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處地가 워낙 급박하면 ‘나락 한 말 정도인데'할 수도 있다.
‘다음에 잘 되면 갚지. 미안하다’하는 것이 普通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나 정원용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어렵다고 해서 남을 힘들게 하면 안된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곡식 자루를 돌려주었다.
그런데 정원용의 이 바른 한生覺에 天地가 感動하였고,
그때부터 福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바른 한生覺.
한生覺을 바르게 가지고 바르게 行動하면 天神 등의 모든 神들이 다 알고,
十方世界 모든 부처님이 다 알고 가피를 베푸신다. 그러므로 바르게 살아야 한다.
바르게 살면 불보살이 認定하고 天地가 感動하여 福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 ‘바를 正’자를 품고 살면서 善行을 많이 하고 福을 지으면
반드시 所願을 성취할 수 있게 되고 많은 福을 누릴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은행에 예금을 해놓으면 에금한 이 외의 다른 사람이 찾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내가 지은 福은 내가 받지 다른 데로 가는 법이 없다.
그러나 소아망상(小我妄想)에 빠져 살면 큰 福은 결코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
小我妄想에서 벗어나 無我의 境地로 들어가야 큰 福과 큰 成功이
‘나’와 함께 하게 된다. 곧 ‘나’라는 고개를 넘어야 하는 것이다.
이 無我의 고개를 아리랑 고개라 하는데, 우리 몸 중에서는 목구멍이 바로
아리랑 고개이다.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음식을 먹여보라
짜고 단것을 넣어주면 ‘간장이다. 된장이다. 설탕이다. 꿀이다. 조청이다. 곶감이다’
하면서 바로 바로 안다. 하지만 이렇게 잘 아는 음식이라도
입 안에만 있으면 피도 살도 되지 않는다.
分別 없는 境界인 목구멍을 넘어가야 피가 되고 살이 된다
그런데 목구멍이라는 고개를 넘어가면 ‘시루떡. 꿀. 곶감’등 음식의 이름들이
모두 사라지고, 짠맛. 단맛. 신맛등도 다 사라진다.
모든 이름과 맛이 다 사라진 이것이 바로 無我의 境地요,
그래서 목구멍을 아리랑 고개라고 하는 것이다.
수행자가 되었든, 예술. 과학. 사업에 종사하든 자식을 기르든,
‘나’라고 하는 小我妄想의 고개를 넘어 無我의 境地에 들어가야
能히 익어질 수 있고 크게 成功을 할 수 있다.
無我의 境地, 無分別의 境界에 들어가 魂身의 힘을 다해야
한 가지를 크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옛날에 마산에 이장춘이라는 봇짐장수가 있었다.
짐을 지고 큰 고개를 올라가게 되면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그는 중간중간에 지게를 작대기로 받쳐놓고 쉬면서 스스로를 향해 소리쳤다.
“장춘아, 네가 지금은 땀을 흘리고 있지만, 이 고개 마루턱만 올라서면
시원한 바람이 네 겨드랑이 밑을 지나갈 것이다. 그러니 힘이 들더라도
용기를 내어 참고 올라가자.”
마침내 고개위에 올라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 또 다짐을 하였다.
“장춘아, 너도 돈을 벌면 이렇게 시원하고 좋은때가 올 것이다.
고생이라 생각 말고 열심히 해라.” 이렇게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으면서
피와 땀을 흘리는 힘든 과정을 극복하고 돈을 모아 큰 부자가 되었다.
이렇듯 이장춘처럼, 예술. 학문. 종교. 과학은 물론이요 모든 事業의 성취는,
精神을 集中하고 精誠을 쏟고 피와 땀을 흘린 뒤에라야 이룰 수 있는 것이지,
나의 편안함. 나의 기쁨. 나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小我妄想에 빠져들어서는
결코 성취를 할 수가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失敗를 하였을 때도 小我妄想에 빠져 포기를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제 끝이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고 하면서 주저 앉지 말아야 한다.
낙엽을 보라. 낙엽이 땅에 떨어져 있으면 사람도 밟고 개도 밟고 지나간다.
價値라고는 조금도 없지만, 그 낙엽도 비바람을 타고 碧空을 活氣롭게 날때가 있다.
낙엽도 벽공을 풀풀 날면서 한껏 멋을 내는데, 萬物 중에 가장 슬기로운 사람이
失敗를 했다고 해서 근심걱정에 잠겨 있대서야 되겠는가!
다시 精神을 가다듬고 힘을 내야 한다. 한 生覺 바꾸어 生生한 산 精神으로 임하면
‘절후(絶後)에 갱생(更生)이라’, 길이 끊어진 곳에서 다시 사는 수가 있으니,
근심걱정하지 말고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아 演劇 한바탕 멋지게 해야 한다.
물론 일상의 삶 속에서도 근심걱정에 잠겨 살아서는 안 된다.
근심걱정에 잠겨 살게 되면 幸福이나 成功이 오다가도 돌아서 버린다.
사람들이 이 世上에 태어날 때에는 아무 걱정이 없었는데,
학교 가고 취직하고 시집, 장가를 가는 등 競爭社會에 몸을 담고부터
가슴 답답하고 머리 아프게 살아간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꼼짝 하지 못하고 그 상태에 빠져 오만가지 걱정을 하면서 산다.
그러나 그 오만 가지 걱정의 主體가 많은 것은 아니다.
오직 사람 아니면 物質, 物質 아니면 사람, 이 두가지 때문에 밤낮없이 걱정을 한다.
그래서 내가 늘, ‘사람과 물질, 이 두 가지를 超越하여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아
멋들어지게 演劇을 잘하고, 늘 快活하고 명랑하고 樂觀的인 氣分으로 살라’고
이르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근심 걱정을 벗어나 멋들어지게 살 수가 있는가?
놓을 줄 알아야 한다. 비울줄 알아야 한다.
‘암소 잡은 요량’ 하면서 근심 걱정을 비우고 놓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옛날 경주에 정만서라는 이가 살았다.
어느 때 한양으로 가던 도중 노자가 떨어지고 말았다.
한 이틀을 굶게 되자 눈이 쑥 들어갔고 걸을 힘조차 없었다.
그는 선비의 체면도 팽개치고 주막으로 들어가, 소의 불알을 삶아서
달아놓은 것을 보고는 ‘썰어달라’고 하여 술안주 삼아 배불리 먹었다.
그러나 돈이 없었던 정만서에게는 그 다음이 問題였다.
술과 음식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로 자리가 차기 시작했지만,
값을 치를 수 없었던 정만서는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마침내 참다 못한 주모가 소리쳤다.
“여보시오, 이제 그만 회계를 대고 다른 손님들에게 자리를 양보 하시오.”
“주모, 사실은 나에게 돈이 없소”
“무어라? 돈도 없이 술과 안주를 먹었단 말이오? 어림없소. 빨리 회계를 대시오.”
주모가 사납게 다그치자 정만서는 말하였다.
“주모, 암소 잡은 요량 하소. 암소 잡은 요량..”
불알이 없는 암소를 잡은 셈 치고 돈을 받지 말라는 것이었다.
‘소의 불알을 먹고는 암소 잡은 요량 하라니?
세상에! 술장사 30년에 저런 놈은 처음일세.’
뒷방에서 나온 남편이 눈알을 부라리며 그 자리에 뛰어들자,
정만서는 남편에게 인사를 나누자며 자기소개를 하였다.
그도 익히 들어 알고있는 천하의 잡놈 ‘정만서’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술값을 받을 相對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남편은 도리어 請하였다.
“고기값 대신에 소리나 한번 해 보시오.’
정만서는 온갖 장기자랑을 다 펼치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러자 길을 가던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그 주막에 있던
술과 안주들이 모두 동이나, 주막을 연 이래 最上의 賣商을 올렸다고 한다.
가만히 돌이켜 보라.
父母 胎中에서 나올 때 영감을 업고 나왔나? 아내를 안고 나왔나?
자식들을 데리고 나왔나? 빈 몸 빈 손으로 나왔는데,
그것들에 愛着이 붙어서 놓으려 해도 놓을 수가 없다.
또 놓을 수 없으니 밤낮없이 걱정을 한다.
여러분도 사람과 물질에 걸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면
정만서의 ‘암소 잡은 요량’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애초 불알이 없는 암소를 잡은 料量을 하면 한 生覺 막혔던 것이 풀린다.
곧 한 生覺 愛着을 비우고 생생한 산 精神으로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아 演劇 한바탕 멋지게 해야 한다.
그까짓 근심 걱정은 냄새 나고 죽은 生覺이다.
앞으로는 산 生覺으로 불타의 精神에 合體해서 살아가길 바란다.
<계속 이어서>
경봉대선사 탄신 120주년, 열반 30주년 기념 특별기고 법문
-결가부좌 명상도량 자비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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