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학이야기]우리는 ‘한알’이다
주간경향 입력 2005.07.08 10:57국학이야기’ 제1회의 글에서 나는 국학을 ‘우리가 누구인가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고 했다. 너라는 타자(他者)와 너의 對相인 내가 만나 어떻게, 그리고 무엇이 우리라고 부르게 하는지, 우리의 精神的 DNA를 찾아 우리가 누구인지, 너와 나의 관계는 무엇인지를 찾는 신원조회 작업이 國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신원조회에서 우리가 되게 하는 인자(因子)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이다. 우리의 피에, 腦 속에 ‘한’이 內在하지 않으면 우리는 他者로 돌아서야 한다. 우리 生來 以前의 자리가 ‘한’이다. 그 한이 담긴
經典이 81자로 된 ‘天符經’이다. 天符經은 ‘얼’을 숫자로 설명한 인류 최고(最古)의 經典이다.
“宇宙 萬物은 하나에서 시작했지만 그 하나는 시작도 끝남도 없는 하나다. 그 하나는 셋으로 갈라졌지만 그 本性의 자리 하나는 다함이 없다. 사람의 몸 안에는 하늘과 땅이 다 들어와 있다”고 天符經은 시작한다.
이 하나가 바로 한얼이다. ‘삼일신고(三一神誥)’에는 “너희 머리 속에는 한얼이 내려와 있고 너희 팔과 다리에는 천지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다. …너희는 한얼 속에 한울 안에 한알이니라”라고 했다. 이 말씀으로 이 民族과 人類를 救援할 수가 있다.
이런 믿음을 가르치고 일러주는 것이 단학(丹學)이다. 때문에 국학의 핵심에 단학이 있고 단학의 중심에는 한얼이 담긴 뇌호흡이 있다. 이것은 신앙도 종교도 아니다. 깨닫고 나면 자명한 사실일 따름이다. 견성(見性)이니 성통(性通)이니 구원이니 하는 것이 한얼을 깨닫는 것이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그의 깨달음을 자기만 지니려 않는다.
<b> 깨닫고 나면 자명한 사실을 깨우쳐 준다는 것은 바로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을, 자기가 한알이라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한알은 한울 안에 있고 한얼 속에 있음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누굴 믿고 안 믿고의 종교적 신앙은 필요없다.
그냥 알고 깨닫기만 하면 된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알 때, 나아가 세계가 이것을 알 때, 역사와 사상의 뿌리를 알 때, 結局 모든 宗敎와 思想은 人間을 包含한 宇宙 萬物이 큰 나무에 열린 하나의 열매임을 알게 된다. 서로가 누구인지를 모를 때는 싸우지만 한 가지에 열린 형제임을 알 때, 이산가족의 재회 같은 환희를 느낀다.
싸우는 世上이다. 갖가지 利己心으로 연일 싸우며 지새는 요즘이다. 하지만 신원조회를 통해 서로가
헤어졌던 형제자매임을 알게 될 때 싸움은 멎고 眞情한 平和가 찾아온다.
스스로 病이 낫고 마음의 傷處가 치유된다. 이 신원조회 구실을 하는 것이 국학이고 단학이다.
‘한’의 의미에는 20여 가지가 있다. ‘하나’의 준말로서 하나라는 개체이기도 하면서 한덩어리 한울 속에 있는 전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다(一卽多 多卽一). 하나가 여럿이 되는 것이 創造다. 그 여럿이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過程이 生成進化의 原理다. 한사상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天符經은 5大 原理를 담고 있다.
그 첫째가 進化, 創造의 원리이다.
둘째는 수승화강(水昇火降)의 원리다. 셋째는 본성광명(本性光明)이며,
넷째는 우아일체(宇我一體)의 원리다. 다섯째는 영생(永生)의 원리다.
天符經에는 천당, 지옥, 죄와 벌의 이야기가 없다. 속죄와 구원의 교리는 없다.
하나(一)에서 시작해 하나(一)로 끝난다.
하나라는 槪念은 同一한 存在에 대한 유한(有限)과 무한(無限)의 명제를 同時에 含意하고 있다.
한마디로 檀君時代 韓民族의 宇宙관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 天符經의 ‘一始無始, 一終無終一’이다.
構體性과 抽想性, 絶對性과 相對性, 特殊性과 普遍性의 關係의 表現이다. 바로 이 對稱的 性格은
生成과 消滅이라는 構體的인 現狀을 認定하면서도 그것을 否定하고
事物과 事物 사이의 相對的 關係를 끌어안으면서 否定한다.
모순(矛盾)처럼 보이는 이 原理는 現狀에 대한 부분적 부정과 부분적 긍정의 融合을 意味한다.
<b> ‘하나’는 만물의 근본인 ‘얼’</b>‘
주역(周易)’에서 ‘역이불이(易而不而,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다)’
‘불역이대역(不易而大易, 바뀌지 않는 것도 크게 보면 바뀐다)’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天符經의 ‘하나(一)’는 可變性과 不可變性의 融合體다. 이것은 檀君時代 지성인들의 意識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런 見解나 思考는 生成 消滅이 斷切의 連續이 아니라 消滅되고 生成되는 循環論的인 것이다.
그래서 天符經은 ‘만법귀일(萬法歸一)’의 原理와 思想을 담고 있다.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이다. 쓰임은 바뀌어도 그 밑동인 하나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하나’는 근본인 만물의 ‘얼’을 의미한다. 얼은 우리의 뿌리다. ‘얼’이란 알맹이의 옛말이다.
天符經은 사람과 事物이 얼이라는 알맹이와 生成 消滅하는 現狀이 融合된 存在임을 말하고 있다.
‘역’(易-바뀜)과 ‘불역’(不易-바뀌지 않음)의 結合이 아닌 融合體가 存在라고 표현한 천부경이다.
때문에 天符經이 말하는 ‘하나(一)’는 생(生)도 사(死)도 아니다.
우리가 모태에서 태어나기 前에는 아마
現狀的으로는 無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태어날 내가 김씨인지, 박씨인지,
한국사람인지 미국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이 狀態에서 우선 우리는 ‘사람’이란 하나(一)로서 共通的이 된다. 그런 다음 姓도 이름도 國籍도 생긴다.
수없는 變化를 겪고 生成의 過程을 거치면서 結局 消滅(죽음)로써 하나(一)로 돌아간다.
‘한’의 자리는 人格的 神의 자리도 아니다. 天符經은 ‘한’으로 創造를 말하지만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다.
段階의 頂点에 앉아 創造와 破壞를 마음대로 하는 神은 없다. 처음도 마지막도 없는 비시원적(非始原的)
立場인 天符經은 絶對者의 자리매김을 하지 않는다.
‘한’이 처음과 마지막의 融合이라면, 그것은 創造性이 없는 ‘한’은 存在할 수 없다는 意味다.
처음에서 마지막을 向해 가는 過程이 創造가 아닌가. 마지막이 있다지만 그 끝이 ‘하나’라는 처음이기에
처음과 마침의 循環運動이 創造라는 生成이다.
天符經은 하늘, 땅, 사람이 하나라는 천지인(天地人) 合一을 말하고 있다. (執一含三 會三歸一)
宇宙에 가득 찬 얼(한)이 사람이 됐다는 것이다.
사람 속에 하늘 땅이 하나(人中天地一)라는 思想은 東學의 인내천(人乃天) 으로 이어졌다. 檀君의 탄생에서도 하늘도 땅도 사람을 지향했다. ‘하나 속에 셋이, 셋 속에 하나가 있다’는 이 天地人 思想이야말로 우리
민족정신의 원형이라 하겠다. 이 민족정신이 신원조회의 기준이다. 이것을 되찾자는 운동이 국학이며 단학이고 뇌호흡이다.
이승헌<국제평화대학원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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