 내려다보고도, 오늘도 맑은 모습으로 蒼天이 하는 법 문이 <티없이 살라>는 법문인게야.

이 얘기를 듣기 전 얼마전엔가, 인법당으로 이뤄진 대웅전 마루에서 건 너다 보이는 오훗녁의 천봉산 자락을 바라보며 스님께서 '구름아, 저기 저렇 게 들려오는 법문 한 마디를 듣기 위해 10년이고 100년이고 經공부가 필요한 게야' 하시길래 '예?'라며 어리둥절해 했더니, '아냐, 그냥 내 혼자 한 소리다' 하셨던게 언뜻 기억이 났다.

(<아니! 그렇게 깊은 뜻이!>를 속으로 연발하며 멍하니 듣고만 있는데...)

[스님] 야, 이놈아! 이쯤에서는 이제 알았다고 네가 앞꼬리 뒷머리를 이어 야 될 것 아니냐? 이거 완전히 소귀에 경읽기 하고 앉아있는 꼴이 네?

(아이고, 내가 못살어!)

[구름] 그러면 지장보살님은 결국 철저한 利己를 위해 철저한 利他의 길로 들어선 것이 되는 것입니까?

[스님] 남은 신경써서 실컨 얘기해 주면, 저 놈은 저렇게 엉뚱한 소리만 한 다니까? 그래도 낙방 점수는 안되니까 가만 두는게지, 거기서 조금 만 빗나간 소리를 했으면 너는 오늘로 당장에...

그러니까, 지장보살님은 해탈의 문고리를 잡고서 완전한 해탈의 모습이 무엇인지 직관하셨던게야. 해탈은 했으되 해탈의 문 안에서 기다리는 부처님이 되느니, 하루라도 빨리 모든 중생이 해탈의 문 고리를 잡아 열고 들어갈 수 있게끔 저렇게 땅으로 변화하여 일각 의 쉼도 없고 한 마디 말도 없는 가운데 온 몸으로 법문을 내뱉으 며 중생을 돕는 보살의 모습을 택하신게야.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해탈의 문으로 들어서면 지장보살님은 어떻게 되겠냐? 대답은 뻔하 지? 사실 해탈의 문고리를 놓고 돌아선 지장보살님에게는 이미 해 탈의 문고리도 해탈의 문도 존재하지 않아!

그러니 결론은 넘 신경쓰지 말고 네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게야, 알것냐?

꼭 재미있는 얘기 끝에 이렇게 심지를 박아놓는다구요, 스님은 글쎄!

열 네 번째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구름입니다.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14

⑦ 오늘 풀이할 대목은 : 運三四成環五七一

이 대목은 완전히 불교 용어로 숫자의 개념을 채우는 바람에 그 용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답답하기만 했다.

[스님] 왜 답답하냐? 답답하기는 듣는 너나 말하는 나나 마찬가지다.

[구름] 스님은 극장 안에 앉으셔서 영화 내용이 답답하실지 몰라도, 저는 그 극장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부터 답답한 셈이니...

[스님] 그러면 아직 영화관도 못 찾았단 말이냐? 그 놈, 그런데 말솜씨는 영화감독이 다 되었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서 뿔난다고 하더니...

그렇다고 불교용어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릴 수도 없는 것이었는데, 그나마 처음 말씀하실 때의 내용이라고는 다음 한 줄의 문장이 전부였다.

[스님] 三身과 四智를 운행시켜 五欲 및 七情과의 윤회를 거쳐서 근본자리인 一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아직까지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유교가 버티고 있는 까닭인지 연장자에게 쓸 수 있는 말들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예를 들면 ‘웃긴다’는 말은 어떠한 경우라도 연장자의 언행을 묘사하는데 사용될 수 없다. ‘그 분은 참 웃긴다’거나, 혹은 ‘그 분은 참 웃기시신다’는 등 아무리 앞 뒤로 포장을 해도 ‘웃기다’라는 말이 들어가는 이상 절반은 욕이 되고 만다. (사실, 지금도 많은 어른들이 여전히 웃기고 있는게 엄연한 현실이지만.) 그러한 금기의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는 말인데, (흐흐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느낌은 사실 그랬다.

[스님] 무슨 말이냐고? 그래, 너야 절간을 영화 관람하듯이 몇번 다녔을 뿐이라했으니 당연하겠지.

(‘영화 관람’ 정도면 양반입니다. 저는 영화가 아닌, 그저 극장 구경을 다녔을 뿐인걸요?)

[스님] 法身․報身․化身의 三身과 北平等性智․西妙觀察智․東大圓鏡智․南成所作智의 四智를 운행시켜서, 色聲香味觸의 五欲 및 喜怒憂懼愛憎欲의 七情과의 사슬로 윤회를 이루며 근본의 자리인 一로 돌아가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떠냐? 더 모르겠지?

(당연하죠!)

[스님] 속으로는 오만 욕을 다하면서 겉으로만 웃고 있는다고 내가 속을 줄 아냐?

[구름] 제가 어찌 스님을... 천부당 만부당의 말씀입니다. 다만 제가 이해할 수 있는 표현으로 들려 주셨으면 합니다.

[스님] 그런데 숫자라고 생긴 숫자는 모두 나와서 이렇게 춤이라도 추듯하는 이 중간 부분에서는 그렇게 뭐가 뭔지 모르는게,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헷갈리는게 정상이야.

[구름] 스님, 한 걸음만 더 나아가다가는 제가 이렇게...

실례를 무릎쓰고 오른 손가락을 하나 길게 뽑아서 나의 관자노리에 대고 빙글빙글 돌렸다.

[스님] 그래, 바로 혼돈(混沌)을 말하려는 것이야!

결국에는 ‘빙글’ 돌아버렸다.

다행히 스님의 보충 설명이 있었기에 조금 더 돌아서(?) 제자리로 올 수 있었다.

[스님] 다른 것은 네가 나중에 사전 찾아보고, 우선 三身에 대해서만 사설을 붙여보자. 法身은 淸淨法身이니 근본자리와 다름없는 心界로서 空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곧 毘盧遮那佛이며, 報身은 圓滿報身이니 근본자리가 형상화 된 性海로서 性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곧 盧舍那佛이며, 化身은 百億化身이니 형상화 된 것에서 거짓으로 일어나는 海中漚(□거품구)로서 相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곧 釋迦牟尼佛이라고 말해주면 네가 또 이해를 못할 것이고,

(아이고! 스님 감사합니다.)

[스님] 三身은 그 첫 번째(法身)가 근본자리 그 자체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고, 그 두 번째(報身)가 근본자리가 우리의 인식대상으로 형상화 된 단계를 표현한 것이며, 그 세 번째(化身)가 그렇게 인식대상으로 형상화 된 것으로부터 형성된 뚜렷한 실체, 바꾸어 말하면 허망한 실체를 말하는 것이다.

(우째 쪼께 풀리는 듯 싶더니 그냥 제자리인데요? 스님.)

[스님] 근본자리 즉 마음의 경계(心界)라 하였으니 곧 환인(桓因)을 말하며, 형상화된 것 즉 성품의 바다(性海)라 하였으니 곧 환웅(桓雄)을 말하며, 실체화 또는 허상화 된 것 즉 바다 가운데 일어나는 무수한 거품(海中漚□거품구)이라 하였으니 곧 단군(檀君)을 말하는 것이다. 너는 이렇게 설명해 줘야 알아먹겠지?

[구름] 와! 스님 그게 또 그렇게 연결됩니까? 천부경이 단군과 연결되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지만, 불교로 들어갔다가 거기서 자연스럽게 단군으로 이어지니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스님] 본디 아무것도 모르면 神秘한 법이고, 조금 알면 神奇한 법이며, 대충 알면 特別한 법이고, 다 알고 나면 平凡한 법이야.

그 표현이 또 새삼스러워 열심히 옮겨 적고 있으려니,

[스님] 무슨 유행가 가사인 줄 아냐? 그렇게 열심히 옮겨 적게?

계속 적다가는 또 불벼락이 떨어질까봐 할 수 없이 몇 자만 적고 나머지는 머리에 넣어 두었습니다. 원체 용량이 협소한 메모리이다보니 그것 몇 자를 잊어먹지 않으려 용을 쓰느라 그 날 그 이후에 설명을 들은 혼돈(混沌)에 대해서는 혼돈 그 자체 밖에는 기억이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아직까지 제게 천부경의 중요 모습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는 혼돈(混沌)이라는 놈에 대해서는 다음편에서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열 다섯 번째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구름입니다.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15

⑦ 오늘 풀이할 대목도 : 運三四成環五七一

[스님] 처음부터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 한 번 살펴보자. 이 삼라만상은 애초에 ‘하나(一)’라는 화이트 홀의 작은 정점에서 팽창해서 이 놈 저 놈이 생성되었고 그 생성된 것들은 어떤 어떤 모습을 지녔다는 등의 얘기가 앞 부분의 내용이고, 그 다음이 지금 얘기하는 중간 부분으로서 뜻 모를 숫자들이 난무하는 부분이다. 그 전체적인 내용은, 앞서 생성된 삼라만상 - 그 가운데 인간이 중심됨은 뒷 부분에도 밝혀져 있다 - 이 성숙의 단계로 접어들어 왕성한 활동력을 발휘하는 모습을 말해 놓은 것이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한창 일을 하는 나이인 청장년기인 셈이지.

비록 天地人이 각각에 세 가지 씩의 모습을 지니고 형성이 되었지만 아직은 무미건조한 채로 있었는데, 그 천지인에 여섯 가지의 기운(地水火風空識)이 작용하자 별의별 식(識)이 다 나타나서 활기 있는 모습이 된 셈이지.

점심 때는 스님께서 장기 출타 중인 틈을 타서 홍보살님이 광주에서 제일 좋다는 곳에서 직접 사가지고 오신 도치나물(도끼로 쳐서 다듬은 나물이라는 뜻이라나요?)을 실컨 먹었다. 경내에서는 어림도 없는 얘기이고, 이렇게 스님이 계시지 않은 날을 틈타서 학생(그래봐야 나와 다른 1명)에게 제공되는 말 그대로 별식으로, 절에서 제법 떨어진 개울가에서 판이 간혼 벌어지곤 하였다.

모르는게 약이고 아는게 병이라더니, 절에 들어와 주워들은 뒤 병이 되어버린 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도치나물 먹고 냄새 풍기며 법당에 들어갔다가는 내생에 지독한 피부병에 걸린다는 말이며, 나머지 한 가지는 새벽에 도량송 소리 듣고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내생에 뱀이 된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그런지 새벽 도량송 때면 어김없이 일어나 앉아있곤 하였다. 물론 듣지 못했던 대부분의 날들은 빼고.

며칠 후에 돌아오신다던 스님께서 점심 시간을 조금 지나 돌아오시자 이 날 저녁에는 사실 스님 방에 들어가기가 조금은 망설여졌다. 내생 때의 걱정이야 죽기 전에 하면 되니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만, 혹시 스님으로부터 불벼락이나...

[스님] 오늘은 왜 그렇게 멀찌감치 앉아 있냐? 어떤 날은 무슨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이 턱 밑에 바싹 다가 앉더니?

그래서 그 날은 애꿎은 녹차만 거의 나흘 분량이 없어지고, 얘기 중에 실례를 무릎쓰고 무려 3번이나 解憂所(多不有時)를 다녀온다고 스님의 말씀을 도중에 끊어놓곤 하였다.

[스님] 별의별 식(識)이 다 나타나서 활기찬 모습이 된 그 상태대로 아무 거리낌없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속세인 것이야.

참다 참다 도저히(그 놈의 녹차는 왜 그리 반응이 빠른지) 참지 못해 마지막 세 번 째.

[구름] 스님, 한 번 만 더...

[스님] 그래 그렇게 거리낌없이 사는게 속세는 속세니까, 빨리 갔다와 이 놈아!

이 날은 다른 것 모두 이해 못했더라도 解憂所의 깊은 뜻과 多不有時는 간혹 多有時도 될 수 있음을 배웠으니 기본 소득은 있었던 셈이다. 돌아오니 녹차상이 스님 뒤쪽으로 멀찌감치 옮겨져 있었다.(이제 냄새도 거의 가셨으니 까짓것 뭐!)

[구름] 그럼, 지수화풍공식(數學 公式이 아닙니다)은 천지인이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입니까? 아니면...

[스님] 解憂所가 그리워 귀머거리로 앉아 있는 줄 알았더니 그래도 듣긴 들은 모양이구나.

네 말대로 능동이니 수동이니 하는 말을 써서 얘기를 해 보자. 천지인이 무슨 ‘공식’인가를 받아들여 활발한 모습을 뛰기까지는 그저 자연의 흐름 그 자체일 뿐이야. 즉 한 점에서 팽창을 시작한 후로부터 계속 확장만 거듭하고 있는 셈이지. 그런데 천부경 전체를 보면 처음과 끝이 똑같이 하나(一)로 되어 있어. 처음에 얘기했듯이 하나는 화이틀 홀이고 하나는 블랙 홀인 셈인데, 그러면 한 점에서 팽창해서 결국에 한 점으로 돌아가고자 하면 팽창하던 상태가 줄어드는, 다시 말하면 축소되는 전환 시점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니겠냐?

그 시점에 대해 말해 놓은 부분이 바로 運三四 이 부분이야. 그 주체는 사람이 되고, 주체가 되는 사람이 이제는 능동적으로 무엇을 흡수하기 시작하는 부분이지. 즉 인간이 자유분방하게 식(識)의 바다에서 뛰어 놀다가 이제는 본래의 바탕으로 돌아가고자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시점이야.

본래의 바탕으로 돌아가고자 능동적으로 취한 행동이 바로 三身과 四智의 힘을 빌려, 바꾸어 말하면 신앙이나 종교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그 힘에 의지해서 근본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기나긴 여행을 시작한 셈이지.

팽창에서 축소로의 전환,

수동에서 능동으로의 전환,

망각에서 자각으로의 전환...

解憂도 했겠다,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걸림없는 스님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스님] 그 전환의 시점이 바로 運三四 이 부분이야. 운전하는 놈은 바로 사람이지. 결국에는 사람이 운전대를 잡고 있다는 얘기야! 부처님도 하나님도 아닌 사람이.

[구름] 그러면 다섯(五)과 일곱(七)은 무엇 때문에 運三四의 뒷 부분에 와 있습니까? 오욕(五欲)과 칠정(七情)이라 하였으니, 위치해 놓으려면 뒷 부분 보다는 오히려 앞 부분의 칠팔구(七八九) 근처에 놓아야 될 것 같습니다만?

解憂하니 머리도 맑아진 것일까? 내가 해 놓고 보아도 그럴 듯한 질문 같았다.

[스님] 이제는 아주 지능적으로, 말하려는 내용을 미리 짐작하고 그에 맞춰서 질문을 해버리네?

[구름] 제가 그렇게 스님 말씀하실 내용을 짐작하기까지야 하겠습니까? 단지 이번처럼 맞췄다면 소 뒷걸음질에...

[스님] 어어? 갑자기 생쥐로 취급하기까지하고?

얘기의 농도가 제법 짙어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그 중간에 쉴 틈이 적당히 주어졌다. 녹차를 워낙 갖다 부워놓았더니 도치나물의 끈기도 배겨내지 못했던지 슬슬 시장기가 돌았다. 그렇다고 오늘의 얘기가 막 무르익는 순간에 解憂所 가듯이 식당에 가서 라면을 끓여먹고 올 수도 없고...

[스님] 며칠 전 얘기한 홍익사상 가운데 ‘세상에 있으면서(在世)’라고 한 부분이 있지? 천상도 아니고 지하도 아닌 이 인계(人界)에서 귀일(歸一)을 위한 수행이 행해진다는 얘기 말이야. 그 내용이 천부경의 이 부분과 일치하고 있어.

오욕과 칠정은 분명 사람이 사는 이 세계의 욕정(欲情)이며, 삼사(三四)를 운행시켜 그 욕정인 오욕 및 칠정과 고리를 이룬다(成環)하였으니 바로 그 모든 수행의 행위가 사람이 사는 이곳에서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는 셈이지.

또한 고리를 이룬다함은 곧 윤회를 의미하기도 하니, 이 구절을 다시 정리해 보면, 「주체가 된 인간이 삼신과 사지의 힘을 운행시키고 그 힘에 의지하여 귀일(歸一)을 위한 수행을 해 나감에 있어서 오욕 및 칠정과 더불어 거대한 고리를 이루는 윤회의 과정을 거치며 끊임없이 수행해 나가다가 결국에는 근본자리(一)로 돌아가게 된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말씀드리다는 ‘혼돈’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이 되지않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정리해서 들려드릴 만큼 제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천부경 얘기가 끝나더라도 따로 들려드릴 기회가 있을지...

구렁이 담, 또 넘어가며 열 여섯 번째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구름입니다.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16

⑧ 오늘 풀이할 대목은 : 妙衍萬往萬來 用變不動本

단양동은 천봉사가 있는 동네 이름이다. 동네라야 사찰을 제외하면 이제는 겨우 두 집이 있을 뿐인 말 그대로 산비탈의 막다른 산골이다. 빛 고을 광주에서 화순을 거쳐 보성으로 이어지는 국도변의 문덕이라는 곳에서도 걸어서 약 3㎞ 더 들어와 있는 이 곳은 그래서 오지 아닌 오지로 통한다.

절 건너편의 산등성이를 오른쪽으로 조금만 타고 오르면 바로 천봉산이다. 그 너머로는 예전에 송광사보다 더 컸다던 염불선도량(念佛禪道場)의 사찰이 하나 있다. 사찰 얘기를 듣다 보면 흔히 듣는 얘기가 ‘이 사찰은 지금의 본찰(本刹)인 어느 어느 절보다도 예전에는 더 컸었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대구의 동화사 또한 한 때는 팔공산 기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북)지장사의 말사(末寺)였다고 하는 것처럼.

천봉사가 자리한 터 또한 그와 비슷한 얘기가 전해지는데, 고려시대에는 이 일대가 제법 큰 사찰 단지가 들어서 있었다는 얘기가 그것이다. 지금의 큰 사찰이 그러하듯이 예전에 이곳도 계곡의 반듯한 곳이면 모두 암자가 들어서 있었고(예전에 암자터였다고 손으로 가리키는 곳은 군데군데 어김없이 대나무 숲으로 덮여 있었다), 천봉사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조금 내려선 곳에 본사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대웅전 터 뒤편에 해당하는 곳은 지금도 대나무 숲이며, 숲 안에는 야생하는 차나무가 있어서 천연의 竹露茶葉이 널려 있다). 그 말처럼 대웅전 터 였다는 곳은 주위의 구릉에 비해 제법 반듯한 형태로 남아 있다.

문덕에서 들어오는 입구에 일명 가사촌(袈裟村)을 따로 거느릴 정도로 규모가 있었던 예전의 사찰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유는 조선시대 때 사찰에서 담배 농사를 지어 팔다가 그 벌로 인해서인지 몇 차례의 대형 화재로 졸지에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가 점차 폐사로 변했다는데, 근래까지 제법 동네를 형성하고 있었던 단양동은 이 곳 보성에서도 빈촌 가운데 빈촌으로 손 꼽혔었다고 한다.

괜한 담뱃불 장난(?)이 불러들인 업보가 이 땅에 뿌리 박혀서인가? 내가 있는 동안에도 지역 이기주의에 쫓긴 군(郡)의 쓰레장이 승주호 수원지의 하나이자 주민 없는 단양동의 입구 계곡인 사찰 근처에 개설되었기에 쓰레기차 덕분에 졸지에 오지를 면하는 꼴이 되었다.

[스님] ‘염불’이 무슨 말이냐?

예고도 없고 수업시간(?)에 배운 적도 없는 이런 시험문제가 요즘 들어 제법 심심찮게 던져진다.

[구름] (주절주절 지껄이는 게 염불이죠, 뭐!)

장난기가 발동하면 이렇게 대답도 하련만...

[스님] 염불을 한문으로 풀이하면 ‘부처님(佛)을 생각한다(念)’이다. 부처란 깨달은 자를 말하는 것인데,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키면 불성(佛性)을 지닌 마음의 근본자리를 일컫는 것이니 곧 천부경에서 말하는 근본자리인 하나(一)를 가리키는 것이다.

지금처럼 허망에 쌓여 있는 것이 아닌 청정한 마음이 바로 부처인데, 부처를 생각한다 하였으니 곧 청정한 내 본래의 마음을 생각한다는 뜻이 되고, 청정한 내 본래의 마음을 생각한다 하였으니 곧 근본자리 하나(一)를 생각한다는 뜻이 되며, 근본자리 하나를 생각한다 하였으니 곧 근본자리로 회귀하고자(歸一)하는 염원을 말하는 것이므로, 결국에는 ‘염불’이란 자신 바깥의 무엇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 내부의 수행(修行)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염불선도량이 무슨 의미인지 물은 질문에 들려주신 답변이다.

[스님] 그러면 염불선(念佛禪)이 무엇인지 알겠지?

질문에 대한 모든 답변은 언제나 이렇게 근처까지 왔다가(물론 머리 좋으신 분은 이미 해답까지 들은 단계이겠지만) 결론은 스스로 정리하도록 풀어놓곤 하였다. 마치 동양화의 여백처럼...

그러면 오늘은 나도 ‘염불’이란 걸 한 번 해 볼까?

어느 날은 이처럼 이런 저런 얘기로 천부경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끝나기도 하였습니다. 하기야 계속해서 一, 二, 三, 四... 해서는 어디 제가 그 수업을 견뎌 내기나 했겠습니까? 이렇게 ‘할배 무릎에서 듣는 옛날 옛적 야그’도 간혹 있었으니 망정이죠.

열 일곱 번째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구름입니다.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17

⑧ 오늘 풀이할 대목은 : 妙衍萬往萬來 用變不動本

묘하고도 넓어서 모든 것에 거리낌없이 오고감에, 쓰임은 변하여도 근본은 움직이지 않는다. → 이러한 근본의 깨달음은 오묘하면서도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게 넓은 것이니 일체의 생각과 가르침에 거리낌없이 통하며, 그 쓰임의 모습은 오만가지로 변화하여도 근본은 변하거나 움직임이 없다.

[구름] □□□□□□□□□, □□□□□□□□□.

[스님] □□□□□□□□□,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18

⑨ 오늘 풀이할 대목은 : 本心本太陽昻明

근본은 마음이니, 곧 근본은 크게 밝은 것으로서 오로지 밝은 빛일 따름이다. → 그 근본자리라는 것이 곧 바로 마음이니, 그 근본자리는 크게 밝은 것으로서 세상의 빛과는 다른 절대의 밝음인 것이다.

[구름] □□□□□□□□□, □□□□□□□□□.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19

⑩ 오늘 풀이할 대목은 : 人中天地一

사람 가운데 하늘과 땅이 합일되어 절대로서의 하나가 이미 내재하여 있다. → 사람의 마음 가운데 하늘과 땅이 이미 합일되어서 존재하고 있으니, 사람의 마음이 곧 하늘과 땅의 합일된 본래 모습인 절대의 하나인 근본자리이다.

[구름] □□□□□□□□□,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20

⑪ 마지막 대목은 : 一終無終一

하나로 마치지만 마치는 그 하나라는 것도 본디는 없는 것이다. →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근본자리인 절대의 하나로 돌아가서 마치게 되나, 그 마치는 절대의 하나 자체도 본디는 존재치 않는 허상일 뿐이다.

* <스님, 천부경 얘기 들려주세요!> 부록(?)

⑫ 菩提方便文

心은 虛空과 等할새 片雲隻影이 無한 廣大無邊의 虛空的 心界를 觀하면서 淸淨法身인달하야 毘盧遮那佛을 念하고 此虛空的 心界에 超日月의 金色光名을 帶한 無垢의 淨水가 充滿한 海象的 性海를 觀하면서 圓滿報身인달하야 盧舍那佛을 念하고 內로 念起念滅의 無色衆生과 外로 日月星宿山河大地森羅萬象의 無情衆生과 人畜乃至蠢動含靈의 有情衆生과의 一切衆生을 性海無風 金波自涌인 海中漚로 觀하면서 千百億化身인달하야 釋迦牟尼佛을 念하고 다시 彼無量無邊의 淸空心界와 淨滿性海와 漚相衆生을 空性相一如의 一合相으로 通觀하면서 三身一佛인달하야 阿(化)彌(報)陀(法)佛을 常念하고 內外生滅相인 無數衆生의 無常諸行을 心隧萬境轉인달하야 彌陀의 一大行相으로 思惟觀察할진저.

丙子三冬於雲門道場門碧閒人述

마음은 허공과도 같으니 한 조각의 구름이나 한 쪽의 그림자도 없이 크고도 넓음의 가없는 허공과 같은 마음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청정법신인 듯 여기며 비로자나불을 생각하고, 이러한 허공과 같은 마음의 세계에 해와 달 보다도 더 찬란한 금빛 광명을 띈 더러움 없는 깨끗한 물이 가득 찬 바다와도 같은 성품의 바다를 바라보면서 원만보신인 듯 여기며 노사나불을 생각하고, 안으로는 생각으로 인해 일어나고 생각으로 인해 사라지는 물질을 지니지 않은 무리와․밖으로는 해와 달과 별자리 그리고 산과 강 대지 등 삼라만상과 같이 뜻을 지니지 않은 무리와․사람과 축생 그리고 꿈틀거리는 벌레와 영혼을 함유하고 있는 뜻을 지닌 무리 등 모든 무리들을 성품의 바다에서 바람이 없는 가운데 금빛 파도가 스스로 솟아오르는 바다 가운데의 거품으로 바라보면서 천백억화신인 듯 여기며 석가모니불을 생각하고, 다시금 저 한 없고 가 없는 맑고도 비어있는 마음의 세계와 깨끗하고도 충만한 성품의 바다와 거품의 형상을 한 뭇 무리들을 근본자리와 성품과 형상을 하나로 하는 합일된 모습으로 관통하여 바라보면서 삼신의 공덕을 모두 갖춘 부처님인 듯 여기며 아(화신)미(보신)타(법신)불을 생각하고, 안과 밖으로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습인 수 없는 무리들의 항상성 없는 모든 행위를 마음에 따라 만 가지의 경계로 바뀌는 듯 여기면서 미타의 하나되는 큰 행위의 모습으로 생각하면서 관찰할지니라.

구름도 합장.

출처 : 하늘그림 궁
글쓴이 : 새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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