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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서거 102주기(3월 26일)---우국을 생각하다

장백산-1 2012. 3. 27. 00:35

 

 



안중근 의사 서거 102주기…憂國을 生覺하다
(CBS 노컷뉴스 / 변상욱 / 2012-03-26)


오늘은 안중근 의사 서거 102주기를 맞는 날이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이 1909년 10월 26일, 순국한 날이 1910년 3월 26일이다. 안중근 의사와 관련해 이토 저격사살을 주로 이야기하다 보니 그의 일생에 관해서는 소홀히 전해지는 느낌이다.


◇ 안중근 의사는 교육운동가이자 의병장

안중근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만인계 등 서민금융 사업 등을 하다 1905년 을사 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여비를 마련해 상하이로 가 국권 회복 운동을 시도했다. 뜻대로 되지 않고 부친상까지 당해 귀국해서는 평안도에서 석탄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구국의 뜻을 펴기 위해 다시 회사를 정리하고 교육사업으로 전향했다. 평안도에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고 황해도 돈의학교를 인수했으며 스스로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7년에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뛰어들어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일본의 방해로 국채보상운동도 실패로 끝나자 안중근 의사는 남은 방법은 독립전쟁 뿐이라고 생각하고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는데 가담했다.

 

이곳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에 가입해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이 때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당당하게 남자답게 용감히 싸워라’ 당부하고 아들을 떠나보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는 주로 함경도 쪽 국경을 넘어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는 게릴라전을 담당했다. 이 때 남긴 유명한 일화로 기습작전으로 일본군을 제압한 뒤 포로를 잡으면 국제공법 전쟁포로에 관한 규약을 엄수해 잘 돌보다 풀어주곤 해 그냥 처치해 버리자는 강경파들과 충돌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 어쩌구 하는 망발들이 이어지지만 이런 일화나 법정에서의 최후 진술 등을 살피자면 테러리스트가 되기엔 애당초 어울리지 않는 성품이다.

 

그러던 1909년 초, 안중근은 뜻이 맞는 동지들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했는데 이때 왼손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결의를 다졌다. 안중근 의사의 수인(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고 하자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하고 나섰던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은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 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라 웅변했다. 이 같은 뜻을 바로 해석하자면 안중근 의사가 일본의 강제합병 이후 독립투쟁이 아니고 조선이 독립국이던 시점에서 의병투쟁을 벌였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토 히로부미 같은 자들이 국왕을 속이고 여론을 호도하면서 전쟁을 획책하고 있다는 관점이다. 또한 그런 악적을 사살한 대한제국 의병 참모중장인 자신은 전쟁 포로이고 이 행위가 법정에서 유죄라면 그것은 일본국 전체가 이토 히로부미처럼 침략의 간계를 꾸미고 있는 증거라고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 검찰관이 감동하고 간수가 존경하고…

1910년 2월 13일, 안중근 의사의 두 동생과의 면회가 성사됐다. 동생들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깨끗이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어머니의 뜻을 전했다. ‘두 동생이 울면서 어머니의 말을 전하자 검찰관마저 눈물이 그렁해 목이 메었다’고 만주일일신문 1910년 2월 13일자가 보도했다.

 

안 의사는 두 동생에게 나이 드신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불효를 용서해 달라고 청했다. 큰 아들은 신부가 되었으면 좋겠으니 잘 키워 달라고 부탁했고, 동생에게는 조국의 발전을 위해 공업 또는 식림(나무심기)같은 사업을 하라고 당부했다. 이런 것이 우국(憂國- 나라를 근심하고 염려함)의 모습이리라.

 

또 ‘지바 도시치’라는 일본인 간수가 안중근 의사를 흠모해 기일이 되면 제사를 올렸고 자식들에게까지 안중근 의사의 제사를 거르지 말도록 당부하고 세상을 떠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은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안 의사의 시신을 유가족에게 인계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감춰버렸다. 사형이 집행된 여순 감옥의 동남쪽 야산인 동산파(東山坡) 지역에 묻혔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일제는 정확한 매장지를 알려 주지 않아 그의 매장지를 찾을 수 없었고,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유해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1945년 11월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 선생이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찾고자 노력해 이듬해 6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세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와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를 위해서는 네 번째 ‘虛墓’를 만든다. 2008년 3월 남북한이 함께 중국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 뤼순(旅順)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변상욱 / CBS 대기자


출처 :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2097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