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낭하리 석각본 3 차 탐사기
(남해 낭하리 석각본은 달력도 없었을 4 천 년 전, 남해 낭하리 주변 주민들에게 개천절을 알리는 삼시랑 들의 그림 글자로 보는데 그간해독이 되지 않아 오해가 많았음으로 이에 글쓴이가 읽는 이들의 이해를 위하여 자세한 설명과 실증을 제시해 가며 쓰려니 긴 글이지만 매우 신비하고 재미난 글이니 끝까지 읽어 주시라)
* 들어 가는 말
* 옛 기록이나 전설로 본 남해 낭하리 석각본
*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낭하리 고각(古刻)
* 낭하리 석각본 해독
*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
* 석각본 중 Y 자 의 정체
* 아직까지 전 하는 석각본이 거꾸로 된 이유
* 없어진 환웅바위
* 환웅상 바위는 틀림없이 있었는데
* 천지 만물에 감사 하자.
* 태극기의 반가움
* 비 바람등 하늘이 만든 웅녀상
* 지명이 말해주는 낭하리
* 바닷물에 샛별이 비쳐 개천절을 말라는 실제 지형
* 석각본 그림은 누가 페러디 한것인가?
* 5 천만 동포가 다 나왔을 웅녀 여음굴
* 위대한 환숫.
* 未 자는 환숫 나무가 아니다.
* 수메르 우르문자의 환숫 나무들 (EBS 방영에서 촬영한것)
* 물에 비친 초승달
* 암각화의 트레이드 마크
* 우주 천문학에서 증명하는 개천절을 알리는 낭하리 석각본
* 나가는 말
* 들어 가는 말
2012. 5.23 일 꽃 보다 좋은 신록의 계절, 한민족사를 밝히는 단체의 고향과 같은 (사) 한배달 이사장 박정학 박사와 그의 부인이며 특히 환단고기 이유립 선생의 제자였던 전 여사, 그리고 전 경기대 교수였고 1 대 국사찾기 협의회 의장 안호상 박사에 이어 3 대 회장을 하시고 지금은 본각선교원 원장인 고준환 박사와 글쓴이 카페 '천부경과 천부인' 운영위원인 '좋아' 박중면 님과 경북 경산시 와촌면 명마산 고조선 글자 바위와 울산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 그리고 그 역사적으로도 의문에 싸인 남해 낭하리 석각본을 세번째 찾아가 보았는데 우선 낭하리 석각본 해독 부터 한다.
글쓴이가 2006 년 음 10 월3 일에 찾아 갔을 때도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일이 하도 많이 일어나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번 2012.5.23일 찾아 왔을 때도 참으로 이상한 것 천지였다.
아래 사진은 글쓴이가 첫 번째 왔을 때인 2006 년 음 개천절에 철조망으로 출입금지를 시켰던 사진으로 2007년 음력 개천절에 찾아 갔을때 철조망이 없어서 그 입구를 찾지 못했는데 이번 2012년 5 월 23일에 갔을 때 잘 찾아보니 철조망 대신 출입금지 간판만 쓰여 있어 그 입구를 찾는 단서가 된 사진.
2012. 5.23일 좋아님이 찍은 입구
* 옛 기록이나 전설로 본 남해 낭하리 석각본
우선 옛 기록인 환단고기에 나오는 이야기부터 읽어보자.
* ...亦嘗聞南海道 郎河里 之溪谷及鏡珀湖先春嶺與夫烏蘇里以外巖壁之間時或有發見彫刻非梵非篆人莫能曉此 非神誌氏之所作古字 ...太白逸史神市本記
( 또한 소문을 듣건대, 남해도 낭하리(郎河里) 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오소리(烏蘇里) 바깥의 암벽 사이에서 언젠가의 조각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은 알 수가 없는 것 이라 했으니 이것이 신지씨가 만든 옛 글자가 아닌지 모르겠다. - 태백일사 신시본기)
* 大辨說註曰 南海縣 郎河里 之溪谷巖上有神誌古刻 其文曰 桓雄出獵致祭三神 又曰 大始傳古只憑口舌久而 後乃形以爲畵 又復畵變而爲之字盖文字之原...
(대변설大辯說 의 주에 말하기를 “남해현 낭하리의 계곡의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 그 글에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리다>라고 있다”고 했다. 또 가로대 “대시 大始에 옛것을 전함에 있어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에만 의지한 지 오래이다. 나중에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또다시 그림이 변하여 문자가 되었다.)
* 진시황때 서불(徐示)이 불로초를 구하러 다닌 흔적이라는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 또는 "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의미의 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이라 불리어 왔다.
또 인터넷에 올라 있는 글을 보면
* ....이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위 그림 맨 왼쪽의 낭하리 암각화다. 환단고기에 인용된 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하였다.그 개량된 형태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다. 환단고기의 저자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은 것이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립 옹도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라고 밝히면서 신지 전자(篆字)를 소개해 놓았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다.
*또한 "최치원(崔致遠)이 일찍이 신지(神誌)가 새겨진 옛비석을 찾아 . . . 즉 낭하리(郎河里)의 암각(岩刻)이 그것(神誌)의 실제 흔적(痕迹)인 것이다." 등으로, 과거부터 여러 문헌에서 보이고 있다. (이하 생략)
*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낭하리 고각(古刻)
이상과 같이 역사적으로도 아직까지 해독이 되지 않던 남해 낭하리(지금은 양아리라 하나 언제 또 지명이 바뀔지 모르기에 원명대로 낭하리라 함)고각본은 그 고각(古刻)사진이나 전해오는 그림, 또는 인테넷 사진은 거꾸로 된 것이고 그 거꾸로 된 이유가 있었다.
아래 화면은 흔히 인터넷 상에 뜨는 그림으로 맨 좌측이 낭하리 석각본으로 거꾸로 되 있으며 다음이 평양 법수교 밑에 있다는, 자식을 많이 낳게 해 달라는 기천문(祈天文)이고 다음이 창성 조적서 비 이며 다음 맨 우측 사진 위가 깨진 토기에 새겨진 원시 한글 가림토이고 그 아래가 갑골문이다.
글쓴이가 낭하리 석각본을 바로잡아본 그림
* 낭하리 석각본 해독 우선 위 그림에서 큰 사람이 수레에 타 있고 그 뒤를 天자가 밀고 있다. 그러나 환웅이 아무리 큰 사람이라 큰 그림을 그렸다 해도 天이 그 수레를 밀다니? 이는 우리 조상이 그린 금문을 보면 안다. 즉 天자가 지금 한자로 변하기전 우리민족은 네 활개를 편 사람을 大로 그렸다. 따라서 사내는 大 밑에 점이 붙은 太 자이나 大는 여인을 포함한 보통 사람이고 보통 사람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 뛰니 하늘 이라는 'ㅡ' 이불을 덮어 현재 天자가 된기록이 금문상 나타난다 즉 이 天자는 한자의 발달 과정을 말 하는 고조선 글자다. * 전설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 글쓴이는 낭하리 고각을 찾으러 갔다가 상주 해수욕장 민박집에서 숙식을 한 다음 낭하리 석각본을 찾는다니까 친절하게도 민박집 아주머니가 차로 데려다 주기에 보리암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로 올라가며 찾으려고 헤맸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고 등산객들도 모른다 했다. 앉아서 핸드폰(조식법(調息法- 환웅, 단군때 부터 하던 한민족의 단전호흡인데 단 해가 솟아 오르는 것을 마음으로 보는 것은 글쓴이가 추가) 쳤다. 즉 해오름 관법에 들어갔다. 깊히 깊히 들어갔다. 하느님은 보통때는 낮잠을 주무시느라로 잘 받지 않았는데 다행이 그 날은 낮잠을 주무시지 않고 바로 받았다.
" 저는 우리 라구 하는 놈 인디유. 낭하리 석각본은 어디 있는기유? " " 잉 우리 라면 내가 처음 말을 만들어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고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고 나를 욕하던 바로 그 고얀놈 이구나" " 예 그래유. 하느님이 처음 天地人 원방각으로 말을 만드시고 그 천지인 원방각으로 신지가 글자를 만드니 그때부터 거짓말과 결국 거짓말 밖에 되지 않을 책이 만들어져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지 안남유" " 과연 옳은 말이로다. 내 실수로 말과 글자를 만들지 않아서 모든 사람들이 순진하게 이심 전심으로 살아 가게 했다면 이 犬지랄 같은 세상은 오지 않았을 건디..." " 그래유. 하느님이 그 천지인으로 말과 글자만 안만들었어도 지금 살인이나 하는 문화는 없었을 긴디...알아 주시니 고마워유.그렁게 석각본 위치나 알려 줘유" " 그건 우리 아가한테 물어봐라. 여기는 내 며느리 관할이다" " 아가,며느리가 누군디유?" " 이런 멍청한 놈 있나? 내 며느리는 곰네 밖에 더 있냐?" " 아 웅녀 말씀인가유? " " 그랴 인석아. 웅녀는 한자고 우리말로 곰네다" " 그래유? A~C . 웅녀한테 다시 해오름 관법을 하려면 또 한참 수고 해야 겠네유“ " A~C 가 뭐냐? " " 에구 하느님이 영어도 모르남유?" " 정말 고얀놈이로다. 내 한테 영어로 욕을 하니다니..."
다시 웅녀한테 해오름 관법이라는 핸드폰을 쳤다. " 그래 너 하느님한테 실컷 야단 맞았지 히히. 그렇다면 내 시녀를 보내주마" 그리고 처다보니 쌍홍문 아래에서 그곳에 등산왔던 어떤 아기씨 둘이 쉬면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글쓴이가 처다보자 " 차 한 잔 드릴까요?" " 예 예 나는 낭하리 석각본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인디유" " 낭하리 석각본요? 그럼 잘못 오셨어요. 우리는 금산 정상까지 갈려고 온 등산객 이지만 그런 중요한 유물을 연구 하시는 분이라면 우리가 모셔다 드리지요. 우선 차를 드시고 우리와 함께 내려가요" 정말로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낭하리 석각이 있는 위치는 이 보리암 등산로 입구에서 국도를 따라 자동차로 한 20 분으 더 가야 한단다. 글쓴이는 그들의 차를 얻어 타고 그곳으로 갔다. 그 고각 있는 길은 그 입구가 철조망으로 통제 해 놓았다. 그러나 돌멩이로 지질러 놓은 돌을 치우고 들어가 보니 그곳에 올라가는 오솔길은 먼저 보리암 올라가는 길 보다 덜 경사가 지고 바위나 돌도 적었으며 흙길이고 경관도 좋았다. 생각해보니 반만년 전 선조들은 구태어 보리암 등산로를 택하지 않고 이 길을 택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그때는 보리암은 그만두고 불교가 생기기 전이니까 구태여 그 급경사이며 암벽 투성이 인 보리암 코스로 다녔을 리가 없었을 것이고 또 그 바로 위가 웅녀 상이 있는 토굴이라니 일반 백성들은 당연히 낭하리 고각이 있는 이 길로 다녔을 것이며 지금 보리암 등산로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 석각본 중 Y 자 의 정체 산 중턱까지 올라가자 Y 자형 세 갈래 길이 나오고 이제 좌측으로 조금가면 그 현장이란다.아래 사진 상으로는 Y 자 길이 선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는 출입구를 막아 길이 너무 피폐해 졌고 거기다가 장마까지 져 길 흔적이 거의 사라졌지만 분명 좌측 덤불 뒤로는 가는 길이 선명하고 우측도 마찬가지 이었다.
2006 년 음 개천절에 찍은 사진 |
ㅗ |
그러나 이번인 2012. 5. 23 일에 가 보니 아래 사진과 같은 Y 자 길은 막아놓고 대신 좌측 석각본 쪽 좁은 곳으로 길을 돌려놓았다.
2012. 5.23일 조아님이 찍은 사진, 입구는 출입금지라 해 놓고 앞으로 개방하려는지 길을 잘 해 놓았다
좌측으로 조금가니 드디어 현장이 나온다. 그 현장이 얼마전 까지만 해도 그대로 방치해 놓았었는데 남해군에서 철책을 두르고 안내 판도 써 붙였다 하니 고마웠다. 이 안내판을 보고 이것이 경남 기념물 제 6 호 라는것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올라 오는 길도 막아 놓았는데 누가 보라고 이 안내판을 써 붙였을까?
이 안내문은 이번 2012.5.23일 갔을때도 그대로 였다.
이 안내문 내용은 글쓴이의 추측대로 서불(徐市)이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러 왔다가 남긴 흔적이라고 했지만 이를 부정한다. 그 이유는 글쓴이가 말한대로 진시황때는 이미 대전(大篆) 소전(小篆) 등 한자가 있었기때문이고 그 그림에는 불로 초의 흔적이 없기 때문이며 더욱 확실한것은 그 그림 글자 석각본을 보면 이는 진시황때 대전 소전이 만들어기전 최소한 2 천년 전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2006년 갔을 때 남해군에서 탁본을 뜨다가 원본 훼손을 방지하고 사진이나 찍으라고 힌 페인트 칠을 해 놓은 모양인데 는이는 아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진으로는 세밀한 선이 보이지 안을것이니 탁본을 해 갔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혹 석각의 자획이 마모 될지도 모르니 아예 사진이나 찍어 가라고 선이 분명하게 페인트 칠을 했을것이라고 생각했고 웅녀의 시녀들 이야기로도 중국, 일본인들이 한국사람보다 더 와서 사진을 찍어 간다는데 이는 진시황때 서불이 진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이곳을 들러 일본으로 가 일향국(日向國) 을 세운것이 현 일본이기 때문이다.
* 아직까지 전 하는 석각본이 거꾸로 된 이유 우리는 이 현장에 들어와 바위(거북바위)를 한 바퀴 돌아 사진을 찍기 좋은 장소에서 찍다보니 위 역사에 전하는 그림이나 아래 사진과 같이 그림이 꺼꾸로 된다.
이 부근의 지형과 지질을 조사해 보았다. 이 부근엔 바위가 없고 땅도 그냥 흙 뿐이다. 그렇다면 이 거북바위는 몇 만년전 위에서 굴러 내려와 옆으로 세워져 밖힌 것이고 바닦이 바위가 아니니 그간 지각 변동, 또는 침강에 의해서 이제는 자빠졌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사진 찍기 좋은 장소를 골라 찍는다는것은 이 바위가 자빠졌단는것을 생각지 못한것일것이며 따라서 아직까지의 모든 탁본이나 사진이 꺼꾸로 된 원인이 될것이다. 바위 위에 올라가 다시 찍어 보았다.
다시 설명하면 그 바위가 원래 대로 있는것이 아니라 서 있던것이 쓰러진 것이다. 쓰러졌다는 증거는 그 바위 밑 부분이 칼로 자른듯이 서 있기 좋게 일직선이라는 것이다. 지금 길을 고쳐 놓기전 들어오는 길쪽 에서 보면 그 돌이 흙 위에 서 있기 좋게 일직선이고 또 그 바위 이름이 거북 바위인데 옛날의 거북은 울진 반구대 석각본이나 경주 무덤에서 보듯 거의 엎드린 여인을 표한다. 따라서 그 거북바위는 혹 그 아래 큰 암석이 있고 거기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위 어디선가 그곳 흙위에 굴러와 거기에 세워져 밖힌것이 것이 그간 지진등으로 옆으로 쓰러진 것일 것인데 만약 쓰러지지 않았다면 그 석각본이 있는 위치가 제사 지낼때 지방 붙이는 자리였을 것이며 당시 삶신할매께 다산과 순산을 비는 삼시랑이나 주민들은 단풍이 드는 10원 상달 초사흘 초승달이 샛별과 만나는 일년에 단 한번뿐인 날을 개천절로 전해 듣고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웅녀 할머니 시녀들 사진, 천사의 얼굴을 내 맘대로 공개 할 수 없는데 다행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니 천사들 초상권 침해는 아니다.
그러나 이번 2012.5.23일에 가 보니 어떤 탁본도 할 줄 모르는 어는 넘이 검정 페인트를 질질 흘리며 부어놓고 탁본을 했으니 참으로 한심하다.
일행과 석각이 새겨진 거북바위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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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Y 자 밑에 붙어있는 꺼꾸로 된 Y 자는 어디 있을까?
우리가 올라올때 아스팔트 국도에서 철망을 처 놓은 샛길로 올라왔다 즉 ㅗ의 세갈래 길을 올라 왔는데 그곳 지형은 산 줄기 이므로 약간 높았으며 그렇다면 옛날 길은 ㅗ 자의 양쪽 끝이 처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옛날길은 Y 와 꺼꾸로된 Y 자가 붙어 있을 수 밖에 없으니 이는 분명 그 석각이 있는 장소의 지도라는 추측이 맞는다. 웅녀 할머닌 시녀 들에게 물었다.
" 여기서 더 올라가면 또 Y 자 같은 세갈래 길이 나오남유?"
" 또 Y 자 같은 길은 없는것 같던데요"
" 그럼 저 Y자 같은 것이 붙은 그림은 이곳을 찾아오는 지도라는 제 추즉이 맞는것 같습니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Y자 길은 여기서 끝이 나고 들어 오는 길은 저 천사 들이 서 있는 반대 방향이다.
그렇다면 고대 선조들이 이 그림을 새길적에 일부러 한 바퀴 돌아와서 보라고 새겼을것 같은가?
만약 이 천사들이 서있는 부분이 침강되지 않아 세로 서있던 바위가 쓰러지지 않았다면 들어 오자 마자 그 그림이 보였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림은 제사 지낼때 지방 붙이는 곳 처럼 바위 머리가 되며 따라서 꺼꾸로의 그림이 아니라 바로 잡힌 그림이 됬을것이다.
" 아기씨들 아니면 이 흔적을 도저히 찾지 못할뻔 했습니다. 저를 위해서 금산 정상을 가신다더니 쌍홍문 까지 등산을 거의 다 하시고도 일부러 여기까지 오셨으니 제가 점심이라도 대접 할까요? 아니면 저 위로 더 올라가면 이 석각과 관련된 사진을 더 찍을 수가 있을까요?"
" 이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더 올라가 보세요. 더 올라가면 단군전각이 있고 그 뒤에 자연이 만든 웅녀상이 있는데 그쪽으로 가시다 보면 이곳과 관련된 바위가 또 있을 지 모르잖아요"
하긴 그랬다. 저 환웅 수레 바위는 좋은데 먼저 쌍홍문에서 찍었던 바위와 같은 기둥은 아직 찾질 못했다.
시녀들 말을 들으니 옆으로 조금만 가면 바위가 있고 그곳에서 바로 앞에 있는 바닷물을 찍을 수 있다 하여 가 보니 정말이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깜짝 놀랄만한 바위가 보이는것 이었다.
즉 아래 그림과 같이 환웅을 밀고 올라가는 정확한 그림이 보였다.
* 깜짝 놀랄 삭각본과 같은 환웅상 바위
물론 아래사진은 수레도 없고 바퀴도 없으며 또 수레를 밀고있는것이 天 자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바위를 보고 이는 환웅이 사냥을 나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했을 수도 있는것이다.
그러나 이번 2012. 5.23 일 갔을 때는 그 바위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쥐가 물어갔을 리도없고 아마 환웅님이 곰네님과 숲 속으로 거시기 하러 가셨나?
2006년에 왔을 때도 웅녀님 시녀 말 대로 바로 앞 바위 위에 올라가 환웅상을 찍었는데 이번에는 없다.
먼저 환웅상이 있던 위 아래를 찾아 봐도 아무래도 환웅님은 웅녀님과 데이트 하러 가신것 같다.
읽는이 들도 한번 찾아보시라. 위 사진은 석각본 정면에서 찍은 위 사진이고 아래는 아래 사진인데 2006 년 개천절에 있던 거대한 환웅 바위는 쥐가 물어갔는지 없다.
* 환웅상 바위는 틀림없이 있었는데
다시 Y 자 길로 나와 우측으로 올라 갔다. 역시 사람이 다니지 않아 길이 모호 했다. 그러나 분명 전에 사람이 다닌 흔적은 있었다. 한참 올라갔다. 올라가다 보니 우측에 바위 들이 나타나는데 이 바위들은 정상까지 이어져 있어 만약 그림을 그린다면 낭하리 석각 우측 기둥이 될 수도 있을것 이라고 생각 했다. 그렇다면 좌측 좀 낮은 바위 기둥은 어디 있나?
조금 더 올라가니 좌측 바위와 환웅 수레 바위가 저 아래로 보였다. 그 위치라면 석각본 바로 마즌편인데...
더 올라가 봐도 환웅 바위는 저 멀리 보인다. 그러나 우측 좌측 바위를 한꺼번에 찍으려면 위로 올라 가는 길에서 좌측 골짜기로 얼마를 들어 가야 하는데 가시 덤불이 길을 막아 조금 밖에 들어 가지 못했다.
글쓴이는 이 사진 보다 더 좋은 위치에서 사진을 찍어 읽는이들 한테 알리고 싶은 욕심으로 가시 덤불을 헤치고 좌측 골짜기로 깊숙히 들어갔다. 손과 얼굴 모두 가시 덤불에 긇히건 말건 마구 들어갔다. 그러나 가면 갈 수록 아직 떨어지지 않은 단풍과 소나무 들이 하늘을 가려 그야말로 캄캄했다. 더구나 그날 빗방울인지 눈방울 까지 날리며 하늘은 음산한데 바람까지 스산하게 불어 댔다.
또 승냥이인지 산 짐승이 꿩 토끼 들을 잡아 먹은 흔적이 여기 저기 있어 겁이 더럭 났다. 더구나 점심때가 지나고 이 산을 두번이나 오르내리니 무척 목이 마르고 시장해서 진이 빠지고 더욱 으스스 했다.
* 천지 만물에 감사 하자.
주위를 보니 부러진 나무가지가 있었다. 이것을 주어가지고 몽둥이을 만들었다. 이런 경우 산 짐승은 용케도 진 빠진 사람을 알아보고 덤비는 수가 많단다.
그러나 곧 몽둥이를 버렸다. 전에 도사님들이나 큰 스님들은 아무리 깊은 산중을 밤에 다녀도 결코 호랑이가 해 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를 해 준다지 않던가? 사람에게 살의가 있다면 동물들은 먼저 알아 보고 덤빈단다. 그러나 살의가 없고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면 호랑이 조차도 그 사람을 보호한단다.
천지 만물에 감사 하자. 천지 만물에게 감사하면 천지 만물은 절대로 너를 해하지 않고 보호 한다. 그러니 산 짐승과 대결 하겠다고 몽둥이를 든 내가 얼마나 수양이 부족한 인간인가?
나는 적당한 바위에 앉았다. 그리고 천지 만물에 감사 하는 마음으로 하느님 한테...아니 곰네 할머님한테 해오름 관법의 핸드폰을 치려고 좌선을 했다.
" 곰네 할머니 웅녀상은 어디 있는지 도와 줘유"
" 잉 그래서 내가 그 석각을 찾게 천사도 보내 주지 않았더냐? 글구 너 내 산에서 살생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몽둥이 까지 버렸으니 더욱 기특하다. 산짐승은 걱정말아. 내가 보호 해 준다.글구 산토끼를 보내 네 길을 안내 할테니 따라가 보거라"
" 예 고마워유. 근디 날씨나 호랑이등 산짐승은 다 하느님 소관인디 왜 이 산 만큼은 할머니 소관이래유?"
" 잉 조금 더 올라가 보면 그 이유를 안다"
" 근디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고 맥이 빠져 도저히 더 못 올라 가겠는디유. 뭐 산 열매나 다래등 좀 먹을거좀 없남유?"
" 멍청한 녀석. 네 배낭을 열어 봐라"
배낭을 열어 봤다. 그런데 배낭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물병과 초코렛 등이 들어 있다. 평소 집 사람은 등산 할때는 아무리 작은 산 이라도 얏 보지 말고 비상 식량을 가져 가야 한다더니 미리 준비 해 넣은 모양이다.
물과 초코렛으로 기운을 차리고 배낭을 걸머메자 정말 것짓말 처럼 산토끼 한마리가 눈앞에서 알짱 댄다. 산 토끼는 용 케도 가시 덤불이 없는곳을 골라 정상 쪽으로 올라 갔다. 산토끼는 정말 내 길을 안내 하는것 같았다. 조금 올라가다 내가 못 따라가면 뒤를 힐긋 돌아보며 기다려 줬고 내가 올라가면 그제야 앞장서 올라 갔다. 나는 이 산토끼가 분명 나를 인도하는것으로 확신했으니 신이 났다. 할렐루야...아니지 얼싸 좋다 하며 따라 올라 갔다.
* 태극기의 반가움
얼마를 올라가니 아 이렇게 반가울수가 있을까? 외국에 나갔다가 태극기를 보면 눈물이 나는데 여기에도 단군 성전에 태극기가 게양되 있는것이 눈에 들어오니 얼마나 반가우랴? 단군성전에 올라가보니 하느님, 황웅, 단군상과 산신령 그림등 장엄하게 장식이 되어 있으나 오늘이 진짜 개천절 인데도 불구하고 조용했다.
작은 돈 이지만 여비를 털어 성심을 바치고 절을 세번 하고 내려왔다.
그곳에는 거의 글쓴이 또래의 남자가 있었고 부인 들이 김장인지 무슨 일인가 했다.
" 이 단군 성전이 오래전 부터 있었나요?"
" 이 성전이 지어진것은 몇 십년 안되지만 일연 선사님이 오래전 부터 토굴 같은곳에서 성모님을 모시고 있었답니다"
" 성모님 이라니요? 혹시 웅녀 할머니를 말씀 하시는것 아닙니까?"
" 예 이 산은 원래 금산이 아닙니다.금산이란 이성계가 여기서 도를 닭고 왕이 된다면 그 은덕으로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어 주기로 했는데 막상 왕이 되니 차마 그럴 수는 없어 비단금(錦)자르 써서 금산이 된것이지 원래 이름은 성모산 이었습니다."
이 말은 나도 아는 이야기 이다. 그러나 이 산의 원래 이름이 성모산이라면 바로 곰네산, 즉 웅녀산이 아닌가? 그래서 하느님 한테 핸드폰(해오름 관법)을 칠적에 이 산 만큼은 우리 며느리 한테 맛겼단 말인가? 참으로 어제저녁 통화내용이 놀라울 정도로 적중했다.
그러나 이 산이 정말 성모산 이라면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한다.
" 왜 이 산이 성모산 이라고 하나요? 누가 언제서 부터 그런 이름을 붙였나요?"
" 자세한건 모릅니다. 아주 옛날 그러니까 단군때 부터 여기에는 저기 계시는 성모님 신상이 있었고 거기에 기도 하다 보니 성모산 이라 했답니다."
그러고 보니 단군정전 후면 우측으로 제단이 있고 거기에는 아주 오래되 눈 귀 코가 비바람에 마모되어 없어진 자그마한 여인상이 있었다.
내가 깜짝 놀라며 사진을 찍으려 하지 그 분은 깜짝 놀라며 찍지 말란다.
글쓴이는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해독에 낭하리 석각 해독한것을 혹 필요한 사람에게 주려고 프린트 해 가지고 간것이 있는데 그걸 보이며 말 했다.
" 저는 여기 놀라온 사람이 아니고 이런걸 조사 하러 다니는 사람인데유. 이 낭하리 석각은 흔히 서불이 불로초 구하러 다닌 흔적이라 하지만 제가 해독해보고 또 오늘 현지 답사해 본 결과에 의하면 틀림없는 환웅님을 모시고 천제를 지낸 흔적입니다. 이 환웅님 기사와 저 성모님 신상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고 많은 독자님들이 우리 뿌리를 알게 하여 될 수 있는한 여기에 많이 오게 하려는데 왜 찍지 말아야 하나유?"
" 아 그런 일을 하시는군요? 그럼 어쩌나? 우리 선사님께서 아직 때가 아니니 사진은 못 찍게 엄명을 내렸는데...여보 전화좀 걸어서 승낙좀 받아봐요."
김장을 하는 그 부인에게 말했다.
" 안되요. 먼저번에도 어떤 학자님들오 오셔서 찍자는 것도 거절 했구요. 심지어 중국, 일본 학자등 외국에서 오신 분들도 많은데 모두 못 찍어 갔어요"
" 계연수,이유립 선생이 환단고기를 다 만들어 놓고도 당시 일제하라 발표를 못하고 때를 기다리던것과 같은가요? 그러나 이미 환단고기는 1984 년에 발표 됬고 이제는 우리가 국권을 잡은지 오래인데 저 성모님상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될수 있는한 많이 알려서 우리 뿌리를 찾는 사람이 많을 수록 좋을 텐데..."
" 아니 요즘도 단군상 목자르는거 보지 못했어요?"
이 주인집 남자는 외출한 선사님께 핸드폰 이라도 쳐서 사진을 찍게 하고 싶은 모양인데 이 아주머니는 막무내기다.
* 비 바람등 하늘이 만든 웅녀상
그러나 아래 사진은 다음해 개천절날 몰카로 찍은 사진
또 다른 아주머니도 달려와 그 낭하리 석각 그림과 내 설명을 듣고 이 그림이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라 하자 매우 신기해 했는데 그 분은 나중에 글쓴이 카페의 회원이 되셨다
나는 그 선사님 이라는 분의 정체가 궁금했다.
" 선사님은 누구고 어딜 가셨는데요?"
" 아 원래 이 단군성전 짓기 전부터 여기 토굴에서 수도를 하고 계신 77 세 되신 할머니가 있으신데 그분을 우리는 선사님 이라고 부릅니다.
부언 - 2012년 5월에 가 보니 일연선사는 돌아 가셨음
그 분은 지금 음력 개천절을 지내시러 다른 지방에 멀리 가셨어요"
" 혹 그분이 1960 년대까지 진도지방에 남아 있던 세습무 당골레가 아닌가요?"
" 에이 당골레 라니? 무당이 아니예요. 선사님 이에요 선사"
이분은 세습무 당골레가 어떤 존재인지 잘 모르는것 같고 그져 무당이라면 요즘 푸닥거리나 하는 강신무 정도로 아는 모양이었다.
딴 이야기, 그러나 대부분의 중국땅은 거의 황사가 부는 사막이고 지금 발해만을 끼고 도는 만리장성 서남쪽 산동반도의 불한= 밝한(卞= 弁 韓 ) 과 만리장성 동쪽과 한반도를 포함한 만주와 일대의 말한 (馬韓) 을 제후국으로 두고 만리장성 부근 가운데 에서 선한_= 신한(辰 = 辰> 秦韓 의 천제국으로 양쪽 제후국 삼한을 을 다스리던 밝달 임금 (진시황의 진한 <秦韓> 밑이 禾인가 天인가만 다른 > 奏>를 보고 신채호도 우리가 주신대 제국이 있었다 하나 이는 한자를 잘못 읽은 탓인지 우리 역사에서 주신국은 찾을 수 없었음 )은 단군왕검 혼자 전국에 그의 도를 펼 수 없으니 각 지방에 심시랑 또는 단골> 당골레를 두고 사법 행정, 무속, 즉 누가 분쟁이 있으면 판결 해결해 주고 또 아이들 혼인날짜나 제례뿐 아니라 심지어 굴뚝 고치는 날 까지 관장 하신 분이 있었고 일반 백성은 보리때 보리 한말, 벼때 벼 한말씩 바치고 그저 아이들 감기만 들었어도 단골집을 드나들기를 지금 단골집 드나들듯 했으며 그래서 지금 단골의 어원이 바로 이 단골이다.
그를 단군의 도를 세습 하였으니 세습무(世習巫)라 하는데 지금 무당은 단군의 도는 전혀 아는바 없이 그저 신이 내려 흉내나 내고 푸닥거리나 하니 단군의 도와는 전혀 관게가 없는 강신무(降神巫) 일 뿐인데 그 분은 무당이면 같은 무당인줄 알고 펄쩍 뛴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낭하리 석각 그림과 설명서에 매우 흥미가 있는것 같고 또 그 산꼭대기 단군성전에서는 인테넷도 될 수 없으니 그 내가 프린트 해 가지고 간것을 드리기로 했다.
다른 아주머니도 그 유인물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는 부산에서 기도차 온 손님이라 했고 환단고기도 읽을 정도로 우리 역사에 관심도 많았으며 인테넷도 한다니 난 그 아주머니에게는 명함을 건네며 인테넷에 들어가 보라고 했다.
그럼 왜 이산이 웅녀 산인가? 하긴 여기에는 전에서 부터 임신과 출산을 관장했던 삶신할매, 즉 아기를 낳으려면 빨리 나가라고 우리의 볼기짝을 때려 엉덩이가 시퍼렇다는 그 몽골반점의 원인 삶신할매인 웅녀나 (지금 무당, 무속, 미신이라고 비하하는 샤먼(shaman),머니즘은 곰네 할머니가 삶신 할매기 때문인데 우리까지 샤먼이 미신이라고 비하 하고 있음)
또는 그를 대신하는 삼시랑, 당골레가 수도를 했고 일반 백성이 그 당골래 한데 기도를 드리기 위해자주 올라오다 보니 이 산이 웅녀 산이라 했을 것인데 단군성전에서 수도 하는 이들은 이를 신성시하기 위해 성모산 이라 했는지도 모른다.
* 지명이 말해주는 낭하리
위 환단고기 내용만으로 낭하리 고각이 환숫(桓雄)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면 그 지명에서 혹 환숫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까? 글쓴이는 낭하리 고각을 탐사하고 돌아와 다음 일요일 혼자 등산을 해 가며 더 곰곰히 행각해 봤다. 지금 그 동네 이름은 남해군 양아리(南海郡 良阿里) 양이 마을 이라 하고 또 두모리 석각본이라고도 하니 얼마나 또 바뀔지 모른다. 그러나 환단고기 기록에는 남해현 낭하리(南海縣 郎河里)라 하니 낭하리 석각본 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인들이 왜? 낭하리 라고 했는지 그 뜻을 몰라가지고는 낭하리의 뜻을 알 수가 없다. 지금 우리가 쓰는 한자의 원조 금문은 우리 조상이 그린 그림 글자로 교통 표지판 처럼 음이 없이 뜻만 통 하는 그림글자 였지만 갑골문> 대전> 소전 > 예서 > 해서로 중국인들에 의해 음이 붙여지고 모양이 현형되 오다가 우리 에게 들어온 것은 삼국 초 이니 한자가 우리 글자라고 한다면 미국 자동차 박람회에 가서 달구지의 원조가 우리이니 자동차의 원조도 우리라고 하는 말과 같다.
지금 전국에 걸쳐 있고 우리가 맥도 모르고 부르는 우리 행정 지명과 촌노들이 말하는 우리 지명을 비교해 보자. 몇 가지 예를 들면 지금 우리 지명중에 大田 이 있는데 과연 우리 선조들이 대전 이라고 했을까? 이는 큰 밭 이란 뜻의 한밭 이 한자로 기록하다 보니 일제때 大田이 된것이지만 6.25 전후만 하더라도 우리는 한밭 이라 했고 작은고개 라는 애오개가 이제 아현동 이 됐으며 전에 말한 글쓴이의 고향 틀무시는 지금 기지시리(機池市里) 인데 그 이유는 틀무시는 애초 틀못이던것이 틀은 베틀機자를 쓰고 못 은 못 지池를 쓴것이며 市는 틀못에우리가 그 즐겨 붙이는 약방의감초격 접미사 이, 즉 갑순이 갑돌이 하는 이 가 붙어 틀못이> 틀무시 가 되고 그러다 보니 里에 불과한곳에 市 가 붙었으며 이 순수한 우리 지명을 한자로 쓰자니 機池市里 가 되었다 했다. 각설 그만하고...
그렇다면 낭하리(郎河里)도 한자가 들어오기 전 분명 우리말이 있었을 것이다. 뭐라고 했을까? 글쓴이는 걸으며 생각 하다가 깜짝 놀랐다. 그 전 우리말로는 틀림없이 '앵무리' 였을 것이다. 왜 앵무리 인가? 한자로 기록되는 郎 은 바로 삼시랑(三侍郞)을 말 한다. 가림토를 창제한 사람도 삼낭(三郞) 을보륵이고 ‘고려팔관잡기에 또한 말하되 삼랑(三郞)은 배달의 신하이다. 씨를 뿌리고 재물을 관리하는자를 업(業)이라하고 교화와 복에 대한 위엄을 주관 하는 자를 랑(郞) 이라하고 무리를 지어 공 이름을 주관 하는자를 백(伯)이라 하니 즉 옛날 하느님 시대에 발달된 풍습이다.’ (高麗八觀雜記亦曰三郞倍達臣也主稼種財理者爲業主敎化威福者爲郞主聚衆願功者爲伯卽古發神道也)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郎은 분명 삼시랑을 말하고 그 이외도 우리 사서에서 삼시랑은 그냥 간단하게 郎 이라 한 기록이 너무 많다. 그렇다면 郎, 즉 삼시랑은 하느님, 환숫, 밝달임금(단군) 등 삼신을 받드는 직책이고 또 지금 전라, 충청지방의 할머니 들이 자녀를 10 여명 이나 낳았고 누가 " 할아버지와 금슬이 좋아 자녀를 많이 두었느냐?"고 물으면 " 금슬은 무슨 놈의 금슬? 삼시랭이 가 주책이 없어서 그렇게 됬다고 한다. 즉 삼시랑은 옛 부터 우리의 임신과 출산을 담당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지금 국어사전에서 화랭이 를 찾아보면 이는 ' 男巫', 즉 남자 무당으로 나오는데 화랭이의 원 말은 환한나라 앵이(앙이, 옹이)즉 환한것이 송판의 앵이 처럼 뭉처진것을 말하니 바로 환앵이가 화랭이가 되고 이것이 화랑도(花郞道) 가 됬으며 또한 이것은 풍월도(風月道) 풍류도(風流道)라 하는데 風은 바람이고 月은 달 이며 流도 달릴 류 이니 역시 달 이다.
또 딴말...따라서 풍월, 풍류란 바달 >밝달 이며 배달(培達)은 바로 밝달 의 변음이니 지금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환숫께서 세웠다는 배달국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삼국유사를 쓴 일연의 이두 문자로 본다. 즉 단재 신채호 같은이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단군이나 조선 소리가 없는 중국의 사대 사상 글이니 일연의 삼국 유사만 못하다고 하나 김부식은 책임있는 역사서를 당시 학자들과 상의해서 쓴 역사의 기록이나 단 승자인 신라의 기록에서 썻으니 없는 단군이나 조선 소리를 만들어서 쓸 수도 없고 어떤 기록이 있다 해도 고구려 성벽이나 광개 토대왕 비에 새겨저 있듯이 한자를 우리말 순서로 기록한 이두이니 졸렬해서 취하지 않았다 했다. 그러나 그 보다 364 년이나 늦은 일연의 삼국유사는 이두가 유행할 때 이고 역사책이 아니라 신비한 것이나 즐기는 불교 서적이니 누가 책임을 물을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 나라 최초의 나라는 檀君의 우리말 밝달임금이 첫땅, 새땅 이라는 의미의 아사달(阿斯達)에서 일어선 아사선(阿斯鮮)인데 이를 역시 고려말 일연이 이두로쓴 중국의 고기만 보고 조선이라 한 것이니 밝달 임금은 단군이 어느 넘인지 조선이 어느넘이 세운 나라인지 모르는 일연의 작품을 우리는 단군이니 조선이라 한다. ( 우리 말에 감둥이와 검둥이가 같은 말이듯 아래아점 글자로는 처음 빨래가 아시빨래이고 처음 갈이가 아시갈이 이듯 아시 아사는 같은 말이고 따라서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말에서 朝日新聞이 아사히신문 이다)
딴 소리 그만하고 위 앵무리 의 앵 은 옹이, 앙이의 앙 에 우리말에 거의 붙어 다니는 접미사 이 가 붙어 앵이가 되고 이 앵이 한자로 바꿔 쓰면서 환앵이가 무당인 화랭이가 되고 또 이것이 화랑(花郞)이 되듯 이 앵이 郎 이 됬을 것이다.
또 앵물이의 물 은 낭하리의 하 가 물河자 이기때문이기도 하지만 낭하리 석각 그림이나 또 그 석각 그림에 있는 쌍홍문 앞에서 바닷물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앵무리 의 리 는 지금 里 가 아니고 위 틀못이 가 틀무시 가 된것같이 앵물이> 앵무리 가 됬을 것이다.
* 바닷물에 샛별이 비치는 실제 지형
글쓴이는 먼저번 이론에서 미심적은것을 마저 정확히 정리 하러 왔다. 하나는 과연 이 쌍홍문에서 상주 해수욕장의 바닷물에 비친 아래 그림과 같은 달 그림자가 보일까 하는 문제였지만...
이는 비록 아직 쇠 다운 쇠가 나오지 않아 무딘 차돌이나 흑요석 등으로 새겼을 테지만 초승달이 분명하고 김수로왕비 허황후가 아유타 국에서 파사 석탑을 싣고 배를 타고 도착한곳이 지금 김해 평야이니 전에는 김해평야 일대가 모두 바다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 이 성모산 바로아래 까지 바다였을 테니 지금 이 쌍홍문에서 보는 달 그림자는 상주해수욕장이 아니라 바로 아래 바다 였을 것이다.
그러니 위 그림에서와 같은 초승달과 샛별이 만나는 물그림자를 석각본 위치에서 기대 해 본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쌍홍문 에서 바라본 상주 해수욕장.멀리 바다가 보인다.
두번째 의문은 석각본의 석주 그림과 실제 전에 제시했던 쌍홍문 석주 사진이 악간 달랐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번에 정확히 밝혀야 한다.
석각본에 그려진 석주가 이것이라고 제시했던 사진
* 석각본 그림은 누가 페러디 한것인가?
그렇다면 석각본 그림 하고 실제 사진하고 다르지 않은가?
그러니까 아마 이 석각 그림은 선조들이 이 쌍홍문 앞에서 찍은것...아니 그린것 이 아닌가? 그럼 나도 쌍홍문 앞으로 가 봐야지.
나는 2007 년 2 답 사를 왔을 때 좋아 님들 일행 들에게 말 했다
" 그럼말야 나는 저 앞으로 내려가 쌍홍문 암벽를 찍어볼테니 다른 분들은 아까 누군가가 말한 백명굴 인가 천명굴로 가봐. 백명이던 천명이던 이 산이 웅녀산이라면 당연히 굴구멍이 있을거야. 곰 이 바로 굼과 같은말이고 굼, 구무는 구멍이며 여음 이니까 혹 여음 같은 굴도 있을게야. 사진좀 잘 찍어와봐. 난 원래 구멍을 좋아 하거든 히히
그들은 백명굴로 가고 나는 쌍홍문앞 으로 내려가는데 쌍홍문 앞 길은 사진도 제대로 찍을 수 없는 길이다. 즉 적당한 자리에서 쌍홍문을 찍자면 그 옆 개굴창이나 낭떨어지로 떨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포기 할소냐? 최대한도 좋은 위치에서 찍은 사진이 다음 사진이다. 여기서 나무 뒤 좌측에 있는 바위가 석각본 그림 좌측 바위인데 정말로 그 끝은 석각본 그림처럼 밑으로 휘어져 있고 다음 작은 구멍이 석각본 그림처럼 口 자이며 우측 나무뒤가 석각본 그림 우측 바위인데 그것도 꼭 석각본 그림처럼 생겼다.
그런데 다른것은 위 석각본 그림은 석주 사이가 좁은데 실제사진은 좀 넓다. 그러나 석각본을 추상화로 그리던 피카소가....아니 우리 조상은 환웅상은 거대하게 그렸고 그 뒤 수레를 미는 天 자 백성은 작게 그렸으니 그 작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큰 환웅을 밀어? 그러니까 이 석각본 그림은 요점만 그린것이고 후에 피카소가 그 솜씨를 배웠나? 하여간 그때 사람들이 줄자를 가지고 다니며 양쪽 석주와 굴 구멍이 몇 메터인지 재 가며 그렸겠어? 그냥 페러디 해서 그렸겠지 그럼 나도 패러디인가 뭔가를 해서 넓은 석주 사이를 좁혀봐? .
그런데 패러디를 어떻게 하냐? 내 컴퓨터를 도와주는 유원님은 온다고 대답은 맹맹이 콧구멍처럼 해 놓고는 오질 않으니 이 할배식 패러디를 해 보자. 위 사진을 잘라 맞춘것이 아래 그림이다. 히히 그럴듯 하지?
그런데 말여. 가장큰 문제는 실제로는 굴 구멍이 아래 사진같이 두개야. 꼭 괴물 같지? 그러나 석각본 그림은 구멍이 하나야. 이거 내가 잘못 짚었나?
그래서 다시 위로 와서 조사해 보니 그러면 그렇지 구멍 하나는 이래 사진같이 천정이 빵구가 났어.
그리고 아직도 천정에서 돌이 떨어져 바닦에 있네.
그러나 이 돌들을 누군가가 치워 지금은 그 길로 다니지만 전에는 꽉 막혀 있었을 거야. 그렇다면 굴 구멍은 두개가 아니라 하나란 말여. 꼭 석각본 처럼 하나란 말여. 와우 신난다. 이제 석각본 그림을 완전 무결하게 증명했어. 할렐루야!
얼마 있지않아 좋아님이 웅녀 구멍 사진을 찍었다고 보여 주었다.
* 5 천만 동포가 다 나왔을 웅녀 여음굴
천신인 환숫이 사내의 대표이니 거시기도 거대한 거시기라면 웅녀는 지신이니 웅녀의 거시기도 참 거대하네. 우리 민족이 다 여기서 나올만 혀. ㅎㅎ
뭐라? 는 이 사진이 너무 음난하다고? "谷神不死 是謂玄牝," 노자 도덕경 6 장의 말이다. 미물로부터 모든 인간은 물론 어느 성자도 이 구멍에서 나오지 않은자가 없으니 그래서 노자는 이 구멍을 神 의 경지로 올려 놓은것이다. 그러니 만약 이구멍을 음난하다거나 또는 비천시 하는자가 있다면 이는 부처님 말고 자신의 존재 조차도 부정하는 가증스런 자가 될것이다.
이 위대한 구멍의 이름을 백명굴이니 천명굴로 하지 말고 웅녀굴, 아니 성모굴 이라 하는게 좋겠다.
* 위대한 환숫.
다시 다음 그림
수레를 밀고있는 天자 같은 사람은 큰 사람에 비해 아주 작은 사람이니 하인이나 일반 백성을 뜻한다 했고 이 작은 사람이 수레를 밀고 있다는것은 먼저 말했드시 환숫이 그 위에 있는 곰네를 찾아가는 그림이라고 본다 했다. 그 근거는 그 부근에 바위 형상이 그렇게 생겼으니 이것이 환숫(환웅)이 곰네를 찾아 가는것 이라고 본것이다.
글쓴이는 환웅을 환숫 즉 환한 부족의 숫컷이라 하여 감히 짐승에세나 붙이는 숫컷 이라 하는데 이 숫 은 지금 우리말로는 비천한것 같지만 이 숫에서 슷응> 스승, 슷님 > 스님이 나왔으니 당시는 매우 존귀한 존칭이다. 즉 우리 보통 사내는 정신상태가 아직 서고 세운 상태가 유보되고 있음으로 감히 남근에 그 서고 세워진 뜻의 ㅅ 을 쓰지 못하고 그 위에 ㅡ 이라는 이불을 덮어 ㅈ 자를 써 자* 라 하며 스님은 그 정신이 세워졌으니 ㅅ 을 쓰나 아직 정신이 서지 못한 중은 ㅈ을 을 쓴다.
다음 그 큰 사람 앞, 뒤 로는 나무가 있는데 아래 그림과 같은 뒤의 나무는 수직으로 서 있는 정상적 나무로 위 수레가 수평이 아니라는 올라 가고 있다는 근거이며 앞의 나무는 벼랑 즉 암벽에 붙은 나무이니 약간 경사가 져 있다.
* 환숫나무
이 나무는 환숫을 상징하는 신단수 이니 매우 중요 하다.
여기서 이 나무들은 가지가 꼭 두개씩 으로 자루가 달린 出 자 모양으로 그렸다. 이는 보통 나무를 그리다 보니 그렇게 됬다고 할지도 모르나 앞 뒤 의 모든 나무가지, 또는 아래 환숫을 뜻하는 수메르 우르문자 에서도 나무가지가 하나 나, 셋 이 아니고 꼭 두개 인것으로 보아 이는 환숫을 상징하는것이다.
즉 금문에서도 나무가지가 셋인 未자는 사내, 환웅이 아니란 말이고 김부식의 삼국사기 이두에서도 妹는 사내가 상대할 수 없는 계집이 아닌 누이라는 것이다.
아래 가지가 두개인 나무는 곰네(웅녀)가 신단수(神壇樹) 앞에서 결혼이 아니라 아이 배기를 빌었던 바로 그 신단수를 그린것으로 본다. 따라서 수레에 탄 큰 사람은 환숫이란 말을 상징적으로 말 하는것이다.그러면 이 나무가 왜? 신단수가 되는가? 설명이 길지만 좀 간추려 보자.
현재 나무는 木자를 쓴다. 그런데 木 자는 'ㅡ' 과 ㅅ 중간에 ㅣ 를 내려 그은자 이지만 금문, 갑골문으로 볼때아래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에서 셋을 말하는 글자와 같다.
*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하나 둘 셋 ...열 중 셋 을 말하는 글자
이 글자는 현재 木 자의 원형이 된다 아래 중국의 갑골문과 금문으로본 木 의 설명을 보자.
甲金蒙隸大字典 -四川辭書出版社 刊 의 맨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 와 같다.
따라서 현재 木 자는 위 나무가지가 V 자 처럼 올라 갔어야 할것을 후세에 쓰기 편하게 ㅡ 로 그은것 뿐이며 나무도 소나무 이고 소나무도 홍송인것이 김부식의 삼국사기 이두를 풀어보면 나오는데 그래서 궁궐을 지을때 홍송을 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木 이 왜 환숫을 뜻하는 신단수인가?
환숫은 사람을 대표하므로 天地人 천부인 원방각 (圓方角-ㅇ ㅁ △ ) 중에 사람 천부인 △ 으로 무속으로는 삼지창이 된다.
또 우리말 셋 도 사람을 상징하는 사람 천부인 △ 으로 만든 ㅅ 이 두개나 붙는다. 즉 서고 세우는 뜻이 있는 ㅅ 하나만 써도 사람인데 여기에 또 ㅅ 이 또 붙어 섯 + 접미사 이 = > 셋이 된다면 이는 사람중에 서는것이 붙은 사내이고 사내의 대표가 환숫이기 때문이다.
즉 환숫은 하늘, 해의 정기(정액)을 받아 곰네(땅, 웅녀)에게 전해 주는 사내의 대표이고 그 사내는 최치원 81 자에서 말하듯 人一三, 즉 우리말로 사람이고 사내이며 셋 이다. 또 一 積 十 鉅 無 匱 化 三 이란 말도 있는데 여기서 이것을 그간 해석한사람들은 " 하나를 쌓아 열로 커지면 궤짝이 없는 三 으로 化한다" 라고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한다.
그러나 여기서 一 은 숫자뿐 아니라 크고, 히고, 밝다 라는 우리 한 민족의 한 이며 十 은 숫자 열이 아니라 문열 열다(開) 라는 우리 말이고 鉅는 크다는 뜻만있는것이 아니라 鉤鉅라하여 낙시 미늘, 걸캥이 뜻이 있다. 즉 지금 철조망과 같은 씨족의 울타리란 뜻이있고 이는 통감 한기에도 있는 말이다. 다음 三은 사람이며 사내이고 사내의 대표는 바로 환숫 이다.
따라서 최치원 81 자는 비록 한자지만 한자 해석으로는 절대로 풀릴수가 없고 반드시 한자의 우리말 표현인 이두로 풀어야 쉽게 풀린다. 따라서 위 一 積 十 鉅 無 匱 化 三 이란 한을 쌓아나가 아홉이라는 씨족의 울타리가 가득차면 열고나가 대 자유인으로 승화한단 말이고 이것이 홍익인간 이라는 말이다.(이 부분 좀더 자세한 설명은 글쓴이 카페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해독에)
다음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셋 에서 아래 거꾸로된 삼지창은 우리 민족만이 썼던 세운다는 뜻이 되므로 솟의 다리가 되고 삼족오 의 다리가 세개가 되는 근거가 된다.
다음 이 환숫을 뜻하는 나무는 신지녹도전자 하나의 하 에서는 아래와 같은 자루가 달린 山山 이었다.
신지녹도전자 천부경 하나의 하
그럼 하 란 무엇인가? 지금 우리는 태양을 해 라 한다. 그러나 이는 원래 음이 아니다. 하늘을 뜻하는 하늘 천부인은 ㅇ 이고 이 ㅇ 을 가지고 만든 글자가 바로 ㅎ 이다. 즉 하늘의 주인을 ㅎ 으로 본 것이다. 이 ㅎ의 첫 발음이 바로 하 인데 여기에 우리말에 흔히 붙는 접미사 이 즉 갑순이, 갑돌이 할때 붙는 이 가 붙어 학교 라고 해도 될것을 촌노들은 핵교 라고 하듯 접미사가 붙으면 해 가 된다.
그러니까 위 하 를 뜻하는 글자는 해 의 빛을 받는 나무들을 그린것이다.
그러니까 그 하 의 원형인 나무가 위 낭하리 석각그림인 것이고 또 아래 수메르 우르 문자가 된다.
* 수메르 우르문자의 환숫 나무들 (EBS 방영에서 촬영한것)
역시 가지가 꼭 두개씩인데 이도 신단수 밑에서 천제를 드리는 그림이다.
그러니까 이 환숫을 상징하는 신단수(神壇樹)수 앞에서 곰네(웅녀)가 아이배기를 빌었다 하였고 솟터(蘇塗)에 모셔놓고 제를 올렸으며 이것이 전래되어 지금 바이칼호 주변 부라이트족,울치족, 나아이족, 그리고 몽골족 등의 오보가 되는데 이 오보 란 옵 이고 우리말에 검둥이 감둥이가 같은말이듯 모음이 혼동됬으니 옵은 압 과 같은 말이고 위 鉅에서 말했듯 아홉 이라는 씨족 울타리 이며 씨족이란 남근과 같은 말이고 이 압 은 한편 아비 가 되니 결국 위 오보 란 우리 말이다.
한편 이 환웅을 상징하는 신단수는 우리에게는 솟터(蘇塗)의 웅상(雄常)나무를 걸쳐 이제는 서낭나무가 되었다.
그리고 이 오보나 서낭나무 둥치에 둘른 오색천은 환숫의 신성한 음모를 뜻하고 나무가지 위 씨앗 자루는 고환을 뜻한다.( 자세한 것은 하나 둘 셋...열의 뜻를 밝히는 책 [진본천부경] 참조)
그러니까 위 낭하리 出자 나무 그림은 무엇으로 보나 분명 환숫을 상징하는것이며 또 이 그림이 금문, 갑골문으로 변하는 과정을 엿볼수가 있다. 따라서 지금 한자는 우리 조상이 당시 부족하던 말과 글자를 그림으로 보충 했기 대문에 위 석각 그림은 그림과 글자가 혼용 됬던 것이고 이것을 중국인들이 가져다가 자기네 말에 맞추어 발달 시킨것이 지금 한자다.
다음 그 큰 사람 앞의 나무는 그 방향이 약간 옆으로 기우려져 있다. 이는 암벽에 붙어있는 나무라 했는데 역시 자루가 달린 出자이다.
* 다음 아래그림은 암벽이나 그 암벽에 들어가는 門 까지 그린것 같은데 이 그림도 아주 중요하니 잘 관찰해 보자.
* 물에 비친 초승달
이 그림은 그냥 암벽뿐 아니라 암벽과 바닷물 그림이라 잔영이 보인다. 그런데 그 잔영에는 초사흘 달과 같은 반달과 해의 그림, 아니면 큰 별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 눈으로 가장 크게 보이는 별은 샛별인 금성이다.
* 샛별인 초사흘달은 한편 초승달이라 하는데 달 중에 이 초사흘달이 새색씨 눈섭처럼 가장 예뿌다 한다.
아래사진은 지구인만이 볼 수 있다는 아름다운 초사흘 달이다. 흔히들 보름달이 더 아름답다지만 보름달은 다음날밤 부터는 죽는 달이고 이 초사흘달은 앞으로 살아나는 달이다.
아래는 보통의 초승달
아래는 물에 비쳐 파진 각도가 낭하리 석각본과 같은 촛승달
그러니까 위 바다에 비친 그림은 초사흘달과 샛별인 금성일 수가 있다.
그리고 나중에 안 일이지만 현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신비하게도 이곳에서만은 어떤때에는 초승달과 샛별의 잔영이 동시에 다 바닷물에 비치는 곳이라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초사흘 달과 샛별이 그렇게 만나는 시기일수도 있다.
한편 초사흘 달은 매월 나타날수 있으나 그 초사흘 달이 샛별과 그렇게 가깝게 만나서 물그림자가 비치는 날은 각자 궤도, 공전주기가 다르니 흔치 않을것이다. 어쩌면 일년에 한번만 그런 현상이 일어 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일년에 한번 만나는 날이 달력이 아예 없었거나 있다해도 시원치 않았을 당시 이런 그림으로 표시했는지도 모른다.
아마 상주 해수욕장에 가 본다면 몰라도 ...그러나 상주 해수욕장도 평면에서 찍을 수 밖에 없을 테니 달 그림자가 길에 늘어나 제대로 않보일 것이고...
그러나 이 잔잔한 상주해수욕장 바닷물에도 가로등 불빛은 비추는데 그 샛별 그림자는 비치지 않는다. 아마 바닷물에 비치려면 전등 불빛이 전연 없고 파도가 잔잔한 남해 어딘가 벽촌 이어야 하는데 그것도 그 앞 산이여야 해. 만약 평지에서 보았다가는 다음 사진과 같이 물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사진이 犬 판이 되지.그렇다면 이 남해안 일대에서 그런데가 과연 있을까?
남해 바닷물 중에 유난히 상주해수욕장 물이 호수처럼 잔잔한 이유는 저 섬들이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어서 일테고 과연 이 남해안 일대에 저런 곳, 전기가 전연없는 그런 벽촌이 과연 있을까? 그렇다면 바닷물에 비친 초승달, 샛별 사진 찍기는 애당초 그른게 아닌가?
환숫당시에 달력이 없었다고 하면 또 환단고기를 인용하여 반박할지 모르니 이를 미리 말 하다.
환단고기 마한세가 상 에는 " 옛날에 환웅께서는...달력을 365일 5시간 48분 46초로 일년을 만드시고.... 라는 기록이 있다. (三韓管境本記(馬韓世家上) 에 昔者桓雄....曆以三百六十五日五時四十八分四十六秒爲一年也)
그러나 이것은 후세인이 너무 조상을 받들다 보니 이런 가필을 붙였다고 생각된다. 아니 그때 벌써 분과 초가 있었다니... 이는 이조중기 이맥의 가필도 아니다. 시계가 우리에게 들어온 후의 계연수나 이유립의 가필로 보인다. 이런 가필때문에 아직도 환단고기가 위서로 취급되는것이다.
우리는 하루의 시간을 子丑寅卯...등 12 시간으로 하였으니 지금 2 시간이 전에는 1 시간이었고 이것도 시계가 없던시절 어림 짐작이었으며 또 특수층에서나 쓰는 시간이었지 일반백성은 새벽, 아침, 점심, 저녁, 밤 이라 했고 그것도 정확한 시간이 아니니 아침나절 저녁나절...하는 나절 이란 말을 썼다.
그러니까 겨우 신석기 문명이 끝나고 청동기 문명이 시작된 환웅, 단군때 벌써 일년이 365일 5시간 48분 46초가 있었다는것은 그때 그분들이 그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우선 위 그림이나 금문에서 보드시 그런글자를 가지고는 달력을 만들수는 없다는것이며 또 그때 사람들 한테는 그런 분 초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환숫, 밝달임금때는 달력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시원치 않았을 것이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시와 또 천체 돌아가는것을 보고 계절과 날짜를 짐작했다고 보야한다
그러므로 위 초사흘달과 금성, 또는 해가 만난다는 환상적 그림은 아마 원시 달력 을 그렇게 표시했을 것이고 이것은 상고시대 일식현상의 기록을 슈퍼컴퓨터로 시물레이션하여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니라는것을 입증시킨 서울대 박창범 교수같은 천문학자가 현지를 기준으로 증명해 보거나 아니면 일년내내 현지에서 관측해 봐야 하겠지만 우선 글쓴이의 짐작으로는 음력 10 월 상달 초 사흣날이 될것이다.
그럼 이 날이 무슨날인가?
바로 앗선(첫조선)을 세운날이다, 즉 하늘이 열린 개천절이다.
* 암각화의 트레이드 마크
* 석각본 트레이드 마크 셜명
즉 먼저 글에서 T 자의 뚜껑인 ㅡ 은 금문, 또는 훈민정음 제자해 천지인 에서 말하듯 하늘이며 다음 세운 'ㅣ' 은 금문 工 자에서 보듯 사람이 서 있는것이고 다음 큰 점은 시각을 나타내기 위한 지는 해 라고 했는데 왜 지는 해 인가? 샛별(금성)이 초승달과 만나는 날은 약삭빠른 며느리나 일찍 저녁을 해 먹고 본다는 말이 있듯이 단풍이 물드는 10월 상달의 해가 지기도 전에 떳다가 사라지는 일년에 한번 있는 날이며 그 날이 바로 하늘을 연 개천절이기 때문이다.
다음 바위 우측 T 자 같은것과 또 그 옆 아주 많이 펴진 ㄴ 자 같이 휜 'ㅡ' , 그리고 큰 점 이 있는데 여기서 T 자의 뚜껑인 위 'ㅡ' 은 하늘이며 T 자를 세운 'ㅣ' 은 工 자에서 보듯 사람이 서 있는것이며 다음 큰 점은 시각을 나타내기 위한 지는 해라 했다. 런데 여기서 헷갈리게 하는것은 바로 그 T 자 옆 구름같은 아주 많이 펴진 ㄴ과 같은 'ㅡ' 그림이다.
이는 T 자 뚜껑이 하늘이니 그 옆에 있는것은 하늘의 구름이라고 할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신지녹도전자 천부경의 하나 둘 셋 ...열 중 '하나' 의 나 에 나타나는 누리를 뜻하는 아주 많이 펴진 ㄴ 과 같다.
* 아래 그림은 신지녹도전자천부경 하나 에서 나 에 해당하는 그림으로 아주 많이 펴진 ㄴ 이라는, 누리(땅) 위에 햇살이 비치는 그림이다. 우리 선조는 빗살무니 토기에서 보듯이 햇살은 꼭 빗금이다.
그리고 땅은 어떤 금문에서는 천부인 원방각ㅇ ㅁ △ 중 땅인 ㅁ 으로도 나타나고 그냥 ' ㅡ' 으로 나타나지만 신지독도전자나,초기 가림토에서는 위 그림과 같이 아주 많이 펴진 ㄴ 와 같이 나타나고 또 어떤 금문에서의 王 자는 위 'ㅡ' 은 하늘, 다음 十 자는 大자나 아예 생식기 까자 붙었던 太 자 이었고 그 아래 땅 이라는 'ㅡ'도 평지가 아니라 가운데가 나왔거나 위 그림같이 아주 많이 펴진 ㄴ 형태의 땅 으로 나타난다.
이상 신지녹도전자 하나의 나 나, 위 王자의 땅 부분 그림에서 보듯이 T 자 옆 구름같은 그림은 누리(땅) 를 표시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 많이 펴진 ㄴ 의 뜻은 누워있다는 뜻으로 이 그림은 나중에 가림토에서는 진짜 누리 라는 ㄴ 으로 나타나며 이는 훈민정음이나 한글에서도 같은데 그래서 ㄴ 으로 시작되는 순수한 우리말은 모두 누워있는것 뿐이다.( ㄱ ㄴ ㄷ ...ㅎ 의 뜻을 밝히는 책 [천부인 ㅇ ㅁ ㅿ]
참조)
이상으로 보았을때 이 그림, 글자는 절대 할일없는 자가 그린 무의미한 그림이 아니다. 먼저 말 했드시 신석기에서 겨우 청동기가 되어 연장도 운석 조각이나 청동기 정 등 시원치 않았을 원시, 누가 누구 보라고 이렇게 정성들여 석각을 했단 말인가? 이는 분명 환숫의 상이나 또는 곰네 상을 보고 삼시랑 들이나 그 부근 주민들이 그 쓰러지기 전 바위 앞에서 축문 대신 그림을 새겨놓고 다산과 순산을 빌었던 흔적으로 본다
그리고 그 기록이 '환단고기' 에 인용된 " 환웅이 여기에 사냥을 나왔다가 삼신제를 지냈다" 는 말로 기록됬을지을 것이다. 따라서 글쓴이는 아직까지 환단고기가 비록 가필은 많을만정 위서만은 아니라는 증거 33개를 정리해 놓았는데 이 그림은 환단고기가 위서가 아니라는 또하나의 입증도 된다.
결론은 이 그림 글자에서 신지녹도전자, 금문, 수메르 우르문자, 가림토가 혼용된 天地人을 뜻하니 이 낭하리 석각은 세계 역사상 그림이 글자로 변하는 과정을 한꺼번에 말하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고 이는 우리의 국보인 동시 인류 문화 유산의 하나가 되니 유네스코에 등록할 필요가 있다는것이다,
또 꿈같은 기대인지는 모르나 우리나라 진도등지에서만 나타나는 모세의 기적처럼 초사흘 달이 샛별과 만나 물그림자에 비치는 날, 이런 환상적인 하늘의 신비가 바로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이고 달력이라면 우리 조상들의 천문관측 수준은 더 말해 무엇하랴?
여기서 샛별이란 금성인데 왜 전갈자리 안테레스도 샛별이라 하느냐? 그건 우리 생각이구 4 천년전 선조들은 금성이구 수성이구 안테레스고 나발이구 그런 이름도 없었어. 그냥 해가 넘어 가기도 전 밝은 별 은 모두 샛별로 본 것이다.
* 우주 천문학에서 증명하는 개천절을 아리는 낭하리 석각본
다음은 위 사실을 우리 독자님이 현대 천문학으로 시물레이션 해 본 것이다.
초승달과 전갈자리 샛별 그 부분만 확대. 2007년11월11일17시30분_상주
여기서 분홍으로 표시된 부분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지평선 아래이고 그 위 둥그런 선은 달 궤도.
그러니까 17시 30분, 아니 헷갈리니 오후 5시 반까지는 초승달과 샛별이 지평선에 걸려 있었는데 6시 반에는 벌써 지평선 아래로 사라졌으니. 정말 약삭빠른 며느리 아니면 볼수 없는게 초승달이란 말이다.
* 나가는 말
이상 개천절을 알리는 하늘의 편지 낭하리 석각본 3 차 탐사기 를 마치는데 환웅님이 곰네님과 데이트를 하러 간것 이외는 변한것이 없고 전에는 그런말이 없이 단순히 서불과차라 하던것이 지금은 고조선 가림다라는 말 까지 생기고 그 석각본 들어가는 길을 막아놓고 공사는 하지만 그 길의 단장으로 보아 글쓴이가 남해 군수에게 건의 한대로 그곳 주민들을 위하여 상주해수욕장에서 석각본 > 단군성전과 웅녀상 > 보리암 > 쌍홍문과 백명굴 등 이어 다시 상주 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1 박 2 일 관광 코스를 만들 예정인것 같다.
맨 아래 가림다문자 문자(加臨多文字) 소리는 전엔 없던 말이다.
다음은 그 부근에 있는 고조선시대 가림토가 분명한 양지 암각화를 해독 설명한다.
또는 http://cafe.daum.net/chunbuinnet - 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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