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해탈의 문

장백산-1 2012. 5. 1. 18:38

 

 

집착하는 마음 버리면 새로운 내가 보인다

통도사 서축암 감원 우진 스님
 

 

우진 스님

 

 

 

오늘의 主題는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답을 구하기 위해 ‘화엄경’을 펼쳐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모습의 첫 번 째는 ‘이행(二行)이 永遠히 멈추었다’입니다.

二行이라는 것은 二分法的 行動입니다. 좋다-나쁘다, 한다-안한다, 좋다-싫다,

예쁘다-추하다 등 모든 두 가지 生覺의 패턴, 行動의 패턴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무엇인가 나누어 보고 生覺하고 行動하는 그 모습들이 없어졌다는 뜻도 됩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두 번 째는 ‘달무상법(達無相法)’입니다. 形像이 없는 法을 通達했다는 말입니다.

衆生은 相을 따라 움직입니다. 有形의 存在 를 내가 얻었다, 있다고 보는 것이 相法입니다.

反面 無相法은 어떠한 形相도 없는 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앞에 있는 그 무엇을 보더라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辱을 들어도 稱讚을 들어도 똑같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에서 ‘깨달음’은 認識 中心입니다. 똑같은 말이 어떤 形態와 狀況으로 展開되면 ‘解脫했다’라고 表現합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이라고 하는 認識의 轉換을 通해서 束縛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깨달음, 解脫을 定義하는 말은 아함 불교로부터 화엄경에 이르기까지 一慣되게 表現되는 세 가지로 整理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를 보겠습니다. ‘화엄경 십지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불자야, 보살 마하살이 이와 같은 열 가지 모습으로 모든 緣起를 본다.’ 緣起는 原因과 關系 속에서 形成된 것, 認識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世上 모든 存在하는 것은 緣起로서 存在 합니다. 여러분과 저도 緣起 속에서 存在하고 이 法堂도 緣起 속에서 存在합니다.


그래서 ‘固定 不變의 實體도 없고, 人間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人格도 없고, 목숨도 없는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나 속에 살았있다고 生覺했는데 나도 없고, 나는 人間이라고 生覺했는데 人間도 아니고, 나는 살아있다고 生覺했는데 살아 있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自性이 空하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自性은 스스로의 性格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差別的 個性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과 區別되는 性格이 있습니다.

 

모습, 생각, 이름, 주민번호 등이 自性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法’이라고 합니다. 하나하나의 存在마다 하나하나일 수 있는 性格을 말합니다. 그 法이 空하다는 얘기는 ‘있다, 없다’라고 判斷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있다는 生覺이 드는 순간, 나라고 하는 生覺, 나의 人格이라고 하는 生覺, 나의 主觀이라고 하는 生覺 속에서 拘束 되고 束縛되어서 어디에서든 自由로울 수 없습니다.


認識轉換으로 속박 벗음이 깨달음


좋다는 生覺에 사로잡히면 좋은 이미지(想)를 주고 싶습니다. 그 사람이 느끼는 좋은 이미지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지요. 그러면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그 무엇이라도 固定된 生覺, 固定된 價値觀을 갖고 있다면 그 固定된 패턴 속에서 幸福할 수 없습니다.


제가 얼마 전 우연히 넘어져서 목발을 짚게 되었습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제 自신이 넘어져서 목발을 짚는다는 사실을 想像한 적도 없습니다. 목발을 짚고 법당에 들어오는 저의 心情을 生覺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것도 하나의 모습입니다. 목발을 짚는 것도, 생생하게 두 발로 걷는 것도 하나의 모습입니다. 멀쩡하게 걷다가 절름발이가 되고 절름발이 상태이지만 아마 곧 멀쩡하게 걸을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無常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새로운 내일을 준비하게 됩니다.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가 될 수 없다는 事實을 自覺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인은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도 挑戰的이고 開拓的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나는 無常하고 오늘의 삶은 오늘로써 끝입니다. 恒常 새로운 내일을 위해서 挑戰하고 새로운 내일을 위해서 創意的인 精神을 發輝하면 됩니다. 이 世上 모든 것들은 變化되고 恒常 새롭게 태어난다는 事實로 나 自身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잘 保存하고 維持하면 조금 더 쓸 수 있고 維持 保修 管理가 시원찮으면 금방 끝이 납니다.


두 번째, ‘모든 存在하는 갈래의 差別的인 모습들이 消滅되어서 必境에 다 흩어지고 없어진다. 그래서 그 形像 있음이 없는 줄 보면 바로 그 瞬間에 어떠한 形像도 없다는 事實을 알게 되고 解脫의 世界가 내 앞에 펼쳐지게 된다.’


여러분 어릴 때 사진과 지금의 사진을 比較하면 어떻습니까.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自性滅입니다. 이 世上에 存在하는 모든 하나하나를 解體해 보니까 그 모든 것들은 사라져 解脫해 있더라, 卽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社會에서 가장 심각한 問題가 自由民主主義의 市場 經濟입니다. 自由 民主主義의 理念이 相입니다. 過去에는 나만 잘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잘 살고 보니까 옆이 다 무너집니다. 우리 社會에서 불교인들이 해야 될 役割 중의 하나가 低酸素 飮食으로 먹거리를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50km, 70km안에서 생산된 음식으로 우리의 음식을 해결하자는 것이 低酸素 飮食 運動입니다.


필리핀에서 바나나가 올 때 까지 수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며 왔습니다. 미국에서 소고기, 돼지고기가 올 때 수없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며 왔습니다. 과거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좋아진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맛있는 음식만 추구하며 살다보면 結局은 共滅한다는 理致를 아는 것이 無常입니다. 이 世上 어떤 모습도 固有의 모습이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본 모습이 事實이 아님을 알 때 나는 幸福해 질 수 있습니다. 불교인의 두 번째 해탈이 이것입니다. 보이는 現狀과 내가 알고 있는 生覺으로부터 벗어날 때 幸福해 집니다.


세 번째를 봅시다. ‘이와 같이 空과 無常에 들어가면 願하고 求하는 것이 없어진다.

그런데 오직 除外되는 것이 있으니 大慈悲가 나를 이끄는 머리가 되어서 衆生을 敎化하는

것이 除外되며 바로 그 때 無願解脫門을 얻게 된다.’


이것은 ‘願하다, 求하다’와는 다릅니다. 願하고 求한다는 것은 思慕하고 그리워하고

依存해 있는 것입니다. 남편은 돈을 줘야 하고 자식은 나의 자랑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수가 되지요. 依存心 때문입니다. ‘수타니파타’에서는 부처님께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합니다.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으라는 노래 가사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依存을 벗어나라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랑이 아니라 慈悲라고 합니다. 願하고 依存的인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그 사랑이 아름답습니다.


‘永遠’ 없기에 挑戰 계속해야


空과 無常과 無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우리는 불교를 믿고 수행을 합니다. 祈禱를 하는 理有는 오늘의 나의 삶이 아닌 또 다른 내일의 삶을 準備하기 위해서입니다. 절을 하는 理由는 나의 固定觀念을 내려놓기 위해서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수없이 찾는 理由는 나라는 執着을 관세음보살을 通해서 풀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아함에서 대승경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强調하신 깨달음의 類形입니다.


화엄경에 나오는 말을 한 가지 더 언급하겠습니다. ‘境界, 즉 눈앞에 펼쳐진 對相이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고 또한 變化와 같은 줄을 뚜렷이 알아야 한다.

만약 모든 보살들이 能히 이와 같이 보고 實踐하는 것이 하나가 되면 모든 境界 가운데 좋다, 나쁘다와 같은 두 가지의 價値 判斷을 하지 않는다. 두 가지 見解가 生起지 않고 生覺이 멈춰지면 一切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한瞬間 바로 自身의 눈앞에 펼쳐짐을 얻는다.’


人類의 모든 文化는 生覺의 文化입니다. 하지만 오직 불교만이 생각을 멈추라고 합니다.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찾다 보면 生覺이 멈춰집니다. 열심히 절하다 보면 生覺이 멈춰집니다. 열심히 경전을 읽다 보면 生覺이 멈춰집니다. 그 生覺의 멈춰짐 속에서 새로운 나와

새로운 길이 發見됩니다.


그래서 根本의 마음이 發顯되는 바로 그 瞬間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分別, 妄想이 떨어지니까 우리의 마음이 根源으로 돌아갑니다. 根源으로 돌아가니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瞬間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慈悲와 智慧와 願力이라고 했습니다. 그 根本마음이 發顯되어서 一切法이 곧 마음의 自性임을 알아서 肉身의 몸으로부터 智慧의 몸으로 轉換된다고 합니다.


절을 하고 경전을 독송하고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는 모든 목적과 당위성은 바로 이 空, 無常, 無願을 얻는 데 있다는 事實을 바로 알고 정진을 해 나간다면 반드시 解脫의 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우진 스님이 3월4일 영축총림 통도사 설법전에서 봉행된 ‘출가 열반절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서’ 릴레이 초청법회 다섯 번 째 법석에서 설한 내용입니다.

 


우진 스님

1980년 종범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80년 사미계, 91년 비구계를 수지한 스님은 98년 종범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았다. 통도사 강주를 역임하고 현재 통도사 서축암 감원으로 주석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