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백수(庭前柏樹)
카르페 디엠!
현재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은
과거 기억에 대한 집착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는
활발발 살아있는 순간의 마음
달마 스님이 훌륭해도
집착하면 자유는 사라져
어느 스님이 “무엇이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요?”라고 묻자,
조주 스님이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
- 무문관(無門關) 37칙 / 정전백수(庭前柏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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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으로부터 다짐을 받자 제자는 이제 제대로 대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다시 물어봅니다.
“무엇이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조주 스님은 대답합니다.
“뜰 앞의 잣나무!”
어떻습니까. 느낌이 조금 다르지요. 무문이 생략한 대화에서 핵심은 아마 ‘경(境)’이라는 槪念에 있을 겁니다. 境은 認識 對相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비사야(viṣaya)의 번역어입니다. 바로 이 部分이 重要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差異가 나는 결정적인 지점은 바로 이 ‘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지요. 제자가 잣나무를 自身의 마음과는 無關하게 뜰 앞에 존재하는 客觀的인 事物로 이해하고 있지만, 스승에게는 잣나무는 自身의 마음이 없다면 存在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조주 스님에게 있어 잣나무는 후설의 용어를 빌리자면 노에마(noema)였던 것입니다. 사실 잣나무가 마음에 들어온다는 것은 마음의 활발발(活潑潑)한 作用, 그러니까 노에시스(noesis)가 作動한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
“뜰 앞의 잣나무!”라고 말하면서 조주 스님은 살아있는 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노에마를 지목한다는 것 자체가 노에시스를 암시하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3. ‘지금 바로 여기’가 깨달음
더 숙고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것에도 執着하지 않아야 뜰 앞에 펼쳐져 있는 잣나무들이 우리의 눈에 들어온다는 점입니다. 만일 어제 읽던 경전의 내용이나 아침에 제자와 나누었던 대화에 마음이 가 있었다면, 조주 스님의 눈에 잣나무들이 들어왔을 리 없을 겁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지금 바로 여기’에 조주 스님의 마음은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一切의 執着에서 벗어나 깨달은 마음, 卽 自由로운 마음 아닌가요. 불행히도 제자의 눈에는 여전히 잣나무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저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疑問만이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오히려 지금 자신의 스승이 선불교 특유의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식의 대화법을 사용한다고 짜증까지 내고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200여 년 전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승은 자꾸 “뜰 앞의 잣나무!”만을 외치고 있으니 어찌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무문관’의 37번째 관문이 생각보다 난해하지는 않으시지요. 그렇습니다. 조주 스님의 마음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면, 제자의 마음은 200여年 前 達磨大師에게로 가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다시 말해 여여(如如)하게 事態를 보세요. 달마 대사는 단지 제자의 記憶 속에만 存在할 뿐 아닌가요. 물론 제자가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알려고 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안다면, 자신도 달마처럼 혹은 스승 조주처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제자는 지금 자신이 깨달음에 이를 수 없는 길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알라야意識을 끊어내기는커녕 그것을 强化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스님이 되기 前,
아니면 스님이 된 後에, 책이나 스승으로부터 배웠던 달마 이야기가 어느 사이엔가 그의 內面에
지울 수 없는 記憶, 즉 알라야意識이 되어버린 겁니다.
알라야意識은 끊어야 합니다. 이것은 물론 過去나 記憶에 매몰되어 있는 마음을 극복한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의 마음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살아있는 마음일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싯다르타의 이야기가 아무리 훌륭해도, 혹은 달마 대사의 가르침이 아무리 절실하더라도, 그것에 執着하는 瞬間 우리는 自由로운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제2의 싯다르타나 제2의 달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自身이 主人公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무문 스님이 “조주가 대답한 것을 자신에게 사무치게 알 수만 있다면,
過去에도 석가가 없고 未來에도 미륵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當然한 일이지요.
‘지금 바로 여기’에 살아있는 마음, 그래서 “뜰 앞의 잣나무”가 確然히 드러날 때,
우리 自身이 이미 석가이자 미륵처럼 깨달은 사람이 되어 있는 겁니다.
記憶 나시나요. ‘죽은 詩人의 社會(Dead Poets Society)’라는 영화에서
키팅(John Keating)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역설했던 이야기 말입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잡아라!”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옥련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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