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스님
동서고금 꿰뚫는 법문 담겨…40~60년 前 韓國發展 점쳐
현실정치에도 매서운 잣대 “政治家 손에 興亡盛衰 달려”
1950~70년대 한반도에 전쟁의 참화가 지나간 후 한국이 세계의 새로운 주인공이 되며, 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때 民衆의 時代가 到來한다고 누군가 말했다면?
그 때까지는 韓國이 세계 10대 經濟大國으로 成長하고 政權 交替를 이루고, 세계 3대 메이저 기구인 유엔에서
반기문 사무총장이 연임한데 이어 김용 다트머스대 총장이 세계은행 총재에 내정되는 등 한국인들이 지구촌의
주역으로 등장하리라곤 누구도 예상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그랬기에 ‘산승의 헛소리’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던 이가 오대산의 탄허 스님(1913~83)이었다. 그의 탄생 100돌을 10개월 가량 앞두고, 법문의 핵심만을 담은<탄허록>(휴 펴냄)이 출간됐다. 이 책엔 세간의 궁금증을 유발한 예언뿐 아니라 정치, 철학, 생사, 종교에 대해서도 동서와 고금을 꿰뚫는 지혜의 요체가 담겨 있어 대중의 갈증을 해소시켜주고 있다.
우선 관심을 불러오는 것은 한반도에 대한 그의 예언이다.
“지구의 주축 부분에 위치한 우리나라에서 인류 역사의 시작과 끝이 이뤄질 것이다. 5천년 동안 고난과 역경
속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의 불행한 역사는 머지않아 종결될 것이다. 새 시대가 오기 전엔 진통을 겪지 않을 수
없는데 이 고통이 지나면 남북통일의 서광이 보이고, 생각으로 감지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도래한다.”
일제 식민과 민족끼리 살육하는 전쟁의 아픔을 겪은 우리로서는 참으로 흥분되지 않는 예언이 아닐 수 없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한겨레>, <문화방송> 사장을 지낸 언론인 김중배는 탄허에 대해 “비록 몸은 산간에 있으나 눈은 宇宙의 運行을 뚫어보고자 하며, 부정적이고 피해망상이라 할 수 있었던 우리 역사의식에
새로운 긍정, 새로운 용기를 불어 넣었다”고 평했다.
한반도와 달리 일본에 대한 그의 예언은 가혹하다. 백범 김구를 도와 독립운동을 했던 부친의 영향일 수도
있다. 그는 “지난 5백년 동안 무려 49차례나 우리나라를 침략한 그 죄악의 과보를 받게 될 것”이라며
‘일본 침몰설’을 제기한다.
呑虛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도 정치지도자들에게 “우리의 精神 哲學을 굳건히 하지 않고
선진국이 될 수 없다”며 精神文化院 설립과 南北和合 방안을 건의하는가 하면 대전 국립묘지의 터를
잡아주기도 했다.
하지만 산사의 노승의 말로 보긴 어려운 매서운 잣대를 현실 정치에 들이댔다.
그는 한반도의 밝은 미래를 제시하면서도 “무엇보다 政治家의 役割이 막중하고,
그들이 손에 興亡盛衰가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 사람이 아무리 밝다해도
萬民의 총명을 모으는 것보다 밝지는 못하다”며 독단과 독불을 경계했다.
그는 노나라 정승이 공장에게 ‘우리나라에 먹을 게 없다’고 걱정하자 공자가
‘적은 것은 걱정하지 말고 먼저 公平하게 分配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 한
예화를 들며, “탐심이 많은 지도자는 권력을 통해 제 욕심만을 채우므로 백성들이
곤고해진다”고 경고했다.
呑虛는 “한 사람만 소득이 높아서는 되지 않고 모두가 평등하게 춥고 배고픈
사람이 없어야 하는데, 만약 한 사람이 1百萬名이 먹을 것을 지니고 있다면 이것은
政治 不在의 社會임에 틀임 없다”고 꼬집었다.
탄허는 또 노나라 정승이 ‘우리나라엔 도둑이 많아서 정치를 못하겠다’고 하자,
공자가 ‘당신이 욕심을 안 내면 백성은 상금을 주고 도둑질하래도 하지 않을 것’
라고 답한 문답을 들며 “솔선수범이 나라를 살리는 최선의 길”임을 제시했다.
탄허는 “최고의 지도자가 小人일 때는 그에 따라 10퍼센트의 極惡質形(아주 악질) 관리가 등용되어,
10퍼센트의 極善質(아주 선한 부류)은 모두 암혈에 숨을 수밖에 없어 백성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고
이렇게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수출이 늘어나고, 눈 뜨고 나면 수십 개의 대형 공장들이 들어서고, 쌀밥에 고깃국을 먹게 되고,
우아하고 세련된 옷을 입는다고 해서 極度의 精神的 스트레스와 人間關系에서 오는 갈등으로 倫理와 道德,
宗敎와 眞理를 외면한 채 혼미에 빠져 있는 사회를 과연 발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느냐”면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일을 과감하게 잘라내고 정화하는 것만이 福祉社會에 좀 더 빨리 도달할 수 있는 길”
이라고 말했다.
그가 노승일 때도 정치가들에게 젊은이들의 말을 경청하라고 권한 것도 예사로는 보이지 않는다.
탄허는 정치가에게 “돈벌이 하는 기업가의 건의나 주장보다는 밤새워 고민하고 국가의 미래를 주시하는
학자, 철학자 그리고 종교가의 말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권하며 이렇게 채찍했다.
“政治만을 위한 政治는 百害無益이다. 眞實로 人間을 위한 政治일 때만 그 기강이 바로 세워질 수 있다.”
◆ 탄허 스님은
呑虛는 全北 金提에서 태어나 이미 동양사상의 한 경지를 이룬 상태에서 조계종
초대 종정인 한암 스님과 20여 통의 서신을 주고 받은 끝에 21살에 강원도 오대산에
출가했다.
그는 스승 한암의 증명에 의해 23살 때 이미 승려들에게 불경을 강의하기 시작했고,
26살 때 훗날 조계종 종정이 된 고암 스님과 탄옹 스님 등 대선배 스님들에게 불교의
정수인 <화엄경>을 설했다. 이어 42살 때엔 한암에 이어 월정사 조실로 추대돼 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탄허는 한자로만 100만자로 너무도 방대하고 유·불·선에 통달하지 않고선 해석이
불가능한 <화엄경> 80권을 붓다 이래 최초로 자국어로 번역해낸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10여년 간 매일 원고지 100장씩 쓰는 초인적인 작업을 거쳐 원고지 6만2천5백장
분량의 <신화엄경합론> 이름으로 내, 원효·의상 이래 최대의 불사를 이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는 불교를 뛰어넘는 선각자이자 경세가이자 ‘현자들의 스승’ 구실을 했다.
탄허보다 10여년 연상인 함석헌(1901~89) 선생이 그를 자주 찾아 동양학을 물었고,
자타칭 인간국보였던 국문학자 양주동(1903~73) 박사는 탄허로부터 <장자> 강의를
들은 뒤 “장자가 다시 살아 돌아와도 탄허만큼은 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탄허불교문화재단 이사장 혜거 스님은 1960년대 초 여름 영은사에서 49재를 모실
때 한 밤중에 큰 바람이 불어 문짝이 펄렁거리고 모든 호롱불이 일시에 꺼져 모든
대중이 우왕좌왕 할 때 탄허 스님만은 <금강경>을 마지막 구절까지 독송하며 동요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
그는 또 “탄허 스님은 밥짓고 일하느라 공부할 수 없는 공양주와 부목까지 함께
공부하도록 하기 위해 아침 공양 지을 때, 점심 공양까지 한꺼번에 밥을 짓도록 해
3년간 찬밥으로 점심 공양을 때웠을 정도로 공부하려는 이들을 돕는데 남달랐다”고
회고했다.
◆ 탄허 스님이 보인 예지력
1949년 어느날, 탄허는 개미 떼가 자기들끼리 싸움을 해서 오대산 중대 법당과
뜰에 수백마리씩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를 본 뒤 역학 원리로 난이 일어날 것을
알고 상좌들을 경남 양산 영축산 고지에 있는 백련암으로 피신시켰다.
또 월정사의 한 암자에서 <신화엄경합론>을 번역하고 있던 그는 1968년 가을
장서와 번역 원고들을 모두 삼척 영은사로 옮겨두었다. 그러자 울진·삼척에 북한
무장간첩 120여 명이 침투했다. 월정사에 군단사령부가 세워져 소탕작전을 하면서
암자는 폐허가 되었다. 재가 될뻔한 ‘필생의 원고’를 미리 구해낸 것이다.
탄허는 월남전도 정확히 예언했다. 당시는 미국을 도와 국군이 파병돼 남한엔
‘미국의 승리와 월맹 타도’의 분위기가 고조되던 때였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숭산
스님이 “미국이 가지고 있는 핵무기 하나면 월남은 꼼짝 못할 것”이라고 하자
탄허는“역학의 원리를 볼 때 월남은 남쪽으로 화(火)인데, 미국은 태방으로 금(金)
이어서 금이 불에 들어가면 녹을 수밖에 없다”며 “미국이 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우담 화엄학연구소장은 출가승으로서 탄허 스님을 모실 당시 그의 남다른
예지력을 자주 지켜봤다. 1965년 겨울에 횡성에서 진부로 이동하면서 버스를 타고
가던 중이었다. 운전기사 뒤에 타고 있던 스님이 갑자기 내리자고 해서 황급히 내렸다.
날도 추운데 왜 그러느냐고 불평을 했더니 “운전기사의 미간을 보니, 곧 죽을 상이다”
고 했다. 그런데 20분쯤 가다보니 버스가 전복되어 있었다.
서우담이 “왜 운전기사에게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었다. 하지만 탄허의
대답은 “몸 성히 운전 잘 하고 있는 사람한테 ‘당신 곧 죽을 것이니 운전하지 말고
한겨울 고갯길에서 차에서 내리라’고 하면 미친 놈이라고나 하지 내 말을 듣겠느냐”는
것이었다.
1979년 늦은 봄 고려대학교에서 봉직하고 있던 모 여교수가 안암동 대원암으로
스님을 찾아왔다. ‘지인의 소개로 박정희 대통령과 혼담이 오가고 있다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탄허 스님은 “결혼 좋지, 그러나 서산에 지는 해는
부상(扶桑·해가 뜨는 곳)에 잡아맬 수 있을 때 좋은 것이지!”
전 대통령이 곧 세상을 마치리는 예언 때문인지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 탄허 스님 제자들의 회고
탄허 스님을 가까이서 겪었던 이들은 남달랐던 그의 면모를 생생히 전한다.
△혜거 스님(탄허불교문화재단 이사장)=1960년대 초 여름 영은사에서 49재를 모셨다.
한 밤중에 큰 바람이 불어 문짝이 펄렁거리고 모든 호롱불이 일시에 꺼지자 칠흑
같은 어둠 속 바람 소리 때문에 모든 대중이 우왕좌왕 했다. 그 때 탄허 스님만은
아무 동요 없이 <금강경>을 마지막 구절까지 독송했다.
탄허 스님은 공부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심이 대단했다. 공부할 때는 승려들 뿐만
아니라 절에 사는 공양주(보통 공양간에서 밥하는 여성들을 일컬음)과 부목(절
살림을 위해 허드렛일을 도맡아하는 일군)까지도 함께 공부하게 하기 위해 아침
공양 지을 때, 점심 공양까지 한꺼번에 밥을 짓도록 했다. 공양주가 밥짓느라
공부하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스님도 3년간 찬밥으로 점심 공양을
때웠을 정도로 공부하려는 이들을 돕는데 남달랐다
△전창열 변호사=1963년 한국대학생 불교연합회 창립에 주도적이었다.
조계사에서 대한불교청년회가 신진 불교 학자인 이기영 박사를 초청해 원효 스님의
대승기신론 강의를 개설했다. 1964년 이기영 박사가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에서
개최된 대학생 수련회에 지도법사로 참석하고 돌아와서 탄허 스님에 대해
“이번에 월정사에서 만난 탄허 스님은 생불과 같은 위대한 스승이다”고 했다.
그 뒤 탄허 스님을 뵙기를 고대하던중 조계사에서 뵐 수 있다. 그 때 가르침에 대한
열정 그리고 지혜와 지식의 해박함과 심오함에 모두들 감탄했다. 탄허 스님과의
첫만남은 너무나 극적인 감동과 충격이었고 내 생애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탄허 스님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스님에게 궁금한
것이 있을 때는 반드시 질문을 해야만 말씀을 해주셨다. 아무리 기상천외한 질문이
있더라도 전광석화 같은 답변이 이루어졌고, 불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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