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에 어머니와 금산사에 다녀온 바우(만공스님의 속명)소년은 미륵부처가 업어주는 꿈을 꾸고 나서 식구들 몰래 출가의 꿈을 키운다. 14세에 공주 계룡산 동학사로 출가해 진암(眞巖)스님 밑에서 행자생활을 하다가 그곳에 다니러 온 경허스님을 운명적으로 만난다. 경허를 따라가라는 진암스님의 말에 처음엔 "싫다"고 거부하지만, 경허의 법문을 듣고난 후 그 자리에서 마음을 바꿔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경허스님은 그의 형 태허스님과 어머니가 머물던 천장암에 바우소년을 데리고 가 월면(月面)이라는 법명을 준다.
바로 이때가 경허의 세 '달'이 모두 함께 천장암에 거하던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훗날 백두산에서 나그네들에게 짚신을 삼아주던 무주상보시로 유명했던 '북녘의 상현달' 수월(水月)스님은 땔나무를 해오는 소임인 부목을 맡고 있었고, 아이같은 천진불로 유명했던 남녘의 하현달 혜월(慧月)스님은 이곳에서 경허스님에게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수월은 30세, 혜월은 23세, 만공월면은 14세였다.
걸림없는 무애행으로 유명한 경허스님과 제자 만공의 일화는 많다. 어느날 무거운 시주 바랑을 짊어진 월면이 경허스님에게 "너무 무거워 쉬었다 가자"고 하자 경허스님은 "무겁지 않게 해주겠다"면서 지나가던 여인의 입을 맞춘다. 여인의 비명소리를 듣고 동네사람이 나와 두 사람을 쫓자 만공은 정신없이 산속 절까지 뛰어갔던 것이다. 경허스님은 빙긋 웃으며 "아직도 그 바랑이 무겁더냐?"고 물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만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대체 그 한가지 돌아가는 곳이 어디냐)를 화두로 참선에 들어간 스님은 25세에 온양 봉곡사에서 새벽종을 치며 깨달음을 얻어 오도송을 남긴다. '빈산의 이치와 기운은 예와 지금의 밖에 있는데/흰구름 맑은 바람은 스스로 오고 가누나/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을 건너 왔는가/축시엔 닭이 울고 인시엔 해가 뜨네'
이후 스님은 공주 마곡사 토굴에서 수도했으나 경허스님으로부터 "아직 진면목에 깊이 들지 못했다"는 점검을 받고 더욱 정진한다. 경허스님을 모시고 서산 부석사와 부산 범어사 계명암에서 수도하고 해인사 조실로 초청받은 스승을 시봉한다. 1901년 경허스님과 헤어진 만공스님은 양산 통도사 백운암에서 재차 깨달음을 얻었다. 1904년 금강산을 거쳐 삼수갑산으로 화광동진(和光同塵)하러 떠나는 경허스님께 마지막으로 법인가를 받고 '만공(滿空)'이란 법호를 받는다. 이때 만공은 스승 경허의 헌 담배쌈지와 담뱃대가 맘에 걸려 새것으로 선물했는데, 경허스님은 아이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훗날 글방선생 '박난주'로 임종을 맞을 때 경허는 이 두가지를 꼭 무덤에 함께 묻어달라고 했다. 아마도 이것이 자신임을 증명할 신표가 될 것임을 내다봤기 때문일 것이다.
1905 년 이후 주로 덕숭산 수덕사에서 주석한 만공스님은 1931년 금강산 유점산 금강선원 조실, 1933~35년 마하연 조실, 1936년 마곡사 주지를 잠깐 맡았을 뿐이다. 만공스님이 마곡사 주지로 있었던 1937년 3월, 총독부는 전국 31본산 주지와 도지사를 모아 미나미 총독의 주재로 '불교진흥책 마련'이란 미명하에 한·일 불교 합병을 획책하는 회의를 주최했다. 이 자리에서 미나미가 "전 총독 데라우치는 조선불교에 끼친 공이 크다"고 하자, 만공스님은 벌떡 일어나 "데라우치는 조선승려로 하여금 일본 승려처럼 파계하도록 했으니 무간지옥에 떨어져 큰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분연히 소리 치며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미나미는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다. 이날 밤 만공스님의 둘도 없던 친구 만해 한용운 스님이 찾아와 "잘했다"면서 "이왕이면 주장자로 저 쥐새끼같은 놈들을 한방씩 갈겨 주지그랬나"라고 하자, 만공스님은 "미련한 곰은 방망이를 쓰지만 큰 사자는 원래 할(喝, 깨달음을 주기 위해 크게 소리침)을 하는 법"이라고 응수했다. 이때만큼은 한용운도 잠시 말을 잊었다.
만공스님의 시봉이었던 원담스님(덕숭총림 방장)은 "만해 한용운 스님과 김좌진 장군은 자주 수덕사로 놀러 오시곤 했다"면서 "만공스님은 한용운을 가리켜 '내 애인'이라고 종종 말씀하셨다"고 회상했다. 만공스님은 거구에 육척장신으로 힘이 장사여서 김좌진 장군과 팔씨름을 하면 이길 때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만공스님 주위에는 항상 글쓰고 그림 그리고 소리하는 예인들이 많았다. 남농 허건, 허백련 등 화가들을 비롯해 소리 잘하는 풍류객들도 종종 만공을 찾았다. 만공스님은 그럴 때면 늘 옆에 끼고 있던 '공민왕 거문고'를 타며 함께 풍류를 즐겼다. 스님의 거처였던 덕숭산 소림초당 앞의 작은 다리 갱진교(更進橋)는 달빛을 벗삼아 만공스님이 거문고를 타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 거문고는 의친왕 이강 공에게 신표로 받은 것으로, 공민왕이 직접 만들어 탄 이후, 대대로 조선왕조에 전해온 왕가의 가보였다. 현재는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거문고의 뒤판에는 만공스님이 지었다는 '거문고 법문'이 씌어있다. '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고?/이것은 체(體) 가운데 현현한 곡이로다/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고?/이것은 일구(一句) 가운데 현현한 곡이로다/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고?/이것은 현현한 가운데 현현한 곡이로다./한번 퉁기고 이르노니 이 무슨 곡조인고?/이것은 돌장승 마음 가운데 겁 밖의 노래로다./아차!'
이 거문고와 함께 성보박물관에는 스님이 일본의 패망을 전해듣고 기뻐하며 무궁화 꽃봉오리를 붓삼아 썼다는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편액도 걸려있다.
만공스님은 말년에 덕숭산에 전월사를 짓고 지내다가 1946년 10월20일 나이 75세, 법랍 62세로 입적했다. 입적하던 봄, 스님은 시봉하던 원담스님을 불러 "더 살면 험악한 꼴을 볼 것이니 올해 시월 스무날쯤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아침 목욕 후 거울을 들여다 보며 "자네 나와 이별할 때가 되었네 그려" 하더니 춘성스님에게 법상을 맡긴 후 열반에 들었다.
만공스님의 제자로는 보월(寶月) 용음(龍吟) 고봉(古峰) 서경(西耕) 혜암(惠庵) 전강(田岡) 금오(金烏) 춘성(春城)스님, 비구니로는 법희(法喜) 만성(萬性) 일엽(一葉)스님을 들 수 있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