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은 행위다.
신구의(身口意)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 것이
그대로 업이 되어 존재 속에 업력(業力)을 남긴다.
그 업력은 잠재적인 어떤 세력이며 에너지로 우리 안에 머물러 있다가
인연의 때를 만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
그것이 바로 인과응보의 법칙이요,
업인과보의 법칙이다.
그렇듯 한 번 지은 업은 반드시 받아야지만 소멸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업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법구경]에서는 말하고 있다.
"하늘에도 바다에도 산중 동굴에도
사람이 악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이처럼 자신이 지은 업은 반드시 자신 스스로 받아야 끝이 난다.
그러면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불교에서는 분명 수행을 통해 업장이 소멸된다고 했는데
업장은 그것을 받기 전에는 소멸하지 않는다면
이 두 가지 가르침 사이에는 큰 오류가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아무리 선한 업을 많이 짓더라도
과거에 지은 악한 업이 선업에 의해 상쇄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면
어차피 착하게 살아도 죄의 과보를 받을 것인데
선업을 애써 지을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고 자포자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런가?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소금물의 비유로써 답을 주고 계신다.
한 움큼의 소금을 한 잔의 물 속에 넣으면
그 물은 짜서 마실 수 없게 되지만,
그것을 큰 그릇에 넣으면 마실 수 있는 물이 된다.
잔 속에 넣은 소금의 양과 큰 그릇 속에 넣은 소금의 양은 동일하지만,
물의 양에 따라 마실 수 있는 물이 되기도 하고,
마시기 힘들만큼 짠 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아가 한참 갈증이 심할 때 소금 한 움큼이 들어 간 많은 양의 물은
갈증을 해소 해 주는 소중한 감로가 되기도 하고,
더 나아가 그 그릇에 온갖 양념을 하고 나물을 넣어 국이나 찌게를 끓인다고 생각해 본다면
그것이 도리어 맛깔스런 음식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 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과거에 악업을 지어 놓았다고 하더라도
그 업을 기계론적이나 결정론적으로 반드시 나쁘게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즉, 나쁜 업을 지었어도 그 뒤에 좋은 업을 많이 지으면
이미 지은 나쁜 업에 대한 과보가 나쁘게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과거에 어떤 업을 지었느냐가
내 삶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중요한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
오직 지금 이 순간 내 의지에 따라
자신의 삶과 운명을 자신 스스로 변화시키고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를 운명론이나 숙명론이라고 하지 않고
업보론, 업인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업보론은 운명론이나 숙명론과는 이처럼 분명 다르다.
소금물을 넣었다면 반드시 그 물을 내 스스로 먹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즉, 악업을 지었다면
반드시 그 악업의 과보를 내 스스로 받아야 하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 물을 먹을 때 내 선업을 얼마나 더 쌓았느냐에 따라
짠 소금물을 먹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물을 먹을 수도 있는 것처럼,
악업을 지었더라도 그 악업을 받을 때는
결정론적으로 악한 과보를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이처럼 악행을 많이 하고, 죄업을 많이 지었더라도
그 죄업을 참회하며, 반성하고, 다시금 선업을 더욱 많이 짓고,
선한 생각, 선한 말, 선한 행동을 많이 함으로써 업을 선하게 변화시킨다면
악업의 과보를 받더라도 괴로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반대로 과거에는 선한 업을 많이 지었더라도
그 선업의 결과를 받을 때 좋지 않은 모습으로 받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과거의 선업이나 악업은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운명적으로, 숙명론적으로 무조건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바꾸고 변화시켜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법성게에 '일념즉시무량겁'이라고 한 말처럼
한 생각이 곧 무량한 시간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즉, 과거 무량한 시간 동안 수많은 악업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한생각 맑고 청정하게 일으켜 선업을 짓고 수행 정진한다면
지금 이 순간의 맑은 일념으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과거 무량겁 동안의 악업이 있더라도
한생각 맑고 청정한 지혜를 일으키면 성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전생에 내가 어떤 사람에게 심하게 욕을 했다 치자.
'너 같은 녀석은 그냥 죽는게 낫다. 죽어 버려라'
이 구업은 분명히 업력을 남기게 되고,
다음 생에 나는 내가 욕한 그 사람에게 똑같이 욕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구업의 결과를 받을 때, 내가 쌓은 선업과 내 수행력의 차이에 따라
똑같은 악한 구업의 과보는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이번 생에 태어나 선업을 많이 지었다면 자연스럽게 내 삶이 맑고 밝아질 것이고,
선업을 지은 법계의 기운에 따라 내 주위는 선한 기운이 넘쳐흐를 것이다.
또한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이라면 자기 중심이 딱 서 있을 것이고,
어떤 욕이나 경계를 당하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수행력이 우뚝 서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전생에 내가 행한 욕설을 이번 생에 다시 받게 되더라도
그 욕에 휘둘려 마음을 괴롭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수행력과 선한 인연이 충만한 사람이라면,
어느 순간 상대방에게 '너 같은 녀석은 그냥 죽는 게 낫다. 죽어 버려라'
하는 욕을 얻어 먹었다고 하더라도 그냥 잠깐 마음 아프기는 할 지언정
그렇게 괴롭다거나 진짜 죽고 싶거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더욱이 수행력과 법력이 선 사람이라면 그 정도 욕을 얻어 먹는 것은
그 사람 마음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을 수 있다.
그 사람 마음의 평화를 깨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러한 욕설로 인해 마음을 관하며 수행의 재료로 삼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번 생에 태어나서도 끊임없이 악행을 하고 악업을 짓고 산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사람 주위는 어둡고 탁한 기운이 넘쳐 흐를 것이고
마음은 허약하고 나약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 나약하기 짝이 없는 사람에게 '너 같은 녀석은 그냥 죽는 게 낫다. 죽어 버려라'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그 욕설은 너무나도 괴로운 영향을 줄 수도 있고,
조금 극단적인 경우라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살을 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그렇듯이 똑같은 업을 지었더라도 그 업을 어떤 상황에서 받느냐에 따라,
어떤 인연일 때 받느냐에 따라 그 업은 큰 차이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첫째, 선업을 짓는 것이 중요하고
둘째, 수행을 통해 수행력을 증장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누구라도 악업을 짓지 않고 산 사람은 없다.
과거 전생 또 그 전생 혹은 이번 생의 과거에서라도
누구나 악업을 많이 짓고 살아 왔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 그 악업에 대한 과보를 받을 지 모른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내가 지은 업은 분명히 과보를 남긴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언제 받을 지 모를 과보를 괴롭게 받지 않기 위해
또 다른 선업을 짓는 것이고 수행을 하는 것이다.
선업을 많이 지으면 선업의 기운이 나라는 존재를 맑고 청정하게 바꾸어 주기 때문에
많은 물에서는 한 움큼의 소금이 짜지 않듯
많은 선행과 선업을 지은 사람에게 악의 과보나 죄의 과보도 그리 괴롭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수행을 통해 수행력을 키우면 어지간한 괴로움이나 경계나 과보 쯤은
크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자기 중심이 잡히고,
자기 안에 주인공의 뿌리가 내리게 되기 때문에,
과보를 받더라도 그것이 나를 괴롭힐 수 없는 것이다.
선업을 짓는다는 것은 '복'을 키운다는 의미고,
수행을 한다는 것은 '지혜'를 키운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처님께 우리가 귀의하는 이유가
부처님은 '양족존'이시기 때문인 것이다.
즉 부처님은 복과 지혜가 충만하게 존숭하신 분이기 때문인 것이다.
부처님은 선업과 악업의 사슬, 윤회의 사슬 속에서 선업과 수행을 통해 복과 지혜를 구족하심으로써
그 사슬, 수레바퀴를 벗어나신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칠불통게를 보면
'諸惡幕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모든 악은 저지르지 말고,
모든 선은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맑고 깨끗이 하라.
이것이 곧 여러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라고 했던 것도
모든 악을 버리고 모든 선을 쌓음으로써 '선업'을 쌓고,
그 마음을 맑고 깨끗이 하는 '수행'을 쌓아
복과 지혜를 다스려야 한다는 여러 부처님의 거룩한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면 전생이나 과거에 지은 악업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에서다.
그 어떤 업의 과보라도 '지금 여기'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일 뿐,
어찌 과보를 과거에 받거나 미래에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미래에 과보를 받는다는 것도 사실은 말을 미래라고 표현했을 뿐이지
그 과보를 받는 순간, 그 순간은 현재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과보를 받는 순간이 '지금 여기'라는 현재라면,
'지금 여기'라는 현재를 잘 다스린다면
과보를 받더라도 크게 휘둘리지 않으며 여여하게 받을 수 있다는 결과가 된다.
그 말은 현재만 잘 다스린다면
우리 삶은 아무 문제 없이 평화로울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현재를 잘 다스리는 '지금 여기'의 수행과 선행 속에
업장을 소멸할 수 있는, 업을 뛰어넘을 수 있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말인 것이다.
사실 업장소멸이라는 말이 이런 의미다.
업장이 받지도 않고 수행만 하면 그냥 소멸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수행, 마음공부를 통해 업장을 받더라도 받지 않는 것 처럼
내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인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선업을 짓는 것과 수행을 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두 가지는 바로 '지금 여기'라는 현재의 문제인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현재를 잘 다스리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지혜가 생기고,
존재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생기며,
업인과보의 법칙 속에서 업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수행자의 두 가지 할 일은
선업을 지음으로써 '복'을 증진시키는 일과
수행을 쌓음으로써 '지혜'를 증진시키는 일인 것이며,
그 두 가지는 오직 '지금 여기'라는 현재 속에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현재를 다스리면
과거와 미래까지 완벽하게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지나간 과거에 얽매여 괴로워하지도 말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얽매여 고민하지도 말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선행과 수행으로써 잘 다스리면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를 일깨우는 최상의 삶의 방식인 것이다.
업을 두려워하지 말라.
불교의 업사상은 업에 빠지고 집착하여 선악의 업장에 노예가 되라고 있는 가르침이 아니라
선악을 초월하고 업을 초월하여 더 많은 선업을 짓고,(제악막작 중선봉행)
그 마음을 청정히 하여 수행하도록 이끎으로써(자정기의)
부처님 가르침을 올바로 전하기 위한 가르침인 것이다.(시제불교)
- 법상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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