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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기법 / 1-10. 연기법과 문명의 방향

장백산-1 2010. 6. 26. 20:22


      연 기 법 1-10. 연기법과 문명의 방향 『조화와 공생』 연기법은 비법의 법이므로 방향성이 없습니다. 인간의 존재나 우주의 존재가 계획된 설계에 의해서 운명론적으로 굴러 가야 한다는 강제된 방향성의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신의 섭리 같은 것을 말하는 기독교나 힌두는 섭리의 방향성을 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우주적 의지로 존중하는 연기법에서는 인간을 강제하는 방향성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을 강제하는 방향성은 없지만, 그러나 연기법에서도 지향해야 할 방향성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 방향성은 조화와 공생입니다. 자연을 보면 왜 연기법의 방향성이 조화와 공생이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작은 생명의 계界와 중간 크기의 계. 큰 생명의 계들이 서로 어울려 하나의 조화로운 순환계를 형성하고, 그 순환계에 의해서 또한 모든 생명의 계들이 존재하는 것이 자연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이라는 연기법을 해체하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 자신과 인간의 사회까지도 해체하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왜 인간이 위험한 존재가 되었느냐 하면, 인간이 그의 능력으로 실현시킨 문명이 인간과 자연의 연기법을 해체하는 최악의 존재론적 관념들로 뒤덮여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문명을 개괄하면 이 문명이 전적으로 기독교적 문화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도사를 앞세운 자본의 식민지 침략과 그 침략에 연이은 서양문물의 세계 제패는 전 세계에 개인 중심의 학문과 문명체계를 건설합니다. 소위 자본주의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가치는 자연을 물질로 보는 인간 중심의 가치와 개인을 절대 존재로 보는 개인 중심의 가치에 기반합니다.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한 개인이며 따라서 이 땅위의 세계에서 개인은 절대 실체의 존재임은 물론 개인의 물질적 권리는 자연이나 사회 등의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인권을 빙자한‘개인의 세계에 대한 물질적 권리’는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물질 만능과 자본 최고의 초석이 됩니다. 현대 자본주의 문명의 기초를 이루는 법과 경제 제도를 보면 이러한 개인 중심, 인간 중심의 존재론적 관념은 확연히 드러납니다. 보이는 존재 중심의 법이고 경제 제도이다 보니 보이지 않는 사회와 자연의 존재 가치는 무시됩니다. 자연과 사회를 도적질하는 큰 도적은 세상을 활보하는가 하면, 재물을 도둑질하는 작은 도둑은 모든 공권력의 대상이 되는 것이 우리의 법이며 경제 제도인 것입니다. 사회를 혼란에 빠뜨려 많은 사람들을 자살로까지 몰고 가는 정치인이나 경제 사범은 인권이라는 미명 아래 법의 보호를 받는가 하면, 우발적으로 사람을 살해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은 사형이라는 극형으로 심판합니다. 자연을 착취하여 돈을 버는 사람이 자원을 잘 이용한 기업가라는 소리를 듣는가 하면, 까르푸나 메가마켓 같은 거대 자본의 시장이 법의 제도적 지원 아래 재래시장과 그 상인들의 존재 기반을 박탈합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회의 조화와 공생을 깨고 경쟁 일변도로 내모는 이러한 법과 제도가 현대사회를 규정하게 된 까닭은 현대사회의 문명이 인간중심, 개인중심의 가치관에 편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기법의 관점에서는 개인중심과 인간중심의 기치관은 틀렸습니다. 원래 무아인 개인을 절대존재화하여 모든 가치를 집중시킴으로써 사회의 가치와 자연의 가치가 개인이라는 허상에 종속되어버리는 오류를 초래합니다. 개인의 절대존재는 원래 허상이므로 개인의 인권이나 존재의 조화는 실현되지 않고 대신 물질만능과 자본최고의 가치들이 연기緣起하여 인권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무아인 인간은 자신의 세계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자연과도 분리될 수 없으며 사회와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사회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옳은 방법입니다. 즉, 인간의 조화로운 존재를 위해서는 자연과 사회의 조화를 실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을 절대 존재로 실체화하는 관점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저해하는 사회적 가치나 자연의 가치는 제한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러나 개인을 사회와 자연의 연기 존재로 보는 관점에서는 사회와 자연의 조화와 공생을 극대화하는 것이야말로 개인의 인권과 사회적 정의를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전체주의적 발상이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전체주의는 다른 집단에 대한 자기 집단의 배타성을 기반으로 하는 관념이어서 조화와 공생을 언급조차 할 수 없는 관념입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야말로 개인의 인권이라는 미명 아래 개인과 개인을 배타적 적자생존의 장으로 내모는 전체주의적 발상에 다름 아닙니다. 물신주의 혹은 황금만능이라는 가치 아래 개인과 개인을 투쟁하게 만드는 전체주의적 발상 말입니다. 인간을 연기 존재의 무아로 보는 연기법에서는 개인의 절대 존재가 허상虛像이며 사회의 관계망, 세계의 관계망, 자연의 관계망이 실상實像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절대존재라는 관념을 근거로 개인의 물질적 권리를 지고의 가치로 간주하는 자본주의는 허상을 위하여 실상을 희생시키는 최악의 미망이요, 오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상을 희생시켜 허상의 이익을 구하는 법과 경제의 문명이다 보니, 그런 문명이 조화와 공생의 사회 대신 경쟁과 적자생존의 사회를 생산하는 것은 필연이며 그런 문명이 인간과 자연의 가치 대신 물질과 소비의 가치를 생산하는 것도 필연입니다. 거대 자본이 재래시장과 그 상인들을 압살하고 큰 도적놈이 세상을 떵떵거리며 사는 어처구니없는 필연입니다. 관계망을 실상으로 하는 세계라면 비록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사회와 자연의 계界를 존재의 계로 편입시켜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관계망, 즉, Network를 인간에게 작용하는 실상의 계로 고려하는 학문이 관계론입니다. 세계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학문이 조금이라도 연기법의 실상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존재론을 대체하는 학문으로 관계론의 학문을 진지하게 고려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세계와 문명을 구성하는 학문들을 볼 때, 실상의 연기법을 이해하는 관계론적 학문이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한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의 지구는 존재론적 관념들로 인해 자연과 인간의 연기법이 와해되는 과정에 있다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연기법이 해체되는 과정에 있지만, 그러나 연기법은 비법의 법이므로 인간을 강제하지 못합니다. 오직 인간의 각성과 실천적 의지만이 연기법을 지구에서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일승의 연기법이므로 연기법 실현의 주체는 인간 외에 따로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반드시 연기법을 부활해야만 하느냐고 묻는다면, 첫째로는 우리가 실상의 존재로서 참되게 존재함을 원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우리가 지속 가능한 문명을 원하며 그래서 이 지구에서 계속 살아남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허상을 위한 문명은 실상을 해치게 되어 있습니다. 개인을 절대의 존재로 강조하면 할수록,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사회는 절대 존재의 개인이라는 허상 아래 압살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중심의 문명에서 인간의 가치는 작고 작은 것들만을 향해 달려갑니다. 인간의 소외, 자기 상실, 감각과 쾌락 최고, 경쟁 만능은 그러한 문명이 낳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 문화일 것입니다. ♩.. 님의미소 / 김승화

출처 : 생활불교
글쓴이 : 본사(本師)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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