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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Re:산서성(山西省)은 신시(神市, 배달) .고조선 이래로 동이의 강역

장백산-1 2012. 12. 27. 22:45

 

현재 중국의 산서성은

신시(神市, 배달) .고조선 이래로 동이의 강역이었다.

 

<규원사화>.<단군기>에서는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에 다다르고

서쪽은 알유(또는 설유)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해.대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으니,

가르침이 퍼져나가 물들어 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當是之時, 檀君之化, 洽被四土, 北曁大荒, 西率猰兪, 南至海岱, 東窮蒼海, 聲敎之漸, 偉乎廣矣.)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주어 제후로 삼았다.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하며,

숙신홀(肅愼忽)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산하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이름하고

낙랑홀(樂浪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주인씨의 후손은 개마국(蓋馬國)에 봉하고,

여수기는 예(濊)의 임금이 되게 하였으며,

부소와 부우 및 작은 아들인 부여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와 진번(眞番) 및 부여(夫餘) 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에 부루가 또 동쪽에서 온 세 사람을 각지에 봉했는데,

후세의 옥저(沃沮)와 졸본(卒本) 및 비류(沸流) 등의 명칭은

모두 이 봉함을 받은 나라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단씨(檀氏)의 시대를 통하여

무릇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는 열둘로서,

나누어 천하의 모든 고을을 다스렸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당시란 고조선을 세운 초대 단군

즉 단군 왕검 때의 일을 말하고 있다.

 

단군 왕검께서 옛 신시(神市) 즉 배달의 강역을

대부분 복원하였던 것입니다.

서쪽의 알유(猰兪)는 지금의 서역을 가리킨다.

 

이암의 <단군세기>에도

13세 흘달 단군 때 이미 섬서성 장안 서쪽의 빈(邠) 기(歧)지역에 관제를 설치하였고

22세 색불루 단군 때에도 여파달(黎巴達)에게 군대를 나누어 빈(邠) 기(歧)로 진격하여

그곳의 유민(遺民)과 서로 결속하여 나라를 세워 리(黎)라 하고

서융(西戎)과 함께 은(殷) 제후들 사이에 더불어 살도록 하니,
남씨(藍氏)의 위세가 매우 강성하여

임금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의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남씨(藍氏) 또는 남국(藍國)에 대하여 이유립 선생은

남수(藍水) 부근에 있으며 남수(藍水)는 력도원(道元)의 수경주(水經注)의 강수(絳水)로서

오늘날 산서성 둔류현(屯留縣) 서남에 있다. 그 물은 능수산(能秀山)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장수(漳水)에 흘러 들어간다. 통지씨족략(通志氏族略)에 남씨(藍氏)가 이 지역에서 보인다.

후한서(後漢書)에 은(殷)나라 중정(仲丁)에 이르러 남이(藍夷)가 침범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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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잃어버린 역사, 보이는 흔적
글쓴이 : 신완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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