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내가 부처가 된 때

장백산-1 2013. 4. 2. 19:21

 

 

내가 부처가 된 때/성철스님

내가 부처가 된 때 / 성철스님                         

내가 부처가 된 以後로 지내온 많은 歲月은 限量없는 百千萬億 阿僧祗로다. 

自我得佛來 所經諸劫數  無量百千萬億阿僧祗

이 구절은 法華經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있는 말씀인데 法華經의 骨字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성불한 뒤로 얼마만한 세월이 경과했느냐' 하면

숫자로써 형용할 수 없는 限없이 많은 세월이 경과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普通으로 봐서 이것은 理解가 안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印度에 出現해서 成佛하여 涅槃하신 지 지금부터 2천 5백여 년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부처님 말씀이 自己가 成佛한 지가 無量百千萬億 阿僧祗  以前이라고 했을까?

 어째서 數字로는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옛날부터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事實에 있어서 부처님이 2천 5百年  前에 出現하여 成佛하신 것은 方便이고

實地로는 限量없는 無數한 阿僧祗劫  以前에 벌써 成佛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아야 佛敎에 對한  基本姿勢, 根本姿勢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目的이 무엇이냐고 보통 물으면 '成佛이다', 卽 '부처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으례껏 그렇게 말하지만 實際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實際 內容은 중생이 본래부처 (本來是佛)라는 것입니다.

깨쳤다는 것은 本來부처라는 것을 깨쳤다는 말일 뿐

衆生이  變하여 부처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 前에는 自己가 늘 衆生인 줄로 알았는데 깨치고 보니

億千萬 無量阿僧祗劫  前부터  本來로 成佛해 있더라는 것입니다.


無量阿僧祗劫  前부터 本來로 成佛해 있었는데  다시 무슨 成佛을 또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성불한다, 성불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중생을 지도하기 위한

方便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부처님이 道를 깨쳤다고 하는 것은 無量阿僧祗劫  前부터 成佛한 本來모습 그것을

바르게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 한 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一切 衆生, 一切 生命, 심지어는 구르는 돌과 서 있는 바위, 유정 무정(有情 無情) 全切가

無量阿僧祗劫  부터 다 成佛했다는 그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世界를 '사바세계'라 합니다.  모를 때는 사바세계이지만  알고 보면

우리가 사는 이곳은 사바세계가 아니고 저 無量阿僧祗劫  前부터 이대로가 極樂世界입니다.

그래서 佛敎의 目標는 衆生이 變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바르게 깨쳐서

本來 自己가 無量阿僧祗劫  前부터 成佛했다는 事實, 이것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同時에 온 十方法界가 불국토(佛國土) 아닌 곳, 정토(淨土) 아닌 나라가 없다는

이 事實을 깨치는 것이 佛敎의 根本目標입니다.


다른 宗敎에서는 '救援'이라는 말을 합니다. '救援을 받는다', '예수를 믿어 天堂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本來 부처인 줄 確實히 알고 온 十方法界가 本來 佛國土며, 淨土인 줄 알면 그만이지

또 무슨 남에게서 받아야 할 救援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래서 佛敎에는 根本的인 意味에서 絶對로 救援이란 없습니다.


이것이 어느 宗敎도 따라 올 수 없는 佛敎의 獨特한 立場입니다,

實際 어느 宗敎, 어느 哲學에서도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불(佛), 부처란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이르는 말입니다.

無量阿僧祗劫  前부터 成佛했다고 하는 것은

本來부터 모든 存在가 不生不滅 아닌 것이 없다는 그 말입니다.

사람은 물론 動物, 植物, 鑛物, 심지어 저 虛空까지도 不生不滅인 것입니다.

또한 모든 處所十方法界  全切가 모두 다 不生不滅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卽 淨土이며 佛國土인 것입니다.

卽 모든 存在가 全部 다 부처고, 모든 處所가 全部 다 淨土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사바세계가 있고 중생이 있는가?

내가 언제나 하는 소리(말)입니다. 아무리 해가 떠서 온 天下를 비추고 환한 대낮이라도

눈을  감은 사람은 光明을 못 봅니다. 앉으나 서나 全切가 캄캄할 뿐 光明을 못 봅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마음의 을 뜨고 보면 宇宙法界 全切가 온통 光明인 同時에 대낮 그대로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全切가 부처 아닌 存在 없고 全切가 佛國土 아닌 곳이 없습니다.

마음의 만 뜨고 보면--- !


그러나 이런 이 眞理를 모르고 아직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내가 중생이다',  '여기가 사바세계다' 라고 말할 뿐입니다.
根本 病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마음의 눈을  떴나,  감았나,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全切가 다 光明이고, 마음의 눈을 감고 보면 全切가 다 暗黑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全切가 다 부처이고, 全切가 다 佛國土이지만,

마음의 눈을 감고 보면 全切다 衆生이고  全切가 다 사바세계 地獄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 저것 말할 것 없습니다.

누가 마음의 눈을 감고 캄캄한 暗黑世上에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光明世界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부처님 世界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淨土에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시 바삐 어떻게든 努力하여 마음의 눈만 뜨면 一切 問題가 다 解決됩니다.


가고 오고 할 것이 없습니다. 天堂에 가니 極樂世界에 가니 하는 것은 모두 헛된 소리 입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마음의 눈만 뜨면 一切 問題가 다 解決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내가 無量阿僧祗劫  前부터 成佛했더라."  '本來부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衆生을 濟度하기 위하여 方便으로 涅槃을 나타내지만
實際는 내가 죽지 않고 恒常 여기 머물러서 法을 說한다.

爲度衆生故 方便現涅盤 而實不滅度 常住此說法

이 구절은 앞의 게송에 계속되는 구절인데, 무슨 뜻인가 하면 부처님께서

無量阿僧祗劫  前부터 成不하였을 뿐만 아니라 未來劫이 다하도록 絶對로 滅하지 않고

여기 계시면서 恒常  法門을 說한다는 것입니다.


'여기'라 함은 부처님 계신 곳을 말함이지 印度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韓國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이 나타나 계시는 곳은 全部  '여기' 입니다.

부처님께서는 千百億化身으로 나타내시어 十方宇宙法界에  안나타나는 곳이 없으시니까

十方宇宙法界가 다 '여기'입니다. 그래서 十方宇宙法界 '여기' 이것을 常住不滅이라고 하였습니다.

恒常  여기 十方宇宙法界에 머물러 있으면서 絶對로 滅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過去에도 常住不滅, 未來에도 常住不滅, 現在에도 常住不滅 이렇게 되면

一切 萬法이 不生不滅 그대로입니다. 나지도 않고 滅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永遠토록  화장찰해(華藏刹海), 無盡法界, 極樂淨土등  뭐라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이름이야  뭐라고 부르든 간에 過去, 現在, 未來를 通해서

부처님은 恒常  '여기' 계시면서 늘 說法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석가모니라고 하는 個人 한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아닙니다.

宇宙森羅萬象 一切가  다 過去부터 現在 未來 할 것 없이 恒常  無盡法門을 說하고 있으며

무량대불사(無量大佛事)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저 산꼭대기에 서 있는 바위까지도 법당 안에 계시는 부처님보다 몇 百倍 以上 가는 說法을 恒常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위가 說法한다고 하면 웃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위가 무슨 말을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實際 참으로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눈만 뜨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귀도 열립니다. 그러면 거기에 서 있는 바위가 恒常 無盡說法을 하는 것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이라고 합니다.


유정(有情) 卽 生物은 으례 움직이고 소리도 내고 하니까 說法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무정물(無情物)인 돌이나 바위, 흙덩이는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무슨 說法을 하는가 하겠지만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바위가 恒常 說法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 뿐 아닙니다. 모양도 없고 形象도 없고 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虛空까지도

恒常  說法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온 宇宙十方世界에  說法 안 하는 存在가 없고 불사(佛事) 안하는 存在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事實 이것을 알아야만 불교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누구를 濟度하고 누구를 救援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입니다.

오직 근본요지(根本要志)는 어디 있느냐 하면 본래면목(本來面目), 本來부터 成佛한 面目,

본지풍광(本地風光), 本來부터가 全切 佛國土라는 것, 이 뜻 이것만 바로 알면 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所用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生覺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참 좋은 法이야. 우리 모두가 佛國土에 살고, 우리 全切가 모두 부처라고 하니 노력할 것이 뭐 있나,

공부도 할 것 없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아무래도 안 좋은가.'이렇게도 혹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根本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本來 부처이고, 本來 불토(佛土)이고, 本來 해가 떠서 온 天地를 비추고 있지만

눈감은 사람을 光明을 볼 수 없습니다. 自己가 本來 부처이지만 눈감고 있으면 캄캄한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마알간 거울에 먼지가 꽉 끼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은 본래 깨끗하고 말갛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있는대로 다 비춥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먼지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합니다.

명경(明鏡)에 때가 꽉 끼어 있으면 아무 것도 비추지 못하는 것,  여기에 묘(妙)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本來 부처라는 이것만으로는 안됩니다. 내가 本來 부처다, 내가 本來 불국토에 산다,

이것만 믿고 '내가 공부를 안해도 된다', '마음의 눈 뜰 필요없다', 이렇게 되면

永遠히 봉사를 못 면합니다. 永遠토록 캄캄 밤중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自信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슨 自信을 가질 수 있느냐 하면 설사 우리가

눈을 감고 앉아서 光明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光明 속에 산다는 것, 光明 속에 살고 있으니

눈만 뜨면 그만이라는 것, 설사 내가 完全한 부처의 行動을 할 수 없고 佛國土를 보지 못한다고 해도

本來 부처라는 것, 本來  佛國土에 산다는 그런 自信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는 것은 눈을 뜨지 못하여 그것을 보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쓰지 못한다고 하지만 前後左右에 黃金이 꼭 차 있는 것을 알 것 같으면

눈만 뜨면 그 황금이 모두 내 물건 내 소유이니 얼마나 반가운 소식입니까?

이것을 哲學的으로 말하면, '現實 이대로가 絶對'하는 것입니다. 

'現實 이대로가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전에도 얘기한 바 있습니다.

現實 이대로가 絶對이고 現實 이대로가 不生不滅인데

이 不生不滅의 原理는 자고로 불교의 특권이요, 전용어가 되어 있다고.


그러나 科學이 發達함에 따라 原子物理學에서도 自然界는 不生不滅의 原理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證明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해서 불교가 수승하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원래 그런 원리가 있는데 요즘 과학이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불교에 가까이 온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여 년 前에 宇宙法界의 不生不滅을 宣言하셨고,

科學은 오늘에 와서야 自然界의 不生不滅을 實證함으로써 時間의 差異는 있으나

그 內容은 서로 通하고 있습니다.


人間의 根本存在는 無量阿僧祗劫  前부터 成佛하여

無量阿僧祗劫이 다하도록 無量佛事를 하는 그런 큰 存在입니다.

다만 病이 어느 곳에 있거나, 눈을 뜨지 못하여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스님도 딱하시네. 내 눈은 멀쩡한데 내가 기둥이라도 들이받았는가. 왜 우리 보고 자꾸만 눈감았다.

눈감았다, 하시는고?'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껍데기 눈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한밤중에 바늘귀를 볼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눈 가지고는 소용없습니다.


그런 눈은 안 通합니다. 속의 눈, 마음의 눈, 마음 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明鏡에 끼인 때를 벗겨내야 합니다. 明鏡의 때를 다 닦아내어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해가 대명중천(大明中天)하여 十方世界를 고루 비추고 있는 것이,

맑고 맑은 거울에  고요하게 그대로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울의 때를 벗기고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는가?

가장 쉬운 方法이며 第一 빠른 方法이 참선(參禪)입니다.

화두(話頭)를 배워서 부지런히 부지런히 참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두를 바로 깨칠 것 같으면 마음의 눈을 안뜰래야 안뜰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번쩍 뜨이고 맙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한번 뛰어 부처지 位에 들어간다,

한번 훌쩍 뛰면 눈 다 떠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일 쉬운 방법이 參禪하는 方法입니다.


그 外에도 方法이 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무엇이 가리고 있어서 캄캄하게 되었는가?

그 原因, 마음 눈이 어두워지는 原因이 있으니 그것을 除去하면 될 것 아닙니까?

불교에서는 그것을 탐(貪), 진(瞋), 치(癡), 삼독(三毒)이라고 합니다.

慾心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이 三毒이 마음의 눈을 가려서 本來 부처이고,

本來 佛國土인 '여기'에서  중생이니, 사바세계니, 지옥을 가느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눈을 가린 三毒, 삼독만 완전히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저절로 안밝아질래야

안밝아질 수 없습니다. 그 三毒 中에서도 무엇이 가장 根本이냐 하면 貪慾입니다.

貪慾! 貪내는 마음이 根本이 되어서 성내는 마음도 생기고 어리석은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貪慾心만 根本的으로 除去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自然的으로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貪慾心은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 '나'라는 것 때문에 생겼습니다.

'나'! 남이야 죽든가 말든가 알 턱이 있나, 어떻게든 '나'만 좀 잘 살자, '나'만! 하는 데에서

모든 貪慾心이 다 생기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中心이 되어서 자꾸 남을 害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눈은 永永 어두워집니다. 캄캄하게 자꾸 더 어두워집니다.

 

그런 貪慾心을 버리고 마음 눈을 밝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라는 것, '나'라는 慾心을 버리고 '남'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한번 生覺해 보십시오. 누구나 무엇을 生覺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자나깨나 '나'뿐 아닙니까?

그 '나'뿐인 生覺을 完全히 거꾸로 해서 자나깨나 남의 生覺 남의 걱정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行動의 基準을 남을 위해 사는 데에 둡니다. 남 도우는 데에 基準을 둔단 말입니다.


그렇게하면 自然히 三毒이 녹아지는 同時에 마음의 눈이 자꾸자꾸 밝아집니다.

그리하여 탐, 진, 치 삼독이 완전히 다 녹아버리면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이 다 없어져 버리는데

눈이 안보일 리 있습니까?  탐, 진, 치 삼독이 다 녹아버리는 데에 가서는 눈이 완전히 뜨여서

저 밝은 光明을 환히 볼 수 있고, 過去 無量阿僧祗劫  前부터 내가 부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同時에,

十方世界가 全部 佛國土 아닌 곳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未來劫이 다하도록 自由自在한 大解脫의 生活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하고 물으면 이렇게 答합니다.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다.'

世上은 全部 내가 中心이 되어서 '나'를 위해 남을 害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 라는 것을 完全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과는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는 남을 위하다가 내가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지만, 설사 남을 위하다가 배가 고파 죽는다고 해도, 남을 위해서 노력한 그것이 근본이

되어서 내 마음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밝아지는 동시에 무슨 큰 利得이 오느냐 하면

내가 本來 부처라는 것을 確實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本來 부처라는 事實을!


自己는 굶어 죽더라도 남을 도와주라고 하면 '스님도 참 답답하시네. 自身부터 한번 굶어보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70평생을 산다고 해도, 80살을 산다고 해도 잠깐 동안입니다.

설사 100살을 살면서 지구 땅덩어리의 온 財産을 全部  내 살림살이로 만든다고 生覺해봅시다.

부처님은 무량아승지겁 前부터 성불해도 또 무량아승지겁이 다하도록 온 시방법계를

내 집으로 삼고 내 살림살이로 삼았는데  그 많은 살림살이를 어떻게 계산하겠습니까?


人生 100년 生活이라는 것이 아무리 富貴榮華를 하고 잘 산다고 해도, 미래겁이 다하도록

시방법계, 시방불토에서 無碍自在한 그런 大生活을 한 그것에 比較한다면

이것은 티끌 하나도 안됩니다. 조그마한 먼지 하나도 안됩니다.

內容을 보면 10원짜리도 안됩니다.그러나 10원짜리도 안 되는 이 인생을

完全히 抛棄해서 남을 위해서만 살고 어떻게든 남을 위해서만 努力합니다.

 

그러면 저 無量阿僧祗劫, 億千萬劫  全부터 成佛해 있는 그 '나라'에 들어가고 그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結局에는 10원짜리 나를 犧生하여 여러 億千萬원이 넘는 '참 나'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괜찮은 장사가 아닙니까. 장사를 하려면 큼직한 장사를 해야 합니다.

내가 中心이 되어 사는 것은 공연히 10원 20원 가지고 죽니, 사니 칼부림을 하는 그런 式 아닙니까?


아주 먼 옛날 부처님께서는 배고픈 호랑이에게 몸을 잡아먹히셨습니다.

몸뚱이까지 잡아먹히셨으니 말할 것이 없을 程度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배고픈 호랑이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 內容에는 큰 慾心, 큰 慾心이 있는 것입니다.

물거품같은 몸뚱이 하나를 턱 버리면 그와 同時에 十方法界  큰 佛國土에서

未來劫이 다하도록 自由自在한 大解脫을 成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出家하신 것도 그런 것입니다. 나중에 크면 임금이 될것이지만

이것도 가져봐야 별 것 아닙니다. 서푼어치의 값도 안되는 줄 알고 왕위도

헌신짝같이 차버리고 큰 돈벌이를 한 것 아닙니까?


根來에 와서 순치황제(順治皇帝)같은 분은, 滿州에 나와서 1년 동안 戰爭을 하여

대청제국(大淸帝國)을 건설한 분입니다. 이것은 중국역사상 가장 큰 나라입니다.

중국 본토 이외에도 남북만주, 내외몽고, 티벳, 인도지나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래놓고 가만히 生覺해 보니 참으로 마음의 눈을 떠서 未來劫이 다하도록 解脫道를 성취하는 것에

비하면, 이것은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10원짜리 가치도 안 되는 것임을 알고 대청제국을 헌신짝처럼

팽개쳐버리고 그만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금산사(金山寺)라는 절에 가서 다른 것도 아니고 나무하고 아궁이에 불이나 때는

부목 (負木)이 되었습니다. 大淸帝國을 建設한 만고의 대영웅 순치황제같은 사람이 절에 가서

공부하기 위해 나무해 주고 스님네 방에 불이나 때주고,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工夫를 成就  안할래야 안할 수 없습니다.


순치황제가 出家할 때, '나'는 本始 西方의 걸식하며 修道하는 修道僧이었는데,

어찌하여 만승천자로 타락하였는가? (我本西方一衲子 綠何流落帝王家)'하고 탄식하였습니다.

만승천자의 富貴榮華를 가장 큰 墮落으로 보고

만승천자의 보위(寶位)를 헌신짝 같이 차버린 것입니다.


이것도 生覺해 보면 慾心이 커서 그렇습니다. 대청제국이란 그것은 10원짜리도 못되고,

참으로 눈을 바로 뜨고 보면 十方法界에서 自由自在하게 生活할터인데 이보다 더 큰 財産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나간 이야기를 한 가지 하겠습니다.
6 25사변 때 서울대학에서 교수하던 文博士라고 하는 이가 나를 찾아와서 하는 말입니다.
"스님네는 어째서 個人主義만 합니까?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사회와 국가도 다 버리고 산중에서

參禪한다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혼자만 좋으려고 하는 그것이 개인주의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스님네가 개인주의 아니고 당신이 바로 개인주의야!"
"어째서 그렇습니까?  저는 사회에 살면서 부모 형제 돌보고 있는데, 어째서 제가
개인주의입니까?"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당신 여태 50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부모 내 처자 以外에 다른 사람들을 

한번이라도 生覺해 본적 있는지 良心대로 말해 보시오."
"참으로 純粹하게 남을 위해 일해 본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스님네가 부모 형제 버리고 떠난 것은 작은 家族을 버리고, 큰 家族을 위해 살기 위한 것이다.

내 부모 내 형제 이것은 작은 가족이야. 이것을 버리고 떠나는 그 目的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모든 중생을 大平等하게 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내 손발을 묶는, 처자권속이라고 하는 쇠사들을

끊어버리고 오직 큰 가족인 一切 存在을 위해서 사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야!  내 부모 내 처자 以外에는 한번도 生覺해 본적이 없다는 당신이야말로 徹頭徹尾한 個人主義者 아닌가?"
"스님 解釋이 퍽 普遍的이십니다."
"아니야, 이것은 내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니고 海印寺의 八萬大藏經版에 모두 그렇게
씌여 있어.

'남을 위해서 살아라'하고.  菩薩의 육도만행(六度萬行) 6바라밀의 처음이 무엇인고 하니

베푸는 것이야.  精神的으로 物質的으로 남을 도우는 것, 그것이 바로 보시(布施)야!

팔만대장경 全切가 남을 위해서 살아라 하는 內容의 것이야."
"……."
"그러니 승려가 출가하는 것은 나 혼자 편안하게 좋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더
크고 귀중한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릴 뿐이야. 그래서 결국에는 무소유(無所有)가 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일체 중생을 품안에 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야.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려면 반드시 貪내는 마음 이것을 버려야 하는데, 貪慾心을 버리려면

'나'만을 위해서, '나'만을 위해서'하는 이 生覺을 먼저 버려야 합니다."


前에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佛供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앞에 갖다 놓고 절하고 복비는 것이

佛供이 아니고 純粹한 마음으로 남을 도우는 것이 佛供이라고.


부처님께서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서 아주 간곡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신 앞에 갖다 놓는 것보다도  중생을  잠깐동안이라도  도와줄 것 같으면 그것이

자기 옆에 갖다 놓는 것보다는 여러 億千萬倍  비교할 수 없는 功德이라고.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結局 마음의 눈을 떠서 未來劫이 다하도록 永遠한

큰 살림살이를 成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도와주는 것이 부처님에게 갖다 놓은 것보다

비유할 수 없는 만큼 큰 공덕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가지 例를 들겠습니다.
일본 천리교(天理敎)의 敎主되는 사람이 '나카야마 미키'라는 女子 분입니다.

그 당시 日本에서도 굉장한 富者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工夫를 해서 自己 딴에는 마음의 을 떠버렸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니 自己 살림살이는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큰 살림을 해야겠다 生覺하고 男便에게 말했습니다.
"이제까지는 내가 당신 마누라 였는데 오늘부터는 내가 당신 스승이야!

내가 깨쳤어! 내가 하나님이니까 내 말을 들으시오."


'미쳤나? 왜 이러지? 그래 어떻게 하라는 거요?'
'우리 살림살이를 全部 다 팝시다. 이것 다 해봐야 얼마나 되나요. 모두 다 남에게  나누어줍시다.

그러면 結局에는 참으로 큰 돈벌이를 할 수 있습니다. 아주 큰 돈벌이가 됩니다.'


그리하여 財産을 다 팔아서 모두 남에게 줘버렸습니다. 이제 내외는 빈손이 되었습니다.

밥은 얻어 먹으면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利益이 되는 것, 남에게 좋은 것, 남 도우는 것을

찾아다니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女子의 몸으로 日本 歷史上 有名한 큰  人物이 되었던 것입니다.


結局 돈벌이는 크게 한 것입니다.  우선의 조그만 살림살이를 나눠주고서는.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나도 큰 살림살이를 한번 해 봐야겠다'이렇게 作定하고

집도 팔고 밭도 팔고 다 팔 사람 있습니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自己 財産 온통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 나누어 준다면!

그렇게만 되면 내가 목탁 가지고 따라다니면서 그 사람을 위해 아침 저녁으로 예불하며 모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설사 그렇게까지 極端的으로는 못하더라도

우리의 生活方針은 어떻게 해서든지 남을 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남을 위하는 이것이 참으로 '나'를 위한 것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참으로 '나'를 위한 것이고 

'나'를 위해 慾心부리는 것은 結局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자꾸 노력하면, 참으로 남을 돕는 생활을 할 것 같으면 결국에는 마음의 눈을 떠서

청천백일(靑天白日)을  환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려운 것을 많이 할 것 없이 한가지라도 남을 도우는 生活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가 앞으로 바른 길로 서려면 승려도 신도도 모두 生活方向이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느냐 하면 남을 돕는 데로 完全히 돌려져야 합니다.


승려가 예전같이 산중에 앉아서 됫쌀이나, 돈푼이나 가지고 와서 불공해 달라고 하면

그걸 놓고 목탁 똑딱거리면서 福 주라고 빌고 하는 그런 生活을 그대로 계속하다가는

불교는 앞으로 永遠히 없어지고 맙니다.


절에 다니는 신도도 또한 그렇습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내 자식이 머리만 아파도 쌀되나 가지고

절에 가서 '아이고, 부처님, 우리 自息 얼른 낫게 해주십시오'이런 式의 思考方式으로는

참된 부처님 제자가 아닙니다.승려도, 신도도 부처님 제자가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는 아무 發展이 없습니다. 산중에 갇혀서 결국에는 아주 망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불교 승단에는 승려 전문대학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을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마을 사람들도 논을 팔아서라도 자식을 공부시키려고 합니다.

자식 공부 시키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인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불교에서도 승려를 자꾸 敎育시켜야 합니다. 自己도 모르는데 어떻게 포교하며

또 어떻게 남을 지도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나중에는 법당의 기왓장을 벗겨 팔아서라도 '승려들을 교육시키자'하는 것이 내 근본생각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종단적인 차원에서 꼭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結論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生命이 億千萬劫  前부터 本來 부처이고 本來 佛國土에 살고 있는데

왜 지금은 캄캄밤중에서 갈팡질팡하는가?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해서 그렇다.

그렇다면 마음의 눈을 뜨는 方法은? 

話頭를 부지런히 參究해서 깨치든지 아니면 남을 돕는 生活을 해야 합니다.


떡장사를 하든, 술장사를 하든, 고기장사를 하든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지

話頭를 배워서 마음속으로 話頭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속으로 話頭를 하고, 行動은 남을 도우는 일을 꾸준히 할 것 같으면

어느 날엔가는 마음의 눈이 번갯불같이 번쩍 뜨여서 그때에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無量阿僧祗劫  前부터 本來 부처이고  本來 佛國土에 살고 있다는

그 말씀을 確實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참으로 人間 世上과 天上의 스승이 되어서

무량대불사(無量大佛事)를 未來劫이 다하도록 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춤뿐이겠습니까?  큰 잔치가 벌어질 텐데 그렇게 되도록 우리 함께 努力합시다

  

   *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하신 대중법어/ 1981년 음 6월 30일성철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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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토피아님이 올린 법문

-무진장 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