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과 현대물리학

죽음을 넘어서야 산다- - - - ( ㅡ大事因緣 )

장백산-1 2012. 12. 7. 13:00

 

 

 

죽음을 넘어서야 산다 -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 [3]


그러면 本來 淸淨한 마음은 어떠한 것인가?

다만 텅~텅~ 비어서 때가 묻지 않은 것에 그치지 않고, 本來 淸淨하므로

석가모니 마음이나 달마 스님 마음이나 서산 스님 마음이나 내 마음이나 똑 같단 말입니다.

<何期自性本自淸淨> 

 

부처님 마음이 훤히 맑기만 하고 아무것도 없는 마음은 아니지 않습니까?.

本來 淸淨한 마음으로 그 마음 가운데는 一切 功德이 圓滿히 갖추고 있습니다.

내가 비록 아무것도 아니 배웠다 하더라도 또 어린 동자라 하더라도

本來淸淨마음 가운데는 석가모니와 똑같은 만공덕(萬功德)을 圓滿히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何期自性本自具足>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내 마음은 그와 같이 조금도 때 묻지 않은 本來淸淨마음인데,

그 淸淨한 가운데는 無限의 功德(無量功德)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자리는 내 몸뚱이에 制限된 것이 아니라

宇宙와 더불어서 무량무변(無量無邊)것입니다.

<何期自性能生萬法>

 

또한 그 마음자리는 同時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낳지 않고 죽지 않고 영생(永生)합니다.

<何期自性本不生滅>

 

그 마음자리는  因緣의 拘束을 받지 않습니다.

宇宙가 因緣이 다 해서 텅~텅~비어지는, 파괴(破壞)가 되어 버리는 그런 때가 온다 하더라도

그 淸淨無垢한 그 마음자리는 조금도 變動이 없습니다.

<何期自性本無動搖>

 

이렇게 本來淸淨한 自己 마음을 믿는 것, 이것이 참다운 대승신앙(大乘信仰)입니다.

내 마음도 그렇고, 저 사람 마음도 그렇고, 내 마음도 역시 끝도 없이 宇宙에

언제나 어디에나 充滿해 있고, 이렇게 生覺하면 내 마음이 다 차 버려서  

다른 사람 마음은 찰 틈이 없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마음은 物質이 아닌 波動하는 에너지(氣運)이라서 내 마음이나 저 사람 마음이나

모두의 마음이 똑 같이 宇宙에 充滿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다, 너다, 밉다, 곱다 하는 分別 妄想하는 그 마음 이런 마음은

거품 같은 메아리 같은 마음입니다. 이런 分別 妄想하는 마음은 事實  實存的인 存在가 아닙니다.

참다운 마음은 그와 같이 物質이 아니고, 거품 같은 것이 아니고, 메아리 같은 것이 아니고,

참다운 마음은 實存的인 宇宙의 實相인지라 모든 存在의 참다운 마음 이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自己를 너무나 사랑하고 自己를 너무나 아끼고 하는 이런 사람들은

所重한 내 마음이 저 미운 사람 마음과 같다고 生覺할 때는 좀 섭섭하겠지만,

부처님 가르침은 絶對로 공평무사(公平無私)한 絶對平等한 마음입니다. 다른 動物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다른 植物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어떠한 마음이나 生命自體로 들어갈 때는 똑같아 버립니다.

 

이런 消息을 알고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고, 이러한 道理를 알고 參禪 工夫를 해야

참다운 參禪입니다. 이런 道理를 모르면 참다운 參禪이 못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외도선(外道禪)은 무슨 재미나 生覺하고, 便利나 生覺하고, 自己 健康이나 生覺합니다.

전혀 必要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것만  生覺하는 것은 참다운 參禪은 못됩니다.

참다운 參禪은 앞서 말씀드린 世間的인 外道禪이나 小乘禪의 그런 功德보다도

比較할 수 없는 무량(無量)한 功德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世間的인 功德은 참다운 參禪 가운데包含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參禪할 때에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고, 또 염불선(念佛禪)도 하고, 念佛 話頭도 합니다.

훤히 밝은 마음자리는 끝도 없이 宇宙에 充滿한 것이므로 그 마음 가운데는 석가모니나 예수가 갖춘

無限의 功德도 다 들어 있습니다. 功德은 이루 다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功德을 다 말할 수가 없으므로 간추려서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이릅니다.

三明六通은 무엇인가 하면

自己의 지난 過去를,무시이래(無始以來)로 끝도 없는 自己의 過去를 훤히 알고,

다른 사람 過去도 알고, 未來도 훤히 알고, 또 宇宙에 있는 모든 것을 훤히 느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過去를 아는 것이 숙명통(宿命通)이요,

未來를 알고 宇宙에 있는 모든 것을 알고 通達하는 것이 이른바 천안통(天眼通)이요, 또 一切 存在에

대한 모든 煩惱를 끊어 버리고 眞如佛性을 證明하여 불가사의(不可思議)한 能力을 갖춘 누진통(漏盡通), 이러한 것들을 自由自在로 할 수가 있습니다.

그와 同時에 自己 몸을 마음대로 하고, 남의 마음도 헤아리고, 이런 등등 無限한 能力이

우리 마음에는 온전히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것 보고 좀 어려운 말로 하면 무루공덕(無漏功德)이 원만구족(圓滿具足)이라,

우리 마음은 때 묻지 않은 一切 功德을 圓滿히 갖추고 있습니다.

一切 衆生의 根本마음 가운데는 無漏功德이 圓滿具足 되어 있습니다.

어느 聖者의 말씀에나 이런 內容의 말씀이 다 있습니다.

 

지금 잘 못 알고 있는 사람들은 신통(神通)은 외도(外道)들이나 하는 것이지

정도(正道)에는 神通이 없다, 이렇게 말합니다만 이것은 부처님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外道人들도 神通을 합니다. 그러나 外道人들은 바른 見解가 없습니다.

煩惱를 미처 떼 내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는 아상(我相)을 못 떠나 있습니다.

外道는 재주는 제법 부리지만 '나'라는 我相을 못 떠나 있으므로 그 재주는 限界가 있습니다.

또 재주로 自己 慾心을 부립니다. 慾心을 내면 神通은 어디 간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正當한 성자(聖者)의 神通은 '自己라는 我相'이 없기 때문에 神通은 조금도 줄어듦이 없습니다.

그러한 神通한 것이 自己한테 갖추고 있습니다.

 

聖人들뿐만 아니라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佛性, 이른바 그 자리가 眞如佛性입니다.

나한테 있는 것도 眞如佛性, 저 사람한테나 누구한테나 있는 根本 性稟은 眞如佛性입니다.

나무한테나 어느 것이나 어디에나 언제나 항상 佛性은 宇宙에 가득 차 있고

事實은 宇宙는 오직 眞如佛性뿐인 것입니다.

사람이요, 하늘에 있는 별이요, 植物이요, 動物이요, 이러한 것들은

眞如佛性 위에 因緣 따라서 잠시잠깐 가짜 모양(假像)을 나툰 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衆生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眞如佛性 위에 因緣 따라서 잠시잠깐 동안

이루어져서 나타난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꼭 이렇게 알아야 됩니다.

참다운 眞如佛性 자리를 알고 느끼면 人類戰爭이 必要 없습니다.

그러나 겉에 뜬 假像만 보고서 '그 假像이 참말로 있다' 이렇게 보니까

假像인 그것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싸운단 말입니다.

假像에 執着하는 限에는 自己 마음도 不安意識을 永久히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恒時 不安스럽습니다. 우리 마음의 本性품이 眞如佛性이고, 그 眞如佛性 자리는 萬功德이

圓滿히 갖추어져 있으므로 眞如不性 자리까지 우리 마음이 이르지 못하면

恒時 마음은,모든 것을 다 추구하는 마음은 가시지 않습니다.

百億 대 富者나 千億 대 富者나 不安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切對로 滿足이 없습니다.

眞如佛性이 우리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萬功德을 갖춘 眞如佛性이 되어 버려야

그래야 비로소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됩니다.

眞如佛性 거기까지 못 갈 때는 恒時 마음이 不安스럽습니다.

 

<대중 가운데서 불쑥 질문이 있었습니다.>

“큰스님 진여불성(眞如佛性)이 무엇입니까? ”

“아! 예! 예! 그러십니까? ”

眞如佛性! 아주 좋은 質問입니다.

진여(眞如)라는 것은 참 진(眞)자, 같을 여(如)자, 바로 진리(眞理)라는 뜻입니다.

宇宙의 本性稟과 조금도 差異가 없는 바로 宇宙의 眞理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眞理가 다만 이치(理致)에만 그치지 않고 '하나의 生命'이기 때문에

부처 불(佛)자, 性稟 성(性)자 불성(佛性), 卽 부처님 그러는 것입니다.

어느 분들은 佛性 그러면 이것은 하나의 이치(理致)가 아닌가, 하나의 도리(道理)가 아닌가,

이렇게만 生覺을 합니다만

佛性은 宇宙의 道理인 同時에 宇宙의 法則인 同時에 宇宙의 生命인 것입니다.

진여(眞如) 이것은 眞理를 말합니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完璧한 眞理가 眞如입니다.

眞如佛性 그러면 바로 '眞理의 生命'이란 뜻입니다. 우리 '마음'은 바로 '眞理의 生命'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 왔던지 간에 '眞理의 生命자리'는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參禪 工夫는 그 眞理의 생명자리를 問題視 합니다.

話頭를 들 때도 우리가 그 자리를 추켜들어야 합니다.

'眞理의 生命 자리' 그 자리를 떠나 버리면 參禪이 못됩니다.

따라서 그 '眞理의 生命자리'를  안 놓치고 붙들고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자리를 놓치지 않고 붙들고 있으려면

우리 人間이 보는 것은 모두 다 虛妄하다 즉, 空하다 제법(諸法)이 공(空)하다, 이렇게

우리가 分明히 理解하고 느껴야  '眞如佛性 자리'를 놓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貌樣을 보면 貌樣에 執着을 합니다. 좋다, 궂다, 싫다, 귀엽다 또는 있다, 없다 하는

그런 妄想 때문에 우리 마음은 恒時 動搖하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 衆生들이 지금 이대로 해서는, 人間이라 하는 業識으로 보아서는,

모두가 이렇게 形像이 있게 보인단 말입니다. 나도 있고 너도 있고 다 있게 보입니다.

 

그러나 衆生이 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事實로 있다고 生覺할 때는,

부처님 말씀에 依持하면 이 세상 모두가 다 虛妄하고 無常한 것인데,

(夢)이요 허깨비(幻)요 물거품(泡)이요 그림자(影) 같은 것인데,

우리가 그렇게 理解를 못하고, 보는 대로 내 몸뚱이도 이대로 있고, 내 所有다 이렇게 生覺하는

이런 生覺으로 해서는 참다운 參禪은 하지못하는 것입니다.다만 모습만 참선같이 앉아서 하는 것이지,

정말로 몸과 마음이 온전히 渾然一體가 되어서 하는 참다운 參禪은 아닙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이 眞如佛性 자리에 딱 못 박혀 있어서

眞如佛性 자리여의지 않아야 참다운 參禪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어려우니까 먼저 先行的으로 익혀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 몸뚱이 이것도 텅~비어 있다, 또 내 環境 이것도 다 텅~텅~비어 있다,

다만 眞如佛性이 因緣 따라서 메아리같이 山에 가서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울려오지 않습니까.

메아리가 흔적이 있습니까. 메아리가 흔적이 없듯이 眞如佛性이 因緣 따라서 업(業)의 바람 따라서

잠시잠깐  나와 같은 모양이 되어 나왔고  너와 같은 모양들이 되어 나왔단 말입니다.

다른 一切 物質도 모두가 다 그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