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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양자의학의 궁극적인 목적

장백산-1 2011. 2. 7. 12:00

 

 

양자의학의 궁극적 목적
 
1. 초의식으로 가득 찬 우주
 
여기에 어항이 하나 있고 이 어항을 우주라고 가정하자. 뉴턴물리학에서는 이 어항은 텅 비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에서는 이 어항이 비어있기는커녕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가”에 의하여 꽉 차 있다고 하였다. 이 “무언가”에 대하여 물리학자 Max Planck는 zero-point energy라고 불렀으며, 물리학자 David Bohm은 초양자장이라고 불렀고, Carl G. Jung 은 “동시성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집합무의식”이라고 하였으며, 쉘드레이크는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하여 “확장된 마음”이라고 하였다.

이 어항 속의 물은 누가 만들어서 거기에 있게 된 것이 아니라 그냥 태초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이며 그래서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다. 그런데 이 어항 속의 물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요동(holymovement)을 치고 있다. 그 결과로 이 물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발생하기 시작하였고, 이 존재들은 다시 가지치기를 하면서 존재의 분화 현상이 일어났다.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우리의 우주가 생겨났다. 그러니까 은하계도, 태양과 달도, 너와 나도, 나무와 짐승, 공기와 물, 산소와 탄소, 원자와 전자, 양성자와 중성자, 앞 쿼크와 참 쿼크 등 모든 것들이 이 어항 속의 물에서 생겨나서 모두 어항 속의 물 속에 잠겨 있다.

물속에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도 따지고 보면 근본 질료는 물이다. “너”라는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하면 동일한 부모인 “우주의 자식”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너”도 “나”도 동일한 물로부터 출발은 했지만 우주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세월 동안 진화를 거듭한 결과로 이제 와서는 “너”와 “나”의 겉 모습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러나 “너”와 “나”의 근본은 물이기 때문에 가끔은 이 물을 매체로 해서 “너”와 “나” 사이에 정보가 저절로 전달될 수 있다.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나”와 “바람” 사이에, “나”와 “바위” 사이에, “나”와 “나무” 사이에, 혹은 “나”와 “물고기” 사이에 정보가 저절로 전달될 수 있다. 그것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바로 詩人이다. 그래서 이 어항 속의 물로 따지면 여기와 저기의 구별이 있을 수 없어 공간적으로 하나이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별이 있을 수 없어 시간적으로도 하나이다. 그냥 모두 ‘하나’일 뿐이다.

쉘드레이크의 실험에서 보았듯이 “확장된 마음”은 관념적인 것도 아니며, 형이상학적인 논란거리도 아니며 귀신의 장난도 아니다. 그것은 엄연한 진실이고 현실이며 우주의 실재(reality)이다. 그러니까 쉘드레이크가 말하는 “확장된 마음”이란 우주의 허공은 “마음으로 충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단지 “마음으로 확장되어 있다”라고 표현을 달리 했을 뿐이다.

이 “확장된 마음”은 실존적이기 때문에 텔레파시나 “누군가 쳐다보는 느낌” 같은 현상은 비정상적인 유령 현상이나 기괴한 심리 현상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인 것이다.
데이비드 봄의 “비국소성 원리”를 철학교수 최종덕은 “부분의 합은 전체인가”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비유하였다. “버틀만이라는 사람은 항상 색깔이 다른 양말만을 신고 다닌다. 따라서 버틀만은 오늘의 한쪽 양말이 빨간색이라면 다른 쪽 양말은 보지 않고도 최소한 빨간색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반면에 그의 어린 아들은 버틀만에게 어떻게 아버지는 다른 쪽 양말을 보지도 않고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느냐고 감탄스럽게 묻는다.” 이 비유는 정보가 전달된다는 개념이 아니라 개체로서의 두 쪽의 양말은 버틀만이라는 사람의 전체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되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 양자의학을 넘어서
 
사람의 마음은 표면의식, 개인무의식 그리고 집합무의식으로 구성된 3층 구조로 되어있다. 여기서 표면의식은 우리가 깨어 있을 때 우리의 생각 주체가 되는 의식이다. 개인무의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저장된 기억의 창고와 같은 의식이다. 집합무의식은 우리가 단세포로부터 진화하면서 경험하였던 모든 것들이 저장된 기억의 창고와 같은 의식이다. 그런데 이 집합무의식은 그냥 모든 기억이 저장된 잡동사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집합무의식의 거의 대부분은 초월의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초월의식은 진, 선, 미가 그 특성이고 전지전능이 그 기능이며, 사랑과 자비가 그 본색이다.

우리는 흔히 태어나는 순간부터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였던 기억과 지식을 토대로 우리들의 삶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며, 흥분하기도 하며, 행복해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피부 속에 갇혀 있는 육체와 더불어 슬퍼하고 기뻐하고, 흥분하고, 행복해 하는 이 존재를 “나”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평범한 우리들은 육체와 개인무의식을 합친 것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세계의 현인들은 육체와 개인무의식을 합친 “나”라는 것은 “가짜 나”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진짜 나”가 따로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진짜 나”는 융파의 심리학 용어로는 “집합무의식”에 해당되고 시대적, 문화적 그리고 종교적 차이 때문에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즉, 신, 하느님, 부처님, 도(道), 궁극의 나(I), 영(spirit), 집합무의식의 다양한 명칭, 절대신성(the Divine), 참 자기(the Self), 주시자(the Witness), 순수한 현존 (Presence), 순수한 각성, 공(空) 등등.

범부와 현인의 차이를 보면, 범부는 “가짜 나”를 나의 전부인 줄 알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현인은 “진짜 나”의 존재를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범부와 현인은 생각하는 방식이나 내용도 전혀 다르다. 범부들은 산을 집중해서 바라보라고 하면 산만 바라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만 생각이 다 왔다 갔다 한다. 구름들이 행진하듯 지나가고, 상념들도 행진하듯 지나가고, 신체적 감각들도 행진하듯 지나가고, 마치 원숭이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나뭇가지를 타듯이 오만 생각이 지나간다. 그러나 현인들은 산을 한참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갑작스레 바라보는 자는 없어지고 오직 산만 있게 되어 그래서 자신이 곧 산이 되는 순간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저기 밖에 있는 세상과 “나” 사이에 분리가 없어지고, 자신은 단순히 자기의 피부 안쪽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게 되며, 이미 자기의 피부경계를 뛰어넘어서 멀리 가버리게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연이 나의 일부임을 알게 되며, 내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이 나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마치 나의 손이나 나의 발을 취급하듯이 자연을 그렇게 취급하게 된다고 하였다.

현인들은 말하기를 “가짜 나”에서 벗어나면 “진짜 나”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진짜 나”는 애초부터 우리 내면 깊숙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진짜 나”의 존재를 믿고 그것을 찾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진짜 나”를 경험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 “진짜 나”를 경험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될까? 현인들은 말하기를 그것은 사랑의 실천이라고 말했다. “진짜 나”의 특성이 바로 조건 없는 사랑이기 때문에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조건 없는 사랑을 맹렬히 연습하면 저절로 “진짜 나”에 근접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사랑이란 것은 어둠을 없애는 빛과 같은 것이며, 개인무의식 속에 저장된 슬픔, 불안, 공포, 분노와 같은 온갖 잡동사니 같은 마음의 쓰레기를 녹이는 용광로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개인무의식을 완전히 녹이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집합무의식, 더 정확히 말하면 집합무의식 속의 순순한 초월의식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의 실천은 쉬운 일은 아니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슬픈 일에는 항상 슬퍼했고, 공포스런 일에는 공포를 느꼈으며, 불안한 일에는 불안을 느끼면서 단단한 조건반사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누가 나한테 이유 없이 욕을 하는데 이 사람을 상대해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겠는가? 건강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이 순간에 슬픔 이외에 다른 감정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슬퍼하고, 불안해 하고, 화를 내는 습관들은 너무나 두터운 보호막으로 가리워져 있기 때문에 여간 해서는 사랑의 힘으로 녹여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현인들은 말하기를, 그래도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의 실천으로 이것을 녹이면 드디어 녹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는 부딪치는 사건마다 조건 없는 사랑으로 임하는 한편, 매일 일정한 시간을 만들어 조용히 명상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맹렬한 반복과 연습에 의하여 드디어 우리가 집합무의식을 경험하게 되면 현인들은 말하기를 초월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나의 내면에 있던 집합무의식이 우주 공간을 채우고 있는 집합무의식과 연결되어 내 몸도, 내 마음도 나의 것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초자아 혹은 초개인(트랜스퍼스날)의 시작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이 순간에 현인들은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실재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바탕이며, 그러한 것의 본질은 곧 모든 것이고, 그러한 것의 본질은 곧 실재이며 그리고 당신이, 바로 당신이 그러한 것이다.”라고 외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나의 내면 속에 있는 집합무의식과 우주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집합무의식이 하나로 연결되는 현상을 쉘드레이크는 “확장된 마음”이라고 불렀고, 데이비드 봄은 “비국소성의 원리”라고 하였으며, 칼 융은 “동시성의 원리”라고 불렀다.

현인들은 말하기를 자아초월이란 결코 형이상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을 실제로 경험해 보면 그것이 형이상학이 아닌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아초월에 이르는 길을 마스터한다면 누구나 그것을 재현할 수 있고, 그래서 자아초월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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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마음공부와 자기계발을 넘어서
글쓴이 : 와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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