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열등감은 허상이다

장백산-1 2012. 9. 8. 13:46

 

 

열등감은 허상이다/법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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劣等感은 虛想입니다 / 법륜스님

 

 

우리는 남보다 잘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것이 뜻대로 안 되면 劣等感에 사로잡힙니다.

사춘기의 학생들은 첫째가 외모, 두 번째가 성적 때문에 劣等感에 사로잡혀요.

그래서 아이들이 거울을 자주 보고, 옷에 신경을 쓰는 걸 보면 어른들은 공부는 안 하고

외모에만 신경 쓴다고 야단을 칩니다. 사실 사춘기 때는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고,

사람들의 눈에 띄고 싶고, 어디를 가든 中心에 서고 싶어 합니다.

그게 充足이 안 되면 소외감과 열등감을 느끼고 심해지면 精神的인 충격에 사로잡혀

자학에까지 빠집니다. 또 일부는 우울증에 걸리기도 합니다.

 

優越意識은 自己가 잘났다고 폼을 재고 잘난 척하는 데서 생긴다고 알고 있지만,

事實 劣等感도 優越意識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열등감이라고 하니까 열등의식 같지만,

實際는 自己가 잘나고 싶다는 우월의식이 밑바탕에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存在는 서로 다를 뿐

 

存在에는 우월성도 없고 열등성도 없고 서로 다를 뿐인데 내가 그걸 보고 差別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것보다 더 좋다.’, ‘더 나쁘다.’ 하는 生覺은 存在 自體를 그대로

反映한 것이 아니라 歪曲된 것입니다. 그걸 반야심경에서는 顚倒夢想이라고 합니다.

事實을 事實대로 알지 못하고 거꾸로 뒤바꿔 알고 있으니 實在와 맞지 않습니다.

안 맞으니까 현실에서 부딪히고 고통과 번뇌가 생기고 구속을 받습니다.

例를 들어 못이나 망치는 자기가 사용되지 않는 곳에 있어도 불평이 없습니다.

쓰이지 않으면 그냥 있을 뿐입니다. 필요가 없을 때는 그냥 거기에 있다가

필요할 때가 되면 자기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事實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 보면 그 存在 自體에 어떤 優越性이라든지 劣等性이

內在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은 六根이라는 여섯 가지 感覺機管을 通해서 어떤

問題를 받아들이면서 劣等意識과 優越意識을 가집니다.

오아시스가 實在하지 않는데 사막에서 오아시스가 눈에 보이는 신기루와 마찬가지입니다.

實在하지 않아도 우리가 느낄 수는 있습니다. 눈에 보일 수도 있고 귀에 들릴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虛像을 虛想인 줄 아는 것이 重要합니다.

여러분들은 ‘나는 코가 못 생겼다, 눈이 못 생겼다.’ 하지만 그런대로 살아가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볼 때 소위 예쁘고 잘났다는 배우들을 만나보면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얼굴에 대한 열등감이 큽니다.

‘다 잘났는데 눈이 문제야. 다 괜찮은데 코가 문제야. 입술은 괜찮은데 이가 이상하게 생겼어.’

이렇게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가 많습니다.

實在로 劣等한 것과 劣等意識은 別個의 問題입니다. 이 意識이라는 것은 身體와는 別個인

精神作用이기 때문에 아주 優等이어도 劣等意識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제일 열등의식이 심한 집단이 어디인가?’ 라는 통계 자료를 본적이 있었는데,

서울대학교 인문사회계열 국내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가장 열등의식이 심한 걸로 나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서울대학교에 들어갈 정도니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고 항상

일등이었어요.

그런데도 국내 박사학위를 땄기 때문에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딴 사람에 대한 열등의식이

심합니다. 객관적으로 미인이라고 하는 배우들이 신체적인 열등의식이 더 심한 것과 마찬가집니다.

 

劣等意識은 虛想임을 알아야

 

이 世上에 劣等한 存在는 없습니다. 存在는 서로 다를 뿐이에요.

예를 들어 보통 사람 스무 명을 뽑아서 그 사람이 가진 모든 것에 대해 점수를 매긴다고 해 봅시다.

키나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순서, 눈이나 입이 큰 순서, 팔이나 손가락이 긴 순서를 매기고,

또 누가 더 달리기를 잘하나, 넓이 뛰기를 잘하나, 부엌에서 음식을 잘하나 등으로 순서를

매긴다면 다양한 점수가 나옵니다.

스무 명의 사람으로 한 천 개쯤의 질문을 해서 점수를 매겨서 平均을 내어보면 그 평균 점수가

비슷하게 됩니다. 이것은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各各 다르지만 全切的으로 보면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意味합니다.

그런데 어떤 時代나 狀況, 條件에서는 이 중에 몇 개만 가지고 等數를 매깁니다.

몇 십 년 전에는 주로 수학, 국어, 영어 등 성적을 중심으로 등수를 매겼고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는 오직 문장 잘 쓰는 그 한가지로 점수를 매겼어요.

그런데 지금은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것도 굉장한 能力으로 인정받습니다.

50년 前에 태어났으면 공 잘 던지는 것이 쓸모가 없었겠지만 지금은 야구에서 그 한 가지만으로

엄청나게 큰돈을 법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자기 아이가 能力 없다고 平價하면 안 됩니다.

時代에 따라 基準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絶對的으로 優越한 이가 存在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絶對的으로 劣等한 이가

存在하는 것도 아닙니다. 劣等意識이 虛想임을 알아 劣等意識에서 벗어나는 것이 重要합니다.

가령 身體障碍는 열등한 것이 아니라 不便한 것이에요. 팔이 하나 없는 것은 다만 不便할

뿐이라는 生覺을 하면 의족을 해서 편리한 방향으로 극복하면 됩니다.

그런데 신체장애를 열등하다고 생각하면 두 가지 증상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자살충동 즉,

죽어버리고 싶은 충동이고, 다른 하나는 팔이 두 개 있는 남의 팔을 잘라버리고 싶은 충동입니다.

그래서 열등의식이 있으면 자학증상과 공격증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이상성격의 소유자가 됩니다.

독재자들을 심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들에게 열등의식이 잠재되어 있는 걸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자기를 칭찬하고 잘해주면 혀라도 빼줄 듯이 베풀다가 자기에게 반대하면 형제나 아내까지도

죽여 버릴 정도로 감정 기복이 극한으로 치우쳐 늘 불안한 삶을 살아갑니다.

 

'있는 그대로' 認定하면 열등감에서 벗어나

 

現實에서는 수많은 인간의 재능 중에서 필요한 몇 가지만으로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에

우월하고 열등한 게 생깁니다. 그러나 눈이 잘 안 보이는 것이 다만 불편할 뿐이라는 事實을

알면 눈이 나쁘다는 열등의식이 사라집니다.

이것은 '意識의 問題'로, 불교로 말하면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理致만 잘 알면 劣等意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의 열등의식은 내가 어릴

때 영어나 수학을 못 했든, 춤을 못 췄든, 잘 못 했던 것에 내가 執着함으로써 生긴 것입니다.

그 劣等意識이 現在의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無知로부터 形成된 것이지 本來 劣等한 건 아닙니다.

여기에 담배를 30년 동안 피운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담배 피는 習慣을 끊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끊어집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아마 나는 前生에서부터 피웠을 거야.

前生에서부터 피우지 않았으면 이렇게 안 끊어질 수 있느냐.’ 라고 生覺합니다.

生覺은 그렇게 하더라도 本來부터 담배 피는 習慣의 씨앗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나중에

形成된 것입니다. 이 習慣을 業, 카르마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本來 타고난 業은 없으며 다만 形成된 것으로 봅니다. 사실 우리가 아주 어릴 때

習慣이 形成되어 自己化된 것, 마치 나의 本體처럼 意識의 根源을 形成하는 것은 變化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붓다는 '이것마저도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어떤 것도 本來부터 있었던 것은 없는 거예요.(本來無一物)

業을 變化시키고 消滅시키기 어렵지만 不可能 한 것은 아닙니다.

맘만 먹으면 쉽게 된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消滅이 可能하기에

우리가 解脫로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存在 自體가 優越하고 劣等한 게 없는 것처럼 이 世上에는 그 어떤 存在도 불쌍한 存在는

없습니다. 불쌍하다는 것은 내 生覺일 뿐이에요. 사람이 죽는 것이 불쌍하다면 우리 마음은 내내

 불쌍해야죠. 지금도 계속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설령 누가 죽는 걸

봐도 自器하고 聯關 關係나 利害가 있고 없음에 따라 불쌍한 生覺이 일기도 하고 안 일기도

합니다.

어린 아이에게 손이나 다리 하나가 없으면 우리는 그 아이를 불쌍하게 生覺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그 아이를 보면 불쌍하다고 여기실까요? 부처님은 여느 아이와 똑같이 그 아이를

안고 웃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아이를 잡고 잘 웃다가도 그 아이를 보면 갑자기

 ‘손가락이 하나 없네, 아이구, 불쌍해라.’ 이럽니다.

그 아이 입장에서는 本來는 自身이 불쌍한 存在가 아닌데 모든 사람이 自己를 보고 불쌍하게

여기고 불쌍해하는 얼굴 표정을 지으니까 그 아이는 우울해집니다.

그러니 누가 아이를 불쌍하게 만들어버린 거예요? 바로 우리의 生覺, 意識입니다.

우리에게 열등의식이 없다면 스스로는 누구도 열등하거나 우월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엄격하게 말하면 부러울 것도 없고 도움 받을 것도 없는 거지요.

 

存在는 劣等한 것이 없는데 劣等意識은 現實로 存在합니다.

劣等하지 않은데 劣等意識이나 優越意識이 形成되는 理由는 人生에서 몇 가지만 가지고 집이나 학교, 사회가 順序를 매기기 때문입니다.

돈에 執着을 하면 자기보다 돈 많은 사람에 대해서는 열등의식이 아주 큽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돈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또 우월의식이 아주 큽니다.

또 사회적 지위나 출세에 집착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계급이 하나라도 높으면 굉장히 비굴하게

굴고 자기 아랫사람에 대해서는 권위의식을 갖습니다.

이처럼 우월의식과 열등의식은 어떤 것에 執着하면서 생기는 거예요.

돈에 執着하면 돈 문제에 있어서 우월의식과 열등의식이 생기고,

얼굴에 執着하면 외모에 관해 우월의식이나 열등의식이 생깁니다.

이 事實을 아는 것이 重要합니다.

 

‘劣等意識은 無紙로부터, 環境으로부터 形成된 것이지 本來 存在가 優越하거나 劣等한 것은 아니다.’

이 事實만 우리가 確實히 알아도 劣等意識에 사로잡히지는 않습니다.

열등의식이 일어나기는 하겠지만 내가 거기에 사로잡혀서 울고불고하지는 않아요.

그러니 여러분들은 이 劣等感으로부터 自由로워지기 바랍니다.

 

 


Stranger on The Sh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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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반야심경수행자님 - 음악;가전충효님-

-무진장 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