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우주론과 현대물리학-현각스님
현대물리학과 불교의 우주론
주지하는 바와 같이 기독교에서는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아주 단순한 답변을 해 주고 있다.
창세기 1장에 "태초에 야훼신이 천지를 말(言)로 창조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물론 전의 이집트나 수메르,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등장하는 창조설화와 동일한 코드다. 우주의 근원은 신이라는
중동 종교들의 입장이다.
그러나 동양의 생활 윤리를 지배해온 유교도 아주 간결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유교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근사록(近思錄)』 첫머리에 "극(極)이 없음이 곧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움직여
양(陽)을 낳고 움직임은 극에 이르러 고요해진다.
고요해짐은 음(陰)을 낳고 고요해짐이 극에 이르러 다시 움직인다."
그리하여 이러한 음양이 결합하여 수. 화. 목. 금. 토의 오행(五行)을 발생하고 음양 오행이 결합하여 천지 만물을
발생시켜 무궁한 변화를 계속시킨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우주의 근원을 신(神)으로 보고 있는 것과는 판이하게 유교는 그것을 역(易)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우주에 대해 서 기독교보다는 과학에 근일접한 유교는 그 견해를 이렇게 극명하게 서양 고대 사상과
달리하고 있다.
그러면 불교는 어떠한가?
붓다 당시에 만동자라는 비구가 있었다.
그는 붓다가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해명해 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 하고 있었다.
"세계는 유한 한가 무상합니까?
영원하기도 하고 무상하기도 합니까?
영원하지도 않고 무상하지도 않습니까?
세계는 유한 한가 무한합니까?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합니까?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습니까?
.....등등......."
그런데 붓다는 독화살의 비유로 만동자의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깨달음과 지혜와 해탈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네가 성급하게 알고자 하는 바와 행해야 할 바는 너의 현 존재가 苦이라는 진실과
나아가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길을 찾는 것이 더 빠르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중아함 전유경(箭喩經)』에 나오 는 유명한 이야기다.
(부연설명/ 수행을 하면 자연적으로 알게 되는 것)
붓다는 이렇게 우주의 기원이나 본질에 관한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 언어에 의한 즉답 대신 그 답의 근원적 문제를
언급한다.
'무엇이 우주를 뚝딱 있으라 하니 만들어졌다'라는 고대 중동 사막, 황야 유목민들의 사막 환경 위의 덜렁 태양 하나와 같은 단순한 논리, 그 한마디의 결론이 아닌 우주의 생성 원리 속의 가장 근본적 배경 원리을 설명함으로써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대물리학 시대에나 조금씩 밝혀내지는 우주생성 원리를 소름끼치도록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붓다는 당시의 우주론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범주 속에 모두 포섭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첫째는 존우화작인설(存祐化作因說)로 우주의 창조는 물론, 그 안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그 원인이 신[尊祐]에게
있다는 견해로서, 정통 바라문의 우주론이 여기에 포섭될 것이다.
둘째 숙작인설(宿作因說)은 그러한 원인은 과거에 지은 바에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셋째는 무인무연설(無因 無緣說)로 모든 현상은 아무런 원인 없이 발생하고 있다는 우연론으로서 사문들을 이곳에
포함 시킬 수 있을 것이다.
붓다는 이 세 가지 우주론에 대한 개체설명을 다음과 같이 검토하고 있다.
"만일 모든 것이 신의 뜻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에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해야 한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의욕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또 노력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과거에 지은 바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에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의욕도 노력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아무런 원인 없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렇게 일어난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의욕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중아함(中阿含) 권3 도경(度經)』
당시 종교적 환경으로서는 파격일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에게나 매력적인 단어들,
인간의 본연의 숭고한 의지, 노력, 의욕, 원인, 결과(업. 보)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당시 고대 인도의 종교와 자연 체념적인 환경을 고려할 때 혁명적인 사고이다.
기독교가 발생한 2,000년 전의 유대에서의 유대교적 신적 체념적 개념에서 예수도
약소하나마 인간 의지를 설파했지만 어디까지나 유대교 한계에 머물고 있다.
앞서 살펴본 세 가지 우주론은 현실 세계의 인간의 죄악과 의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진리성이 부정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진리탐구에 있어서는 '인간에게 의지가 있다'는 것을 엄연한 사실로 확정하고 이로부터
그 배후의 원리를 탐구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인간의 의지적 작용을 불교에서는 '업(業;Karma)'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업에 대해서 그 대상이 나타내는 필연적인 반응을 '보(報)'라고 한다.
우리 현실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원칙적으로 이런 업. 보의 인과율에 의함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뿐만 아니라 업. 보가 삼세에 걸쳐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만일 고의로 업을 지으면 반드시 그 보를 받나니 현세에 받기도 하고 내세에 받기도 하나니라.
그러나 고의로 짓는 업이 없으면 보를 받지 않나니라."
『중아함 권3 思經』
이것이 불교에서 설하는 업 설의 원리적인 내용이다.
업 설은 또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이 무엇인가에 대한 불교의 답변이기도 하다.
불교의 업 설에 의할 때 우주를 움직이고 있는 궁극적인 힘은 바로 중생들 자신의 '업력(業力)'인 것이다. 불교학에서는 우주 안에 있는 전 중생들의 이러한 공동적인 업을 '공업(共業)'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세계는 공업의 소성(所成)
'이라고 말하고 있다.
업설은 불교의 우주론이 될 가능성이 있는데 장아함 끝 『세기경(世記經)』이나 또는 그 별행경이라고 볼 수 있는
『기세경(起世經)』.『기세인본경(起世因本經)』 등에 좋은 예가 있다.
아함경의 교리를 체계화한 과학자들 사이에 유명한 『구사론(俱舍論)』을 통해 그 요점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모든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 허공에 바람이 일기 시작하여 풍륜(風輪)이 생한다.
중생들의 업력에 의해 다시 풍륜 위에 구름이 일어나 수륜(水輪)을 생하고, 업력에 의해 다시 수륜 위에 바람이 일어나 수면을 응결시켜 금륜(金輪)을 생한다.
금륜 위에 수미산이 솟고.....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수미산 남쪽의 섬부주(贍部洲)이며, 이 밑에 염마왕국(閻魔王國)이 있고, 그 아래 다시 8대 지옥이 차례로 위치한다.
그리고 해와 달, 별들은 수미산을 싸고 공중에서 돌아간다.
이것이 중생들이 몸담게 될 세계가 형성된 다음 이곳에 중생이 생하게 되는 것이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되풀이하는 이러한 세계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 속에 무수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우주(세계)는 실로 무량하여 허공의 양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특히 주목해야 할 바는 세계의 생성을 '중생의 의지적 업력'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며,
변천 소멸 그리고 다시 생성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업력에 의한다는 입장이 한결 같이 유지되고 있다.]
이것은 우주를 신의 창조로 보는 서구 종교의 신학적인 우주론이나 또는 성주괴공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고 보는
우주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불교의 교리는 이러한 업보설로 다한 것이 아니다.
우주의 본질을 밝히려는 미묘한 교리가 그 뒤 에 다시 중층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업설에서 육바라밀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인간의 궁극적 물음에 대한 답변 아닌 것이 없다.
우주의 근원적 힘 요소 본질이 무엇이며, 인간은 어떻게 해서 현재와 같은 괴로운 생사에 전락케 되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중층적으로 해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우주론을 거론한다는 것부터가 새삼스러울
정도이다.
우리는 흔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듣는다.
이보다도 더 간결한 우주론이 있을까?
『법화경』에는 "우주의 실상은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주고받는 것이다."고 하였다.
우주의 실상은 깨달음을 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는 뜻이며 과학이 밝혀낼 한계는 뚜렸하다는 것이다.
오직 인간 일반 오감으로 확인 가능한 원리에 그치기 때문이다.
(일반 오감적 한계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하다.)
불교는 우주의 궁극적 실상에 대해서 이렇게 '깨달음'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독특한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깨달음이란 인간이 시. 공간과 미립자의 소멸 그 저변의 끝인 우주의 근원적 힘과 작용 그자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명상이란 실험 작용을 통해 인간 뇌신경계가 우주의 근원적 힘과 작용의 근원을 탐지하거나 그 자체가 되는 결과적 상태(effective results)가 깨달음인 것이다. 깨달음이란 우주의 근원적 상태를 실험한 결과적 상태다.
우주의 모습
지금으로부터 150억년 전의 어느 시 우리의 우주가 시작되었고,
45억 년 전의 어느 날 그 우주 안에 지구라는 행성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다시 10억 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이 지나면서 기묘한 인연원리 화합에 의하여 지구에는 생명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 35억년 동안 무기물의 변모와는 본성상 질적으로 다른 유기물의 생명 진화의 역사가 계속되어 오늘날에는 150여 만종의 다양한 생물체가 지구 위에 살게 되었다.
그 다양한 생물종 중의 하나이면서 겨우 수백 만 년 전에 지상에 그 모습 을 드러낸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자신의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은 문제까지를 포괄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들의 사고는 외적으로 자연 현상의 배후 원리와 우주 근원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내적으로는 '나란 무엇인가 하는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의 문제에 이르게 되었다.
외적인 문제를 다루는 인간 동의 영역을 물리학을 위시한 자연학이라고 한다면,
내적인 문제를 다루는 영역은 종교와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서양의 철학 과학 종교는 거의 외적인 면, 자연학에 치중되어 있다.)
자기 외적인 대상을 역사상 가장 성공적으로 그리고 가장 믿을 만하게 설명하였던 학문이 현대물리학이라고 한다면, 인간 자신의 내부 문제를 가장 치열하게 다루면서 마침내 그 모든 외적 조건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즉 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인 것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로 부터 시작된 불교라고 할 것이다.
현대물리학과 불교라는 인간의 이 두 가지 정신 활동은 시간적으로 2,500년이라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은 물론이고 다루는 내용이나 방식마저도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험과 관찰을 위주로 하는 현대물리학이 명상만으로 이루어진 불교적 세계관을 추적해 가고 있다는 또 하나의 불가사의를 우리는 20세기에 들어와서 경험하게 되었다.
(실험과 관찰에 의한 현대 물리학이 명상에 의한 실체접근과 그 결과를 공유하는 현상이 엄존한다.)
이 두 세계관이 우주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 정신이 미숙하고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을 때의 인간은 자 기 자신이 그리고 자신이 사는 지구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아집(특히 서양의 종교와 철학)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하면서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 아니고, 태양은 우리 은하를 이루는 수천억 개의 은하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전의 세계관이 상정하였듯이 인간이 어떤 특권적인 지위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도 다른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조상을 가졌으니 일체동근이며,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한 부분일 뿐이어서 일체평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우주의 모든 구성성분이나 지구상의 무. 유기물, 그리고 모든 생명체는 그 존재가치로서는 동일하다. 모두 존재할
권리가 있고 존경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상이 불교다.)
그리고 현대과학이 이룩한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연에 대한 이해는 불교 의 연기론(緣起論)과 100% 합치되고 있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나 자신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사물을 면밀히 고찰하여 본다면, 그 크기가 크다고 할 수 있는
천체에 이르기까지 어떤 예외도 없이 그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 나 자신의 육체도 분해하면 실체가 없고 그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 의식이나 정신도 한시도 그대로 있지 않고
변하는 비실체이다. 금강경의 가르침에 적확하게 설명되어 있는 현상적 결과이다.).
그들 모두는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상호연관이라는 연기에서 의해서만 현현할 뿐이므로 제법무아(諸法無我 ;원인에 의해서 일체가 생성하고)이며, 인연이 화합하면 잠시 존재하고 인연이 별리하면 허망하게 흩어질 뿐이므로 제행무상(諸行 無常 ;원인의 에너지가 다하면 무로 돌아간다.)이다.
그 좋은 예가 밤하늘의 별이다.
수소라는 성간물질이 모여 별을 이루고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변화해 가다가 마침내 소멸하여 형체가 없는 단계에
이르는 우리 은하의 천체들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성주괴공(成住壞 空)의 원리를 벗어나지 않으니 이 우주전체는
그대로가 제법무아이고 제행무상인 연기(緣起)의 장(場)일 뿐이다.(이런 자연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현대물리학과
같은 결과를 낸 명상이라는 실험. 관찰로 가능했다.)
이는 커다란 천체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연의 궁극적 구성물인 원자. 미립자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현대과학의 도움으로 우리는 원자가 양성자와 중성자,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양성자와 중성자의 내부에서는 무수한 소립자들이 순간순간 생성되었다가 소멸한다는 놀라운 발견을
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과학의 결과물이다.
이들의 전형적인 수명은 10(-23승)초라고 하니 찰나에 생하고 찰나에 멸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찰라 라는 단어는 불교에서 나온 용어로서 현대 물리학에서 1초/10의 23자승 정도의 상상 불가의 시간 개념이다.)
그러나 굳이 이름을 붙여 생멸이라고 하지만 이쯤 되면 본체로서가 아니라 현상 그 자체만을 본다 하더라도 생도 없고 멸도 없다(不生不滅;이 4자 성어를 현대물리학은 몇 십 년 전만 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최근에야 불생불멸의 우주를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불교의 우주론에 현대 물리학에 늑깍이로 입문한 셈이다.
이 상태에서 있음과 있음, 있음과 없음은 상호연관이라는 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어서, 어느 순간에 그들이 현현한다 하여도 실로 있는 것이 아니요. 어느 순간에 그들이 멸한다 하여도 실로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붓다는 이런
현상을 49년 동안 초지일관 설명하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상호 연관의 문제는 다만 원자라든가 천체라는 물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칸트나 뉴턴이 생각하였던 절대공간이나 절대 시간과는 달리, 현대물리학에서의 공간은 물질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며, 시간도 또한 공간과 상호연관을 가지는 것이다.
이렇듯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은 전체와의 상호연관 위에서만 비로소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은 과학적 상식이 되었다.
이를 불교에서는 중중무진 법계연기(重重無盡法界緣起)라고 한다. 이 불교의 시공간의 문제는 대폭발 이론에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대폭발이란 단지 거대한 폭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거대한 폭발과 같이 멀찌감치 서서 구경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고, 대폭발 이 전의 우주의 모습이 무엇이냐 라든가 아니면 대폭발이 일어났던 지점이 우리 우주의 어디냐는 질문은 그 예 성립되지도 않는다.
대폭발은 문자 그대로 우주의 시작이므로 대폭발과 함께 시공간이 시작되기 대문 이다.
(시간은 공간과 밀착된 에너지 체계이며 물질 생성도 시. 공간과 같은 체계에서 일어난다.
즉 먼지 하나도 시. 공간이 만들어낸 에너지 작용이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도 시. 공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육체의 구성물 중 뇌신경 체계는 모두 단백질이다.
뇌신경 체계는 전기 작용을 일으켜 인간의 자아개념, 즉 의식이나 정신을 발생시킨다.
마치 전기 코드를 뽑은 TV에 전기 작용이 일어나면 화면이 발생하듯 인간 의식은 본질적으로 신경이라는 물질과
전기라는 물질의 종합체로 인간 정신이나 마음은 절대적으로 물질이다.
막연한 비 물질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막연한 무지적 비물질적 사고가 종교와 신을 탄생시키고 인간의 자유를 속박으로 둔갑시키는 원인이다. )
그러므로 대폭발 이전이란 우리의 우주 내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며, 대폭발이 일어난 지점은 우리 우주 전체
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그 이전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던 절대 시간이나 절대 공간은 잘못된 개념이며 시공간
마저도 우리 우주와의 연관에서만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공간까지 포함하여 모든 존재의 나타남은 인연에 의하여 생멸하게 된다.
색(色)으로서 나타난다고 하여도 그 자체는 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요소가 화합하여 연기하는 것일 뿐
이므로 이를 무자성공 (無自性空) 혹은 공성(空性)이라 한다.
이는 색성공(色性空) 즉 색의 성품이 그대로 공임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현대물리학의 우주관은 색을 떠나서 공이 존재하지 못하며 공을 떠나서 색이 존재하지 못하는, 색체즉공(色體卽空), 공체즉색(空體卽色) 이라는 불교의 우주관(반야심경의 위 구절을 현대물리학이 경악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고 하겠다.(이에 관한 논의 는 상대론적 양자역학의 진공 개념을
보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지만 이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그리하여 용수는 "연기하는 것을 공성이라고 하며, 공성을 가명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공가중 삼제원융(空假中 三諦圓融)의 도리를 밝혔다.
서구의 신과학운동의 여파가 우리나라에 불어 온 게 1980년대입니다. 신과학운동의 대표적 인물이 물리학자인 카푸라 박사입니다. 이분의 저서인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이 1979년에 번역되어 출판됐지요. 이후 이런 유형의 서적들이 많이 소개되었습니다. 90년대에는 불자인 국내 과학자들이 불교사상을 현대물리학 성과로 설명하는 책들을 출판했지요. 최근에는 한 스님이 반야심경 해석한 책을 썼는데, 반야심경의 공을 설명하면서 현대물리학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유행병이 되었습니다. 이글도 마찬가지로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저는 이런 경향은 문제점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불교의 세계관, 우주론을 잘 알고 있는 불자가 흔치 않습니다. 위 글에서도 불교의 세계관 및 우주론을 잘
설명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략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함부 경전에 의하면, 이세상은 크게 유정과 기세간으로 나뉩니다. 유정은 인간과 같은 존재들이고 기세간은 그 존재들이 사는 세계입니다. 유정은 3유, 욕유, 색유, 무색유가 있고 그들이 사는 세계가 각각 육계, 색계, 무색계입니다.
한 인간을 관점으로 볼 때 이 세상은 5온, 12처, 18계로 나타냅니다. 외부세계가 6외입 처, 계(색, 성, 향, 미, 촉, 법), 내부세계가 12계<6내입 처(안, 이, 비, 설, 신, 의),(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입니다. 이것을 다섯 가지 그룹으로 보면, 색온에는 (색, 성, 향, 미, 촉, 안, 이, 비, 설, 신) 10처, 계가 포섭됩니다. 나머지가 수, 상, 행, 식 4온에 포섭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기본 요소로 파악한 것이 6계입니다. 4대, 공, 식입니다. 즉 지계, 수계, 화계, 풍계, 공(空)계, 식(識)계입니다. 공계는 공간을 말합니다. 구사론에서 세친보살은 공(허공)을 무위법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색법으로 분류하는 견해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능가경과 능엄경에서도 색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함부 경전에서는 지, 수, 화, 풍, 공, 식 이렇게 6계로 보지만, 구사론에서는 심을 포함해서 7계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능엄경에서는 지, 수, 화, 풍, 공, 식, 각(覺) 이렇게 7계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지, 수, 화, 풍, 공이 색온에 포섭되는 겁니다.
제가 알고 있는 불교의 세계관은 因 과 緣에 의해서 기본요소인 6요소가 화합하였다가 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위 글에서 구사론을 인용하였습니다. 구사론에서 인과 연에 의한다고 되어 있던 걸로 기억됩니다. 이외에도 유가사지론에서도 볼수 있으며, 세기경은 한역본보다는 디가니까야 D27경인 세기경이 좀 더 자세합니다.
현대물리학과 불교적 세계관과의 큰 차이점을 살펴보면, 현대물리학은 물질의 세계만을 다루지만, 불교는 심을 다룬다는 점에 있습니다. 6계(혹은 7계)중에 현대물리학이 다루는 부분은 지계, 수계, 화계, 풍계, 공계 이렇게 색법만이
대상이 됩니다. 뉴턴의 고전물리학에서는 절대공간의 개념이었습니다. 구사론에서 세친보살이 허공을 무위법에
포섭시킨 이유와 유사합니다. 허공은 공간적 점유성이 없어서 장애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색이 허공에서 작용하게
되므로 무위법에 속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6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 공계는 말하자면 규극으로 전설에 따르면 이는 바로 명암이며' 라 게송으로
말하면서, '인아가색'이라고 이름 한다는 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가'란 바로 공계의 색이라는 뜻으로 이러한
공계 중에서는 어떠한 장애도 갖지 않기 때문에 아가라고 이름 한다]라고 하였지요.
고전물리학에서는 절대공간의 개념은 물질적 현상이 일어나는 3차적 공간으로 그 자체의 본성에 있어서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없이 언제나 동일하며 정지의 상태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리적 세계에 있어서의 모든 변화는 시간이라고 불리는 별개의 차원에 의하여 묘사되며, 시간 자체도 물질적 세계와 아무 관계없이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로 일정하게 흘러가는 절대적 개념이었습니다.
이러한 뉴턴 식 세계관은 현대물리학에서 의해서 깨집니다. 아인스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등장합니다. E=mc2 유명한 공식입니다. 이식이 의미하는 것은 질량은 단지 에너지의 어떤 형태라는 것입니다. c는 빛의 속도입니다.
빛의 속도의 상수 C(초속 30만Km)가 들어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광속에 가까운 속도를 가진 물리적 현상을
기술할 때면 이 상대적 이론을 고려해 넣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빛은 전자기파(파동)나 입자(광자)의 형태를
취한다는 것으로 이중성(상보성)을 의미합니다.
이 특수상대성 이론을 중력(모든 질량을 가진 물체들의 상호인력)을 포함하는데 까지 확대시킨 것이 일반 상대성 이론입니다. 왜 상대성(relativity)이란 용어를 사용했을까요? 이 용어가 씌어진 이유가 불교의 기본관점과 같습니다.
즉 객관적인 세계에서 벌어지는 물리현상이라도 그 현상을 관찰하는 관찰자와 관계한다는 것으로,
[상대]라는 용어가 쓰여진 겁니다. 불교에서 진여계는 현상계로 파악되는 것이라는 소리와 같은 관점인 겁니다.
우리들이 현재 지구 내 일상에서 경험되는 물리현상은 고전물리학의 개념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고전물리학의 개념이 결코 폐기된 것이 아닙니다. 이점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현대물리학 개념을 불교사상에 엉뚱하게 적용시켜 불교사상을 왜곡되게 전달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극미세계를 다루는 양자물리학이나 천체를 다루는 천체물리학이나 우주론에 아인스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적용되는 이유는 빛에 가까운 속도도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립자들은 빛에 속도와 가깝게 움직이고 있고 우주는 엄청난 속도로 공간이 팽창되고 있기 때문에 상대성이론이 적용되는 것이지요.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중력은 공간과 시간을 휘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합니다. 우주에서 질량이 엄청 큰 별이 있는 곳에는 그 주위 공간이 휘어져 있으며, 시간 역시 절대시간이 아니라 역시 공간과 분리될 수 없다고 합니다. 위 글에서도 언급한 [지금으로부터 150억년 전의 어느 시 우리의 우주가 시작되었고] 이것은 빅뱅이론을 말하는 것인데 137억년 전에 대 폭발이 있었다는 가설로 시작은 원자보다 작은 공간에서 시작되었다는 이론입니다. 공간이 팽창하여 지금의 우주 공간이 되었다는 설이죠. 사실 물리학자들도 공간이 팽창되는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다고 하는데, 물리를 전공하지도 않는 비전문가는 오죽 할까요?
고전물리학의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은 이렇게 현대물리학에 의해 깨졌습니다. 절대공간이 에너지 장으로 바뀌었죠. 물질은 입자와 파동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즉 공간은 물질이라는 소리입니다. 에너지장이기 때문에요. 서양은 20세기에 들어 불교의 물질관에 도달한 겁니다. 불교에서는 공계가 색이라 하고 있습니다.
시간 역시 절대시간이 아니라 공간과 분리될 수 없다고 합니다. 빅뱅이론에 의하면 공간이 엄청난 속도로 팽창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태양보다 엄청 mass가 큰 별 주위로는 공간이 휘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양계인 지구에서 경험되는 시간의 흐름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은하계에서 경험되는 시간의 흐름은 다르다는 것이죠. 그러면 불교에서의 시간개념을 볼까요? 능엄경에 [劫數無定: 겁수는 정해진 것이 없다] 유가사지론에는[ 時無決定:시간은 결정된 것이 없다]이 나옵니다. 절대시간이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시간의 개념도 20세기 들어와서야 불교의 시간관에 도달했습니다. 이제까지 내용을 정리하면, 20세기에 와서야 현대물리학은 불교의 물질관과 유사한 관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위에서 간단히 살펴보았듯이 불교와 현대물리학의 세계관은 완전히 다릅니다. 불교는 유심이고 현대물리학은 유물입니다.
위글 저자의 사고방식은 유물일까요? 유심일까요? ' 일체유심조' '색즉시공'이 나온다고 유심일 것 같습니까? [육체의 구성물중 뇌신경 체계는 모두 단백질이다. 뇌신경 체계는 전기 작용을 일으켜 인간의 자아개념, 즉 의식이나 정신을 발생시킨다. 마치 전기 코드를 뽑은 TV에 전기 작용이 일어나면 화면이 발생하듯 인간 의식은 본질적으로 신경이라는 물질과 전기라는 물질의 종합체로 인간 정신이나 마음은 절대적으로 물질이다.] 이 구절을 보면 유심이 아닙니다. 유물입니다. 이 구절은 환원주의 즉 유물적 일원론입니다.
이런 관점이 현대의학의 주류입니다. 의식은 뇌 작용으로 발생한다는 것이죠. 이 소리는 뇌 작용이 일어나지 않으면 의식은 없다는 소리며, 죽으면 끝이라는 소리입니다. 육체는 다 분해가 되겠지요. 불교적 용어를 사용하면 단견을 말하고 있지요. 불교는, 위에 인용했듯이 아함에서는 6계로 식, 능엄경에서는 7계로 식, 각이 있습니다. 육체가 분해되어 지, 수, 화, 풍, 공으로 돌아가면 식과 각은 어디로 갈까요? 참고로 일부 과학자들은 의식과 육체를 각각의 고유한 entity로 보고 이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공계가 색이라 하고 있습니다] 라는 견해와 [허공무위]를 말하는 구사론의 견해는 각각 어떤 이유로 공계를 유위법, 무위법으로 보는 것일까요?
정의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구사론을 보면 그 당시 色은 두 가지로 정의된 듯 합니다. 현색(顯色): 색깔을 띠는 것, 형색(形色); 형태를 갖는 것, 이 두 가지인데요... 색은 요즘말로 물질을 말하는데, 색을 계속 쪼개들어 가게 되면, 즉 극미가 되면 공간적 점유성, 요즘말로 부피를 가졌을까? 하는 의문에 도달하게 되는데, 세친보살은 색은 극미에서도 공간적점유성을 가진다는 견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허공은 공간적점유성을 지니지 않는 것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보아 무위법으로 분류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건 뉴턴의 공간개념하고 똑 같습니다.
그 당시에도 공을 색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나 봅니다. [유여사는 공도 하나의 현색으로, 색처의 스물한 번 째 라고 설하기도 하였다]라고 색을 설명하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친보살은 6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공계는 말하자면 규극으로 전설에 따르면 이는 바로 명암이며] 라고 합니다. 아함부(중아함이었던 같습니다)에서는 6계도 내외로 말합니다. 내6계는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다. 눈, 간, 심장 등 단단한 부분을 지계고, 피, 고름, 등 은 수계로 말하고 있습니다. 내공계는 코 구멍, 귀 구멍, 구강 등을 말합니다. 세친보살이 규극을 말하는 부분은 이러한 내공계를 언급한 것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는 바로 명암] 이 부분은 세친보살은 탐탁하지는 않음을 '전설' 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부의 설에 의하면 명암은 형색에 해당되어 색법에 포섭됩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구사론에서 세친보살은
허공을 무위법으로 분류하였지만 내공계는 색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능가경에서는 공은 색이다고 직접으로 이 구절이 나왔던 걸로 기억되며, 능엄경에서는
[여래장중에 性이 色인 眞空과 성이 공인 진색이, 청정하고 본연하여 법계에 周遍하여 있으면서 중생의 마음을
따르고 소지의 량에 응하느니라]하고 있습니다.
능엄경의 논지는 이렇습니다. 지계를 살펴 볼 때, 色相은 극미인 색변제상을 7분으로 쪼개어 된 것인데, 색상을 다시 쪼개면 허공이 되지만, 허공을 합하면 색상이 되어야 하는데 허공을 아무리 합해도 허공이지 색상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와 공은 고유의 자성을 갖는 요소라는 겁니다. 이런 논지로 성품이 화인 진공, 성품이 수인 진공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지수화풍과 함께 공을 5대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空의 용법에 대해 살펴봅시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空은 공성 혹은 공하다는 의미입니다(공성은 명사적 용법이고, 공하다는 형용사적 용법이지요) 교학적으로는 연기의 성품을 말하고 있습니다. 조건 지어진 것, 즉 유위법은 공성을
갖는다는 겁니다. 연기법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공계에서 空은 공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지수화풍]+[공] = 5대는 불교가 아닙니다라는 주장을 살펴봅시다. 아함부 경전에는 6계는 지, 수, 화, 풍, 공, 식임을 밝히고 있고, 색온은 4대와 4대조색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구사론에서는 공계가 색법에 포섭됨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능엄경에서는 4대중에 지에는 극미로 들어가면 성품이 색인 진공이 있고, 수도 극미로 들어가면 성품이 수인 진공이 있으며, 화도 극미로 들어가면 성품이 화인 진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 수, 화, 풍, 공은 5대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色相은 극미인 색변제상을 7분으로 쪼개어 된 것인데, 색상을 다시 쪼개면 허공이 되지만, 허공을 합하면 색상이
되어야 하는데 허공을 아무리 합해도 허공이지 색상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극미의 지(색상)을 합하여
산과 같은 대지가 될 때, 결합되는 색상들 사이에는 성품이 색인 공간이 존재한다는 소리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색온은 극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색의 쌓임입니다. 철 덩어리를 예로 들어 봅시다. 철 덩어리는 불교용어를
사용하면 지에 속하는 정색의 쌓임입니다. 철 덩어리는 철 분자가 결합되어 있고, 철분자사이사이는 극미의 공간이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능엄경의 설명은 더욱 더 과학적인 사실과 부합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교를 알면 우주가 보이고 나자신이 보이고 세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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