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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진화생물학으로 풀어본 우리 몸의 비밀] 개체인 ‘나’의 이익이 모든 행위 동기?

장백산-1 2013. 3. 29. 20:23

[진화생물학으로 풀어본 우리 몸의 비밀] 개체인 ‘나’의 이익이 모든 행위 동기?
〈40〉진화윤리와 이데올로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대학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떠들지를 않는다. 후배 학자에게 전공과목 하나를 물려주면서 3년만에 다시 교양과목을 담당해 보니 그 동안의 변화가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원흉(?)은 분명했다.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재미있는 외로움’에 길들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친구와의 대화도 SNS나 메신저를 통해 ‘문자’로 주고받는다. ‘말’과 ‘표정’을 통해서 남과 교류하는 일이 점점 잦아들고 있다. 친구와 노닥거릴 수 있는 ‘재주’를 키우지 못했다. 가만히 강의를 듣든지 꾸벅꾸벅 졸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그 유전자에 각인된 상반된 성향으로 인해 항상 갈등한다. ‘나’를 위할 것인가, ‘집단’을 위할 것인가? 다시 말해 ‘나’라는 개체를 위해 활동할 것인가, 아니면 동포(同胞)인 ‘남’을 위해 봉사할 것인가?

진화생물학적으로 표현하면 개체(Individual)와 유전자(Gene)의 ‘갈등’이다. 그러나 이런 상반된 마음은 생명의 세계에서 ‘인간 종’에게 최강의 문명을 이룩하게 만든 ‘비결’이기도 했다.

‘유전자’와 ‘개체’의 두 축은, 개인윤리에서는 ‘선’과 ‘악’의 갈등으로 나타나며, 사회적으로는 공익(公益)과 사익(私益)의 ‘대립’ 혹은 ‘조화’로 나타난다. 거시적으로 조망하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반목 역시 그 뿌리는 개체와 유전자의 대립에 있다.


스마트폰…‘지극히 사적인 도구’
표정 잡담 사라진 위태로운 현실


rB >C 라는 해밀턴의 공식에서 보듯이 적정 수준에서 개체가 희생할 때(Cost) 그 개체가 속한(relatedness) 전체의 이익(Benefit)이 커진다. 생명의 세계에서 어떤 집단의 이익은 ‘그에 속한 개체들의 이익’에 ‘개체의 희생으로 인해 얻어지는 이익’을 가산함으로써 얻어진다.

달리 표현하면 ‘사익의 추구’와 함께 ‘공익을 위한 사익의 희생’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집단이 최강의 집단이 된다는 말이다. 어떤 집단의 구성원들이 사익만 추구할 경우 그 이익의 총합은 이에 못 미치며 그 집단은 와해되고 만다. 반면에 공익만 중시할 때 합산할 낱낱의 사익이 적기에 전체의 이익 역시 감소한다.

개체와 유전자. 인간 종을 번성케 만든 진화의 두 축이지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양대 이데올로기를 탄생시킨 생물학적 뿌리이기도 하다. 새가 허공을 날려면 양 날개가 모두 온전해야 한다. 요컨대 새의 오른 날개(右翼)와 왼 날개(左翼)가 모두 건강해야 추락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익(私益)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적 성향과 공익(公益)을 중시하는 사회주의적 성향이 적절히 균형을 이룰 때 우리 사회 전체는 풍요로워지고 구성원 모두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의 구성원 대부분은 유전자가 아니라 개체, 공익이 아니라 사익을 중시한다. ‘밀림의 법칙’인 신자유주의의 경제이데올로기가 고유의 영역을 넘어 행정과 경영과 교육과 연예와 체육 등 우리 사회 전반을 오염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아니라 ‘개체인 나’의 이익이 모든 행위의 동기가 된다. 게다가 수년 전 개발된 ‘지극히 사적(私的)인 도구’인 스마트폰이 그런 경향을 강화시킨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고, 친구 간 ‘잡담’이 없어진다.

위태롭고 위태롭다. 생명의 세계에서 인간 종을 자유롭게 비상(飛上)케 했던 양 날개의 한쪽이 병들고 있다. 시급하고 시급하다. 공동체를 복원하는 일이다. 구성원들이 서로의 내적 상태를 알리는 선의(善意)의 표정과 구어(口語)가 되살아나야 한다.

[불교신문 2871호/ 12월8일자]
김성철 교수(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출처 : 옥련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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