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마음의 법칙---깨달음이 시작이다

장백산-1 2012. 9. 11. 23:51

 

 

 

  마음의 법칙   

제 3 화 깨달음이 시작이다(마음의 거울입니다)

물을 찾는 물고기여
찾는 물은 그만 두고
마시고 있는 물이나 가져오게
제1화에서 물을  찾는 물고기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물속의 물고기가 물밖에서 물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물을 떠나서 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물고기는 어떻게 해야 물을 찾을 수 있을까요?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합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모르는 것을, 몰랐던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무지(無知)를 깨뜨린다는 얘기입니다.
마음이라는 이 物件을 바르게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마음의 作用을 아는 것 입니다. 마음은 스스로 아는 存在이지만
그 안다는 것은 道具를 通해서 傳達되고 또 傳達받습니다.
例를 들어 볼까요?
마음이 事物을 보고자 하면 눈이라는 道具를 通해서 봅니다.
듣고자 하면 귀를 通해서 듣습니다. 마찬가지로, 냄새는 코를 通해서,
말은 입을 通해서, 感觸을 느끼는 것은 몸의 神經을 通해서 합니다.

그런데 눈으로 보는 것을 우리는 普通 '보고 안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귀로 듣고 안다,냄새 맡고 안다, 말하고 안다,
느낌을 안다는 표현이 있음을 한번 生覺해보세요.
우리가 무심히 쓰는 말 가운데 이렇게 눈 귀 코 혀 입 몸을 通해서 하는
마음의 作用을 보통 안다 라고 하는 理由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마음이란 本來 아는 存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本來 아는 것 自體라면 마음 스스로가 보고 듣고 말하면 될텐데,
왜 굳이 눈을 通하고 귀와 입을 通해서 意思를 傳達하는지
새삼 疑問이 들지 모르겠습니다. 참 複雜한 過程을 通해서 말입니다.

 

 


다음은 마음의 作用 가운데 意識作用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보통 앞에서 든 눈.귀.코.혀.입.몸은 마음이 肉體라고 하는 道具를 通해서
作用을 일으켜 쓰는데 비해서 精神的인 道具를 通해서 하는 마음의 作用이
바로'意識'입니다.意識이란 한 마디로 마음이 내리는 判斷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生覺이라고 하면 더 理解가 빠르겠군요.
칠정(七情)이라고 해서 사람에게 일곱 가지 感情이 있습니다.
기쁘고, 화나고,슬프고, 즐겁고,사랑하고, 미워하고,욕심내는 것 등을 말하는데,
이 七情은 그 스스로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눈.귀.코.혀.입.몸을 通해서
 作用한 結果로 얻게 되는 生覺입니다.
가령,불을 만지다 손에 대이면 뜨겁다고 느끼면서 火가납니다.
그리고 불은 뜨거운 것이라는 判斷을 내리고 다시 불을 만지게 되면
훨씬 조심하게 됩니다.
마음은 이러한 過程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判斷하고 決定합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生覺하는 갈대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生覺함이란 바로 이러한 七情을 通해서
判斷하는 사람의 意識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마음은 一切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創造主라고 얘기했습니다.
(一切唯心造를 기억하시죠?)
지금 窓 밖으로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도 마음이 만든 膳物입니다.
數千 數億萬개의 눈송이는 단 하나도 똑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같은 하얀 눈(雪)으로 보이는 것은, 같은 업(業)을 갖고있는
數千 數億萬개의 마음들이 같은 업권(業圈)에서 비슷한
마음의 作用을 한 結果로써 나타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구에 태어나고,
대한민국에 태어나고,경기도 포천에 태어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地球라는 같은 業圈, 대한민국이라는 같은 業圈의 비슷한 業을 지은 結果로
여기에 태어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정과 무정이 개유불성이다(有情無情皆有佛性)."
당시에는 인도말로 하셨겠지만 이렇게 한문으로 번역된 말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있는 것이나 이 없는 것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합니까?
사람,動物 (細胞,박테리아 바이러스등등),植物등의 마음은 아는 作用이 있습니다.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잠자고, 종족을 번식하고, 싸우고, 위로하고등등
참 많은 마음의 作用이 있습니다.
다만, 植物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生覺이 거의 없으며,

細胞나 바이러스등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지만 生覺이 아주 單純합니다.
그러다가 곤충 새 포유류등으로 올라 오면 生覺도 多樣해지고  움직임도 훨씬 빨라지지요.

人間은 어떻습니까?
人間이 가지고 있는 을 普通 知識이라고 합니다.
萬物의 靈長이라고 우쭐대는 人間은 生覺이 多樣함을 넘어서 너무 複雜합니다.
人間은 그 앎이라는 生覺의 道具를 아주 잘 活用해서 宇宙船을 타고 달나라도 가고,
컴퓨터도 만들고,수천미터 바다밑도 다닙니다.
그러나 가공할 만한 殺傷武器를 만들고 서로 죽이는 戰爭을 지금까지
쉬지 않고 있습니다.너무 發達된 生覺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되레 피곤한 存在이기도 합니다.
有情이란 이렇게 이 있는 存在, 生覺할 줄 아는 存在를 말합니다.

無情이란 무엇일까요?
돌멩이,흙,광물질,물 바람등 스스로 生覺하지 못하는 物質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함부로 取扱하는 이러한 物質들도 다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돌멩이,물,쇳덩이에게도 사람과 같은 마음이 있다니, 믿어집니까?
그것은 틀림없는 事實입니다.
돌멩이는 마음은 있으되 그 마음의 作用이 거의 完璧하게 멈춰버렸기 때문에
스스로 生覺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狀態를 부처님은 무기(無記)라고 하셨습니다.記錄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돌멩이는 백날을 때려도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有情無情이 다 皆有佛性이라고 말씀하신 窮極的인 意中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理解하면
바로 오늘의 주제인 '깨달음'에 아주 가까이 간 것입니다.
마음 밖에는 마음이 없다. 마음을 떠나서는 단 한 物件도 설 수 없다.
그렇습니다. 오직 마음 뿐입니다.
그러니 이 三千大天 世界의 森羅萬像 그 어떤 것이라도
마음 아닌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마음만으로 꽉 차있는 世界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보는 物質世界란, 業따라 輪回를 거듭하면서 몸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어 옷만 갈아 입을 뿐 그 根本은 오직 마음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意中입니다.
이 부처님의 말씀이 分明히 理解가 된다면 이 산승(山僧)의 넋두리가
오늘 헛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이제 마음이란 어떤 物件인가를 살펴 볼 차례입니다.
먼저, 함허득통(含虛得通) 선사라는 분의 금강경(金剛經) 說義에 나오는
게송을 보겠습니다.
< 한 物件이 있으니
이름과 모양이 끊어졌고
옛과 이제를 꿰었으며
한 티끌에 있으되
온 누리를 삼켜버렸다.
안으로는 뭇 妙함을 머금었고
밖으로는 뭇 事物과 일(事)에 應하면서
하늘과 땅과 사람에 있어서 이것이 主人이고
一萬 가지 모든 法에 이것이 王이로다.
넓고 壁 없음이여 그 비할 것이 없고
높고 끝없음이여 그 짝할 것이 없도다.
神妙하지 않은가?
허리를 구부리고 펴는데 있으며
은은히 보고 듣는데 있으니
玄妙하지 않은가?
하늘과 땅보다 먼저여서 그 비롯함이 없고
하늘과 땅이 다 없어진 뒤에도 그 마침이 없으니
있다 할 것이냐 없다 할 것이냐 나 모르겠다. " >

 

마음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습니까?
누군가가 당신의 마음을 나에게 보여주세요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여러분의 마음을 보여 주겠습니까?
모양도 없고 어떤 빛깔도 없는 이 마음을 보여줄 재간이 있습니까?
지금 이 마음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또 生覺하면서도 마음을 볼 수 없습니다.
물 속에 있으면서 물을 찾는 물고기의 處地와  무엇이 다릅니까?
앞에서 마음을 떠나서는 마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東西南北上下  그 어디를 둘러 봐도 온통 마음뿐인데,
마음을 보려고 하면 마음을 결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마음은 사라진 것입니까?
아니면 흔적을 남기지 않는 마술을 부린 것입니까?
마음은 한 번도 여러분 곁에서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마술을 부려서 흔적을 지운 것도 아닙니다.
마음은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태어난 적도 없고, 멸해서 사라진 적도 없습니다.
마음은 상주불멸(常住不滅)입니다.
항상 머물러 있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마음의 실다운 모습(실상實相)이라고 합니다.
마음과 비슷함을 지닌 것이 虛空입니다. 虛空에 모양이 있습니까?
虛空이 빛깔을 가지고 있습니까?
모양과 빛깔이 없는 虛空이기에 虛空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虛空이 없는 것입니까? 만약 虛空이 없다면
바람도 번개도 구름도 아니 이 山河大地가 서 있을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단 5분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無情한 物件으로서 가장 큰 것이 바로 虛空입니다.
有情한 物件으로서 가장 큰 것은 바로 마음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虛空이고 虛空이 마음입니까?
虛空도 마음이 만든 被造物에 불과합니다.
虛空은 스스로 아는 그 앎의 작용이 없습니다.
마음과 虛空의 根本的인 差異는 바로
스스로의 앎이 있느냐 없느냐의 差異입니다.

 

이제 마음을 깨닫는 얘기를 하겠습니다.
마음을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얼마든지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비록 두 손으로 감싸서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글로써 말로써
보여 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마치 물을 마셔본 사람만이
그 물의 차고 더움을 말해 줄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물에 대해서 오래 硏究하고 知識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도
물을 直接 마셔본 사람과 比較가 되겠습니까?
깨달음은 硏究하고 生覺을 많이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知識으로도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일까요?
물을 찾는 물고기가 물밖에서 물을 찾고자 하는 生覺을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 밖에서 물을 찾고자 하는 뒤바뀐 錯覺을 쉬어 버리기만 하면
그 고기는 즉시 물을 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꿈속의 몸을 나로 아는 錯覺을 벗어나면 마음은 스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꿈은 내 마음이 展開한 能力의 作用이지 實在 있는 世界는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내 肉體도 마음이 부려쓰는 道具이지 몸이 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내몸을 이루고 있는 눈 귀 코,팔다리는 나와 가장 가까운 因緣들이
내 마음을 따라 모인 것입니다.
그것들도 또한 各各의 마음이기에 因緣이 다하면 제 갈길로 가지요.
죽음이란 모였던 몸의 因緣들이 各各 제 갈길로 흩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 말이 理解되십니까?
몸이 나의 實體가 아니라는 이 事實에 分明하다면,
몸이 나라고 執着하는 것은 마치 꿈속의 世上을 實在 있는 것인양
錯覺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반야심경( 般若心經)에
"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遠離轉到夢想, 究境悅磐)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꿈속의 뒤바뀐 生覺을 여의기만 하면 곧바로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실상(實相:실다움)이 보름달 처럼 完璧하게 드러나는 그 刹那를 가리켜
'깨달았다 즉,견성(見性)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찰나간의 體驗이지만 여러분도 그러한 體驗이 있을 것입니다.
몸이라는 生覺을 完全히 잊고 하늘도 땅도 사라져버린 그 瞬間!
그러한 때,이러한 境地를 뭐라고 이름할 수는 없지만 分明히 지금과는 다른 體驗.
오직 마음이라는 둥근 달이 홀로 빛나는 것을 안다면,얼마나 쉽습니까?
오죽하면 세수하다 코만지기 보다 쉬운 일이라고 했겠습니까?
西山大師와 소요스님 사이에 있었던 一話를 소개할테니
마음을 깨닫고자 하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루는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게 소요선사란
대강백스님이 찾아 와서 마음을 깨닫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西山大師는 그 날로부터 소요스님에게 공양주노릇을 시키고,
부목,채전,원두 심지어는 시봉일까지 시키면서 부처님의 法文은
단 한 번도 해주지 않았습니다.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했던 소요스님은
어떻게든 法文을 물어볼려고 했지만 西山大師는 그때마다
밥해라 빨래해라 나무해라등등 물을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가끔 불러다 능엄경(楞嚴經)한 구절씩만 말해주었지요.
그러나 소요스님에게 능엄경은 自己가 學僧들에게 講議하던
 達達 외는 경전이라서 귀에 들어 올리가 만무했지요.
제자 보고는 궂으일만 가려 시키면서 당신은 서늘한 平床에 누워서 낮잠이나 자는데,
소요스님이 가만히 보니까 웃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서 보는 것이었습니다.
저걸 보면 깨달을 수 있나해서 어깨너머로 엿보기라도 하면
얼른 주머니속에 숨겨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깨달을 날만 학수고대했는데 영 可望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10년 째 되던 해, 드디어 소요선사는 떠나기로 작정하고
 下直人事를 합니다.그 때 인사를 받고 아무 말이 없던 西山스님은
주머니에서 때묻은 그 冊을 주면서, 혹연 길을 가다 살길이 망막해지면
펴셔 보라고 당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屍身은 네가 火葬할 것이다."라는 말씀과 함께.
下山을 하던 소요스님은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그만 학질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고갯마루에서 혹심한 熱과 苦痛으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문득 西山大師가 주었던 그 冊이 生覺나서 얼른 펴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詩가 적혀있었습니다.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자여
찾는 소는 그만 두고
탄 소나 끌고 오너라>

 이 詩를 본 瞬間 소요스님은 크게 깨달았습니다.
죽음의 고통도 없어지고 하늘 땅도 온통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아! 이것이다 바로 이것이야!
죽어가던 소요스님은 어느새 환희의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西山스님의 恩惠가 너무 感謝해서 西山스님을 뵙기 前에는
이대로 죽을 수가 없다는 噴心이 얼마나 컸던지
一時에 그 病이 다 나아버렸습니다.
一步一配를 하면서 西山스님에게 다시 가니 西山스님은 이미 앉아서
열반에 든 後였습니다.西山大師의 豫言대로 소요스님은
西山大師의 屍身을 精誠껏 다비해 모셨다고 합니다.

이 一話에서 여러분은 어떤 敎訓을 얻었습니까?
첫째는,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그 至極한 懇切함이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깨달음에는 반드시 스승의 指導를 받아야 합니다.
인가(印可)를 받은 스승의 지도가 없다면 혼자 깨닫는다는 것은 거의 不可能합니다.
설령 그러한 체험이 수 십번 있었다 해도 그것은 바른 見性이 아니라
십중팔구 식견(識見:아름알이)에 놀아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고 반듯이 깨닫고자하는 至極한 간절함이 없다면 애시당초 不可能한 일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 지도를 한다해도 房門의 문고리를 열고
방안을 들여다 보는 사람은 自己自身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눈이 내린 世上은 銀白의 비단을 펼쳐 놓은 듯 깨끗하고 맑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本來 맑고 깨끗한 物件입니다.
業으로 물들어져서 그 純粹함을 잃어버렸지만 그 根本은 變함이 없습니다.
마치 더러운 똥통에 黃金이 들어 있는 것과 같아서 그 黃金은 몇 千年이 지나도
그 純粹한 黃金의 價値가 變하지 않는 것과 같은 理致입니다.
내 마음을 내가 깨닫는 다는 것은 참 우수운 일입니다.
거울속의 내 모습을 보고 내가 있음에 안도하는 것과 같은 꼴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거울로, 알고자 하는 내 마음을 다시 비춰 보지 않는다면
깨달음이란 얻을 수 없습니다.깨달음이 바로 始作입니다.
無知를 깨뜨리는 始作이고, 바른 修行을 이끌어 갈 수 있는 始作이고,
成佛의 始作인 것입니다.

나무 비로자나불
나무 노사나불
나무 석가모니불

혜원스님(동국대 선학과 교수)

 

-결가부좌 명상도량 자비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