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生死없는 마음(心)이 바로 自己 自身 입니다

장백산-1 2012. 3. 7. 14:25

생사없는 마음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참 선 화 두
深 潭 | 조회 22 |추천 0 | 2012.03.0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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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生死없는 마음(心)이 바로 自己 自身입니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瞬間은 自身이 意識하던 意識하지 못하던 自己의 마음(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보고 있다니까 깨달은 사람이나 마음을 볼 수 있지 어떻게 중생들이 마음을 볼수 있느냐고 보통사람들은 말합니다.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을 알았다해서 비로소 물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물속에서 살게되고, 그것을 몰랐다해서 물밖에 나와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을 알았거나 몰랐거나 恒常 물속에 있습니다. 그와같이 우리가 지금 조용히 앉아 있어보면 그것이 공부가 되었던 안되었던, 괴롭던 괴롭지 않던, 깨달았던 깨닫지 않았던 간에 自身의 마음(心)을 그대로 볼수 있습니다. 自己가 自己 마음(心) 속을 들여다 보니까 自己의 모습을 보고있는 것입니다. 왜 이리 피곤한지 왜 이리 불안한지 편안한지 느낍니다. 그러나 남의 마음이 왜 피곤하고 괴로운지는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生覺이라는 것은 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아니라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自己 속의 生覺을 남은 모르지만 自身은 볼 수 있습니다. 自身이 조용히 좌선을 하려고 앉아 있으면 무엇인가 괜히 아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깨닫거나 깨닫지 못했거나 누구든 恒常 自己 마음(心)속을 보고 있습니다. 조용히 좌선하고 있을 때의 그 모습은 환자가 내 몸이 어떠한지를 알기 위해 진찰대에 自身을 올려놓은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진찰해 달라고 하지 않더라도 自己 스스로 內面의 움직임과 精神的 肉體的 狀態를 느낄 수 있고 알 수가 있기 때문에 잠시 5분동안이라도 앉아보면 느낀대로 그대로 알 수 있습니다. 이 瞬間에도 온갖 煩惱妄想과 앞으로 있을 일이 짧은 瞬間 映畵의 畵面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그렇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生覺을 일으킬 때는 生覺이 일어나고 그렇지 않을때는 生覺을 놓아버리고 모든것을 超越해 本心에 돌아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비치고 앉아있는 그 瞬間부터 조는 사람도 있습니다. 入定하고 있을 때의 自己 마음(心) 속과 入定에서 나온 以後의 마음(心) 속을 스스로 比較해 본다면 그것은 이미 自身을 본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면 이렇게 내 마음(心)속에 昏沈이 많은가 하고 生覺해 본다면 그것은 잠이 많다는 진단이 나온 것입니다. 잠도 오지 않는데 어찌 앉기만 하면 온갖 妄想이 일어나는가 하고 生覺해 본다면 그것은 이미 自身의 마음(心)속에 妄想이 많다는 것을 알게된 것입니다. 우리가 意識하고 있을때는 소리가 나면 소리 인줄 알게되고 냄새가 나면 냄새인 줄 알게되고 물건이 오면 물건인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깨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잠자고 있는 사람은 소리가 나도 소리인 줄 모를 것이고 냄새가 나도 냄새인 줄 모를 것이며 물건이 와도 물건인 줄을 모릅니다. 이렇게 소리를 알고 냄새를 알고 물체있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깨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깨어있으면 이 生覺, 저 生覺, 온갖 그림자들이 오고가고 합니다. 自己 속의 온갖 그림자들이 오고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自己自身은 압니다. 잠자고 있는 無意識 狀態와
          깨어있는 意識의 狀態는 分明히 區分이 됩니다. 모를 때 그것을 昏沈이라 하고 혹은 그것을 默의昏沈 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心) 속에는 깨어있을 때는 온갖 生覺의 그림자인 煩惱妄想이 오락가락 하고 있고, 또 그렇지 않고 無意識 狀態에 들어있으면 바로 昏沈이 됩니다. 이 두가지 狀態 卽 잠이 아니면 妄想, 妄想이 아니면 昏沈, 이것이 오고가고 하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 중에 어느쪽이 많으십니까. 量에 관계없이 바로 이 두가지가 自己 마음(心) 속의 障碍物입니다. 煩惱가 가리고 있다해서 마음(心)이 도망간 것은 아닙니다. 虛空에 구름이 덮였다해서 虛空이 도망간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虛空 속에 구름이 끼여 그 뒤의 太陽을 보지 못하는 것 처럼, 마음(心) 속에 昏沈이 꽉 찼고 無意識 狀態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해서 마음(心)이 어디로 도망간 것은 아닙니다. 혹 어떤이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내가 깊은 잠에 빠져있을때 내 마음(心)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하는 疑心을 하기도 합니다. 마음(心)은 物件이 아니므로 잠에 빠졌다해서 멀리 떠난게 아닙니다. 마음(心)은 오고 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虛空이 오고 갈 수 없듯이 말입니다. 다만 虛空에는 구름이 끼였다가 개이기도 하고 비가 왔다가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마음(心) 속에 煩惱妄想이 오고 갔다가 無意識 狀態가 되기도 하며, 다시 意識 狀態가 되기도 합니다. 또 마음(心)속의 內容이나 貌樣이 자꾸 달라지고 바뀐다 해서 마음(心)이 오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꿈 속에서 보면 生時와 똑같은 모양이 오고 가고, 물건을 보거나, 소리도 듣고, 음식도 먹고, 내몸이 오고 가는 것도 그대로 나타나서 모든 感覺이 生時와 똑같습니다. 우리가 生時에 무서워 하는 것들은 꿈에서도 역시 똑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꿈을 깨고 보면 아무것도 오고 간 것이 없습니다. 꿈에서 남에게 당했더라도 놀래서 꿈에서 깨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데 그것을 꿈에선 事實대로 느낍니다. 느끼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것은 연못에 돌을 던지면 돌이 물에 들어가자마자 그 波紋이 한참 오래 갈듯 하지만 結局 없어지는 것처럼 흔적이 自己 마음(心)에 남아서 무엇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實在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心) 속의 生覺이나 느낌이 꿈으로 모양으로 나타난다해서 마음(心) 自體가 오고 가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것이 아무리 自己 속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마음(心)이 같이 따라 가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있던 生覺들이 없어졌다고 해서 마음(心) 自體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事實을 우리들은 確實히 알아야 합니다. 마음(心)이란 바로 自己自身입니다. 自己는 끝없는 過去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난 일도 없습니다. 난 일이 없다는 것은 同時에 죽은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독송하다보면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不生不滅, 不增不減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心)이란 物件이 아니라서 아무리 닦는다해도 맑아지는 것도 아니고 또 物件이 아니라서 때가 묻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혼자서 더럽다 깨끗하다 커졌다 작아졌다 自己 혼자 生覺하고 있는 것입니다. 虛空 속에 구름이 많으니까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이지
          虛空 自體가 커지고 작아지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또한 마음(心)이란 것은 그 量을 도저히 測定할 수 없습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마음(心)이라고 우리가 限界를 任意대로 나누어 斷定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크다고 한다면 마음(心)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음(心)이 큰 것이라 해서 우리가 잡아볼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形體가 없기 때문에 작은 것으로 치면 또 마음(心)보다 작은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마음(心)을 잡으려고 해도
          마음(心)은 形體가 없어서 絶對로 잡히지 않습니다. 우리가 罪를 지으면 형사가 와서 잡아다가 감옥에 가둘 수 있지만 마음(心)속으로 무슨 일(事)을 하던 아무도 本人自身을 가둘 수 없습니다. 그러나 自己 속에 일어난 生覺이 自己의 마음(心)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自身의 本모습을 가리다 보니 그것이 苦痛이 되고 여러가지 感情, 느낌으로서 自己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自己 속에서 일어난 모든 生覺과 煩惱妄想은 그것이 그림자로 나타나거나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소리가 되거나 빛이, 냄새가 되기도 합니다. 生覺으로 나타난 것은 어디까지나 生覺인데도 우리가 이런 것들에 사로잡히다 보니 정말 自己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生覺해보면 괴로움이다 고통이다 하는 것은 누가 나를 支配해서 나쁜 곳에 떨어뜨리거나 또 나를 좋은곳에 인도해 주거나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똑같이 편안하게 해주고 똑같이 즐겁게 해줘야지 왜 안한 사람, 괴로운 사람의 구별이 있는가 하고 불평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평을 해봤자 혼자 불평이지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우리가 좋다 나쁘다하면서 拘束받는 것은 自己가 自身을 拘束한 것에 불과합니다. 自己가 自身을 拘束했다는 것은 自身 속에 일어난 生覺이 自身을 괴롭힌 것입니다. 좋게 느끼거나 나쁘게 느끼거나 生覺이라는 것은 自己 마음(心)으로 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心)이 어떤 모양으로 自己 앞을 가리느냐에 따라 좋아지고 나빠지고 괴로워하며 여러가지 모양으로 스스로 느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自己 生覺을 마음(心)대로 하지 못하고 스스로가 自己 속에서 일어나는 生覺에 사로잡혀 끄달리고 괴롭다 괴롭다 하는지 처량하기만 합니다. 어느날 산에 있는 원숭이가 가만히 산 밑으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어떤 연못에 동그란 달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물에 비친 달은 진짜 달이 아니라 그림자인데도 환한 빛을 발했습니다. 그러자 원숭이는 생각했습니다. ‘저렇게 희귀한 달이 연못 속에 있구나!’ 달이란 원래 하늘에 있는 것인줄 알았던 원숭이는 연못속에서 환한 빛을 뿜고 있는 달을 보고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원숭이들은 달이 항상 동그랗게 있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달은 하루하루 모양이 변하고, 또 때때로 없어지기도 했습니다. 원숭이들은 어떻게 하면 저달을 잡아둘 수 있을까를 고심하던 끝에 문득 연못에 있던 달을 보고는 그것을 담아오고자 生覺했습니다. 그래서 원숭이들은 나무에 몸을 붙이고 사슬을 엮어 연못 속의 달을 건지려 했습니다. 아무리 해도 달은 건져지지 않았습니다. 달은 그대로 물속에 그림자로 남아있는 것이었습니다. 왜 원숭이가 달을 건지려 했을까요. 달인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림자인줄 알았다면 절대 그런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 마음(心) 속의 生覺은 연못의 달처럼 그림자(影)에 불과한 것입니다. 實地로 그런지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生覺해 보면, 生覺이 떠오르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눈을 감자 마자 生覺인 그림자(影)의 퍼레이드가 시작됩니다. 다시 눈을 뜨고 보이는 대로 그에 맞춰 生覺이 떠오릅니다. 잠자다 나타나는 生覺은 꿈(夢)이요, 이 꿈(夢)은 生時와 같습니다. 自己가 自己 마음(心)이 언제 어떻게 變할지 몰라 믿지 못하는 것은 普通 人間의 마음(心)입니다. 평소에 익힌 習性대로 이끌려 가는 것이 바로 人間의 마음(심입니다. 그 習性은 바로 우리의 業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努力하게 되면 우리의 나쁜 業生, 業도 차차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 마음(心)의 모든 煩惱妄想, 각자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身.口.意 三業 中 어느쪽으로 젖어왔냐 하는것, 말도 항상 善한 마음(心)으로 하는 生活에 젖은 사람은 누구를 대하더라도 恒常 공손하고 남에게 부드럽게 대합니다. 그것을 익혀왔기 때문입니다. 正反對로 恒常 남을 욕하고 중상모략하는 사람은 남을 보면 한마디라도 좋게 말할 줄 모릅니다. 이것도 習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안된다 나쁘다 하는 것만 알더라도 큰 힘이 됩니다. 다음에는 自身이 努力하면 됩니다. 그다음에 나쁜 生覺이 일어나더라도 그 한 生覺을 놓아 버리면서 좋은 쪽으로 돌리고 돌리고 하다보면 나쁜 習性이 저절로 일어났듯이 좋은 習性도 저절로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結局 그 모든 業의 因果는 自身에게 돌아옵니다. 내가 잘 살고 행복하고 오래 살려면 남을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自身의 根本마음(心)을 돌이키고, 좋은 生覺, 부처님의 가르침을 自身의 마음(心) 속에 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心)은 바로 부처(佛)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 지유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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