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뿌리 역사를 찾아서!!!

현충사에 일본 '천황' 상징이 있다.

장백산-1 2011. 3. 28. 13:06

 

“이순신 장군 기리는 현충사에 일본 ‘천황’ 상징이 있다”

한겨레 | 입력 2010.11.19 09:00 | 수정 2010.11.19 17:10

 




[한겨레] 훅 필진열전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 혜문 스님


"원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이 불교 정신입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땐 지금보다 몸무게가 15kg정도 덜 나갔던 수습기자 신분이었다. 수면부족과 더위로 경찰서 골방서 기면상태에 있던 나에게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다.

 

 

 

 

 

 

"조계종 승려입니다. 삼성이 도굴 문화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당시 1진(수습기자를 교육하는 선배기자)기자에게 급히 보고를 하고 서울 시내 한 대학교에서 그를 만나기로 약속했다. 기독교 집안이었던 나는 스님하고 이야기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아니, 가까운 자리에서 마주 앉는 게 처음이었다.

  '어려운 말만 하면 어떡하지', '사이비 아니야' 등 잡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왠지 모르게 긴장감마저 들었다.

  약속 시간이 되자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가 보였다. '깜놀'했다. 

 '이건 완전 무림의 고수다.'

 

  상식으로 박혀있던 스님의 모습을 상상하던 나에겐 충격이었다. 고등학교 때 보았던 홍콩 무협영화 '신용문객잔'에 나오는 협객 수준의 외모였다. (이국적인 느낌을 주는 패랭이를 쓰고 있었다!) 외모의 충격은 뒤로 한 채 취재를 시작했다. 상당히 지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나중에 알게 됐지만 '멀쩡한' 대학에서 석사까지 마친 엘리트였다.) 문화재에 대해 상당한 식견을 가진 전문가라는 걸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덕분에 수습 신분이었던 나는 단독 기사를 쓸 수 있었다. 그 뒤로도 '고수'의 활약은 계속 됐다.
조선왕조실록 반환, 조선왕실의궤반환 등 굵직굵직한 문화재 관련 뉴스에 그가 등장했다. 문화재 환수 운동을 펼쳤던 < 문화방송 > '느낌표'에는 고정 출연하기도 했다. 문화재가 있는 곳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일본이 의궤 반환 결정을 발표했던 직후인 11월 10일 혜문 스님을 만나러 안국동으로 향했다.

 문화재 뉴스가 있는 곳엔 항상 그가 있다

 

  -실록도 돌아오고 의궤도 돌아왔습니다. 처음 문제제기를 하고, 민간 차원에서 꾸준하게 환수 운동을 했던 입장으로서 감회가 남다를 거 같습니다.

 "공식적으로 65년 한일협정 때 문화재반환 청구권 문제가 종결됐어요. 그 뒤로 정부차원에서는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민간주도로 4년 여간 노력해서 얻은 성과라서 무척 기쁩니다. 하지만 이는 종결이 아닌 미완의 성공이며, 과거를 되돌아보는 반성의 의미도 있다고 봅니다."

  -실록도 그랬고, 의궤 반환 운동을 했던 곳은 불교계입니다. 그런데 현재 실록은 서울대
규장각에 있습니다. 의궤는 어디서 보관을 해야 할까요.

 "실록은 원래 사찰에서 관리하던 '사고'에서 보관하는 게 맞습니다. 일본이 약탈해간 곳도 사고지요. 의궤도 역시 사고로 돌아가는 게 맞다고 봅니다. 하지만, 국민적 합의가 우선이지요. 국민들이 원하는 곳에 보관하는 게 좋겠지요."

  -이 기회에 스님의 활약상을 정리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간의 문화재반환 운동을 정리해주시지요.

 "이거 참, 너무 많아서.(하하) 기억나는 대로 짚어보면 일단
리움 박물관이 소장하던 현등사의 사리구를 반환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당시 처음 기자님이 기사를 쓰고 나서 1년 뒤 리움 측에서 조건 없이 반환을 했었죠. 여기에 조선왕조실록 반환운동, 이토 히로부미의 규장각 도서 밀반출, 국내 현존하는 최고 금속활자본 발견, 명성황후 시해했던 칼 히젠토, 최근에 명성황후 표범 양탄자 건까지. 아, 제가 생각해도 끝이 없네요. 그렇다고 꼭 우리문화재만 돌려달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한국이 소장하고 있는 약탈문화재인 '오타니컬렉션'을 본국에 돌려주자는 운동도 했었죠."

  -조선시대 기생 명월이의 생식기, 백백교 교주 전해룡의 머리가 국과수에 있는 것을 지적하셨죠. 이런 것은 도대체 어떻게 아시게 된 겁니까.

 "우연하게 60년대 서울시내 명문고등 학교를 졸업하신 분의 얘기를 들었어요. 당시 고등학생들이 명월이 생식기와 전해룡의 머리를 보러 견학을 갔었다는 겁니다. 전 너무 놀랐어요. 인간의 신체가 '도구'로 쓰인다는 것에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명기'로 소문났던 명월이의 생식기는 어떻게 생겼나, 갖가지 음행을 저질렀던 전해룡의 머리는 어떻게 생겼나 보고 싶었던 거죠. 사람의 신체를 '성 적인 도구'로 본 거죠."

  혜문스님의 지적으로 인해 결국 명월이 생식기는 폐기처분 됐고, 전해룡의 머리도 곧 폐기처분하기로 했다.

 오류 바로 잡는 것이 불교 정신

 

 -최근
현충사의 일본식 정원 문제를 거론하셨죠.

 "일본식 정원뿐만이 아니에요. 거기에 박정희가 기념식수한 '금송'은 일본 천왕을 나타내는 거예요. 그것도 청와대에 있던 금송을 옮겨 심은 거죠. 아무리 개념이 없다고 해도 '항일'의 상징인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현충사에서 일본 천왕을 상징하는 나무가 있다는 게 가당키나 합니까. 현충사가 이럴 진데, 다른 곳은 오죽하겠어요."

  -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숭어'가 '송어'의 오역이라는 지적을 하신 것으로 아는데요. 그 뒤 어떻게 됐나요.

 "내년부터 교과서가 바뀝니다. '송어'로요. 2009년 미국에 갔다가 뉴욕 필하모니 공연을 보게 됐어요. 공연장 포스터에서 'Trout'라는 단어를 보게 됐습니다. 저도 처음 보는 단어라 찾아보니 '송어'더라고요. 이상하다 생각했습니다. 분명 우리는 슈베르트의 '숭어'라고 알고 있는데 왜 '송어'일까라고 말이죠. 서울에 돌아와 교과부에 공식 질의서를 보냈습니다. 결국 '송어'가 맞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교과서가 바뀌게 됐어요. 민물고기가 바닷고기로 바뀌는 '얼빠진 세상'이죠. 작은 오류조차 바로 잡지 못하는 거예요."

 -왜 이렇게 문화재에 관심이 많으십니까.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은 오류를 바로 잡는 것입니다. 오류를 바로 잡는 것은 불교의 정신과 상통합니다. 금강경에
환지본처(還至本處)라는 말이 나옵니다. '원래 자리로 되돌린다'는 뜻이지요. 불교라는 것이 결국 '인간의 잃어버린 불성을 찾는 것'입니다.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은 '환지본처'의 정신을 살리는 작은 실행중 하나인 것이죠."

 -학창 시절 꿈은 뭐였습니까.

 "제가 학부는 역사학, 대학원은 국문학을 전공했습니다. 19세기에 관심이 많았어요. 학부 졸업논문은 흥선대원군의 집권기가 주제였고, 대학원은 19세기 한시문학의 해체를 주제로 논문을 썼습니다. 원래는 인문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문학도 병행하면서요. "

 -그 시대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이유가 있나요.

 "19세기를 흔히 민중의 시기라고 합니다. 하지만 민중의 아픔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하죠. 세계가 근대화가 되면서 발현되기 시작한 제국주의 때문입니다. 이러한 와중에 핍박받는 민중에 대한 애정이 생기더라고요."

불감증 세상에 서슬 퍼런 칼날을 겨누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 같은데요. 그러면 언제 처음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나요.

 "2005년 한일협정문서가 공개됐습니다. 당시 어떤 문화재가 돌아왔나 쭉 살펴봤죠. 황당했습니다. 기껏 돌려준 문화재가 영등포우체국 간판, 짚신, 모자, 막도장 이런 것들이에요. 일본이 그래놓고 문화재 돌려줬다고 한 거죠. 기만이었습니다. 분노가 치밀더군요. 당시 한국서도 별 것 아닌 문화재 돌려받고 생색을 내려고 했는지 짚신을 '초혜'라는 어려운 한자로 바꿔 적으면서 '물타기'를 했습니다. 여기에 출가한 봉선사에서 정기적으로 사찰 문화재 조사를 했었습니다. 조사를 해보니 마지막으로 조사했던 76년 대장과 너무 달랐어요. 많은 문화재가 중간에 없어졌더라고요. 그걸 찾다보니 자연스럽게 문화재에 관심이 간 거 같습니다."

 -외국도 많이 다니셨죠?

 "마일리지가 엄청났죠. 거의 마일리지로 외국 다닌 거 같아요. 일본만 40여 회 갔다 왔어요. 다른 나라까지 합치면 50회가 넘을 거 같네요. 심지어 일본 사람들도 잘 모른다는 신주쿠 뒷골목을 다 꿸 정도니까요. 일본 사람들도 놀랍디다. 하하."

  -저도 취재하면서 '문화재를 이렇게 들쑤시면 더 숨는다.'라는 지적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스님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

 "비겁한 변명입니다. 어떤 문제든 수면위로 드러나야 풀립니다. 지금 세상이 불감증 상태입니다. 제가 이렇게 무모할 정도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일종의 '자객'의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객'은 살생을 하는 차원이 아니라, 사마천의 사기 '자객열전'에 나오는 의미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세상에 서슬 퍼런 칼날을 겨눈다는 것이지요."

 -스님이 너무 문화재에 집착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불교의 '환지본처'의 의미를 구현하고자하는 저의 신념이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글쓰기는 인식의 투영…구체적이고 명확해야

  - < 훅 > 에 '
우리 문화재 이야기'도 연재하시고, 블로그도 운영하시고, 재판에 쓸 변론도 직접 쓰시고, 책도 내시고, 보도자료도 쓰시고…글쓰기에 대단한 열정이 있으신 거 같습니다. 스님에게 글쓰기란 어떤 의미입니까.

 "글쓰기는 인간의 인식이 투영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출가 전에는 인문학자가 꿈이었고, 지금은 출가자로서 불교 정신을 구현하려고 하지요. 수행자로서 오류를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를 제기할 소재가 정해지면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뜬구름'같은 글들은 사람들을 움직이지 못하죠."

  -앞으로 계획을 말씀해주시죠.

 "먼저 옥새 문제를 좀 다루어야 할 거 같아요. 명성황후 양탄자 건으로 알게 된 '아델리아홀레코드'(미국으로 건너한 한국 문화재에 관한 미 정부의 공식 보고서)를 보니 국새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어요. 이것을 추적 해봐야할 거 같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사찰서 보관하고 있는 명성황후를 시해했다는 칼 '히젠토'도 다시 짚어봐야죠. 당시 일본은 메이지유신 뒤라 검찰제를 도입하고 있었거든요. 만약 그 칼이 정말로 '살인의 흉기'였다면 검찰이 보관하고 있어야죠. 개인이 보관할 수가 없는 겁니다. 아마 이 문제는 소송까지 갈 수도 있을 거 같아요. 문화재 말고 다른 '환지본처'운동으로는 베트남 '라이따이한'들의 아버지를 찾아주는 운동을 하고 싶어요.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세우지 못했는데, 언젠가는 하고 싶습니다."

 

  명절 때가 되면 가족이 모여 '화투'를 쳤다. 어린 두 손자가 화투짝을 흘리거나, 점수 계산을 잘못하면 할머니는 "자기 밥도 못 찾아 먹는 놈"이라며 핀잔을 줬다. 현재 한국이 그런 상황은 아닐까. 자기 나라 문화재도 제대로 찾아오지 못하고 민간에서 문제제기를 해야 겨우 나서는 수준이니 말이다. '자기 밥' 잘 못 챙겨먹는 사람들에겐 '낙장불입'의 응징만이 가해질 뿐이다.

 인터뷰 이후, 혜문스님은 < 훅 > 에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의 5대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올렸고(http://hook.hani.co.kr/blog/archives/15706) , 지상파 방송에서 이를 다시 보도하는 등 적잖은 파장을 불러왔다. 그 문제와 관련해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서울시에 공청회를 요구하는 의견서를 제출한 상태다. 글·사진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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