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불교에서는 '자살'을 어떻게 보나요?

장백산-1 2011. 3. 12. 22:29

 

얼마 전에 이웃의 20대 주부가 부부싸움을 하다가 13층에서 뛰어내려 죽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왜 자살을 하게 되었을까 안타까웠습니다. 부부싸움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자살을 할 만큼 무엇이 그렇게 심각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마 순간의 화를 이기지 못했거나, 떠나야 할 운명이었거나 아니면 그렇게 죽을 인연이었을까요? 요즘 자살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는데 불교에서는 자살을 어떻게 보는지요?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으면 자살까지 해야 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너무도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자살이 무엇일까요? 보통 살생은 죽인 자와 죽은 자가 있게 마련이고, 그 둘 사이의 인과응보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 인과응보는 분명하여 다음 생에는 거꾸로 죽은 자가 죽인 자를 다시 죽이게 되는 과보가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자살의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죽은 자와 죽인 자가 동일해요. 그러니 그 응보가 없어질까요? 안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죽은 자가 다음 생에 또 다시 죽인 자를 죽입니다. 즉 자살의 경우일지라도 그 인과응보는 변함없고, 그 말은 쉽게 말해 또 다시 다음 어느 생에 자살로써 죽음을 당하게 될 상황을 맞기 쉽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를 죽였습니다. 내가 나를 죽이기까지 한 그 상황을 맞으려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엄청난 에너지의 어둠과 공포와 혼란스러움이 있었겠습니까. 내가 나를 죽여야 한다는 정도의 의지는 일반적인 의지와는 전혀 에너지가 다릅니다. 보통 우리 인간의 에너지는 아상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나아가는데, 자살은 내가 나라는 아상을 내리 쳐 죽이는 것이거든요. 물론 그 또한 자살을 통해 나라는 아상이 조금 더 편해 보겠다는 잘못된 생각이 근본이 되기는 하겠지만, 그렇더라도 아상을 강화시키는 것이 모든 이들의 삶의 목적인데, 그 목적을 거꾸로 죽여 버릴 정도가 되려면 얼마나 전도되고 착각에 빠진 어리석은 의지가 강력한 에너지로써 자리 잡고 있어야겠습니까. 그것은 우주의 일반적인 질서에 완전히 반기를 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살이라는 기형적이고도 부정적인 의지의 에너지는 일상적이거나 평범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에 우리 안에 남기는 업의 흔적 또한 뚜렷하고 강력하게 남길 것입니다. 그렇듯 강력한 자살의 에너지가 업이 되면 죽은 뒤부터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혼란과 혼돈, 전도몽상과 무명은 49일 간의 중음신의 기간 내내 엄청난 혼란과 공포에 빠뜨릴 것이며, 설사 다음 생으로 윤회를 한다고 할지라도 정상적인 인간 몸을 받아 윤회를 할 수 있겠어요? 지옥에 빠지든, 아귀나 축생으로 억겁을 윤회하든, 아수라 지옥에서 끊임없이 전쟁의 패배를 맛보든, 어떤 방식을 취하든 그것은 최악의 상황으로 윤회를 몰아갈 것입니다. 또한 그런 삼악도의 보를 수 억겁 동안 받고 나서 어렵게 인간 몸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잠재의식, 아뢰야식 속에 자살이라는 강력하고도 부정적인 업장이 자리하기 때문에 언제나 삶이 어둡고 부정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러다가 결국에는 자살이라는 업식에 따라 또 다시 자살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한 번 자살을 하는 것은 그 에너지가 너무 강하다 보니 몇 번을 반복해서 습이 되는 다른 업들 이상으로 강력한 습(習)을 남길 것입니다. 즉 자살이 습관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게 바로 업습(業習)입니다. 그러니 한 번 자살한 영혼은 계속해서 자살이라는 풀 수 없는 순환의 고리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한 번 마약에 빠진 사람이 그것을 도저히 끊지 못하고 계속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중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건 더 이상 정상적인 삶이 아닙니다. 차라리 지옥을 몇 번 가는 것이 낫지 자살의 보를 받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보통 인간은 자신의 업에 따라 생을 받으면 자신에게 부여 된 삶의 몫이 있습니다. 삶의 분량이 정해진단 말입니다. 얼마만큼 살다가 죽는다 하는 것이 정해져요. 물론 그것은 고정적인 것은 아니고 이번 생에서 또 다시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항상 변하는 것이긴 해도 그 업에 맞춰 또 다시 적절한 생의 길이가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의 질서이고 인과응보라는 진리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자살은 그 우주적인 인연법의 이치를 중간에서 잘라 먹는 거예요. 우주법계의 이치에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느냐?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의지의 중요성이지요. 어둡고 탁하며 혼란스럽고도 어리석은 의지가 생겨나면서 순간 거기에 휘둘려 충동적으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자유의지적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는 자기의 업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업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자유의지로 업을 바꿈으로써 내 삶을 밝은 것으로 바꾸어 갈 수 있으며, 반대로 아무리 좋은 업을 받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자유의지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삶이 어두워질 수도 있고, 심지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함으로써 완전히 우주적인 진리의 질서를 제 의지대로 바꿀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잘 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기간을 자연스럽게 주어진대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이번 생에서 해야 할 삶의 몫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사사로운 아상으로, 이기적인 나로써 살지 않고 더 큰 차원의 우주적인 질서와 하나가 되어 그것의 일부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적인 모든 이들의 삶의 내용이지요. 그런데 자살은 그 일반적인 흐름을 자기의 의지대로 끊어버리고, 전체적인 우주의 질서와 맞서는 것이니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고, 심각한 것입니까. 결정코 자살이라는 것은 없어야 합니다. 나라는 작은 존재가 어찌 우주의 큰 질서와 맞서 대적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결과는 고스란히 나 자신에게 참담한 결과로 이어질 뿐입니다. 아무리 힘들지라도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내 안에서 녹이고 가겠다는 마음으로 바꾸는 순간 그 무거운 악업이 전환을 맞기 시작해요.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살을 생각할 정도의 괴로움이 왔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수미산보다 더 큰 나의 무거운 악업의 업장을 녹여버릴 아주 중요한 기회를 맞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순간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자살로써 흐름을 끊어버린다면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자신이 이겨내지 못할 만큼 큰 업장은 우리 삶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겨낼 수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예요.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야말로 법계에서 바라는 것이고, 부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겨내고 잘 녹여냄으로써 우리는 한 단계 성장하고 진보하며 맑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법계에는 정확히 필요한 일만이 정확히 필요한 정도의 크기로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때에 일어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주법계는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알맞은 것, 가장 필요한 것들을 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돕기 위해 일합니다. 그 고통스런 경계가 나타난 것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법계의 계획의 일환이며 진리의 방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 힘겨운 경계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자살은 결코 그것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일을 더욱 더 복잡하게 만들고, 몇 배 더 고통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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