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언어도단 심행처멸 | ||||
진리는 말길 · 생각의 길 끊어진 데서 확연히 드러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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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마디에 사람을 살리기도 하며 말 한마디에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백 마디 말보다도 서슴없이 실행하는 진실한 행동이 더 중요하다. 한 개의 사과도 자신이 직접 만져보고 먹어봐야 그 모습과 맛을 제대로 알지,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그 모양이며 참 맛을 정확히 끄집어낼 수 없다. 말이 중요하긴 하지만 말이 미치지 못하는 더 중요한 영역이 이 세상에는 비밀스럽게 존재한다. 명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存在)의 심연(深淵)은 그렇게 말을 떠나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그 비밀의 정원으로 들어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 중에 무의미한 말은 없다. 말에는 의미가 있다. 무엇을 지향하고 지시하고자 한다. 그렇게 우리가 쓰는 말에는 의도(意圖)가 들어가 있다. 내 생각이 말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내가 하는 말에 자신의 생각이 들어가 있기에 거기엔 ‘나’라는 자아의식이 꿈틀거리고 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에고가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말은 인간의 사유작용에서 나온다. 생각이 말로 표현된다. 그런데 사람의 생각, 즉 이성은 대상을 헤아리고 나눈다. 생각은 나를 중심으로 나와 너를 분별한다. 그래서 내 생각은 내 주관적인 선입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할 때는 너무 그리워 아름답게 보이던 연인도 사랑이 식어 헤어질 때면 꿈에도 보기 싫은 사람으로 변한다. 그렇게 생각은 우리들의 눈을 가리고 색안경을 씌운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을 본다. 심지어는 본질에서 한참 벗어나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생각이 진실이라고 우겨댄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과 갈등이 생긴다. 그렇게 내 생각에 함몰되어 입을 연즉 본질과는 십만팔천 리 멀어진다. 입을 여는 순간 등지는 것이다. 개구즉착(開口卽錯)이다. 더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그즉시 그 자리에서 벗어난다. 동념즉괴(動念卽乖)다. 그래서 사실을, 현실을, 진실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말과 생각으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낫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은 말과 생각의 작용으로는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세계 또한 말을 떠나 있다. 언어로의 접근이 불가능하다. 깨달음의 세계를 마음으로 분석하고 추측하고 헤아려서는 알 길이 없다. 사물 그 자체, 진정한 나 자신 앞에서는 말길은 끊어진다. 그렇게 말길이 끊어지기 때문에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한다. 말길만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을 움직이는 마음의 작용도 또한 사라진다. 마음의 길도 끊어져 마음으로 생각하고 추리하며 판단하는 작용 또한 자취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 길도 사라져 종적이 묘연하기 때문에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 한다. 진리(眞理)는 그렇게 말길과 생각의 길이 끊어진 데서 확연히 드러난다. 언어의 길이 끊기고 마음이 작용이 멈출 때가 또 있다. 바로 화두를 들 때이다. 화두는 모든 말의 작용은 물론 생각의 작용을 차단한다. 생각의 모든 퇴로를 차단하여 꼼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도저히 그곳을 피해나갈 길이 없다. 바로 그 순간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간절히 의심한다. 화두를 들고 의심하는 그 순간 의심 삼매에 들어 생각이 길이 끊어지는 것이다. 알음알이가 작용을 멈추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무문관》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전개된다. 수산 성념(首山省念) 선사가 죽비를 들고 대중에게 말했다. “여러분, 이것을 죽비라고 부르면 죽비라는 모습에 걸리는 것이요, 그렇다고 해서 죽비라고 부르지 않으면 그것도 역시 죽비가 아니라는 모습에 걸리게 된다.” 이에 대해 무문 혜개(無門慧開) 선사가 묻는다. “죽비라 부르면 집착이고 죽비라 부르지 않으면 등지게 된다고 하니, 말이 있어도 안 되고 말이 없어도 안 된다. 속히 말해 보라. 속히 말해 보라." 여러분도 말해보시라. 말하는 순간 벗어날 것이다. 무엇도 맞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생각의 작용이 끊어진다. 생각의 작용이 끊어지면 본래 부처의 모습이 드러난다. 청정한 우리들의 본래모습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화두를 들게 되면 우리는 부처의 자리로 들어간다. 화두를 들고 앉아 있는 그 순간 모든 말의 작용과 생각의 작용이 멈추기 때문에 본래 그 자리, 부처의 자리에 있게 되는 것이다. 본래 그 자리는 공(空)의 자리, 무아(無我)의 자리, 무념(無念)의 자리, 부처의 자리다. 새가 날아가는 길을 조도(鳥道)라 한다. 새가 날아가는 길은 자취가 없다. 가을하늘에 기러기가 날아가는 자취가 보이는가? 흔적조차 없다. 그렇게 그 길은 찾을 수가 없다. 화두 역시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진리 또한 생각과 말의 흔적이 없다. 그 자취가 멸한 곳에서 새가 날아간다. 물결도 없는 그곳에서 물결이 인다. 바람도 없는 그곳에서 바람이 인다. 저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 것일까? 저 새는 어디로 날아가는 것일까? 고명석/조계종 포교연구실 선임연구원 |
출처 : 결가부좌 명상도량 자비선원
글쓴이 : 무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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