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의 진리, 하나의 마음, 하나의 우주! ▒
어떤 분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부처님 가르침이 세상에서 가장 쉽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가르침은 조금도 무리가 없습니다.
또 사실을 생긴 대로 보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누구한테나 어디에서나, 또 자기 마음도 본래 생긴대로,
대상도 생긴 대로 바로 보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닦을 수가 있습니다. 어느 누구나가
부처님 말씀 따라서 참다운 자기 성품을 닦을 수가 있습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은 생각하는 존재기 때문에, 누구나 다 행복을 구합니다.
동시에 참다운 진리가 무엇인가를 구합니다.
역사는 유구한 세월을 두고 어느 때나 참다운 것,
행복하고 안락한 세상, 평화로운 사회를 추구합니다.
이때 잘 모르는 사람들은 행복과 진리가 따로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과 진리는 절대로 별개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하게 되려면 반드시 진리가 있어야 하고, 진리를 깨달으려면
그 진리에 행복이 뒤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시대 같으면 복잡하지 않고, 복잡하지 않으니까 단순하게 살면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정보사회입니다.
무서운 정보와 지식의 홍수 가운데서 살고 있기에,
우리 마음이 편안할 때가 없습니다.
이 시대를 '자기 소외의 시대'라고 합니다.
소외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자기를 서먹하게 생각하고,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불안과 불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른바 자기 문제에 대해서 항시 흐뭇하지 못하고,
불행을 느끼고 불안과 공포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독일의 근대 철학자 헤겔은 이와 같은 현상을 자기 소외라고 합니다.
자기 소외는 범부 중생 어느 누구나 안고 있는 우리 마음의 갈등입니다.
그런데 이런 갈등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것은 자기 존재에 대해서 확신을 못 갖는 데서 옵니다.
나라는 것이 대체로 무엇인가? 또
우리 주체에 대상으로 나타는 것은 무엇인가?
즉 주체와 대상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생깁니다.
자기 존재의 중요한 핵심은 주체성입니다.
자기 존재의 주체성이 확립 안 되면 당연히 불안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정보의 갈등이나 홍수 가운데서 어떤 정보가 가장 위대한 정보인가?
또 그 복잡한 정보를 어떻게 정화시켜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등장하여 삶을 어렵게 만듭니다.
자기 주체성을 확실히 확립한다면,
자기 주체성 가운데에 모든 해결방법이 다 들어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이 우주 만유는 원래 이것이 다른 존재가 아니라,
모두가 하나의 진리에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의 진리에 담겨진 하나의 생명인 것이 우리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원론이나 일원론이라는 말을 쓰는데,
부처님 말씀은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 모두가 둘이 아니라는 법문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절대 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둘이 있다고 생각하면 벌써 진리와 멀어집니다.
그리스 철인으로 위대한 플라톤의 이른바 '이데아'라 하는 것도,
모든 사람이 다 경험은 못하지마는, 우주가 하나의 도리란 뜻입니다.
형이상학적인 하나의 도리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형이상학적이라는 것은 비단 사람 눈에 안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개별적 대상도 거기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도 같은 하나의 도리,
우주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로고스', 하나의 원리를 많이 역설했습니다.
신플라톤파라 하는 플로티노스도 위대한 분입니다.
이른바 신비주의로는 공로가 많은 분입니다.
이분도 우주란 것은 오직 일자一者라, 하나의 진리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의 진리를 바로 알아 버리면, 아무리 정보가 복잡하고
자기 갈등이 심하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풀려 버립니다.
이른바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이라,
벌겋게 달아 있는 화로에다 한 줌 눈을 던지면 순간에 녹아 버리듯이,
그와 같이 하나의 도리를 바로 알면
제아무리 어려운 것도 다 풀려 버립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어렵지 않다는 것은, 하나의 진리를 가장 극명하게,
가장 뚜렷하게 말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철저히 과학적입니다. 왜 과학적인가 하면,
우주의 인과의 도리를 부처님같이 확연히 말씀하신 분이 없습니다.
현대 물리학은 인과의 도리를 설명했지만,
체험할 수 있고 실험 실측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인과를 증명했을 뿐입니다.
인간 존재의 윤회, 눈에 안 보이는 세계,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똑같이 위대한 진리 같은 것은 과학이 알 수가 없습니다.
윤회사상은 부처님뿐만 아니라
피타고라스라든가 다른 그리스 철인들도 주장을 했습니다.
물론 부처님같이 윤회사상을 확실히게 말씀한 분은 없습니다.
윤회사상은 정말로 심리적으로 보나 물리적으로 보나, 정확한 수학적 도리입니다.
윤회사상은 조금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도저히 피해 갈래야 피해갈 수 없는,
엄정하고 명명백백한 우주의 도리입니다.
꼭 그렇게 안 되면 안 되는 것이 윤회사상입니다.
더 강조합니다마는, 윤회는 분명히 유구한 과거에서부터 금생을 통과해서
미래에까지 영원히 중단 없이 흘러갈 사상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영겁회귀란 말씀을 들으셨지요.
이것은 모든 존재는 영구히 윤회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사람뿐만 아니라 우주 자체도 텅텅 비어서 에너지만 남는데,
거기서 다시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으로 해서 성취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이른바 성겁成劫입니다. 그때는 모든 존재가 거기서 살게 됩니다.
그것이 주겁住劫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모든 것이 차근차근 못쓰게 됩니다.
어느 존재나 모두 다 산화합니다.
철이고 무엇이고 산소화가 됩니다. 인간도 고기를 많이 먹거나
너무 음식을 많이 먹으면 산화되기 쉽지 않습니까?
산소라는 것은 불이나 같은 것이어서,
이른바 불가역성不可逆性 에너지입니다.
본래대로 돌아올 수 없는 에너지가 자꾸 쌓이면, 우주는 불타 버립니다.
이것이 이른바 괴겁壞劫입니다. 괴겁으로 파괴된 다음에
물질이 조금도 없이 비어 버리면 공겁空劫입니다.
우주는 이와 같이 텅텅 비어 버린 공겁空劫,
형체가 이루어지는 성겁成劫, 생물이 사는 주겁住劫,
파괴가 되는 괴겁壞劫, 다시 성주괴공을 되풀이합니다.
물리학은 오늘날에 와서야 부처님 가르침을 가까스로 뒤쫓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자부심과 높은 긍지를 느껴야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위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감사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가장 과학적이고 가장 철학적인 가르침이며,
또한 가장 수승한 종교입니다. 인류 문화의 정수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하여 둘로 셋으로 쪼개서 보면, 그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의 도리를 깨달으면 성자가 되고,
하나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면 중생입니다.
그래서 유마거사도 이른바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
둘이 아닌 법문을 역설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따지고
저렇게 따지고 자꾸 분할하는데, 우주는 조금도 분할하지 않습니다.
분할해 있지 않는 그 당체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입니다.
이것이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진여불성을 가리켜서 대총상법문이라 그럽니다.
그 속에 모두 다 들어 있습니다. 또 그것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우리 마음이 자기 자성이요, 우리 마음이 바로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대총상법문은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은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서 마음을 찾을 수 있습니까?
혜가스님이 달마대사께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제 마음을 다스려 주십시오" 하니까,
달마스님께서 "아, 그럼 그대 마음을 내놓아 보아라" 그랬습니다.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 있다고 생각할 때,
내가 생각하니까 내가 있다고 데카르트가 말 했듯이,
우리 마음은 모양은 없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생명 자체로 해서 마음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모양이 없으면서 분명히 존재하는 것은,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그 마음 깨닫는 것이 성자고,
마음 깨닫지 못하는 것이 우리 중생입니다.
그런 마음 깨닫는 법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일백 퍼센트 믿어야 됩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천지 우주가 오직 마음뿐입니다. 내 마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 마음도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하나의 원자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하나의 원자란 것이, 물리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굉장히 기기묘묘합니다.
어떻게 기기묘묘한가 하면, 마치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지구나 각 행성이 뱅뱅 돌지 않습니까? 그와 똑같이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돌고 있습니다.
사람 눈으로는 절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물리학적으로 가까스로 실험 실측해서 알 수 있는 원자핵입니다.
또 원자핵의 힘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원자폭탄 같은 것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힘 아닙니까?
원자력이 없으면 현대문명은 유지될 수가 없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원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원자 가운데서,
원자핵을 중심으로 해서 그 밖을 빙빙 돌고 있는 전자가,
꼭 태양을 중심으로 해서 지구나 달이 돌고 있는 것과 똑같다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가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자는 무엇인가? 원자핵은 무엇인가?
순간순간 변환變換되고 순간순간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 눈에는 안 보이는 기기묘묘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중생의 도리에서는 그걸 절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아무리 물리학이 발달해도,
실험 실측할 수가 있어야 무엇이라고 규정합니다.
모양도 없고 시간 공간을 초월한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일체 존재는 하나의 우주 에너지, 우주 생명입니다.
산소ㆍ수소ㆍ질소 어느 것도 원자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우주는 원자로 깔려 있다고 봐야지요. 더 들어가면
우주는 에너지뿐이다고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는 생명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전에는 사람들이 잘 안 믿었겠지요. 분명히 쇠(鐵)는 쇳덩어리고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라 그럴 것인데,
다 모두가 마음뿐이라고 하니까 누가 곧이듣겠습니까?
그러나 현대 물리학이 증명을 다 하니까,
그런 부처님 말씀을 이제는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만법萬法이 유식唯識이라, 모두가 의식뿐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뿐이란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가 윤회사상을 잘 모를 때는, 내가 살다가 갑자기 죽어버리면,
내 목숨이 영 그만 아닌가 하지만,
사실은 부처님 사상에서 본다면 죽음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현재 존재가 과거의 무수 시간을 거쳐 여러 생을 건너왔듯이,
미래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금생에 우리가 죽는다 하더라도,
생명은 절대로 소멸되지 않습니다.
몇만 생을 두고 태어나고 또 태어나고 그러는 것입니다.
불교인들이나 일반 사람들도 다른 것은 미처 긍정을 못하고 잘 모른다 하더라도,
꼭 두 가지 문제만은 확실히 알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이 본래로 하나의 생명이어서 둘이 아니라는 도리입니다.
둘이 아닌 도리는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인도의 힌두교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것은, 일체 존재가 다 본래는 '브라만'입니다.
브라만이란 우주의 본래 생명을 말합니다.
기독교 역시 교리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다 하느님이 창조했다고 합니다.
예수의 본뜻은 부처님의 본 뜻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르침이 이천년 이상 융성한 것을 보면 틀림없이
그것은 성자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종교는 우리 인간의 참다운 화해와 평등과 평화를 추구합니다.
다종교사회에서 자기 종교만 옳고 남의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면,
무지의 표현밖에 안됩니다. 우리가 부처님 계율 가운데서 보살계가 있는데,
보살계를 가끔 받으셔서 잘 아시지마는, 보살계 가운데에 십중금계十重禁戒라,
열 가지 무거운 계가 있습니다. 그 무거운 금계의 일곱번째 계가
자찬훼타계自讚毁他戒입니다.
이 계는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비방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것은 다종교사회에서 다른 종교에도 그것이 해당됩니다.
자기가 믿는 종교는 옳고 다른 것은 그르다 하는 것도,
역시 자찬훼타계를 범하는 것입니다.
신의 문제에 있어서 일신론이 있고 범신론이 있습니다.
일신론은 우주를 창조하고 우주를 섭리하는 것이 오직 하나의 신이라는 것이고,
범신론은 우주 자체가, 모든 자연 자체가 신이 아님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깊이 따지고 보면, 일신교나 범신교가 결국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한 가지만 법집法執해서 그런 구별을 세우지,
집착을 떠나면 같은 것입니다.
신앙의 깊이가 부족하면, 우주는 오직 하나의 신이 창조하고 섭리한다,
또는 하느님과 인간은 다른 것이다로 생각하지만,
더 깊이 사유하면 결국 같은 뿌리입니다. 즉 범신론이 안될 수가 없습니다.
천지 우주가 바로 신뿐입니다. 바로 신이란 말은,
천지 우주가 바로 마음뿐이란 말과 똑 같습니다.
신학자 가운데서도 중세기의 에크하르트 같은 위대한 신학자는,
대체로 기독교를 믿지만 사상은 범신론입니다.
힌두교나 불교와 가깝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만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모두가 다 마음이 진여불성을,
이른바 대총상법문을 갖추었기 때문에 위대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나 다 공변된 진리가 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다만 자기를 탐구하는 척도가 짧아서 어느 부분밖에 몰라서 그렇지,
근본적인 염원은 다 진리로 가고자, 진리가 되고자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좋든 싫든 간에,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하나의 진리로 귀의할 것입니다.
현대 물리학이 부처님 사상을 하나 둘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인들도 자기들 종교심이 보다 깊어지고,
또는 종교 일반의 성향이 더 깊어질수록
부처님 사상에 가까워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서
정말로 행복과 자부심을 느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우선 두 가지 문제입니다.
다른 문제는 결국 이 두 가지 문제에 다 포괄이 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 명심을 하셔야 할 줄로 생각합니다.
한 가지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존재가 오직 하나의 진리라는 일원론적 진리관을 깊이 느껴야 합니다.
우주가 한 생명이기에 진리도 하나요, 내 마음도 하나를 향해 가야 합니다.
모든 현대의 과학ㆍ철학ㆍ종교도 하나의 진리로 귀일되어 가고 있습니다.
일체 존재는 근원적으로 본래 하나기 때문에,
우리 마음도 하나 쪽으로 가고 싶은 간절한 추구심이 있습니다.
인간 존재는 종당에는 부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 부처가 되고 마느냐 하면, 본래가, 당체가 부처기 때문입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우리 본성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부처가 되어야 하는 필연성이 있습니다. 다만 빠르고 늦는 차이뿐,
일체중생개당작불一切衆生皆當作佛이라, 응당 당연히 부처가 됩니다.
우리가 잘못 살아서 윤회가 계속될 때는
부처되는 데 몇천만 생이 걸릴지 모릅니다.
윤회사상은 우리가 느낀 대로, 우리가 생각한 대로,
우리가 행동한 대로 다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도 안 받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것이나 금생에 받지 않으면 내생에,
내생에 받지 않으면 그 다음 전생轉生에, 어느 때나 받습니다.
자기가 지은 업은 절대로 소멸이 안 됩니다.
가사 백천만겁을 지나도 소작업所作業은, 지은 업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다만 인연을 만나면 환자수還自受, 보답을 자기가 지은 대로 되받습니다.
남을 미워하면 미워한 대로 꼭 보답을 자기가 받습니다.
남한테 해코지하면 한 대로 꼭 보답을 받습니다.
본래로 남과 나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이 자기 생명의 근원을 보지 못하니까,
내가 있고 남이 있다고 보는 것이지,
근원을 본다면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똑같은 물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물결이라든가 거품 같은 그런 존재가
우리들 각각의 개인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거품이나 물결의 바탕은 내내야 하나의 바닷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은 물 자체를 못 보고 거품이나 물결만 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성품性品은 보지 못하고 상相만 봅니다.
현상적인 상만 봐서는, 우리 마음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우리 주체는 분명히 성품인데, 주체적인 생명의 근본을 못 보고서
겉의 상만 본다면, 맘이 편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기 소외라는 것도 자기 생명의 바탕을 못 보는 데 있습니다.
부처님 팔만사천 법문이 모두 섭상귀체攝相歸體라,
상에서 성품으로 갑니다. 곧 체로 갑니다.
염불하는 것이나 화두를 드는 것이나 모두가
다 상을 떠나서 근본성품으로 가는 공부입니다.
우리 중생이 금생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요새 명상도 별별 명상이 다 있습니다. 명상센터 등에 가서 보면
무분별로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한테 귀환하는 명상같이 차원이 높고 궁극적인 명상은 없습니다.
자기 존재의 근본이 부처님인데,
부처님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명상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부처를 빨리 증명할 것인가?
내 마음이 바로 핵심자리고 중심이니까,
내 마음을 바로 그대로 느끼고 구해야 됩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어려운 말로 삼신사지三身四智가 다 들어 있습니다.
육조단경에 보면 절묘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성 가운데 청정법신淸淨法身이 있고, 원만보신이 있고,
천백억화신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 말씀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했어요.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 자성, 우리 인간성, 우리 마음 가운데에 다 들어 있습니다.
행복도 진리도 다 들어 있습니다.
그걸 보다 더 간추려서 말씀을 드리면, 상락아정常樂我淨입니다.
상락아정이 무엇인가?
영원히 죽지 않고 존재하는 우리 생명은 영생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우리 생명은 절대로 죽고 남이 없습니다.
금생에 인연이 다해서 저쪽으로 옮기는 것이지,
생명은 절대로 죽고 남이 없습니다.그래서 영원히 사는 것이고,
일체 행복 역시 본래적으로 나한테 갖춰져 있습니다.
누구한테 행복을 빌려올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내 마음이 얼마만큼 위대한 것인가?
자기를 아무리 칭찬한다 하더라도, 본래 지닌 자기 마음을
다 칭찬할 수가 없어요.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님 공덕은 부처님같이 그렇게 대대로 성취한 부처님의 지혜로 본다면,
수백억 년을 헤아려도 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바로 그대로의 존재입니다.
석가모니는 훨씬 위대하고 우리는 저 밑에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래 부처란 그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사실대로 말씀한 것입니다.
부처님한테 있는 부처와 우리한테 있는 부처가 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확실히 말씀드리면, 천지 우주가 사실은 부처님뿐입니다.
어리석게도 중생이 자꾸만 쓸데없는 분별심으로 그렇게 보지 못할 뿐입니다.
부처님 당시는 아라한도阿羅漢道를 깨달으면 삼명육통三明六通을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나이는 무던히 먹었지마는 신통을 못합니다.
왜 못하는 것인가? 공부를 게을리해서 못합니다.
정말로 부처님께서 말씀해 주신 대로 오로지 했다면, 꼭 신통을 해야 됩니다.
우주란 것은 신비에 가득 찬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우주 자체, 진여불성뿐입니다.
진여불성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어느 것이나 바로 보면 불성인 것인데,
우리 중생은 겉만 봅니다. 상만 보고 성품은 못 봅니다.
그 허물은 우리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설사 하나의 화두를 놓고 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본체성에다 마음을 두고서 화두를 참구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덮어놓고 의심한다고 해서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부처 아님이 없다, 만덕을 갖춘 부처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그 자리를 참구하기 위해서 화두를 들어야 합니다.
염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하늘에 또는 어디에 계시는 부처님을 갈앙渴仰하여
가호加護를 입어야 하겠다는 것은, 사실 참다운 불법이 못 됩니다.
참다운 불교라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 생명과 나와의 간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것입니다.
천지가 부처뿐인데 무슨 틈이 있겠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신 지 2500년 이상이 되지만,
부처님은 생생히 우주에 바로 살아 계십니다. 바로 우주 생명입니다.
예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것도 절대로 구분이 없습니다.
하나의 진리, 하나의 생명입니다. 꼭 하나의 도리를 명심해야 됩니다.
상카라라 하는, 인도 힌두교에서 8세기 때 살다 가신 분이 있습니다.
우리 불교는 그때 밀교화되어서, 지엽적인 이파리나 생각하다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힌두교에서
상카라 선인仙人이 나와서, 불교의 진리를 힌두교의 교리로 삼아 불교를 내쳤습니다.
때문에 결국은 인도에서 불교가 자취를 감추기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신앙을 바로 가지면 쇠미가 안됩니다.
한국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고려말 우리 한국 불교가 얼마나 부패했습니까?
그 부패한 죄로 이조 오백년 동안 결국 핍박을 받았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모든 공덕, 즉 자비나 지혜 모두를 다 갖추고 있으며,
또 우리 생명 자체 역시 바로 그러한 공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내 존재가 바로 생각한 것보다 훨씬 위대하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정말로 용기가 나고 보람도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를 비하하면서,
스스로를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명연수永明延壽선사는 10세기 때 분입니다. 아주 위대한 분입니다.
이분께서 하신 말씀 중에, 참수분사斬首焚死라,
인연이 잘못되어서 내 목을 당장 베어 간다 하더라도,
내가 손해볼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느끼실 수 있겠습니까?
자기 목을 당장 베어 간다 하더라도 손해볼 것이 없다,
그리고 반대로 그야말로 불로장생하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훌륭한 불로장생의 약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나에게 이익될 것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정말로 그러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든지 간에 자기 스스로는
잘 몰라서 나는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하더라도, 우리 과거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받는 것이 모두가 다 자기가 지어서 받습니다.
우연은 조금도 없습니다. 다 지어서 받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가정생활에나 사회생활에서
다 남한테 책임을 전가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부터 백까지
모두가 다 자기가 지어서 받습니다. 그와 똑같이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행동, 우리의 사고, 우리가 하는 말 한 마디,
그것이 다 업이 되어서 내생에 또 받습니다.
지금 하는 모든 행동이 우리 미래를 규정합니다. 따라서
설사 내 목을 베어 간다 하더라도, 나를 불에 태워서 죽인다 하더라도,
이것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 전생에 우리가 지어서 금생에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은 뒤에 어디로 갈 것인가 몰라서 그러는 것인데,
사실은 죽자마자 일초의 시차도 없이 또 바로 몸을 받습니다.
우리가 바른 일만 하고 죽을 때는, 금생에 누구한테 핍박당해서
비참한 비명횡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죽은 다음에는 훨씬 좋은 데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자기 목을 베이고 또는 자기를 불태워 죽인다 하더라도
손해날 것도 없는 것이고, 응당 받을 것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야 업장이 소멸될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행복이 현상적으로 온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역시 우리가 과거 전생에 지어서 그만큼 받을 것을 받는 것입니다.
또 자기 몸뚱이가 지나치게 호사를 하면 또 그것이 업이 되어서,
내생 가서는 우리 생이 전락轉落할 수 있습니다.
염불을 하든지 주문을 외든지 화두를 참구하든지 간에,
꼭 그 본래의 자리, 우리 생명의 근본자리를 안 떠나야 우리 생명이 손해를 안 봅니다.
금생에 사는 보람은, 금생에 우리 생명의 본고향인 부처님에게로 얼마만큼 갔는가,
거기에 우리가 금생에 태어난 보람이 있습니다.
현상적인 상에만 젖어서 산다면, 업만 짓는 것이지 보람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근원적인 우리 마음의 본체,
이른바 진여불성인 대총상법문에다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윤회는 하나의 생명 행동지침입니다.
따라서 윤회를 분명히 믿고, 우리 행동 하나하나에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누구든지 윤회에 대해서 의심을 품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윤회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여실하게 증명을 하셨고,
현대 정밀과학인 물리학도 다 증명하고 있습니다. 최면술이라든가
심령과학도 우리에게 윤회를 증명해 보다 잘 납득시켜 주고 있습니다.
생명의 본바탕은 분할이 안 되는, 둘이 아닌 하나의 생명입니다.
유마거사 말대로 하면 불이법문不二法門입니다. 둘이 아니라는 법문은
일반철학으로는 동일률同一律이라, 다 하나의 도리로 귀일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철학자는, 예컨대 칸트나 니체는,
모두 하나의 진리 쪽으로 자기들의 철학체계를 세웠습니다.
저 사람과 나 역시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겉으로 봐서는 둘이나, 성품으로 보면 하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동일률을 안다면,
자기를 위해서 어떻게 남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가정생활에서나 직장생활에서나, 어디에 있든지
꼭 모든 생명은 하나의 뿌리라는 것을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만물이 다 하나의 뿌리이므로, 만물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 하나의 진리를 안다는 것은 지극하고도 위대한 일입니다.
이런 위대한 일을 절대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2001년 6월, 서울 동산반야회 초청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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