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미국식 세뇌교육의 함정

장백산-1 2012. 7. 4. 12:22

 

 

미국식 세뇌교육 그리고 한울의 짧은 이야기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존 스타인벡은 지적했다.

"인디언들을 싹 쓸어버리려는 우리의 공개적인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살아남았다.

그 거센 파도가 지난 뒤, 그들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선한 의도 때문에 또 한 차례 홍역을 치러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는 더 치명적이었다."

그 미국식 세뇌 교육의 첨병 역할을 한 곳이 바로 백인이 세운 칼리슬 기숙사 학교

 (정확히 말해 칼리슬 인디언 실업 학교)였다.

'야만인'을 '문명인'으로 개조하기 위해 야만적인 교육 방식을 택한 이 학교에서의 생활은

수우 족 소녀 어린 장미(리틀 로즈)가 쓴 일기 <나는 가슴이 무너졌다>에 잘 묘사되어 있다.

 

아이들은 이름부터 새로 받았다.

솟구치는 물(리핑 워터)은 패니, 흰 방패(화이트 실드)는 찰스, 서서 바라봐(stands looking) 는 매기,

조심하는 여우(와치풀 폭스)는 호레이스, 빗물(레인 워터)은 벨, 숱 많은 머리 (헤비 헤어)는 알메다,

곰과 함께 얘기해(토크스 위드 베어즈)는 앨버트, 그리고 어린 장미는 나니로 바뀌었다.

그것이 백인들이 말하는 '문명화' 라는 것이었다.

 

오지브웨 족 출신의 로즈마리 바스토우는 부족의 언어밖에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나이가 들었는데도 유치원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첫날부터 슬픈 경험을 했다.

"첫 시간에 한 인디언 소녀가 칠판에 무엇인가를 썼는데, 내가 추측하기에 그 아이가 뭔가 실수를 한 것 같았다.

그러자 반 전체가 떠나갈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우리를 가르치는 수녀 교사는 입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도 웃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 인디언 소녀는 자리에 앉아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무척 무례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예의범절이 무엇인가 알고 있었다.

내가 자란 방식은 사람들이 실수를 할 때 그것을 보고 놀리거나 비웃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속도가 느린 사람이 있으면,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고 부족의 어른들은 가르쳤다.

그날 이후 나는 입을 굳게 닫았다.

그들이 결코 나를 놀리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스스로 결심했다.

그해 1년 동안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숫자를 배우는 수없이 있었는데, 그 시간에도 나는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공부를 못하는 학생에게 벌로 씌우는 꼬깔 모자를 쓰고 늘 교실 구석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하루는 내가 창문 밖으로 도토리를 입에 물고 장난치는 다람쥐를 바라보고 있는데 교사 수녀가 질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사과를 네 개 갖고 있는데, 너에게 한 개를 주면 나한테는 몇 개의 사과가 남지?'

그때 내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수녀님. 사과를 두 개 줘야 하는 거에요. 친구와 뭔가를 나눌 때는 똑같이 반씩 나눠 갖는 거에요.'

그 말을 한 나 자신도 놀랐다.

모두가 얼어붙었고, 수녀는 입이 벌어졌다. 그때 이후로 나는 도저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4학년 때, 식민지 역사에 대한 교과서를 배우게 되었다.

책에는 인디언 전사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모두가 머리를 빡빡 밀고 머리 꼭지에만 몇 가닥 머리칼을 매단 야만인들로

묘사되어 있었다. 한 인디언 전사는 아이를 안은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칼로 찌르고 있었다.

수녀가 와서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너도 바로 이런 야만인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리가 널 문명인으로 만들기 위해 이곳으로 데려온 거야.'

나는 그 책을 움켜쥐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멀리 집어던졌다. 그리고는 노간주나무 뒤로 달아났다.

그 나무 그늘 아래서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생각했다.

'나의 할아버지가 그런 야만적인 사람일 리가 없어. 얼굴 흰 사람들이 찾아오면 할아버지는 언제나 차와 먹을 걸 대접했어.'

나는 나흘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여름이 되어 집에 돌아갔을 때 나는 할아버지에게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햇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난 네가 영어를 배우길 바란다. 사전에 있는 모든 단어를 배우거라. 그러면 언젠가 넌 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인디언들에 대한 진실을 책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열심히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기숙사 학교를 통한 백인들의 동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인디언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인디언들 속에서 함께 생활한 백인들 중에는  답답한 도시 문명에서의 삶보다

자연에 가깝고, 자유로우면서, 모험에 찬 원주민들의 삶에 동화되는 이들이 많았다.

1763년부터 이듬해까지 2년 동안 인디언들과 함께 지낸 젊은 백인 알렉산더 헨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인디언들처럼 살기를 희망하는 백인들은 여럿 있었지만, 문명화된 형태의 삶을 자신들의 삶보다 더 우월한 것이라고

여기는 인디언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심지어 백인들의 기숙사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간 아이들 조차도 인디언들의 삶을 최고로 여겼다.

두 삶의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백인들의 문명쪽으로 돌아서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디언들이 보기에 백인들의 삶에는 무엇보다 자유가 없으며,

수많은 법률과 세금이 있고, 잘사는 이와 못사는 이의 차이가 심하다. 또한 속물들처럼 신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며,

위선적이고 거들먹거린다. 땅을 개인의 소유로 여기고, 곧잘 내 편 네 편을 가린다.

옷차림도 불편하기 짝이 없으며, 질병에 많이 걸리고, 돈과 거짓된 기준의 노예들이다.

인디언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진정한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백인 기병대 대장이 한 인디언 추장을 찾아가 말했다.

"우리가 당신 부족의 아이들을 교육시켜 주겠소. 이렇게 야생의 숲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아이들은 많은 지식을 얻게 될 것이오."

추장은 깊이 생각한 뒤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아이들이 성장했을 땐 부족으로 다시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기숙사 학교로 가서 서구식 교육을 받게 되었으며, 몇 달 뒤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그런데 교사가 시험지를 나눠 주자, 인디언 아이들은 교실 뒤로 가서 둥글게 모여 앉는 것이었다.

당황한 교사가 아이들에게 가서 지금 무얼 하고 있느냐고 묻자, 한 아이가 대답했다.

"우리는 힘든 일이 닥치거나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는 모두 힘을 합해 함께 해결하라고 배웠어요.

지금이 바로 그 때에요. 그래서 이렇게 모여 지혜를 모으고 있는 중이에요."

 

호피 족의 태양 추장(선 치프)도 백인들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인디언 소년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캘리포니아 백인 학교에 들어가 꽤 잘 적응했다. 그러다가 심각한 병에 걸려 네 번이나 혼수 상태에 빠졌으며,

그럴 때마다 호피 족 길잡이 정령이 꿈에 나타났다.

긴 회복기 끝에 그는 조상들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담요를 덮고 누워 있는 동안 나는 지난 학교 생활과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을 생각했다.

나는 신사처럼 말하고, 읽고, 쓰고, 셈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모든 주의 이름과 그 수도명을 말할 수 있으며, 성경의 순서까지도 외울 수 있게 되었다.

찬송가도 서른 곡 넘게 부를 수 있었다.

토론도 하고, 함성을 지르며 미식 축고도 하고, 댄스 파티에도 가고, 음담패설도 지껄일 수 있게 되었다.

침대에서 자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도하고, 머리를 빗고, 화장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사람이 가슴 대신 머리로 생각한다는 것도 배우게 되었다.

그것들은 백인들과 어울리기 위해 내가 배운 중요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경험을 통해 나는 내 자신이 호피 족 길잡이 정령과 함께 있으며,

진정으로 호피 족으로 되돌아가 옛 인디언들의 노래를 부르면서,

가죽 채찍으로 맞거나 죄인으로 몰리는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것이 본질적으로 모든 인디언과 부족들의 노래였다.

 

한 인디언은 시로써 노래한다.

'와서 나와 함께 키 큰 풀들 사이로 걸으라.

그대의 피부를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바람을 느끼라.

그대 얼굴에 내리비치는 따뜻한 햇살을 느끼라.

그대를 껴안는 여름비의 부드러움을 느끼라.

들판에서 자라는 야생화 내음을 맡아 보라.

새들의 노래를 들으라.

왜냐하면 나는 그 모든 것들이니까.

바람은 그대를 만지는 내 손가락

햇빛은 내 따뜻한 입맞춤

여름비는 내 애무

야생화는 내 머리결 내음

그리고 새들의 지저귐은 그대에게

와서 나와 함께 키 큰 풀들 사이로 걸으라고 말하는

내 감미로운 목소리.'

 

 

나의 부족은 지혜로웠다. 그들은 부족의 뛰어난 사람들의 행동을 모범삼아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우리의 교사들은 기꺼이 온 마음을 다해 가르쳤다. 우리의 할아버지들, 아버지들, 삼촌들이 바로 그 교사들이었다.

비록 한 아이의 능력이 다른 아이보다 뒤진다 해도 그들은 아이의 기를 꺾는 말을 결코 하지 않고

오히려 칭찬의 말을 한 순간도 아끼지 않았다. 배움을 얻는 데 실패한 아이는 더 많은 배움을 얻을 뿐이었고,

더 많은 보살핌을 받았다. 혼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까지.    

                                                                                                    (알릭치아 아후쉬|크로우 족)

 

 

오래 전 우리 부족에게는 교육이라는 것이 없었다. 책도 없고 교사도 없었다. 모든 지혜와 가르침은 꿈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 되었다. 우리는 그 꿈을 시험해 보았으며, 그런 식으로 우리가 가진 힘을 배웠디,

                                                                                                                        (치페와 족의 어른)

 

 

교사들 중 많은 이들이 소위 교육 받은 바보들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삶을 사랑하라 가르치고, 우리가 자연의 일부분임을 가르친다.

하지만 교실에 앉아 그것들을 배울 때, 아이들은 자연으로 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다.

그대신 온갖 것들을 암기할 뿐이다. 학교가 아이들의 창조성, 꿈꾸는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자넷 맥클라우드|틀라립 족)

                                                                               

 

 

 

                                                                                                           

-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中 ,류시화 엮음- 

 

 

 

 

17살 때 이 책을 처음 접하고 나는 내가 살아가야할 방식이 정해졌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항우를 만나기 전까지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자

그 전까지 기독교 대안학교를 다니며 나도 모르게 생겼던 편협한 관념들을 밑바닥부터 갈아 엎어준 고마운 책이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지만 내 안에 속삭이던 生覺들을 대신 말해준 사람들이 있다니,

그것도 너무나 아름다운 언어로 말이다. 나는 감격스러웠다.

이후 항상 인디언들의 놀라운 삶의 방식을 동경해왔고

그때까지 받아왔던 교육이 한낱 쓰레기에 불과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항우를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있게 벗어날 방법이 없었고 적응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차저차해서 대학을 갔지만 점점 더 좁고 어두운 길목으로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광고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항우선생님이 옛날부터 복잡하게 사는게 너무너무 힘이 드셨다고 얘기하신 것처럼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것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졌다. 내 삶도 그렇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은 최선을 다하는데 나만 게으른 의지박약에 이상주의자인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견딜 수가 없어 학교를 그만두고 캐나다의 작은 대학을 가려고 했었다.

인디언 미술 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그 학교에서는 특이한 케이스라고 생각했는지 인터뷰를 하자고 했는데

그러던 중 항우생명 책을 만났고 처음 참석했던 모임 첫 날,

 '이번 년도 계획이 변경되었다' 고 이메일을 보내 인터뷰를 거절했다.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이 완전히 바뀔 수도 있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내 행동에 그토록 확신을 가져본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현대 사회에서 교육은 마치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당연한 관문인것처럼 여겨지고

어른들이 돈의 노예라면 아이들은 교육의 노예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죽기 살기로 공부를 해야한다.

 

이제 이 모든게 끝났음을 안다.

지금까지의 낡은 方式은 앞으로 통하지 않는다. 아무런 問題도 解決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 證擧가 도처에 널려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요즘 나는 마치 백인 학교에서 부족으로 돌아온 인디언 같은 기분이 든다.

 

 

모두에게 정말 감사하다.

 

-신인류 항우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