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심법문 (安心法問)
모든 法이 이미 공(空)하다면 누가 道를 닦습니까?
누구라는 것이 있으면 모름지기 도를 닦아야 하고,
만일 누구라는 것이 없다면 곧 도를 닦을 필요가 없다.
누구란 역시 나(我)이니,
만일 아(我)가 없다면 對相(物 :境界/相對)을 만나더라도 是非가 生起지 않을 것이다.
시(是: 옳다)란 나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지, 대상(상대)이 옳은 것이 아니요,
비(非: 그르다)란 나 스스로가 그르다고 여기는 것이지, 대상(상대)이 그른 것이 아니다.
마음(心)이 무심(無心)하면 바로 불도에 통달하게 된다.
경계를 對하되 見解(生覺)를 일으키지 아니하면 '도에 통달했다.' 하며,
경계를 對해서 곧 바로 통달해 그 본원(本源)을 알게 되면,
이사람은 智慧의 눈이 열린 것이다.
智慧로운 사람은 對相에 맡기고 自己에게 맡기지 아니하나니,
곧 취하거나 버리거나, 어기거나 따르는 것이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自己에게 맡기고 對相에 맡기지 아니하고,
곧 가지고 버리고 어기고 따름이 있다.
한 物件이라도 보지 않는 것을 '道를 본다(見道)'라고 하고,
한 物件도 行하지 않는 것을 道를 行한다(行道)라고 한다.
어떤 곳에 있더러도 머무는 바가 없으며,
行하는 곳에서 행하는 바 法이 없으면 곧 이것이 부처(佛)를 보는 것(見佛)이다.
만약 모양(相)에 執着하면 어디에서든지 헛것(虛象)을 보게 된다.
形象을 取하면 괴로움에 떨어지며, 法(相이 空한 性품, 즉 空性)을 觀하면 解脫하게 된다.
만약 生覺으로 分別하면 가마솥이나 화로불과 같은 苦痛을 받아
지금 여기에서 바로 나고 죽음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만약 법계(法界: 진리의 세계)의 性品을 본다면 곧 涅般의 性品이며,
分別하는 生覺만 없으면 곧 法界의 性品이다.
마음(心)은 물질(色)이 아니기 때문에 있는 것도 아니요,
끊임 없이 作用하여 멈춤이 없기 때문에 없는 것도 아니다.
또 作用하되 恒常 공(空)하기 때문에 있는 것도 아니요,
恒常 공(空)하되 恒常 作用하기 때문에 없는 것도 아니다.
마음 마음 마음이여 진실로 찾기 어렵도다.
넓을 때는 법계에 두루하고,
좁을 때에는 바늘조차 용납하지 않는구나.
<안심법문>
해설:
하루 종일 生覺해도 한 生覺도 일으킨 바가 없고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한 걸음도 움직인 바가 없구나.
어린 중생 한 生覺만 일으켜도 온 세상에 먼지 일어나고
어린 중생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벌써 六塗를 돌고 왔네.
상(相)을 보되 성(性)을 보면 견성(見性)인 것을
分別相에 醉해 하루 종일 울고 웃는구나.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부처인데 그 부처가 또 부처를 찾는구나.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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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님이 올린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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