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법칙 제 3 화 - 깨달음이 시작이다(마음의 거울) 입니다
물을 찾는 물고기여
찾는 물은 그만 두고
마시고 있는 물이나 가져오게
제 1 화에서 물을 찾는 물고기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물속의 물고기기가 물밖에서 물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물을 떠나서 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물고기는 어떻게 해야 물을 찾을 수 있을까요?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합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모르는 것을, 몰랐던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무지(無知)를 깨뜨린다는 얘기입니다.
마음이라는 이 물건을 바르게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마음의 작용은 아는 것 입니다.
마음은 스스로 아는 존재이지만 !
그 안다는 것은 도구를 통해서 전달되고 또 전달받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마음이 사물을 보고자 하면 눈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봅니다.
듣고자 하면 귀를 통해서 듣습니다.마찬가지로, 냄새는 코를 통해서,
말은 입을 통해서,감촉을 느끼는 것은 몸의 신경을 통해서 합니다.
그런데 눈으로 보는 것을 우리는 보통 '보고 안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귀로 듣고 안다,냄새 맡고 안다,
말하고 안다,
느낌을 안다는 표현이 있씀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무심히 쓰는 말 가운데 이렇게 눈 귀 코 혀 입 몸을 통해서 하는
마음의 작용을 보통 안다 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음이란 본래 아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본래 아는 것 자체라면 마음 스스로가 보고 듣고 말하면 될텐데,
왜 굳이 눈을 통하고 귀와 입을 통해서 의사를 전달하는지
새삼 의문이 들지 모르겠습니다.참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말입니다.
다음은 마음의 작용 가운데 의식작용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보통 앞에서 는 눈.귀.코.혀.입.몸은 마음이 육체라고 하는 도구를 통해서
작용을 일으켜 쓰는데 비해서 정신적인 도구를 통해서 하는 마음의 작용이
바로 '의식'입니다.
의식이란?
한 마디로 마음이 내리는 판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생각이라고 하면 더 이해가 빠르겠군요.
칠정(七情)이라고 해서 사람에게 의 일곱 가지 감정이 있습니다.
기쁘고 화나고,슬프고 즐겁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내는 것 등을 말하는데,
이 칠정은 그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눈.귀.코.혀.입.몸을 통해서
작용한 결과로 얻게 되는 생각입니다.
가령, 불을 만지다 손에 대이면 뜨겁다고 느끼면서 화가납니다.
그리고 불은 뜨거운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다시 불을 만지게 되면
훨씬 조심하게 됩니다.
마음은 이러한 과정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생각함이란바로 이러한 칠정을 통해서
판단하는 사람의 의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마음은 일체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주라고 얘기했습니다.
일체유심조를 기억하시죠?
지금 창 밖으로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도 마음이 만든 선물입니다.
수천 수억만개의 눈송이는 단 하나도 똑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같은 하얀 눈(雪)으로 보이는 것은,같은 업(業)을 갖고있는
수천 수억만개의 마음들이 같은 업권(業圈)에서 비슷한
마음의 작용을 한 결과로써 나타난 것입니다.여러분이 지구에 태어나고,
대한민국에 태어나고,경기도 포천에 태어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구라는 같은 업권,경기도 포천이라는 같은 업권의 비슷한 업을 지은 결과로
여기에 태어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정과 무정이 개유불성이다(有情無情皆有佛性)."당시에는 인도말로 하셨겠지만 이렇게 한문으로 번역된 말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앎이 있는 것이나 앎이 없는 것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앎이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합니까?
사람,동물(세포,박테리아 바이러스등등),식물등의 마음은 !?아는 작용이 있습니다.
배고프면 먹고,피곤하면 잠자고,
종족을 번식하고,
싸우고,위로하고등
참 많은 마음의 작용이 있습니다.
다만, 식물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생각이 거의 없으며, 세포나 바아러스등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지만 생각이 아주 단순합니다.
그러다가 곤충 새 포유류등으로 올라 오면 생각도 다양해지고
움직임도 훨씬 빨라지지요.
인간은 어떻습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앎을 보통 지식이라고 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우쭐대는 인간은 생각이 다양함을 넘어서 너무 복잡합니다.
인간은 그 앎이라는 생각의 도구를 아주 잘 활용해서 우조선을 타고달나라도 가고,
컴퓨터도 만들고, 수천미터 바다밑도 다닙니다.
그러나 가공할 만한 살생무기를 들고 서로 죽이는 전쟁을 지금까지
쉬지 않고 있습니다.너무 발달된 생각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되레 피곤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유정이란 ?이렇게 앎이 있는 존재,
생각할 줄 아는 존재를 말합니다.
무정이란 무엇일까요?
돌멩이,흙,광물질,물 바람등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물질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함부로 취급하는 이러한 물질들도 다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돌멩이, 물 , 쇳덩이에게도 사람과 같은 마음이 있다니, 믿어집니까?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돌멩이는 마음은 있으되 그 마음의 작용이 거의 완벽하게 멈춰버렸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부처님은 무기(無記)라고 하셨습니다. 기록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돌멩이는 백날을 때려도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유정무정이 다 개유불성이라고 말씀하신;;궁극적인 의중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면
바로 오늘의 주제인 '깨달음'에 아주 가까이 간 것입니다.
마음 밖에는 마음이 없다.
마음을 떠나서는 단 한 물건도 설 수 없다.
그렇습니다.오직 마음 뿐입니다.
그러니 이 삼천대천 세계의 삼라만상 그 어떤 것이라도
마음 아닌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마음만으로 꽉 차있는 세계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보는 물질세계란,업따라 윤회를 거듭하면서 몸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어 옷만 갈아 입을 뿐 그 근본은 오직 마음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의중입니다.
이 부처님의 말씀이 분명히 이해가 된다면 이 산승(山僧)의 넋두리가
오늘 헛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마음이란 어떤 물건인가를 살펴 볼 차례입니다.
먼저,함허득통(含虛得通) 선사라는 분의 금강경(金剛經) 설의에 나오는
게송을 보겠습니다.
한 물건이 있으니
이름과 모양이 끊어졌고
옛과 이제를 꿰었으며
한 티끌에 있으되
온 누리를 삼켜버렸다.
안으로는 뭇 묘함을 머금었고
밖으로는 뭇 사물과 일에 응하면서
하늘과 땅과 사람에 있어서 이것이 주인이고
일만 가지 모든 법에 이것이 왕이로다.
넓고 벽 없음이여 그 비할 것이 없고
높고 끝없음이여 그 짝할 것이 없도다.
신묘하지 않은가?
허리를 구부리고 펴는데 있으며
은은히 보고 듣는데 있으니
현묘하지 않는가?하늘과 땅보다 먼저여서 그 비롯함이 없고
하늘과 땅이 다 없어진 뒤에도 그 마침이 없으니
있다 할 것이냐 없다 할 것이냐 나 모르겠다. "
마음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습니까?
누군가가 당신의 마음을 나에게 보여주세요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여러분의 마음을 보여 주겠습니까?
모양도 없고 어떤 빛깔도 없는 이 마음을 보여줄 재간이 있습니까?
지금 이 마음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또 생각하면서도 마음을 볼 수 없습니다.
물 속에 있으면서 물을 찾는 물고기의 처지와 무엇이 다릅니까?
앞에서 마음을 떠나서는 마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동서남북상하 그 어디를 둘러 봐도 온통 마음뿐인데,
마음을 보려고 하면 마음을 결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사라진 것입니까?
아니면 흔적을 남기지 않는 마술을 부린 것입니까?
마음은 한 번도 여러분 곁에서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마술을 부려서 흔적을 지운 것도 아닙니다.
마음은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태어난 적도 없고, 멸해서 사라진 적도 없습니다.
마음은 상주불멸(常住不滅)입니다.
항상 머물러 있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마음의 실다운 모습(실상實相)이라고 합니다.
마음과 비슷함을 지닌 것이 허공입니다.허공에 모양이 있습니까?
허공이 빛깔을 가지고 있습니까?
모양과 빛깔이 없는 허공이기에 허공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허공이 없는 것입니까?만약 허공이 없다면!!
바람도 번개도 구름도 아니 이 산하대지가 서 있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단 5분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무정한 물건으로서 가장 큰 것이 바로 허공입니다.
유정한 물건으로서 가장 큰 것은 바로 마음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허공이고 허공이 마음입니까?
허공도 마음이 만든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허공은 스스로 아는 그 앎의 작용이 없습니다.
마음과 허공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스스로의 앎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이제 마음을 깨닫는 얘기를 하겠습니다.
마음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비록 두 손으로 감싸서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글로써 말로써
보여 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이것은 마치 물을 마셔본 사람만이
그 물의 차고 더움을 말해 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물에 대해서 오래 연구하고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도
물을 직접 마셔본 사람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깨달음은 연구하고 생각을 많이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으로도 안됩니다.그러면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있다는 말일까요?
물을 찾는 물고기가!!밖에서 물을 찾고자 하는 생각을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 밖에서 물을 찾고자 하는 뒤바뀐 착각을 쉬어 버리기만 하면
그 고기는 즉시 물을 보게 됩니다.마찬가지로 꿈속의 몸을
나로 아는 착각을 벗어나면 마음은 스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꿈은 내 마음이 전개한 능력의 작용이지 실재 있는 세계는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내 육체도 !!마음이 부려쓰는 도구이지 몸이 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내몸을 이루고 있는 눈귀코, 팔다리는 나와 가장 가까운 인연들이
내 마음을 따라 모인 것입니다.
그것들도 또한 각각의 마음이기에 인연이 다하면 제 갈길로 가지요.
죽음이란 모였던 몸의 인연들이 각각 제 갈길로 흩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 말이 이해되십니까?
몸이 나의 실체가 아니라는 이 사실에 분명하다면,
몸이 나라고 집착하는 것은 마치 꿈속의 세상을 실재 있는 것인양
착각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반야심경( 般若心經)에
"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遠離轉到夢想 究境悅磐)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꿈속의 뒤바뀐 생각을 여의기만 하면곧바로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실상(實相:실다움)이보름달 처럼 완벽하게 드러나는 그 찰나를 가리켜
'깨달았다 즉, 견성(見性)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찰나간의 체험이지만 !!!!여러분도 그러한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몸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잊고 하늘도 땅도 사라져버린 그 순간!
그러한 때,이러한 경지를 뭐라고 이름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지금과는 다른 체험.
오직 마음이라는 둥근 달이 홀로 빛나는 것을 안다면.....,얼마나 쉽습니까?
오죽하면 세수하다 코만지기 보다 쉬운 일이라고 했겠습니까?
서산대사와 소요스님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할테니
마음을 깨닫고자 하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루는서산대사(西山大師)에게 소요선사란 대강백(경전을 강의하는스님)스님이
찾아 와서 마음을 깨닫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서산대사는 그 날로부터 소요스님에게 공양주노릇을 시키고,
부목,채전,원두 심지어는 시봉일까지 시키면서 부처님의 법문은
단 한 번도 해주지 않았습니다.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했던 소요스님은
어떻게든 법문을 물어볼려고 했지만 서산대사는 그때마다
밥해라 빨래해라 나무해라등 물을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가끔 불러다 능엄경(楞嚴經)한 구절씩만 말해주었지요.
그러나 소요스님에게 능엄경은 자기가 학승들에게 강의하던
달달 외는 경전이라서 귀에 들어 올리가 만무했지요.
제자보고는 궂으일만 가려 시키면서 ;;당신은 서늘한 평상에 누워서 낮잠이나 자는데,
소요스님이 가만히 보니까 웃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서 보는 것이었습니다.
저걸 보면 깨달을 수 있나해서 어깨너머로 엿보기라도 하면
얼른 주머니속에 숨겨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깨달을 날만 학수고대했는데 영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10년 째 되던 해,드디어 소요선사는 떠나기로 작정하고
하직인사를 합니다.그 때 인사를 받고 아무 말이 없던 서산스님은
주머니에서 때묻은 그 책을 주면서,혹연 길을 가다 살길이 망막해지면
펴셔 보라고 당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시신은 네가 화장할 것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하산을 하던 소요스님은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그만 학질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고갯마루에서 혹심한 열과 고통으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문득 서산대사가 주었던 그 책이 생각나서 얼른 펴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적혀있었습니다.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자여
찾는 소는 그만 두고
탄 소나 끌고 오너라
이 시를 본 순간 소요스님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죽음의 고통도 없어지고 하늘 땅도 온통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아! 이것이다 바로 이것이야!
죽어가던 소요스님은 어느새 환희의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서산스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서산스님을 뵙기 전에는
이대로 죽을 수가 없다는 분심이얼마나 컸던지
일시에 그 병이 다 나아버렸습니다.
일보일배를 하면서 서산스님에게 다시 가니 서산스님은 이미 앉아서
열반에 든 후였습니다.서산대사의 예언대로 소요스님은
서산대사의 시신을 정성껏 다비해 모셨다고 합니다.
이 일화에서 여러분은 어떤 교훈을 얻었습니까?
첫째는 ,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그 지극한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깨달음에는 반드시 스승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인가(印可)를 받은 스승의 지도가 없다면혼자 깨닫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설령 그러한 체험이 수 십번 있었다 해도 그것은 바른 견성이 아니라
십중팔구 식견(識見:아름알이)에 놀아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고 반듯이 깨닫고자하는 지극한 간절함이 없다면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 지도를 한다해도 방문의 문고리를 열고
방안을 들여다 보는 사람은 자기자신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눈이 내린 세상은 은백의 비단을 펼쳐 놓은 듯 깨끗하고 맑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맑고 깨끗한 물건입니다.
업으로 물들어져서 그 순수함을 잃어버렸지만 그 근본은 변함이 없습니다.
마치 더러운 똥통에 황금이 들어 있는 것과 같아서 그 황금은 몇 천년이 지나도
그 순수한 황금의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내 마음을 내가 깨닫는 다는 것은 참 우수운 일입니다.
거울속의 내 모습을 보고 내가 있씀에 안도하는 것과 같은 꼴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거울로,알고자 하는 내 마음을 다시 비춰 보지 않는다면
깨달음이란 얻을 수 없습니다.깨달음이 바로 시작입니다.
무지를 깨뜨리는 시작이고,바른 수행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시작이고,
<혜원스님 동국대 선학과 교수>
성불의 시작인 것입니다.
나무 비로자나불
나무 노사나불
나무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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