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신[一神]이란?
◎삼일신고[三一神誥]
神在無上一位 有大德 大慧 大力 生天 主無數世界
신재무상일위 유대덕 대혜 대력 생천 주무수세계
造兟兟物 纖塵無漏 昭昭령령 不敢名量 聲氣願禱
조신신물 섬진무루 소소령령 불감명량 성기원도
絶親見 自性求子 降在爾腦
절친견 자성구자 강재이뇌
※戶下口+戶下口(령)=靈字의 古字 ※止下止+刂(뇌)=腦
※神(신), 爾(이), 無(무) 聲(성)등 4자는 고자[古字]가 있으나 입력 불가하여 현행글자로 대입하였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람.
※降[1;항복할 항][풀이;1][풀이]①항복하다.②항복을 받다.③크다.④떨어지다. 새가 죽음.⑤기뻐하다. 마음이 자리 잡다.⑥내[川] 이름 [2;내릴 강]①내리다.㉮낮은 곳으로 옮다.㉯임하다. 다다름.㉰공주가 강가[降嫁]하다.㉱물러나다.㉲겸손하다. 자기를 낮춤.㉳숨다.㉴돌아가다. 향함.㉵드리워지다.㉶뒤. 나중. 다음.②비가 오다.③물이 넘쳐흐르다.④별이름. 규루[奎婁].
※衷[속마음 충][풀이]①속마음. 정성스러운 마음.②가운데, 중앙[中央].③속옷. 속속곳. 내의[內衣].④맞다. 알맞음.⑤바르다. 올바름.⑥착하다.
삼일신고[三一神誥]의 하나님 일신[一神], 한민족의 하나님[一神]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의 모든 유일신[唯一神], 절대신[絶對神] 사상을 설명함과 동시에 미래의 인류가 추구할 가장 높은 수준의 인본주의[人本主義]의 개념을 제시한다.
그 위로는 아무도 없는 높은 자리에 계시는 하나님은 유일신[唯一神], 절대신[絶對神] 사상을 설명하는 하나님이다. 완전히 다른 개념의 이 두 하나님이 삼일신고[三一神誥]의 제2장 일신[一神]에서는 한 분인 하나님이다. 하나가 셋이 될 때 유일신[唯一神], 절대신[絶對神]의 하나님이요, 셋이 하나가 될 때 인간의 중심에서 깨어나 인간이 위주가 되는 사상의 하나님이다. 삼일신고[三一神誥]의 하나님은 동서양의 모든 종교가 애써 도달하려 했던 유일신[唯一神], 절대신[絶對神]에 대한 모든 사상을 한꺼번에 지닌다. 동시에 인류가 애써 도달하려는 인간 위주의 모든 사상을 한꺼번에 지닌다.【현묘지도 삼일신고 최동환 해설 274쪽】
◎일신[一神]의 해석
하나님은 그 위로는 아무도 없는 자리에 계신다.
큰 덕과 큰 지혜와 큰 힘으로
하늘을 내시고 수 없는 세계를 주관하시고
많고 많은 물건을 창조하셨다.
그 일은 너무도 세밀하여
먼지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밝고도 밝으며 신령스럽고도 신령스러우며
감히 이름과 그 수량을 셀 수 없다.
소리와 기를 다하여 원을 세우고 기도를 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친히 인식할 수 있다.
스스로의 본바탕에서 하나님의 씨앗을 구할 수 있으니
너의 머리 골에 하나님이 내려와 계시니라.
◎원문[原文]
神在無上一位 有大德 大慧 大力 生天 主無數世界
신재무상일위 유대덕 대혜 대력 생천 주무수세계
造兟兟物 纖塵無漏 昭昭령령 不敢名量 聲氣願禱
조신신물 섬진무루 소소령령 불감명량 성기원도
絶親見 自性求子 降在爾腦
절친견 자성구자 강재이뇌
※戶下口+戶下口(령)=靈字의 古字 ※止下止+刂(뇌)=腦
※神(신), 爾(이), 無(무) 聲(성)등 4자는 고자[古字]가 있으나 입력 불가하여 현행글자로 대입하였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람.
【현묘지도 삼일신고 최동환 해설 275쪽부터】
◎삼일신고 제2장 일신의 글자 수 51자☞그림도표 변화도 생략.
※삼한 이십팔숙[三桓 二十八宿]
삼한은 하늘에도 땅에도 인간에도 있다. 땅에는 진한[辰韓], 번한[番韓], 마한[馬韓]이 있으며 인간에게는 진한, 번한, 마한이 있다. 하늘의 삼한은 자미한[紫微桓], 태미한[太微桓], 천시한[天市桓]으로 이는 곧 하늘의 진한, 번한, 마한인 것이다. 이십팔숙은 이 삼한을 둘러싸고 있는 별자리들이다.【현묘지도 삼일신고 최동환 해설 276쪽】
일신[一神]의 일[一]은 하나이며 신[神]은 님이다. 따라서 일신[一神]은 하나님이다. 삼일신고[三一神誥]의 제2장 하나님[一神]은 한국인이면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알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바로 그 하나님을 설명한다.
◎일신;一神
우리말 하나님은 하느님, 한얼님, 한울님, 하누님, 등의 용어로도 쓰인다. 이 용어들이 여럿이라 해도 그 의미는 삼일신고의 하나님[一神]안에 포함됨을 물론이다.
우리말 하나님을 한문으로 옮길 때는 삼일신고의 일신[一神], 366사[事]의 천신[天神], 천지인경[天地人經]의 천[天]으로 사용되어 하느님, 하느님, 하늘로 직역되지만 이는 모두 삼일신고 제2장 하나님[一神]에 포함됨에 예외가 없다.
◎ 하나님이란 어휘.
조선 선조[宣祖] 때의 시인 노계[蘆溪](1561~1642년)의 노계 가사 중에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기록이 나타난다.【현묘지도 삼일신고 최동환 해설 276쪽】
●시문
時時로 머러드러 北辰을 바라보고
남모르난 눈물을 天一方의 디이나다.
一生에 품은 뜻을 비옵나다 하나님아.
[해석]
때때로 머리를 들어 북쪽임금 계신 곳을 바라보고
남모르는 눈물을 하늘 한쪽에 떨어뜨리는 도다.
일생에 품은 뜻을 비옵니다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란 용어가 한글로 명문화되어 나타나는 가장 오래된 자료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어느 종교를 가지고 있든지 상관없이 다급할 때는 예외 없이 하나님[임]을 찾아왔고, 지금도 찾고 있으며, 앞으로도 찾을 것이다.
400년 전 노계가“일생에 품은 뜻을 비옵니다 하나님이시여!”라고 말한 그 하나님은 우리민족의 집합적[集合的] 무의식[無意識] 안에 늘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타이어족의 하나님.
엘리아데는
“북극권,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민족들의 종교는 한 가지 일치하는 대목이 있는데 그들이 종족적, 언어적으로 조금씩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개 천상계의 대신[大神] 전능한 창조신을 알고 있고 그들을 섬긴다는 것이다. 즉 몽고족의 텡그리[Tengri], 부리아트족의 텡게리[Tengeri], 볼가 타타르족의 탱게레[Tengere], 벨티르족의 팅기르[Tingir], 야쿠트족의 탕가라[Tangara] 등이다.
알타이 타타르인들은 이를 흰빛[Ak Aayas], 코리야크[Koryak]인들은 높은 곳에 계시는 분, 높은 곳에 계시는 주님으로 부른다. 이런 신들은 이름이 구체적으로 ”천공“이 아니더라도 그 이름에는 ”하늘“의 특징적인 성격을 표상하는 말, 가령 “높은”이라든지 ”우뚝 솟은“ 이라든지 찬란한 같은 말들이 딸려 있다. 예를 들면 이르티쉬의 오스티야크족이 섬기는 천신의 이름 생케(sanke)라는 말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찬란하다, 빛난다. 밝다.“는 뜻이다. 바로 이 신을 두고 야쿠트족은 ”세계의 추장이신 아버지 주님”이라고 부르고 알타이 타타르인들은 “흰빛[Ak Ayas], 코리야크(Koryak)인들은 ”높은 곳에 계시는 분“ ”높은 곳에 계시는 주님“이라고 부른다. 터키-타타르인들은 북방과 동북방의 인접 민족들 이상으로 천상의 대신을 극진히 섬기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이 천상의 대신을 ”추장, 임금, 주님“ 그리고 ”아버지”라고 부른다.【미르치아 엘리아데 샤마니즘 이윤기 옮김 도서 출판 까치 1996년 29쪽】
우리말 하나님은 우리와 뿌리를 같이 하는 알타이어족에게서 공통적인 원형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알타이어족들이 애써 설명하려는 개념은 삼일신고 제2장이 모두 설명한다.
◎ 그리스의 유일신[唯一神].
이 같은 알타이어족의 유일신 하나님의 개념은 그리스에도 똑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기원전 오백년경 희랍철학자 크세노파네스는 외관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유한한 인간과는 같지 않은 유일한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했다.
플라톤은 신성[神性]-이것을 선[善;das Gute]이라고 불렀는데-을 모든 인식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였다.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신성[神性]의 빛 가운데서 인식되어지는 것 아니고, 자기의 존재를 신성으로부터 가지게 된다. 이 신성[神性] 스스로는 품위와 능력에 있어서 존재를 뛰어넘는다. 희랍 철학자들은 관습상으로 많은 신이 있지만 본래는 한분 하나님이 계셔서 사람이 이를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아무 사람과도 비교할 수 없으며 어떤 형상으로도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신성[神性]은 세계이성으로서, 혹은 세계법칙으로서, 혹은 운명으로나 섭리로서, 혹은 세계건축자로 생각되어진다.【칼 야스퍼스 철학입문 윤성범 역 1963년 을유문화사 41쪽】
크세노파네스의 유일한 하나님, 또 플라톤이 말하는 선[善]으로서의 신성[神性]은 삼일신고의 내용과 일치한다. 칼 야스퍼스가 분석하는 그리스의 유일신 사상과 신성[神性]을 세계 이성으로서, 혹은 세계법칙으로서, 혹은 운명으로나 섭리로서, 혹은 세계건축자로 보는 입장도 삼일신고와 같은 개념이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모두 슈메르 문명에서 왔고 슈메르 문명이 우리 배달문명에서 왔다는 사실은 아직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는 가설로 머문다. 그러나 이 같이 곳곳에서 드러나는 연결점을 볼 때 우리는 그 가설은 머지않아 우리들의 손으로 실증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2】;기독교의 하나님 용어 차용.
삼일신고 제2장 하나님[一神]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100년 전 서양인 기독교 선교사들이 하나님, 하느님의 용어를 차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과정에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들이 드러난다.
지금의 한민족에게 하나님은 무의식적[無意識的]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들 기독교선교사들이 이 땅에 나타난 100년 전만 해도 하나님은 한민족 모두에게 현실에서 의식적[意識的]인 유일신[唯一神]이며 절대신[絶對神] 이었다.
바로 이 같은 이유로 해서 그들은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을 차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그들이 남긴 기록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한국기독교[韓國基督敎]의 하나님 용어 차용의 역사.
한국기독교가 한민족의 유일신, 절대신 하나님을 언제부터 차용했나 하는 것을 그들의 기록으로 알아보자.
기독교[基督敎]에서 바이블을 한글로 처음 번역한 것은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이다. 1882년과 1883년 그는 누가복음전서를 처음으로 한글로 번역했다. 그중 1882년 본에는
“-----두사람이 하느님의압페셔올운쟈라------”
와 같이 하느님을 사용했다. 1883년 본에는
“------두사람이 하나님의 압페셔 올은쟈라----”
【나채운 기독교문사 우리말 성경연구 1994.6 .20. 38,39쪽】
와 같이 하나님을 사용했다. 다음으로 바이블을 번역한 사람은 이수정이다. 이수정은 박영효와 함께 일본에 수신사로 건너가 일본인 목사 야스가와에게 세례를 받았고 1885년 신약마가복음서언해를 일본에서 출간했다.
신 자예슈크리슈도스 복음
神의 子耶蘇基督의 福音이니
그 책은 위와 같이 하나님 대신 신[神]으로 번역하고 한글 토를 달았다. 그 다음 1887년 서울에 있던 5명의 선교사인 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스크랜튼, 헤론이 한국어 바이블 번역위원회를 발족했다.
여기서 언더우드는 1893년 찬양 가를 펴내면서 하나님이나 샹뎨[上帝], 텬주[天主]를 사용하는 대신 참신, 여호와를 채택하여 사용하였으나 그 반응은 극히 미미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894년 번역자 회는 신의 명칭에 대하여 표결에 부쳤고 투표결과 텬주;하나님=4;1로 나타났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선교사들은 선교활동에 다른 용어와 비교할 수 없이 효과적인 하나님 명칭을 사용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여기서 표결결과는 유명무실해지고 텬주[天主]와 하나님의 명칭은 한동안 공존한다. 기독교의 신에 대한 한글 번역에 있어서 이 복잡하고 치열한 논쟁에서 1906년부터 더 이상 텬주[天主]는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채택되었다.【류대영, 옥성득, 이만열 대한성서공회사 대한성서공회 1994년 106-112쪽】
【3】;100년 전 기독교 선교사들이 한민족[韓民族]의 유일신[唯一神], 절대신[絶對神]인 “하나님”을 차용하기 위한 검토과정.
100년 전 이 땅에 들어온 기독교 선교사들의 그들의 절대신 여호와[Jehovah] 대신 우리 한민족 고유의 절대신 하나님으로 차용한 일에는 대단히 주도면밀한 검토가 바탕이 되었다.
▼죤 로스 J. Ross
죤 로스는 1881년의 예수셩교문답, 예수셩교요령 1881년 예수셩교누가복음, 예수셩교요안니복음젼서에 하느님, 하나님을 채택한 사람이다.
그 이유에 대하여 한국인들이 하늘의 주[Lord of Heaven]의 뜻인 이 용어[Hananim]을 늘 한자[上帝;Sangti]로 번역하며, 한자 신[神;Shen]은 늘 귀신으로 번역했는데, 이 들은 상호 연관되어있다고 생각했다.【류대영, 옥성득, 이만열 대한성서공회사 대한성서공회 1994년 106-106쪽】
또 그는 중국에서 기독교를 믿으려는 사람들에게 용어상의 문제가 그들을 분열시켰음을 상기하고 한국인의 유일신 하나님이 그 어두운 그림자를 막을 수 있음에 고마움을 숨기지 않고 있다.
▼헐버트 H.E. Hulbert
헐버트는 오늘날(100년 전 한국) 한국인이 소유하고 있는 순수한 종교적 개념은 외래적 의식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원시적 자연숭배와도 거리가 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현상에 대해 기독교 선교사인 그는 “이상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이라는 서두로 말을 꺼낸다.【류대영, 옥성득, 이만열 대한성서공회사 대한성서공회 1994년 106-114쪽】
그리고 “이 ‘하나님 Hananim’이란 단어는 ‘하늘’과 ‘님’의 합성어로서 한자어 천주[天主]에 해당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모든 한국인들은 이 하나님을 우주의 최고의 주재자로 간주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또 이 하나님은 자연계에 횡행하는 여러 영[靈]이나 귀신의 무리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가 밝힌 가장 의미심장한 내용인”한국인들은 엄격한 일신론자monotheists이다.“는 사실은 이에 근거하는 것이다.【류대영, 옥성득, 이만열 대한성서공회사 대한성서공회 1994년 106-114쪽】
따라서 이 하나님에 부여된 속성이나 권능은 외국개신교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가르칠 때 거의 보편적으로 이 용어를 수용할 정도로 여호와[Jehovah]의 속성과 권능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중국에서는 천주[天主]라는 우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반해 한국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외적인 형상을 만들려고 시도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까지 밝혔다.【류대영, 옥성득, 이만열 대한성서공회사 대한성서공회 1994년 106-114쪽】
원시적 자연숭배도 외래사상과도 아무런 연관이 없는 순수한 종교적 개념이 하나님 사상이며 그 유일신 사상을 100년 전 한국인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이 말은 필자[최동환]가 늘 하고 싶어 하는 말이다. 그 말을 헐버트가 100년 전에 하고 있다.
오늘날 정작 한국고유사상[韓國固有思想]과 종교를 연구하는 사람 중 한민족의 하나님에 대하여 이만큼 정확한 보고서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궁금할 정도로 우리 고유의 하나님에 대해 나무랄 곳이 없는 정확한 보고서이다.
▼게일 J.S. Gale
게일[J.S. Gale]이 이해한 하나님을 살펴보면 당시 선교사들의 한국고유사상에 대한 이해도를 점검하는 일에 충분할 것이다. 게일은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시경[周時經]이 말하길 우리의 신은 크신 한 분으로‘하나님’으로 불리는데 ‘하나’는 일[一]을 의미하고 ’님‘은 주, 주인, 임금을 의미한다. 한 크신 창조주[創造主]가 ’하나님’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또 주시경[周時經]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그를 천지공사[天地工事]와 연관시키고, 영원한 창조주인 ‘조화옹[造化翁]’으로 부른다.(중략)우리의 ‘하나님’은 ‘지공무사하다.’ ‘거룩하시다.‘ 한다.”라고 밝혔다.【류대영, 옥성득, 이만열 대한성서공회사 대한성서공회 1994년 115쪽】
또한 게일은 1911년 ‘셩경젼서’가 출판되었을 때 그 기념식에서 한국인이 바이블을 받아들이게 된 첫째요인이 신명[神明] 때문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큰 한 분이며, 지도자요, 절대자[絶對者]로서 신비한 히브리어 명칭인 ‘나는 나다.’를 연상시킨다. ‘하나’는 유일을 의미하고 ‘님’은 큰 분을 의미한다.”【류대영, 옥성득, 이만열 대한성서공회사 대한성서공회 1994년 116쪽】
라고 하나님과 히브리어의 절대자와 비유하고 있다. 또 게일은 하나님과 다른 신들과의 비교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색슨어 'God'는 복수로 사용되었고 이방신들에게 적용되던 것이기 때문에 원하는바 목적에 사용되기 전에 많이 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어 ‘Teos'나 일본어 ’Kami'는 소위 많은 신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고, 중국의 상제[上帝] 또한 많은 신위[神位] 중에서 최고신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이름들이 오랜 기간의 사용 시기를 거치면서 애써 도달하려던 의미를 일시에 획득하고 있다.”【류대영, 옥성득, 이만열 대한성서공회사 대한성서공회 1994년 115쪽】
고 했다. 유일신 사상에서 유일신의 명칭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또 그것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종교인의 한사람으로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란 유일신의 명칭에서 말할 수 없는 경의를 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명칭으로 기독교를 전파하기가 얼마나 쉬웠나에 대하여 감사의 말 또한 빠뜨리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한국이 성경의 도래를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이 놀라운 호칭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류대영, 옥성득, 이만열 대한성서공회사 대한성서공회 1994년 115쪽】
게일은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도달하려고 하지만 도달하지 못한 절대신, 유일신의 의미를 우리 배달민족의 용어인 하나님이 지니고 있음을 경탄스러운 어조로 말하고 있다. 그 역시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무의식[無意識]의 중심[中心]인 하나님에 대하여 더 할 나위 없는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위의 글에서 그 어느 민족에게도 없는 놀라운 의미를 지닌 하나님이란 명칭이 우리나라가 바이블의 도래를 환영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라는 말은 아무리 크고 넓게 이해하려고 해도 그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보인다.
우리민족이 하나님이란 명칭을 가진 것은 그들이 오건 또는 가건 간에 아무런 상관없이 만년[萬年]을 이어온 배달사상[倍達思想]에서 온 것이다. 이 말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견강부회[牽强附會]요, 엄청난 아전인수[我田引水]임은 물론이다.
※牽强附會[견강부회][명] 가당치도 않은 말을 억지로 끌어다 대어 조리에 닿도록 함.
▼기퍼드 D.L. Gifford.
기퍼드는 한국의 종교적 신앙이 유교, 불교 그리고 샤머니즘의 혼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각 종교는 이 나라의 신화를 형성하는데 기여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의 신앙체계의 최상위에는 중국인들의 상제[上帝]에 해당하는 하나님[Hananim]이 있다. 바로 그 밑에 부처가 있다고 대부분 소개할 것이다.”【류대영, 옥성득, 이만열 대한성서공회사 대한성서공회 1994년 111쪽】
라고 했다.
▼언더우드 L.H. Underwood.
원래 언더우드는 하나님이라는 용어보다는 턴주[天主], 상제[上帝] 참신, 여호와를 사용하길 원했다. 또 실제로 그렇게 시도했던 인물이다. 그러한 그가 하나님을 사용하게 된 이유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찾을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빼고 다른 말로 출판한 바이블과 찬송가와 전도 문서를 몇 권 가지고 있었는데 이 같은 시도를 계속 고집할 경우 선교회에서 살아남는 것조차 불가능해질 정도였다.【L.H. 언더우드 이만열 역 기독교문사 1990.10. 20.136 쪽】
‘하나님’이란 용어를 쓰느냐 못쓰느냐는 실로 이들 선교사들에게는 실로 생존 그 자체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는 중국과 초기 한국의 종교를 탐구하는 동안에 옛 한국의 일부였던 고구려왕국[the Kingdom of Kokurei]에서는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유일한 신[神]만을 섬겼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말은 설명적인 용어로써 크고 유일한 하나[only One]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제까지 ‘하나님’이라는 말의 사용을 한국인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 그가 발견한 것과는 달랐다. 그러나 고구려시대의 그 의미가 원래의 의미이고 지금의 의미는 거기서 파생된 것이 틀림없었으므로, 언더우드는 이 본래에 담긴 속성을 가지고 이 말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하면 그 본래의 의미가 한국인의 가슴 속에 쉽게 살아날 것이었다. 새로운 발견을 통한 이 빛 속에서 이전에는 자신이 거부했던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이 조리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이제까지 대치하였던 모든 용어들의 사용은 큰 어려움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기꺼이 이 하나님이란 말을 사용하기로 하였다.【L.H. 언더우드 이만열 역 기독교문사 1990.10. 20.136 쪽】
이 기록은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개념이 발견되는 내용이다. 언더우드는 한국인에게 하나님이란 용어와 개념은 적어도 고구려 시대부터 있었던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 개념은 소위 집합적 무의식으로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아있다는 중요한 사실도 알았다. 따라서 이 하나님이란 용어를 사용하면 한국인의 집합적 무의식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그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그 이전까지 극구 반대하던 하나님이란 용어를 기꺼이 사용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고백에는 이상한 부분이 있다. 그의 말대로 하나님의 용어를 사용하면 한국인[韓國人]들의 집합적[集合的] 무의식[無意識] 속의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시 살아나는 하나님은 만년[萬年] 동안 생활 속에서 무의식[無意識]으로 자리를 잡았던 한민족의 고유한 하나님이지 결코 기독교[基督敎]의 야훼신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사용함으로써 한국인의 집합적 무의식 속의 하나님은 깨어나지만 이 하나님은 지난 만년간[萬年間] 한국인들이 늘 사용하던 바로 그 하나님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무의식[無意識]에서 하나님을 불러일으킨 다음 가르치는 “하나님”은 한국인[韓國人]의 무의식[無意識]의 “하나님”이 아니다. 기독교[基督敎]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야훼신이다.
바로 이 순간부터 한국인의 무의식[無意識]세계의 하나님과 의식[意識]세계의 하나님이 완전히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언더우드의 고백처럼 실로 주도면밀한 검토 속에서 이루어진 작업이었음도 밝혀졌다.
100년전 이 땅에 기독교를 심은 장본인들인 헐버트, 언더우드, 게일, 등은 한 결 같이 한민족의 고유한 하나님 사상에 경탄했다.
그리고 그들의 글에는 자신들이 갖지 못한 이 놀라운 어휘와 개념에 대한 부러움이 배여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차용함에 의해 기독교의 선교가 얼마나 쉬워졌는가 하는 감사와 경탄을 구절구절 드러났다.
헐버트, 언더우드, 게일 등은 이처럼 하나님의 어휘와 개념에 대해 100점짜리 보고서를 남겼다. 우리와 아무런 공통점을 가지지 못한 서양인 선교사들은 우리 한민족의 하나님 사상의 핵심을 놓치지 않고 정확히 잡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들을 파악하는 일은 그들보다 한국인이 훨씬 더 쉽다. 그러나 이들 이후 100년 간 그 어떤 한국인들에게서도 이 같은 중요한 사실에 대한 진지한 영구나 발전을 기한 보고서가 나타나지 않음은 무슨 이유일까?
필자[최동환]로서는 한민족에게서 한민족의 유일신, 절대신 하나님을 한민족의 문화와 사상의 중심으로 설정하지 않고 한민족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있다.
다시 말하면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을 빼고 과연 한국학이 성립할 수 있는가 하는 강한 의문을 도저히 숨기지 못하겠다. 하나님은 여러 용어로 대치되어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민족에게는 그 어떤 용어와 개념도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정확하게 부르거나 쓰는 것만큼의 의미를 지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4】;하나님;Hananim 사상의 회복.
CG. 융은---, 많은 경우 무의식[無意識]이 불합리[不合理] 내지는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우리들이 무의식[無意識]과 일치[一致]되지 않고 무의식[無意識]과 대립[對立]하고 있기 때문임에 지나지 않는다. 무의식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 또는 무의식의 분열은 무의식의 움직임이 여러 가지 본능의 에너지와 동일하다는 뜻으로 풀이한 것이다. 무의식과 연결되어있지 않다는 것은 본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뜻한다.【CG. 융 무의식분석 설영환 역 선영사1995 1995년 171쪽】
◎한국인에 있어서 의식세계의 하나님과 무의식 세계의 하나님의 불일치.[아래 그림 생략]
현대를 사는 한국인은 그 대다수가 100년 전 당시 한국인들이 기독교 선교사들에 설명했던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 대신 한국인 대다수는 바로 그 기독교 선교사들이 차용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있다.
우리민족 모두는 필자[최동환]가 제시한 그림과 같이 우리 한민족이 지난 만년간 중심으로 삼아온 하나님이 빙산의 수면아래에 거대한 모습으로 무의식 세계를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지난 100년간 현실 세계에 자리를 잡은 기독교에서 차용한 하나님은 빙산 위의 부분인 의식세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민족 전체에게 해당되는 이 엄청난 의식과 무의식의 불일치는 굳이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아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CG, 융은
“육체의 질병도 심리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있는데 질병이 언제까지나 치유되지 않는 것에도 심리적인 원인이 있을 때가 있다. 마음의 작용에는 조금이라도 빗나감이 있으면 육체로 인한 심한 질병에 걸리는 일이 있다.”【CG. 융 무의식분석 설영환 선영사 1995 1995년 171쪽】
고 했다. 인간의 마음의 작용은 조금만 빗나가도 그것이 육체의 심한 질병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민족의 집합적 무의식의 중심은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의식 세계에서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사실은 마음의 작용이 조금 빗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결정적으로 또 심각하게 빗나가는 엄청난 것이다.
이제 우리가 무의식 세계의 하나님에 대하여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야 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시급하고도 중요한 일인 것이다.
【5】;우리민족의 집합적 무의식과 우리의 고유한 경전.
100년 전 한국인이면 누구나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삼일신고[三一神誥]에서 하나님[一神]으로 명문화 되어 설명되며 천부경, 366사[事]도 이를 뒷받침 한다.
우리는 천부경과 삼일신고와 366사 등의 우리민족 고유의 경전을 읽을 때 우리가 설명 못하는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을 이 경전들이 빠짐없이 설명해줌을 보고 놀란다. 지난 만년의 역사에서 무의식으로 굳어진 경험들이 구체화되어 나타남도 느낀다. 따라서 처음 읽는다 해도 결코 처음처럼 생소하지 않는 묘함이 있다.
이는 오래경전을 읽을 때 느껴지는 이질감과 반대 개념이다. 그리고 그 내용이 너무나 세련되고 간결함에 다시 한 번 놀란다. 또한 유불선[儒佛仙]과 기독교[基督敎] 등 종교의 교리와 배치되지 않으면서 그 교리에서 말하려는 핵심을 간결하게 설명한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우리의 고유의 사상은 변질된 것이다. 그러나 이 경전들에서 발견되는 우리 고유의 사상은 유불선[儒佛仙]과 기독교[基督敎] 등을 모두 포함하는 세련되고도 광대한 더없이 높은 질의 내용이다.
현재의 고정관념은 신라이후 지금까지 지속된 것이며 특히 지난 100년 사이에 이상하게 뒤틀린 것이다. 그리고 이 경전들에게서 발견되는 내용은 지난 만 년 간 굳어진 무의식의 내용과 일치한다.
이 엄청난 시간과 시간이 부딪치며 어찌 혼란과 당황스러움이 없겠는가? 그러나 이미 우리는 이 혼란과 당황스러움을 우리 스스로 극복하여 우리의 고유한 사상을 중심으로 유불선과 기독교를 모두 우리 것으로 체질화하여 하나의 큰 우리를 만들었다.
【6】;남이 아니라 내가 문제다!.
1991년에 발간된 삼일신고의 초판에서 필자[최동환]는 삼일신고의 일신[一神]을 최초로 하나님으로 번역했다.
삼일신고[三一神誥]의 일신[一神]이라는 어휘를 번역하는가 하는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지가 않다. 삼일신고의 일신[一神]은 하나님 하느님 한얼님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 듯한데, 이 중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먼저 천부경[天符經]을 살펴보면 삼일 신고의 일신은 천부경의 대일[大一]임을 알 수 있다. 대일[大一]은 천일일[天一一]에 머무르면서 동시에 하늘과 땅과 땅과 인간에 골고루 머무르시며 우주 삼라만상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오로지 한 분뿐이라는 의미로서의 하나[一]라는 수[數]의 개념은 천부경의 내용을 폭 넓게 설명한다. 천부경이 하나에서 석삼극[析三極]하여 여러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곧 하나인 대일의 변화이며, 삼일신고에서 보다 하느님의 의미에 가까운 천신[天神]이 사용되지 않고 일신[一神]이라는 어휘로 사용된 내용으로 보아 ‘하나님’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천부경과 삼일신고의 내용에 보다 가깝다고 생각한다. 물론 필자[최동환]가 사용하는 ‘하나님’이라는 어휘는 기존의 그 어떤 종교와도 관련되어있지 아니하다. 오직 삼일신고의 일신[一神]에 대한 번역일 뿐이며 다른 어휘가 틀렸다거나 문재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최동환 해설 삼일신고 하남출판사 1991 7월 41쪽】
여기서 삼일신고의 일신[一神]을 최초로 하나님으로 번역한 이래 필자[최동환]의 모든 책은 한민족의 유일신, 절대 신의 명칭을 하나님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 1998년 이래 하나님 사이트(www.hananim.com)를 인터넷에 개설하여 운영함으로써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이 사이트에서는 천부경을 하나님의 경전, 삼일신고를 하나님의 말씀, 366사(참전계정)를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소개하고 또 여러 정보를 올리고 있다.
필자[최동환]의 생각은 사실을 사실대로 알자는 것이다.
필자[최동환]가 문제로 삼는 것은 오로지 한민족[韓民族]이 한민족[韓民族]의 유일신[唯一神]인 “하나님”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지난 100년간 우리가 하나님을 되찾기 위해 과연 어떤 노력을 했으며, 지금 하나님을 되찾기 위해 어떻게 노력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삼일신고 초판에서 일신[一神]을 하나님으로 번역한 이후 뜻밖에도 하나님 명칭 문제로 기독교와 마찰을 빚는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보아왔다. 마찰의 쟁점은 기독교가 하나님을 빼앗아 갔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1992년 11월 17일 서울 민사지방법원[民事地方法院]에 제출된“하느님의 명호 도용 및 단군성조의 경칭침해 배제소송”(민영진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 두란노 1996년 262쪽)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에 관한 문제를 법원에서 판결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발상자체를 필자[최동환]로서는 찬성할 수 없다.
또 만일 기독교에서 하나님 또는 하느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라면 불교에서 사용하는 대웅전[大雄殿], 산신각[山神閣]. 칠성각[七星閣][※]도 비슷한 문제의 소지가 있지 않을까?
※“불상이 처음 들어오매 절을 세워 이를 대웅[大雄]이라 했다. 이는 승도들이 옛 것을 세습하는 칭호로서 본래 승가의 말은 아닌 것이다. 또 가로되 승도와 유생이 모두 낭가[郎家]에 예속되어있다는 말을 이로써 알 수 있다.”(계연수 찬 한단고기 임승국역 193쪽 1986년 정신세계사.)
필자[최동환]로서는 기독교에서 하나님 또는 하느님을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 한국기독의 선택일 따름이라고 생각한다. 대웅전[大雄殿], 산신각[山神閣], 칠성각[七星閣]을 사용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선택인 것과 유사한 문제가 아닐까?
필자[최동환]는 하나님 명칭을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것을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필자[최동환]로서는 가능한 한 더 많은 종교에서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의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바람직한 일 여기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는 많은 나라에서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고 또 한민족의 유일신 하나님 명칭을 사용하리라고 필자[최동환]는 믿고 또 희망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누군가를 적으로 만들어 싸우는 잠시 동안만은 자신과 싸우는 고통스러움에서 도피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과의 싸움보다 훨씬 쉽고 편한 남과의 싸움을 선호한다. 누구나 자신과의 싸움이 가장 힘들고 무섭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칭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과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른 모든 일이 마찬가지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 문제를 풀어나감에 있어서 남과 싸움으로써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신 우리 스스로와의 싸움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리고 우리민족의 유일신 하나님은 가장 문명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통하여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7】;한민족[韓民族]의 천명론[天命論].
진실로 소중한 것은 늘 우리의 내부에서 얻어진다. 우리 한민족의 중심인 하나님은 우리의 내부에 늘 계시므로 우리의 내부에서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다. 그 누군가가 빼앗아갈 수도 없고, 빼앗아 간 것도 결코 아니다.
100년 전 서양인 기독교 선교사들은 기독교의 선교를 위해 하나님을 차용하여 얻은 효과에 대해 감사와 감탄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최동환]는 그들과 똑 같은 의미에서 그러나 그 반대방향에서 이들 서양인 기독교 선교사들이 하나님 명칭을 차용함으로써 얻어진 효과에 대해 감탄하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생겨나고 있음을 도저히 감추지 못하겠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길이란 일방통행이 아니라 늘 양방향이라는 진리를 말하고 있지 않는가?
유불선[儒佛仙] 기독교[基督敎]가 들어오던 길을 반대편에서 관찰해보자. 그 길들은 이미 우리 한민족의 고유한 사상이 세계로 뻗어나가기 위해 준비된 탄탄대로[坦坦大路]라는 사실이 보이지 않는가? 또 한민족에게서 다시 다듬어진 유불선[儒佛仙]과 기독교사상[基督敎思想]이 세계로 뻗어나가기 위해 준비된 탄탄대로[坦坦大路]라는 사실이 보이지 않는가?
지난 천 수백 년 간 전 세계의 종교와 사상이 우리나라로 들어오기 위해 길을 닦았다.
그러나 그 길을 주도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세력은 이미 그들이 아니라 우리 한민족이다. 이것이 필자[최동환]가 늘 가슴에 품고 있는 한민족[韓民族]의 천명론[天命論]이다.
이 한민족[韓民族]의 천명론[天命論]에 비추어볼 때 가장 감탄스러운 것은 우리의 국력이 국력이랄 거도 없던 100년 전에 서양인 기독교 선교사들이 닦아놓은 길이다. 이 길은 지난 천수백 년 간 유교. 불교, 등에서 닦아놓은 길과 비교가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에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불선과 비교해 어느 면에서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길을 닦아 놓았다. 한민족의 천명[天命]이 유럽과 미국 등 전 세계로 향하는 그 길이 단 100년 사이에 고속도로같이 탄탄대로가 되었다. 이 일의 시작을 그들이 우리를 위해 대신 해준 것이다.
우리는 만년[萬年]에 걸쳐 만들어진 이 놀라운 천명[天命]의 프로그램이 실행되는 시작점에 서있다는 사실을 이제 깨달을 때가 된 것이다.
◎주님 Junim, 성령[聖靈], 천주[天主].
하나님의 용어에 치중하다 보면 그 못지않게 중요한 용어가 본뜻을 잃어버린 것에 소홀하기 쉽다. 그 대표적인 것이 주님Junim과 성령[聖靈]이다.
▶발해국 시조 대조영님의 어제 찬은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극히 밝고 지극히 신령함이여
만 가지 조화를 주재하는 주님이로다.
至昭至靈 万化之主 旣剛而健 慧炤德溥
지소지령 만화지주 기강이건 혜소덕부
여기서의 대조영님은 절대신인 하나님[一神]을 만 가지 조화[造化]를 이루신 주님으로 표현했다. 즉 민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같은 말이다. 즉 우리가 t용하는 절대신 하나님은 곧 ‘주님’과 같은 말이다.
▶그리고 삼일신고 고경각의 신사기본은 그 시작이 제[帝]대신 ‘주[主]’로 시작한다.
主若曰 咨爾衆
주약왈 자이중[人人人=衆] (부록참조)
이 내용은 이 책의 시작인 제왈이오가중[帝曰爾五加衆]과 같은 내용이다. 즉 주[主]=제[帝]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삼일신고의 주인공인 ‘제[帝]’를 설명한 모든 해설이 우리말 ‘주님’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말이다.
▶신지비사로 알려진 서효사의 삼한장[三韓章]에도 단군삼경[檀君三京]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주[主]’가 등장한다.
聖主幸新京
성주행신경【185;최동환 천부경의 예언론 제1권 지혜의 나무 2000 172-216쪽】
이 경우 단군왕검님을 칭하고 있다. 따라서 단군은 곧 ‘주님’이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같은 개념은 알타이어족에게는 공통된 현상이다. 이제부터 시작될 하나님[一神]에 대한 설명에서 하나맘 예로 들면 코리야크[Koryak]인들은 절대 신을 “높은 곳에 계시는 분” “높은 곳에 계시는 주님”으로 불렀다.
이제 우리말 주님은 곧 절대신 하나님이며 하나님에 대한 인격신인 단군[檀君], 삼성[三聖]의 의미로 사용했던 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곧 주님이며 주님은 잃어버린 중요한 용어이며 개념이며 반드시 회복해야 할 또 다른 용어이다.
▶천부경, 삼일신고와 더불어 배달민족 삼대경전으로 불리는 366사(참전계정)는 성령[聖靈]이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여기서 성령은 한웅할아버지를 지칭하는 용어이다.【을파소찬 최동환해설 366사(참정계정)지혜의 나무 2000 126쪽.】
<성령께서 높은 곳에 계시어 인간의 366가지 일을 맡아서 관할하시니 그 으뜸이 되는 줄기는 정성[誠], 믿음[信], 사랑[愛], 일[濟], 그리고 화[禍], 복[福], 보[報], 응[應]이다.>
聖靈在上 主在人間 三百六十六事 其綱領 曰誠 曰信 曰愛 曰濟 曰禍 曰福 曰報 曰應
성령재상 주재인간 삼백육십육사 기강령 왈성 왈신 왈애 왈제 왈화 왈복 왈보 왈응
▶최남선 선생은 천주[天主]=하나님이라고 말한다.
백민족[白民族]은 자기 민족의 본원[本源]이 천국[天國]에서 나오고 그 주권자[主權者]는 특히 천주[天主]의 직계자손임을 믿었는데.....
【최남선 아시조선 동양서관 1927년 33쪽】
라 했다. 즉 그리고 천제자[天帝子](혹 천왕[天王]. 천왕랑[天王朗])와 당골이나 얼검이나 불의 칭호는 모두 하나님의 자손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은 물론 주님, 천주[天主], 성령[聖靈]도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자성구자 강재이뇌[自性求子 降在爾腦]
이 문장은 “스스로의 존재의 본질에서 하나님의 씨앗을 구하라. 너의 뇌[腦]에 내려와 계신다.”는 의미이다.(성[性]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존재의 본질이다.) 여기서 ‘스스로의 존재의 본질=하나님 一神’이다. 그리고 일신[一神]은 뇌[腦]에 내려와 계시다는“하나님은 인간의 가장 중심에 내려와 계시다.”이며 이를 문자화 하면 일신강충[一神降衷]이다.【삼일신고 최동환 해설 지혜의 나무2000년 325쪽】
◎일신강충[一神降衷]
“하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
라고 외칠 수 있는 근거인 삼일신고의 자성구자 강제이뇌를 나의 중심에 하나님이 내려와 계시다는 일신강충[一神降衷]으로 표현한 11세 단군 도해님은 이 내용을 3세 단군 가륵 님의 중일경도 참고했음이 분명하다. 중일경[中一經]에서는
“천하의 가장 큰 근본은 나의 중심에 존재하는 하나님이다.”
<天下大本在於吾心之中一也>
<천하대본재어오심지중일야> 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자성구자 강재이뇌를 쉽게 풀이한 내용 중 하나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 일체라는 사실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인격체라는 사실을 쉽게 풀이한 내용 중 하나이다. 【삼일신고 최동환 해설 지혜의 나무 2000년 327쪽】
【8】;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무의식[無意識] 속에 계신 하나님과 기독교에서 교육시킨 의식[意識]속의 하나님을 구별하는 데는 저변에서 기독교를 신앙으로 삼고 있는 종교인들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배타적으로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집착하여 타종교인[他宗敎人]이나, 타교회당[他敎會堂]의 교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간혹 보게 됩니다. 특히 기독교인들로 교인들의 금언이라는 모세의 십계명 제1절을 보면 “나(여호와)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했고, 제2절에는 “나를 위해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위로 하늘에 있을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은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절하며 섬기지 말라.” 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회적인 문제도 있지만 가족 간에도 부모님 상을 당했을 때에 불화음[不和音]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족사나 종교사를 말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나의 주변에서 실제로 목격한 사례를 말하고자 합니다.
나의 사촌 매형이 담낭암[膽囊癌]으로 고생을 할 때 평상시에는 천주교를 믿을 생각을 못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병고에 시달리면서 천주교인들의 친근 방문과 천당[天堂], 천국[天國],아니 “하나님” 곁으로 간다는 기도와 정신적인 안위로 돌아가시기 전 짧은 기간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세례를 받고 운명을 거두게 되자 사촌 누나는 그 후 열심히 남편의 천국가기를 기도하고 본인도 천국에 갈 것이라는 신념으로 천주교 성당을 열심히 다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나의 아버지께서 96세[壬子生]에 급성 간암으로 운명을 하시기 전 27일 동안에 일어난 사실입니다. 나의 형제는 2남 4녀로 6남매입니다. 남동생은 천주교인인 제수와 결혼하여 천주교에 입교하여 5남매를 생산했고 여동생 둘은 기독교인 가족이고, 여동생 둘은 불교의 독실한 신자이고 본인은 아무종교를 믿고 있지 않으나 태생적으로 불교인, 아니 불교인에 가깝다고 봐야 합니다. 할머니와 어머니와 큰어머니 작은 어머니들이 불교 암자에 다닐 때 따라 다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급성간암으로 진단되어 3개월을 넘기기 어렵다고 해서 편안히 쉬도록 하라고 해서 요양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둘째 여동생이 울산에 살고 있기에 아버지께서 둘째 딸이 보고 싶다고 해서 2주 정도 모시기로 하고 막내 여동생과 매제차로 울산을 가면서 종교문제로 슬쩍 물어 보았더니 아버지 머릿속에는 삼신할머니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가득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울산에서 통증 심해서 이틀 밤도 못 넘기고 급히 전주 요양병원으로 후송을 해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말한 대로 3개월을 못 넘긴다는 말 때문에 형제자매들은 교대로 아버지의 병문안을 다니는데 기독교신자인 두 여동생이 자기가소속한 교회의 목사님과 교인들이 병문안을 각각교대로 예배를 하면서 기독교 입문을 권장하는 여동생들에게 4,5일 전까지도 강력하게 거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운명하시기 3일전에는 교인으로 입교를 승낙했다고 주장하는 두 여동생과 불교를 믿는 두 여동생간에 의견이 엇갈려 눈싸움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날 밤에는 의사가 1주일은 더 버틸 것 갔다고 해서 동생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우리부부가 밤을 새워 지키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아침 5시에 아버지께 37km 거리에 있는 집에 가서 옷 좀 갈아입고 오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께서 승낙을 해서 전주에서 5시30분차로 집 와서 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급히 걸려온 전화로 막내여동생의 울음소리와 같이 아버지께서 운명하셨음으로 향년 96세로 2,007년 5월 17일 07;54분[辰時]에 운명[殞命]을 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 두 여동생의 말에 하나님의 곁으로 가겠다고 했다면 우리아버지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 머릿속에 잠재의식[潛在意識]으로 남아있던 “삼신[三神]할머니와 하나님” 곁으로 간다는 말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생들은 자기들의 의사를 들어 주었다고 간직하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민족의 머릿속에는 1만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속에 하나님이 잠재의식으로 남아있었는데 100년 남짓 길들여진 의식으로 무의식으로 존재하는 “삼신할머니와 하나님”을 물리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 사회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종교인들의 형태로 백의민족의 혈통, 혈맥관통[血脈貫通]을 짓밟고 있음으로 잘아나고 있는 젊은 우리자손들에게 정신적[精神的]인 혼돈[混沌]을 유발[誘發]시켜서 정신병자[精神病者]들이 너무나 많이 발생하고 있어 20대 전후청년기 있는 젊은이들이 정신과치료[精神科治療]를 받아야 할 사람이 거의 20%에 가까운데 모두 숨기고 병원가기를 꺼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젊은이들이 정신병원치료를 받아야 하는지! 왜? 이렇게 발병자가 많은지는 연구도 않고 정부당국도 쉬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답안은 간단하다는 것은 위에서 제목과 같이 일신강충[一神降衷]으로 그 하나님자리에 혈맥관통[血脈貫通]으로 내려오는 1만 년 전의 하나님자리에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들의 머릿속 깊은 곳에 내려와 계셔야 하는 자리에 다른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들이 들락거리고 30만 년 전에 언어가 시작 됐다는 우리의 언어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어린이에게 엄마아빠도 잘 못하는 외래[外來] 언어[言語]와 우리말이 혼합하여 들락거리니 정체성[停滯性]이 없는 젊은이들에게 혼돈[混沌]이 일어나서 갈피를 잡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착란[精神錯亂]을 일으키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한참 잘아나는 어린들이 정체성[停滯性]이 확고하게 정착하여 심리적으로 안정된 후에 스스로 외래 언어에 필요성을 느껴서 서서히 절차적으로 이수한다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두 것은 극성스런 부모님들이 조급성[早急性]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그의 정신병의 범죄자[犯罪者]라는 죄인[罪人]은 바로 부모님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는 7정[精]에 해당하는 명궁[命宮];【송과선 밑에 있는 뇌하수체[腦下垂體]에 해당되니 인체의 선[腺]의 주동이라 부르며 몸[身;신]의 내부 활동과 성선[性腺]의 발달을 촉진하며, 정신적으로 매우 활동적이고 적극적이며 명랑한 성격을 가진다.】에 이상한 변이[變異]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변이현상[變異現狀]으로 정신적인 환자에게 치료를 요하는데 이것을 숨기고 정신병원에 가기를 꺼려하는 것은 더욱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 시키는 행위이며, 정신병자들이 사회문제로 발전하여 범죄의식[犯罪意識]이 없는 사이코패스 살인범들이 날로 증가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사회는 정신병원[精神病院]에 가서 진료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은데 마음 놓고 공개적[公開的]으로 정신병원[精神病院]에 가기를 꺼려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直視]하고, 우리는 사전에 모든 것을 방비[防備]하기 위해서 모든 국민은 10세만 넘기면 정신감정[精神鑑定]을 받아보는 것을 제도화[制度化]하여 주기적[週期的]으로 정신감정[精神鑑定]을 받도록 법제화하고 정신감정서가 없으면 구직은 물론 국가공직에 출사를 할 수 없도록 하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치유를 위해 사회복지차원에서 국가는 적극적인 참여로 지방자치단체별로 요양원[療養院]을 대대적으로 건설하여 복지국가를 앞 당겨 홍익인간사회[弘益人間社會]로 한 발짝 다가가서 미래에 모든 국민이 바라는 지상천국[地上天國]인 무릉도원[武陵桃源]을 건설해야 할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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