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스크랩] 冶父頌 2회

장백산-1 2011. 1. 29. 21:49

[송] 如是라. 古人이 道하사대 喚作如如인댄 早是變了也라하시니 且道하라 變向甚麽處去오? 咄! 不得亂走어다. 畢竟作麽生인고? 道火不曾燒却口니라. 如란 如여! 靜夜長天에 一月孤로다.

 

<직역> 이와 같도다. 옛 사람이 말씀 하시되 ‘여여라고 부르면 곧 변해버린다.’고 말씀 하셨으니 또한 말하라. 어떤 모양으로 변해 가는 것인가? 돌(咄)!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불을 말했지만 일찍이 입을 태우지는 못했느니라. 여(如)라는 여(如)여! 고요한 밤하늘에 외로운 달이로다.

(강설) 금강경 법문을 야부선사께서 처음으로 풀어놓은 귀절입니다. 如是라는 것을 가지고 頌을 붙여놓은 것입니다. 如是라는 것은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할 때의 如是입니다. 古人이라 하는 사람은 남전선사라 하는 사람입니다. 남전선사가 어느날 강원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선사는 강의를 하고 있는 강사스님께 “스님께서는 지금 무슨 경을 설합니까?”물었습니다. 이에 강주스님은 “열반경을 설합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경을 설할 때 무엇을 宗으로 삼아 설하십니까?”라고 하자 “如如함을 종으로 삼아 설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남전선사가 하는 이야기가, 如如라고 부르면 벌써 그것이 변해버린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강주스님은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하고 반문했습니다. 선사는“돌로 깎아 만든 사람(石人)이 나무를 깎아 만든 닭(木鷄)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러함을 宗으로 삼아 경을 설하면 그것이 바로 如如라는 것입니다. 如如라고 하는 것이 그래야만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벌써 여여라고 말해버린 상태에서는 이미 그것이 변해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말씀하시기를 “어떤 모양으로 변해가는 것인가?”라고 물은 다음 답하시기를 “돌(咄)!”하고 소리를 내었습니다. (咄이라고 하는 것은 소리로써 선(禪)을 나타내는 한 방법입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답하시길 그 어지러이 간 곳을 찾지 못하겠노라고 하셨습니다. 또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다그쳐 질문을 던진 뒤 ‘불을 일찍이 불이다라고 말하지만 이 불이 입을 태우지는 못했다.’고 자문자답을 하셨습니다. 불을 아무리 말해도 입은 타지 않습니다. 불이라 할 때의 불은 활활 타는 불을 말하지만, 입으로 말하는 불로는 아무 것도 태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석가가 한 소리를 여여(如如)라고 한들 벌써 그것은 십만팔천리의 거리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석가가 한 소리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하면 그 말은 벌써 석가가 한 그 소리가 아니게 됩니다. 석가가 한 말이라고 수 천년을 전해내려 오지만 그것은 이미 석가가 한 그 말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마치 입으로 말하는 불이 실제로 활 활 타는 불과는 다르듯이 말입니다.

그 변하지 않는다는 그것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말은 곧 그것이 아닙니다. 불이라고 한 것과 똑같이 그 본질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라고 하는 것은 고요한 밤하늘에 떠 있는 외로운 달과 같습니다. 그 달은 어디에 떠 있습니까? 그 달은 자기 마음속에 떠 있습니다. 저 달은 하나인데 백개 천개의 강에 전부 달이 보입니다. 다양한 형태로 변화무쌍하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하늘에 떠 있는 달 하나만이 여(如)인 것입니다.

 

출처 : 선도원
글쓴이 : 자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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