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연기법 / 2-2-18. 자유의지의 의미

장백산-1 2010. 6. 26. 21:50



      연 기 법 2-2-18. 자유의지의 의미 자유의지의 의미는 너무도 중요하기에, 진한 글자로 쓰기로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연기법이란 신이나 악마, 신의 심판, 절대 이성, 신의 섭리 등과 같이 수천 년 동안 인간을 구속해 왔던 관념들에 대한 인간의 승리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가 지배자의 허상과 그 허상을 조작하는 일부 인간들의 지배 권력에 대한 민중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다면, 연기법은 인간을 강제하는 절대 존재와 섭리라는 관념들, 그리고 그 관념들을 조작하여 인간을 기만하는 종교 권력들에 대한 인간 정신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당시 부처님의 깨달음은 종교적 관념들로써 인간을 통치하고 속박하던 바라문이나 사제 집단의 기득권, 지배권을 산산이 부수던 혁명적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인도에서 불교가 소멸하다시피 한 것도 결국은 종교적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바라문의 벽을 허물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절대 존재나 궁극 성품을 전제前提하는 종교들은 자유의지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왜곡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종교에게 인간의 자유의지를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은 인간 위에 군림하는 모든 절대적인 것들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나아가 자신들의 존재 기반을 박탈하는 상황에 다르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우주적 의지로 긍정하는 법입니다. 우주는 운명적인 존재가 아니며 인간도 운명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우주가 주인이며 인간이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세계와 열반의 세계를 대對를 지어 나누는 견성 수행은 불교의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연기법을 보는 견성 수행이라면 모르되, 궁극 성품을 보는 견성 수행이란 부처님의 이름을 빌려 부처님을 배반하는 미망迷妄에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세계의 연기법을 불성으로 보지 않고 그 나타남 이면裏面의 궁극 성품을 불성으로 찾는 것은 인간세계를 윤회 중생으로, 궁극 성품을 열반 해탈로 분리하는 관념이며, 윤회 중생의 인과율을 전생에 지은 업습의 현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관념입니다. 이들 관념에서는 인간이 자유의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만 스스로의 착각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윤회 중생의 삶이 꿈이며 환幻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기법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말 그대로 자유의지입니다. 연기법에서는 어떤 확정된 미래도 없으며 따라서 인간의 존재나 우주의 존재도 운명론적인 존재일 수가 없습니다. 매 순간의 선택에 의해서 새로운 존재가 연기하는 것이고 새로운 우주가 연기하는 것입니다. 연기법에서 말하는 이 순간의 존재 인과율은 선천적 업습과 삶의 조건들이 있지만, 그러나 또한 매 순간의 선택을 완성하는 자유의지가 이루는 인과율에 의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자유의지는 업습과 삶의 조건들이 이루는 인연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업습이나 삶의 조건들과 별개로 대對를 지어 나누거나 존재적으로 형상화하여서는 안 됩니다. 물에 파란 잉크를 타면 파란 물이고 붉은 잉크를 타면 붉은 물입니다. 붉기도 하고 파랗기도 한 물이지만 그러나 또한 그 물은 어떤 색깔도 담을 수 있는 물이며, 어떤 색깔도 담을 수 있는 물이지만 그러나 붉은 물일 때에는 붉은 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유의지를 인연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불교적으로 말한다면 부처가 되는 씨앗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중무진의 연기 존재가 그의 존재 실상에 부합하는 연기 무아의 삶, 우주적 존재의 삶, 부처의 삶을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씨앗이 자유의지이기에 자유의지를 부처의 씨앗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는 불성이나 본래 자성과 같은 관념적 허상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의 능동적 선택을 이루는 인간의 의지가 어찌 관념적 허상일 수 있겠습니까? 자유의지는 말 그대로 자유의지이기에 부처의 씨앗이기도 하지만 물들여 있는 중생의 씨앗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인간에게 무아無我를 이루라고 합니다. 무아의 의지는 어떠한 속박에도 물들지 않는 그야말로 자유의지입니다. 그러므로 무아를 이루라고 하는 것은 속박되지 않아서 또한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자유의지를 그대로 실현하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자유의지가 업습과 존재론적 관념에 물들어 업습이나 관념의 의지에 머무르게 되면 중생입니다. 그러나 업습이나 미망의 관념들에 머무르지 않고 무애자재한 자유의 의지 그 자체라면 부처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마음이 모든 인과因果의 법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물든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자유의지가 모든 인과의 법을 이루고 또 실행한다?라는 표현이 보다 정확할 것입니다. 만일 누가 연기 우주를 이루는 궁극 성품을 보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보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무애자재하고 청정 적멸한 초월적 성품을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미망과 슬픔, 아름다운 생각들과 진흙 밭의 개싸움 같은 악다구니들의 연기법을 담아내는 자유의지를 보았기 때문에 보았다고 대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연기법을 본다는 것은 인간의 존재와 인간의 의지를 속박하는 어떠한 것들도 관념의 미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의지는 말 그대로 우주적 의지로서의 자유의지라는 것을 보는 입니다. 연기법의 견성은 그런 것입니다. 자유의지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를 구속했던 모든 근원적 조건들, 원죄나 업장, 신의 심판, 생로병사나 우주의 절대 법칙과 같이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근원적 조건들을 강요하는 관념들의 창살을 모조리 허물어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니체는《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타인이나 세상으로부터 주어진 조건, 관념들에 운명적으로 순응하며 사는 사람을 줄을 타는 광대로 비유합니다. 세상의 핍박, 조롱, 기만을 감수하며 시장에서 줄을 타던 광대는 결국 자신의 존재에 다르지 않았던 줄에서 떨어져 죽습니다. 광대의 너무도 인간적인 죽음을 애도하지만, 그러나 짜라투스트라는 결연히 말합니다. 이제야말로 초인超人의 출현이 필요한 것이라고. 니체의 초인은 모든 종교적 경건이나 세상의 강제들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었습니다. 관념의 신들을 조롱하며 자신의 자유의지를 극대화하는 우주적 존재의 인간이 바로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를 통하여 열망하였던 초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존재 실상이 바로 우주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인에게 초인은 도달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본래 자기 자신이 초인이며 우주적 존재임을 절실히 아는 것입니다.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연기 무아의 법을 통하여 절실히 아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을 형성하였던 모든 존재론적 관념들의 벽을 허물어 버리면 됩니다. 그리고 싫고 좋음의 업습에 머물지 않는 순수하고 우주적인 눈으로 선택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의 눈이며 선택인 것입니다. ♩.. 님의미소 / 김승화

출처 : 생활불교
글쓴이 : 본사(本師)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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