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텅~빈것이 살아있다

장백산-1 2013. 1. 8. 12:26

 

 

 

텅빈것이 살아있다

 

텅빈것이 살아있다

혜민스님


 우리의 불성(佛性) 텅~빈채로 있다. , 아무것도 없는채로 살아있다. 그런데 이것을 經驗하지 않고

觀念으로, 生覺으로 理解하려고 하면 마치 텅빈 무언가가 따로 있다고 ()으로써 잡는다. 그래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무아(無我) 思想과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錯覺한다. 심지어는 있다, 살아있다는 말에

끄달려 힌두교의 범아론적 가르침과 뭐가 다르냐고 異議 제기한다. 그래서 本來淸淨, 本來面目, 主人公을 말하는 선불교를 포함한 대승불교 전체가 부처님 초기 근본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없다는 것은 중생들이 몸을, 생각을, 느낌을 나라고 同一視하는 錯覺을 부처님께서 내신 것이다. 五蘊이 홀로 따로 存在하는 것이 아니고 緣起되어서 아주 잠시 머물러 있는 것이지

스스로 變化하지 않고 따로 存在하는 자성(自性)이 없다는 말씀이다. 實際로 중생들이 나라고 執着하는

몸과 느낌과 생각의 觀點에서 보면 틀림없이 無自性이고 無我다. 정말로 그렇다.

그런데 無自性이고 無我인 것을 깨닫고 난 後엔 어떻게 될까? 그 후의 일을 누군가가 진작에

소상히 일러 주었더라면 오랜 시간동안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고 고생도 덜 했을텐데  하는 것이 있다.

 

바로 그 無自性이고 無我이구나 하는 것을 무언가가 살아서 안다는 事實이다. 내가 무아임으로

아무것도 없는줄 알았는데, 이것이 끝인줄 알았는데,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뭔가가 살아서 안다.

이것이 가장 큰 神秘이다. 아무것도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 그 무엇도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分明 生覺이 完全히 끊어지고 난 後에도 무언가가 살아서 텅빈 가운데에서도 無我, 無自性이구나 하는 것을 즉시 안다. 지금 바로 텅비여서 아무것도 없구나, 그래서 般若心經에서 말하듯 얻을것이 아무것도 없는 고로 (이무소득고 以無所得故) 모든 苦痛에서 벗어난다는 점을 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절대로 槪念으로 生覺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배고플때, ! 배고프구나 하는 것을 生覺을 通하지 않고도 바로 즉시 알수 있듯, 그냥 뭔가가 바로 안다. “라고 했던 것 그리고 無自性인 世上 둘 다 텅비였다는 것을. 그리고 나와 世上을 둘로 나눈것은 오직 生覺이였다는 것을.



그런데 여기까지 오게 되면 텅빈 것을 아는 그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찾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잘 찾을 수가 없다. 왜냐면 그 텅빈 것을 아는 것이 따로 어떤 形象이나 자성(自性)을 가지고 別度로 存在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텅빈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앎과 텅빔이 둘이 아니고, 텅빈채로 있는 것이 살아서 안다. 즉 아무것도 없는 텅빈 마음이 살아 있고 그것이 엄청난 지성(知性)을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텅빈 앎은 虛空과 같이 텅비였기 때문에 더럽혀 질수가 없다. 虛空에다 아무리 똥칠을 해 봐야 더럽혀 질수가 없는 이유와 같다. 또한 이 앎은 몸안에만 存在하는 것이 아니고 事實 몸 안밖 따로 없이 안다. 앎의 관점에서 보면 내 어깨가 결린다는 것을 아는 것이나 새소리가 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나 하등의 差異가 없다. 정말로 똑같은 앎이다. 즉 나무를 보면 바로 그 앎이 나무에 있다. 산을 보면 그 앎이 산에 있다. 뒤집어 말하면 나무가 있다는 것을, 산이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바로 텅빔 그 자체다. 그리고 그 텅빈 앎은 어느 한곳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고 안밖을 다 透過한다. 天地가 그냥 텅~비어있고 그러기에 主와客, 나와 세상을 同時에 포섭한다.



分明 여기까지 읽고 나면 어떤이는 또 觀念으로 머리로 理解해서 나에게 따질것이다. 부처님은 分明 없다고 하셨는데 어찌해서 있다고 하냐고. 없는 채로, 텅빈 채로 있는 것도 있는 거 아니냐고. 아니면 反對로 텅빈 것이라는 것을 또 다른 相으로 붙잡고나서 노력해서 얻어야하는 어떤 對相, 目標로 만들어 버린다. 事實 둘 다 問題이다. 生覺속에 갇혀서 理解의 水準에서 바라보면 이처럼 恒常 텅빈 마음과 그 텅빈 마음을 經驗하는 뭔가가 따로 있다고 자꾸 이분화(二分化)하여 理解하려고 한다. 그래서 텅빈 마음을 觀念으로 가 얻으려고 하거나, 텅빈 마음을 經驗하고 나서도 가 남아 있다고 生覺으로 誤解한다. 왜 이렇게 質問이나 誤解를 하는지는 充分히 理解가 된다. 生覺이 完全히 끊어진 , 意識이 다시 깨어나 主客을 포섭하는 앎을 제대로 經驗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生覺으로, 相으로 자꾸 잡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無自性, 無我임을 바로 아는 앎은 緣紀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緣起해서 일어 났다고 하면 그 앎도 變할 수 있다는 말인데 그 깨달음은 變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덧붙이자면 텅빈 은 世上에 自己 혼자 밖에 없다는 것을 또 스스로 안다. 텅빈 마음이 깨어나 스스로의 存在를 認識한다. 이것이 修行의 엄청난 妙味이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시자 마자 天上天下 唯我獨尊 이라고 하신 理由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텅빈 앎은, 그 텅빈 마음은 부처도 알 수 없다는 道理가 바로 여기에 또 있다. 부처가 몸을 구중궁궐(九重宮闕)속에 숨겼다는 道理도 여기에 있다. 이 자리를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가 없으므로 시자에게 빗장문을 잠그라는 道理도 여기에 있다. 선불교의 선()자를 파자해 보면 왼쪽에 볼시 와 오른쪽에 홀로단 으로 이루어졌다. , 禪은 혼자서밖에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삼계(三界)안에 그 텅빈 만 홀로 가득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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