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신문> 기고문/김태완
마음법(心法)
예컨대 바람이 불어서 물 위에 물결이 일어날 때,
물결이 움직이는가?
물이 움직이는가?
보이는 모양을 따라 물결이 움직인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헛것을 實在로 아는 잘못을 犯하는 것이다.
물결이란 實在하는 무엇이 아니다.
다만 물의 흐름이 因緣따라 瞬間 瞬間 드러내는 虛妄한 貌樣일 뿐이다.
어떤 因緣을 만나서 어떤 물결이 일어나든,
물 그 自體는 일어나거나 사라지는 일 없이 한결같이 물일 뿐이다.
물결을 말한다면 높고 낮음, 부드럽고 사나움, 빠르고 느림, 좋고 나쁨을
말할 수가 있겠지만, 물은 한결같이 물일 뿐 아무런 差別이 없다.
마음 亦是 이와 같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지위가 높든 낮든,
아는 것이 많든 적든, 보이는 것이 무엇이든, 들리는 것이 무엇이든, 어떤 느낌이 있든,
어떤 生覺을 하든, 어떤 欲望이 일어나든, 어떤 行動을 하든, 어떤 因緣을 만나든,
本來부터 한결같이 그 마음일 뿐이고 다른 것은 없다.
마음은 어떠한 理致도 아니고 見解도 아니며 말할 만한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치나 견해나 말할 만한 것은 모두 배우고 經驗함으로써 알게 되고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갓 태어난 어린 아이나 팔십 먹은 노인이나 꼭 같아서 전혀 다를 것이 없다. 마음은 배우고 經驗하여서 얻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思量하고 分別하여 그려내거나 나타낼 수 있는 貌樣이 아니다.
지금 “思量”하는 것이 “마음”이니 마음은 思量될 수 없고,
이 瞬間 “分別”하는 것이 “마음”이니 마음은 分別될 수 없다.
그림을 그리는데, 지금 붓을 움직여 붓질하고 있는 이것(마음)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겠는가? 붓질하는 貌樣을 思量과 分別로 그려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붓질하고 있는 生生한 마음의 活動이 아니라 죽은 그림에 불과하다.
죽은 그림은 그림 속의 떡과 같이 虛妄한 것이다.
지금 이 瞬間 그림을 그리고 있으되 그려질 수 없는 “이것”을 몰록 알아차리면,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달리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工夫하여 깨달은 後에 비로소 마음을 얻어 使用하는 것은 아니다.
깨달아도 그 마음을 使用하고 있고, 깨닫지 못해도 그 마음을 使用하고 있다.
성불(成佛)이란 깨달음을 이룬다는 말인데, 깨달음이란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마음은 本來부터 모자람 없이 갖추어져 있으니,
본래성불(本來成佛)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스스로 生覺으로 헤아려서(思量) 마음이라는 對相을 세우고
그 對相을 알아채는 經驗을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깨달은 사람과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迷惑과 깨달음을 나누는 것이 바로 어리석게 헤매는 分別心이다.
分別心에서는 깨달음과 어리석음을 나누고 부처와 衆生을 나누는 것이
밝은 判斷이라고 여기지만, 이것은 이름과 뜻을 따라서 나와 남, 중생과 부처,
법(法)과 비법(非法)을 세우는 망상(妄想)일 뿐이다.
工夫하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익숙한 分別心 위에서 分明하고 밝게 드러나는
뜻과 貌樣이 모조리 妄想임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뜻으로도 分明하지 않고
貌樣으로도 붙잡을 수 없는 곳에서 分明하고 밝게 되어야 工夫를 바로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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