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지금 여기서 행복하라

장백산-1 2012. 9. 12. 10:41

 

언제나 행복하라 / 법상스님

삶은 완전하다---지금 행복하라 / 법상스님

 

 

불성(佛性), 신성(神性)이 있다는 말은 곧 나와 부처, 나와 신이 '하나'란 뜻이며,
나아가 우리 모두가 神이요 붓다로써 '하나'란 뜻이다.

一切 모든 存在가 '하나'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
그것도 나약하고 어리석은 중생으로써 하나가 아니라
부처로써, 神으로써 完全한 '하나'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人間과 自然이 둘이 아니라는,神과 人間이 둘이 아니라는,
내가 바로 부처라는 동체(同體)와 불이(不二) 思想이야말로
人類의 오랜 聖者, 賢者, 先覺者들과 모든 宗敎들의 共通된 가르침이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에 내가 相對에게 行하는 것이 곧 나에게 行하는 것이다.
내가 相對를 도울 때 事實은 나 自身을 돕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을 도우면서도

도왔다는 相을 낼 필요가 없는 理由가 相對方과 나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밥을 먹으며 내가 나에게 밥을 보시했다고 하지 않듯이
내가 상대방에게 보시한 것은 事實은 내가 나에게 한 것과 다르지 않다.

相 없이 보시하라, 無主上 보시하라,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
그것은 바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억지로 무주상보시를 해야만 한다는 윤리적인 지침이 아니라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自覺이 있다면 당연히 아무런 相을 낼 理由가 없는 것이다.

또한 佛性과 神性이란 것은 부처님의 性品, 神의 性品 그 自體라는 것이 아닌가.
부처님이나 神은 不完全하거나, 不足한 存在가 아니다.
그야말로 꽉 차 있고, 완전하며, 온전한 분들이다.

그렇기에 事實은 佛性과 神性으로 이루어져 있는 우리라는 存在 또한 完全하고 完璧하다.

그렇기에 事實은 보시해도 한 것이 아니다.
너도 完全하고 나도 完全하며, 너도 豊饒롭고 나도 豊饒로운데
무엇을 주고 받을 것이 있는가!
주고 받았다 한들 그것은 그저 單純한 에너지의 移動일 뿐이지
그것이 좋고 나쁘거나, 주어서 대단하거나 주지 못해 아쉬울 것도 없는 것이다.

거기에 아무런 相을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相을 내지 말고 보시하라는 말은
‘이렇게 하라’는 倫理 規定이거나, 命令이 아니라
그저 眞理가 그러하기 때문에 나온 가르침인 것이다.

佛性이 있다, 神性이 있다는 말은 곧 完全性을 意味한다고 했다.
아니 어떻게 부처가 신이 불완전할 수 있단 말인가.
完全하고 完璧하며 充分하고 充滿하다.

그렇기에 불성과, 신성과 다르지 않은 이 世上 모든 存在는
그 自體로써 더없이 完璧한 存在이다. 모두가 신이요 붓다로써 完全하다.
그것은 다른 말로, 이 世上 自體가 完全하다는 意味다.
이 世上의 본 바탕, 根源은 이러한 完全性에 根據하고 있다.
그리고 그 完全性을 이루고 있는 힘이 바로 慈悲와 사랑의 에너지다.

卽, 이 世上은 完全한 사랑의 에너지, 둘이 아닌 完全한 慈悲,  同體大悲

그 自體인 것이다. 抽想的으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란 희망의 약속이 아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지금 여기에서의 生生한 現實狀況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實感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내가 완전한 부처란 말인가? 내가 어찌 신이란 말인가?
그건 너무 엄청난 이야기이며, 또한 너무 불경스러운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眞實은 그렇다. 眞實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眞實로 말씀해 주셨고, 인류의 수많은 성인들도 같은 말을 해 왔다.
부처님께서는 깨닫고 보니 모두가 부처였다고 말씀하셨다.
救濟해야 할 衆生이 따로 없다고 하셨다.

그러한 眞實된 말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믿지 못할까?
왜일까? 그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나에게 주어진 現實에 대해 내 스스로 ‘나쁘다’고 判斷하고 解析하기 때문이다.
내 生覺과 判斷과 分別作用이 아무런 問題도 없는 無分別의 中立的인 現實에
끊임없이 判斷을 加하고 있기 때문이다.
現實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괴롭다고 生覺하는 내가 있는 것일 뿐이다.

本來는 完全한 慈悲의 佛性이고, 完全한 사랑의 神性 그 自體만 있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악마, 사탄, 마왕 파순이 우리를 꼬셔서

地獄으로 빠뜨린다고? 그렇지 않다. 악마도 사탄도 마왕도 없다.
사랑밖에 없는 完全한 宇宙法界 어느 곳에 마왕이나 악마, 사탄이 存在할 수 있겠는가?
신과 사탄이 싸운다는 것은 純全한 像徵일 뿐이고, 부처와 마왕 파순의 싸움 또한
內面에서 이루어지는 自己 自身과의 싸움을 像徵한 것일 뿐이다.

사랑의 神이 世上을 創造한 根源이라면 어찌 사탄이나 악마를 創造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純全한 人間의 想像이거나, 像徵이었을 뿐이다.
내 바깥에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存在하는 악마나 사탄은 없다. 完全한 虛構일 뿐이다.
그것은 다만 우리 안에 있는 生覺이며,我相이고, 에고라는 虛像을 像徵하는 것일 뿐이다.
卽 內面의 煩惱, 欲望, 執着, 火, 어리석음, 我相인 것이다. 惡魔는 바로 我相이며 에고다.

사탄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生覺과 判斷이다. 마왕은 바로 貪慾과 火와 煩惱이다.
즉 내 바깥에 있는 어떤 存在나, 狀況이 우리를 괴로움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괴롭게 만들 수 있는 어떤 外部的인 힘이란 存在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내 스스로 만들었다.

나의 判斷과 解析이 그 모든 괴로움과 두려움을 가져왔을 뿐이다.

남부러워하는 한 좋은 직장의 중역 간부가 찾아와 말한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조금 무리수를 두어야 하는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자니 진급을 못 할 것 같고,
진급을 하자니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한 일을 해야 하는데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다른 質問을 드렸다. 지금 이 瞬間 幸福하시냐고.
지금 自身의 삶이 대체적으로 幸福한가 하고.
過去에 生覺했던 幸福을 지금 이루었는가 하고 여쭈었다.


가만히 生覺해 보시더니 하는 말씀이 그러고 보니

自身은 願하는 것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다.

처음에 오르고자 했던 자리에 지금은 이미 와 있고,
벌고자 했던 정도의 경제력을 지금 누리고 있고,

아내도 하고 싶은 일 하며 행복해 하고,

자식들도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가만히 生覺해 보니 어릴적 自身이 生覺했던 바로 그 幸福의 삶이
어느 샌가 벌써 實現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지금껏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몰랐다. 왜 몰랐을까?
여전히 돈도 더 벌어야 하고, 진급도 더 해야 하고,
자식들도 더 잘 뒷바라지 해야 한다는 生覺 때문이다.
부족해서 더 필요하고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꿈이 이루어진 바로 그 瞬間에 조차 여전히 그 행복을 누리기는 커녕

더 높은, 더 많은, 더 큰 目的을 向해 내달리고자 하는 慾心과 執着 때문에 이미

찾아 온 행복을 스스로 걷어 차 버리곤 한다. 幸福은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지,

追求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 추구는 죽을 때 까지 끝없이 계속되지만

누리고 만끽하는 행복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다.

누릴 수 있는 것을 걷어 차면서 어떻게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하는가.
누리는 것을 더 많이 누릴 때 세상은 우리에게 보다 더 많이 누리도록 해 준다.
反對로 누리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바라기만 할 때 世上은 부족과 결핍을 가져다 준다.
眞實이 이러할진대 어떻게 할 것인가? 누릴 것인가 아니면 추구할 것인가.

이란 추구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누리고 느끼며 만끽해야 할 무엇이다.
주어진 을 누릴 때 비로소 의 完全性이 드러난다.

은 本來부터 完璧했고, 完全했다는 事實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追求하고 빌고 欲望할 때 存在 本然의 完全性사라지고

缺乏과 不足과 失敗가 創造되고 만다.

事實은 不足했던 것이 아니라 不足하다고 生覺한 것일 뿐이다.
事實은 무언가가 더 必要한 것이 아니라 더 必要하다고 欲望한 것일 뿐이다.
事實은 幸福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幸福하지 않다고 判斷했을 뿐이다.
幸福은  어떤 完璧한 狀況이 갖춰졌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幸福을 누릴 때 바로 幸福의 完璧한 狀況이 만들어진다.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고, 어떤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왔던 것은 完全한 幻想일 뿐이다.
지금 이대로 幸福하다. 幸福하기 위해 어떤 것도 必要로 하지 않는다.
‘幸福하기 위한 어떤 特定한 條件’이라는 것은 없다.
世界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幸福指數를 보라.

부처는 어떤 條件도 必要치 않는다. 神은 어떤 것도 願하지 않는다.
만약 무언가를 얻어야지만 그 때 가서 幸福할 수 있다면 그것은

佛性과 神性의, 宇宙法界의, 그리고 우리 自身의 完全性을 짓밟아 버리는 것이다.
부처도, 神도, 宇宙法界도 언제나 完全하다.

宇宙法界의 모든 存在 또한 完全하고 完璧하다. 人間 또한 마찬가지다.

완전하다면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으며, 실패로 인한 괴로움도 없고, 失敗 自體도 없다.
무언가를 必要로 하는 理由는 내가 不完全하기 때문이고,
돈을 더 벌어야 하는 理由는아직은 充分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生覺, 나 自身에 對해서 不完全하고 不足하며 어리석다고 判斷하는
바로 그 生覺이 모든 問題를 가져온다는 事實을 아는가!
우리에게 있는 모든 問題는 그것 自體가 問題인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 대해 問題를 삼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렇게 生覺하면 그러한 現實이 創造된다.

우리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能熟한 畵家와 같아서

마음 먹은 대로 現實이 創造된다는 화엄경의 준엄한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 그것이 바로 나다.

그리고 내가 바로 부처요 신이다.
또한 내가 바로 당신이고, 우주이며, 존재 자체이다.
그리면 그린대로 이루어진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무엇을 그릴지에 대한 土臺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 土臺가 되는 生覺을
‘나는 부족하다’ ‘나는 가난하다’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는 실패할 지도 모른다’
‘나는 어리석은 중생이다’ ‘나는 근기 낮은 수행자다’ 라는 데 둘 것인가,
아니면
‘나는 完全하다’

‘나는 豊饒롭다’

 ‘나는 幸福 그 自體다’

‘내가 바로 부처요 神이다’
‘너와 나는 둘이 아니다’

‘실패라는 것은 없다. 삶은 언제나 성공적이다’라는 데 둘 것인가.

전자의, 부족과 가난과 불행과 어리석음의 生覺의 土臺 위에서는 언제나 ‘더 필요하고

성공해야 하고 싸워 이겨야 하고 더 많이 벌어야 하며,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現實을 그려내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바람은 곧 反對의 結果를 가져온다.
더 必要하다는 生覺의 本質에는 아직은 不足하다는 生覺이 깔려 있기 때문이고,
성공해야 한다는 生覺  裏面에는 失敗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면 오히려 두려워하는 그것이 創造된다.

事實은 바로 그 土臺의 生覺을 그려내는 것이다.
부족과 가난과 불행과 어리석은 세상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러나 後者의 生覺의 土臺는 어떤가?

完全하고 豊饒로우며 幸福하고 삶의 모든 瞬間이 그대로 成功이며

나와 너가 모두 부처요 神이라면 어떨까?

完全한 存在는 그 어떤 것도 必要로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더 벌 것도, 바랄 것도,

욕망할 것도 없다.언제나 充滿한 幸福과 滿足과 豊饒로움과 平和가 넘쳐 흐른다.
넘쳐 흐르는 그 幸福을 나누어 주는 것,

바로 그 사랑과 자비를 나누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없으며,
부처가 되어야 겠다는 환상도 없다.

그저  每 瞬間 瞬間 完全함을 누릴 뿐이다.

그러한 土臺 위에서는 언제나 完全性이 創造된다.
아니 創造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完全했으며 完璧했다는

바로 그 事實이 드러나는 것이고, 바로 그 事實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存在 本然의 故鄕, 完全性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歸依, 歸鄕 !

이 말은 상투적이거나,형이상학적이거나,뜬구름 잡는 말이거나, 비현실적인

이론적이기만 한 말이 아니다.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 自身을 完碧하게 變化시키는

것에 對한 直接的인 部分과 連結되어 있다.

나는 언제나 완전하다고 외치라. 지금 이 자리에서 풍요와 행복을 누리라.
완전하고 풍요롭다면 내 돈이 아까워서 상대방을 돕지 못할 이유가 없다.
無限한 豊饒로움이란 宇宙 全切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것이다.
내가 아까워하고, 蓄積하고, 적다고 生覺하게 되면 바로 그런 궁핍과 결핍의

結果가 만들어질 뿐이다.
넉넉하고 풍요롭다는 마음으로 도울 수 있는 모든 이를 두려움 없이 도우라.
마음에  宇宙 根源의 에너지인 豊饒와 完全性이 깃들게 될 것이다.
두려움 없이 풍요의 土臺 위에서 돕게 된다면
도우면 도울수록 더 많은 풍요가 당신을 찾아 올 것이다.

完全히 幸福하다면 무언가를 더 바랄 것이 없지 않은가.

未來에 오게 될 幸福을 꿈꿀 것도 없다.

'지금 이 瞬間'이 完全無缺한 幸福이라고 외치라.
아무리 작고 사소한 기쁨이라도 그것이 바로 完全한 幸福임을 알아차려라.
넘치는 幸福 그 自體인 사람은 언제나 世上을 向해 幸福을 흩뿌릴 수밖에 없다.
나처럼 타인도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원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 행복한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진다.

내 삶에 실패란 없다.언제나 삶은 완전하며 성공적이다.
부정적으로 보이는 현실 또한 사실은 성공이고,

실패라고 보이는 상황 또한 더 깊은 차원에서 본다면 성공이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실패라는 단어를 내 삶과 결부시키지 말라.더 깊이 들여다보면 실패가 곧 성공이다.
내 삶은 언제나 성공의 연속이라는 事實을 바로 깨달으라.
現實의 狀況에 대해 成功 혹은 失敗라고 解析하지 말라.
성공적인 삶을 사는 이는 失敗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未來를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두려운 現實을 創造하지 않는다. 언제나 成功만을 創造해 낸다.

삶은 언제나 完全하다.
지금 여기에서 幸福하라.

 

출처: http://moktaksori.org/index.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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