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권력 독점해 성공하면 곧 타락하는 ‘역설’
종교 다원화와 선택의 자유는 되레 종교엔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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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가치 다원화 현상이다. 민주사회는 사람마다 자기가 원하는
가치를 추구하며 살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법과 제도로 보장해주는 사회이다. 타인의 동등한 권리를 존중하고 해를 입히지 않는 한 누구든 자기가 선택한 善(good)을 추구하며 원하는 방식으로 살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 아무도 나에게 특정한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을 강요할 수 없다.
宗敎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와 종교가 분리되고 종교가 다원화된 현대 민주사회에서는 누구든 자기가 원하는 종교를 선택해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누린다. 누구도 나에게 종교를 강요할 수 없다. 심지어 부모라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부모가 자식의 가치관, 인생관, 종교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 장성한 자식은 자신이 택한 종교와 가치관에 따라 살며 부모라도 간섭할 수 없다. 서구 사회는 물론이고 가족의 유대가 매우 강한 한국 사회에서도 우리는 가족 구성원들이 종교를 달리하는 경우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종교적 가르침과 세속적 지성 사이의 괴리와 갈등은 운명
價置 多元化와 宗敎 多元化는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과거 전통 사회에서는 주로 종교가 사람들의 가치관과 인생관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무엇이 인생이 추구해야 할 窮極的 善인지, 어떤 것이 좋은 삶이고 바람직한 삶인지 宗敎가 그 規範과 理上을 제시해주었다.
그리고 宗敎는 이러한 가치들이 絶對的인 것이라고 가르쳤다. 宇宙의 理法에 根據한 것이든 혹은 超越的 神의 뜻과 명령이든, 인간에게는 마땅히 따라야 하는 절대적 도리와 규범이 있으며 추구해야 할 가치와 덕목이 있다는 것이 종교의 가르침이었다. 宗敎는 傳統 社會의 道德的 秩序와 삶의 方式의 基礎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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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종교의 역할은 근대 세속화(secularization) 사회로 들어오면서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현대사회에서도 과거 종교의 역할이 관습이나 전통으로 상당 부분 남아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대인의 의식은 종교가 제시하는 전통적 가치관이나 인생관과는 쉽게 건널 수 없는 괴리를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사상적으로 주도한 것은 인간의 이성을 진리와 도덕의 준거로 삼은 18세기 서구의 계몽주의였다.
이로 인해 과학적 진리와 종교적 세계관, 비판적 역사와 신화적 전승, 그리고 자율적 윤리와 전통에 의거한 타율적 윤리 사이에 극복하기 어려운 괴리가 발생했으며, 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상이다. 서구 그리스도교 사회와 유대교 사회가 이러한 위기를 제일 먼저 경험했지만, 지금은 세계 어느 사회, 어느 종교도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되었다. 종교가 적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실재에 대해 말하고 있는 한, 그리고 성인의 말씀이나 경전의 초월적 권위를 주장하고 있는 한, 종교적 가르침과 세속적 지성 사이의 괴리와 갈등은 피할 수 없는 현대 종교의 운명이다.
역사적 연구는 종교의 ‘신화’적 권위 무너뜨려
우리는 현대 종교가 직면하고 있는 세속적 지성의 도전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과학적 세계관과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의 도전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사고방식의 도전이다. 둘 다 만만치 않은 도전이지만, 이를 외면하는 종교는 현대인에 의해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종교의 ‘현대화’란 곧 이 두 가지 도전에 종교가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적 세계관과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이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실재나 사후 세계에 대해 말하는 종교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며, 현대 종교는 끊임없이 과학적 세계관이나 사고방식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할 수밖에 없다.
현대 세계에 보편화된 역사적 사고도 과학적 합리성 못지않게 종교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다. 역사적 사고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변화되어 왔다. 인간의 사회와 문화 뿐 아니라 자연도 진화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 자체도 영원한 것이 아니라 ‘빅뱅’이라는 시간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영원불변한 것, 절대적이고 신성불가침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變하고, 變할 수 있으며, 또 變해야 한다는 생각이 현대인의 상식이 된 것이다. 인간이 만든 제도와 사상은 초월적 기원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모두 역사적 산물이며 상대적이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종교가 아무리 초월적 진리, 절대적 진리를 주장한다 해도, 현대의 역사적 사고는 종교들이 언제 어떠한 역사적 상황과 문화적 조건 속에서 시작해서 발전했는지, 신성하게 여기는 경전과 교리와 제도들이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어떤 과정을 통해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는지를 의심의 여지없이 밝혀주고 있다.
歷史的 硏究는 宗敎의 ‘神化’的 權位를 무너트렸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종교가 지향하는 실재(Reality) 자체는 절대적이고 불변할지 모르나, 그것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그것과 관계를 맺는 인간은 역사의 제약을 받는 존재로서 우리가 사용하는 종교적 언어, 사상, 교리, 제도 등은 모두 역사적 우연성을 띠며 시간적 변화의 운명을 벗어나기 어렵다.
인간이 만든 것은 언제든지 인간이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보편화되면서 역사적 상대주의, 문화적 상대주의가 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각 종교의 ‘근본주의자들’(fundamentalists)이 이런 상황에 불안을 느껴 자기 종교의 어떤 축소된 부분을 절대화해서 고수하려고 하지만, 이는 결국 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으로 보인다.
儒敎도 佛敎도 그리스도敎도 獨占의 時代는 갔다
과학적 세계관과 역사적 상대주의의 도전으로 권위를 상실하기 시작한 현대 종교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이미 언급한 현대의 개방사회, 가치다원사회 자체이다. 민주사회의 혜택이자 정신적 혼란의
원인이기도 한 가치다원화, 종교다원화 현상 자체가 이미 종교들의 상대화를 수반한다. 가치관과 종교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서는 어느 종교도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기 어렵고 사회의 통일적 가치관을 제공하기 어렵다.
인생의 중요한 가치들이나 종교적 가르침이 개인의 주관적 선택의 대상이 되어버림으로써 사회적 보편성이 부여하는 권위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단’을 뜻하는 영어의 ‘헤러시’(heresy)라는 말이
‘선택’을 뜻하는 그리스어(hairesthai)에서 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곧 이단을 의미했던 시대가 傳統社會라면, 現代社會는 이 이단적 선택이 모두에게 자유와 권리로
보장되는 사회이다.
하지만 현대 종교가 과학적 세계관이나 역사적 사고의 도전을 오히려 현대화의 기회로 삼아야 하듯이, 개방사회의 가치 다원화와 종교 다원화 역시 비관적으로 보거나 개탄할 필요는 없다.
宗敎의 多元化와 選擇의 自由는 오히려 宗敎에게 藥이 되고 새로운 機會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현대의 종교다원 사회가 종교들에게 주는 새로운 기회를 두 가지 측면에서 말하고자 한다. 하나는 종교의 홀로서기와 이로 인한 종교의 순수성과 진정성 회복이며, 다른 하나는 종교간 대화의 기회이며 이를 통한 각 종교들의 창조적 발전이다.
한 종교가 사회의 지배적 종교로 부와 권력을 독점하던 시대는 영구히 갔다. 적어도 민주사회, 가치다원 사회, 종교다원 사회로의 이행이 역사의 돌이킬 수 없는 추세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어느 종교도 지나간 시대에 누렸던 독점적 지위를 다시 누릴 수 없으며 거기에 향수를 지녀서도 안 된다. 조선조 시대 유교나 고려 시대 불교가 누렸던 것과 같은 영광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또 단지 ‘전통’이라는 이름(전통문화, 전통종교)에 의지해서 혜택을 기대할 수도 없다.
1970-80년대부터 급속히 성장해서 한국 사회의 주류 종교의 하나로 자리 잡은 그리스도교(개신교, 가톨릭) 역시 이제는 권력의 유혹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현대 다종교 사회, 탈종교 시대의 종교들은 외부의 도움보다는 ‘홀로서기’를 해야만 한다. 어떤 종교든 순전히 메시지 자체의 힘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어느 종교도 국가권력이나 정부의 지원이나 시혜에 기댈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現代 宗敎는 純全히 個人의 靈魂과 靈性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게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종교는 이전보다 더 순수한 종교, 더 진정성을 지닌 신자들을 확보하는 종교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종교의 홀로서기는 종교들에게 ‘감추어진 축복’
이런 면에서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종교의 홀로서기는 종교들에게 ‘감추어진 축복’이 될 수 있다. 과거에 누렸던 특권이나 전통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종교 본연의 순수한 메시지에 의지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종교들이 출발 당시의 원초적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종교든 처음에는 소수의 종교로 시작했다. 사회적 기반이나 권력의 뒷받침 없이 순전히 창시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힘이나 도덕적, 영적 감화력으로 얻은 신자들이 뭉친 작은 공동체로 시작했다. 그런 공동체가 점차 성장해서 사회의 주류 종교가 되고 나아가서 한 나라의 국교, 한 문명권의 문화를 지배하는 종교, 그리고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세계종교로 되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은 종교로 하여금 값비싼 대가를 치르도록 한다. 인류의 종교사는 한 종교가 사회의 다수 종교가 되어서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되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초창기에 지녔던 영적 순수성과 역동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되면 개혁운동이 일어나고 새로운 종파가 생겨나지만 이들 역시 시간이 경과하면서 같은 운명을 되풀이 하게 된다. 종교들이 잃어버린 초창기의 모습을 흠모하거나 그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개혁의 이념으로 표방하고 나서는 것은 이 때문이다.
종교의 역설이라고나 할까, 종교에게는 ‘성공’이 곧 실패가 되는 것이다. 어느 종교든 한 사회의 다수 종교가 되는 순간 그 사회와 한 통속이 되고 사회를 변혁하고 문화를 주도해나갈 정신적 힘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엘케고르의 말 대로, 모두가 기독교인인 사회에서는 아무도 기독교인이 아니게 된다.
이렇게 볼 때 현대 다종교 상황은 반드시 종교에게 부정적인 현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모든 종교가 ‘소수’(minority) 종교가 될 수밖에 없는 현대 종교다원사회는 오히려 종교들로 하여금
본래적 순수성을 회복하게 만드는 기회를 제공한다. 경직화된 전통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나고 무거운
제도의 갑옷을 벗어 던져버림으로써 새롭게 비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반면에 과감한 개혁을 통해 홀로서기를 하지 못하는 종교는 결국은 현대 세계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모든 종교의 교리와 사상의 진위나 우열을 가릴 객관적 잣대는 없다
대등한 세력을 가진 종교들이 공존하는 종교다원사회에서는 종교가 권력의 독점만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독점도 상실하게 된다. 모든 종교는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진리 주장을 한다. 자기 종교의 가르침이나 교리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임을 주장한다. 하지만 종교다원사회는 이러한 주장의 현실성과 설득력을 약화시킨다. 한 사회의 다수를 신자로 확보하고 있는 종교의 절대적 진리 주장은 쉽게 설득력을 지니지만, 종교가 다원화된 사회는 그러한 주장에 사회적 기반을 제공하지 않는다.
지식사회학자들의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사회적 기반이 결여된 ‘지식’은 지식으로서 힘을 지니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나 초월적 실재를 말하는 종교의 경우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나와 대등한 지성과 도덕성을 지닌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다른 신앙과 종교 사상을 따르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종교지도자들이나 의식 있는 신자들에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제공하며 정신적 부담이 된다. 나의 종교가 가르치는 진리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진리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전부 거짓 아니면 열등한 가르침에 따라 살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종교들의 상이한 진리 주장을 평가할 수 있는 어떤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척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종교가 동의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의 척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어떤 위대한 사상가가 그런 척도를 발견했다 해도 종교들 모두가 거기에 동의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 종교마다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있으며 바로 그것이 진리의 척도라고 믿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교의 진리 문제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 중 하나이다. 종교가 제시하는 윤리에 관한한 모든 종교들이 수긍할 수 있는 보편 윤리, 세계 윤리(global ethics) 같은 것을 찾는데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모든 종교의 교리와 사상의 진위나 우열을 가릴 객관적 잣대를 찾기란 현실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불가능하다.
근본주의도 세속주의도 아닌 종교의 ‘제3의 길’
현대종교다원사회에서 종교들의 진리 주장을 대하는 태도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첫째는, 자기 종교만이 진리를 안다는 독점적이고 배타주의적인 주장(exclusivism)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 종교의 절대적 진리 주장을 포기할 수 없으며, 설령 타 종교의 진리를 부분적으로 인정한다 해도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진리는 자기 종교만 안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절대적인 진리 주장이 신앙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일로 간주될지 모르지만, 그런 입장을 견지하는 한 결국 타 종교를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이나 대화는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하며, 종교 간의 갈등은 어떤 형태로든 피할 수 없게 된다.
둘째는, 종교란 모두 다 근거가 없고 믿을 수 없다는 세속주의(secularism)의 입장이다. 많은 현대인들이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이런 입장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나 초월적 실재에 대해 안다고 주장하는 종교들의 진리주장에 회의적이고 부정적이다.
셋째는, 모든 종교가 자기 나름대로 절대적 진리(Truth) 혹은 궁극적 실재(Reality)를 경험하고 인식하지만, 이 진리는 역사적으로 제약되고 문화적으로 굴절될 형태로 주어질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어느 종교도 절대적 진리 인식을 주장할 수 없다. 진리 자체는 절대적이고 영원하지만, 이 진리를 접하고 아는 인간의 시각과 지식은 유한하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한 종교의 절대적 진리 주장은 오히려 그 종교가 지향하고 있는 초월적 - 형이상학적 혹은 인식론적 - 실재 자체에 대한 반역이고 우상숭배일 수도 있다.
설령 자기 종교가 말하는 진리가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라고 주장해도, 이 계시가 특정한 역사적 상황과 문화적 조건 하에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주어지는 한 결코 절대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리 자체 혹은 하느님 자신은 절대적이겠지만 인간의 진리 파악이나 하느님 이해는 유한하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모든 종교적 언어를 거부하는 세속주의(secularism)도 아니고 자기 종교만의 언어를 절대화하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도 아닌 제 삼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진리 앞에서 겸손하고 자기반성적인 입장이야말로 현대 세계에서 종교들이 진정성을 가지고 대화하고 상생을 넘어 창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장 성숙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종교 간 진정성 있는 대화는 창조적 발전 위해 필연적
종교사회학자들 가운데는 현대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가 처한 상황을 시장경제 상황에 빗대어 이해하기도 한다. 종교에 대해 냉소적 시각이지만 생각해볼 시사점이 있다. 시장 경제에서는 언제나 독과점이 문제가 된다. 한 기업이 자본이나 기술력을 앞세워 시장 점유율에서 동종의 다른 기업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지배력을 행사한다면, 이는 사회를 위해서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경쟁자 없는 기업은 횡포를 부리게 마련이다. 독과점은 또 기업 자체에게도 해가 된다. 경쟁이 없으며 발전이 없기 때문이다. 회사운영이 나태해지기 쉽고 새로운 제품이나 기술 개발을 게을리 하게 된다.
종교의 독과점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라고 독점욕과 지배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종교의 메시지는 인간의 욕망을 경계하지만 제도화된 종교는 항시 집단적 이기주의와 독점욕의 유혹을 받는다. 수많은 신도를 확보한 종교는 권력화 되기 마련이다. 경쟁과 견제가 없으면 권위주의적이 되고 타락한다. 다종교 상황은 이러한 폐단을 막고 종교들로 하여금 홀로서기를 강요하는 숨은 축복이 된다. 다종교 사회의 종교들은 당연히 서로를 의식하며 자극을 주고받는다. 경쟁의식도 갖게 된다. 경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무엇을 위한 경쟁이냐가 문제이다. 세력 확장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개인의 삶과 사회를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설득력을 지닌 메시지와 실천의 경쟁이냐가 중요하다.
종교 간의 진정성 있는 대화는 다종교 사회의 화합과 통합을 위해서 뿐 아니라 각 종교의 창조적 발전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종교학자들 가운데는 대화를 강조하는 현대 종교의 현상을 두고서 종교들이 시장을 독점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는 불가피한 타협의 산물, 혹은 현대 세계에서 점점 설 자리가 좁아지면서 공멸의 위기에 처한 종교들이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종교 간의 대화가 현대 종교들의 살아남기 작전의 하나라는 냉소적 시각이지만, 대화에 임하는 종교들이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사실 종교 간의 대화가 종교가 시장화 된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기를 위한 전략이거나 배타주의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풍토에서 독점욕을 은폐하고 영토 확장을 하기 위한 선교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런 대화는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것이 더 솔직하고 좋을 것이다. 결코 진정성 있는 대화, ‘상생을 위한’ 대화, 배우려는 자세의 겸손한 대화, 자기 종교의 개혁과 발전을 위한 창조적 대화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속주의가 지닌 장점과 매력, 아니 그 ‘위대성’을 간과해서는 안돼
나는 현대 다종교 사회의 종교간 대화는 비단 종교들 사이의 대화뿐 아니라 민주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근본정신과의 대화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더 나아가서 현대 종교는 세속주의적 지성의 날카로운 종교 비판과도 진정성 있는 대화를 해야만 한다. 모든 종류의 종교적 초월을 거부하는 세속주의는 종교의 적임에 틀림없지만, 종교는 이러한 세속주의가 지닌 장점과 매력, 아니 그 ‘위대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세속주의 지성들의 날카로운 종교 비판은 종교의 양심을 일깨우며 종교를 개혁하게 만드는 자극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속주의는 전통사회에서 종교가 보였던 횡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념에 따라 선택한 가치를 추구하며 전통이나 관습을 넘어 진정성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유와 권리를 확보해주는 민주 사회를 수립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민주주의는 단지 정체 제도나 체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라는 체제와 제도는 인간의 다양한 집단들이 상이한 종교와 신앙, 사상과 신념,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따라 자유롭게 살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제도라는 점에서 인류가 낳은 가장 성숙하고 위대한 제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단지 하나의 제도만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의 이념과 가치들과 덕목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나와 마찬가지로 타인 모두가 지닌 인격과 인권에 대한 존중, 나와 다른 가치관과 삶의 방식과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모두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존중, 법 앞에서의 만인의 평등, 평화로운 사회에 필수적인 사회정의, 그리고 공과 사의 엄격한 구별에 기초한 공직자들의 철저한 공인의식 등이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뒷받침 해주고 있는 정신적 요소들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신자들, 그리고 공직자들 가운데는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의식하지 못하고 지각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民主主義의 精神的 土臺 自體가 또 하나의 ‘聖스러운’ 理念이며 ‘宗敎’
민주주의의 기본적 가치와 질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국민들 가운데 일반화되지 않으면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껍데기에 불과하게 되기 쉽다. 정치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쉽게 모방하고 도입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배후에 있는 이념과 가치와 사고방식을 사회 구성원들이 내면화하고 자기화하는 일은 더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이는 우리 한국사회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정착 단계에 들어갔지만 혈연과 지연과 학연을 초월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나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별하는 공인의식 같은 것은 아직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종교계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종교의 신자이든 다종교 사회에서 타 종교에 대해 지켜야 할 민주사회의 덕목이 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작금 일부 개신교 신자들이 보인 몰지각한 행위는 바로 이러한 덕목이 아직 우리 사회에서 내면화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민주주의의 정신적 토대 자체가 또 하나의 ‘성스러운’ 이념이며 ‘종교’라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민주사회의 구성원 모두 - 남녀노소, 신분, 계층, 지위, 종교 소속 여하를 막론하고 - 가 존중하고 지켜야 할 절대적이고 성스러운 가치와 덕목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의 성전(sacred shrine)을 가지고 있다. 이 민주성전을 세우고 지키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고귀한 피를 흘렸고 생명을 바쳤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순교자들인 셈이다.
현대사회에서 종교간 대화는 따라서 단지 종교들 사이의 대화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성스러운 이념과 가치들과의 진지한 대화이어야 한다. 각 종교는 타종교들과의 대화 못지않게 민주적 질서가 요구하는 가치와 덕목들에 대해 자체의 입장을 확실하게 정립하고 가르칠 필요가 있다. 이는 현대 종교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사실 민주 사회가 지켜야 할 가치와의 대화가 종교 간의 대화보다도 더 선행하고 우선적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종교 간의 대화가 진정성을 지닌 상생의 대화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종교들은 타 종교와의 대화를 외치기 前에 민주사회의 근대적 질서와 가치를 가르치고 내면화하는 일에 먼저 힘을 기울여야만 한다.
韓國 宗敎界의 많은 問題들이 民主社會의 基本 常識과 德目의 결핍에서 發生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생이 아니라 상쟁의 대화, 창조적 대화가 아니라 갈등을 부추기는 대화
지금까지 나는 현대 다종교 사회 속에서 종교들이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고찰한 다음, 한국 종교계가 진정한 상생과 호혜의 종교간 대화를 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수적임을 지적했다.
하나는 민주 사회의 기본 질서가 요구하는 성스러운 가치와 덕목을 존중하는 자세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실재 자체는 영원하고 절대적일지 모르나,
그것을 추구하고 인식하는 종교들은 결코 절대적인 진리 인식을 주장할 수 없다는
역사의식과 진리 앞에서의 겸손한 자기성찰이다.
이러한 두 가지 필수적 자세가 결여된 종교간 대화는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한 대화, 은폐된 지배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진정성 없는 대화가 될 것이다. 상생이 아니라 상쟁의 대화, 창조적 대화가 아니라 갈등을 부추기는 대화로 쉽게 변질될 것이다.
- 길희성
-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넘다드는 통찰력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서울대에서 철학을 미국 예일대에서 신학을, 하버드대에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한 서강대 명예교수. 한완상 박사 등과 대안교회인 새길교회를 이끌었고, 최근엔 사재를 털어 강화도에 고전을 읽고 명상을 할 수 있는 ‘도를 찾는 공부방’이란 뜻의 심도(cafe.daum.net/simdohaksa)학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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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메일 : heesung@sog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