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人間에게 不變의 自我는 없다
불교에 關心을 가진 분이라면 누구나 오온(五蘊, pañca-skandha)이란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오온은 한자 의미 그대로 ‘다섯 가지 덩어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싯다르타(Gautama Siddhārtha, BC563?~483?)가 우리 人間을 分析할 때 사용하였던 槪念입니다. 싯다르타는 우리 인간이 다섯 가지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는 存在라고 본 것입니다.
그 다섯 가지는 무엇일까요?
색(色, rūpa), 수(受, vedanā), 상(想, samjñā), 행(行, samskāra), 식(識, vijñāna),
바로 이 다섯 가지입니다. 여기서 色이 肉體作用, 壽는 感覺作用, 想은 表像作用, 行은 意志作用, 그리고 마지막으로 識은 判斷作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싯다르타가 五蘊을 이야기했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人間에게는 固定 不變한 자아(ātman)가 存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人間을 構成한다는 五蘊에는 自我가 包含되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런 理由에서입니다.
當然한 일 아닌가요?. 스스로 自身을 돌아보세요.
육체작용, 감각작용, 표상작용, 의지작용, 그리고 판단작용을 除外하고 不變하는 自我를 內面에서 發見할 수 있으신가요. 이렇게 五蘊을 除外하고 不變하는 自我를 결코 찾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싯다르타가 五蘊說을 제안했던 根本的인 理由라고 할 수 있습니다.
興味로운 것은 五蘊 中 어느 하나라도 사라지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破壞될 수밖에 없다는 点입니다. 例를 들어 항문이 막힌다거나 심장이 멈추는 等 肉體作用이 그친다고 해보세요. 우리는 바로 死亡에 이르게 될 겁니다. 感覺作用의 경우를 生覺해볼까요. 만일 뜨거움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혹은 視覺이 없어지는 등 感覺作用이 不可能해진다면, 生命의 불꽃은 얼마 지나지 않아 虛妄하게 꺼지게 되겠지요. 이것은 표상작용, 의지작용, 판단작용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五蘊 중 어느 하나가 극단적으로 사라지면, 우리의 삶도 存在할 수 없을 겁니다. 이런 極端的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五蘊 중 하나가 과거와 다르게 作動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경우라면 生命에는 별다른 지장은 없지만, 우리는 過去와 사뭇 다른 모습을 띠게 될 겁니다.
交通事故로 다리를 잃게 되어 肉體作用이 過去와 다른 경우를 生覺해보세요.
이때 우리는 겉모습에서나 內面에서 過去와는 完全히 다른 사람이 될 것입니다.
過去에는 意持의 對相이 돈이었는데 지금은 깨달음이 依知의 對相인 경우를 生覺해보세요.
이때 우리는 貪慾스러운 사람에서 求道者로 變하게 될 겁니다. 이런 式으로 우리의 自我는 不變하는 것이라기보다 五蘊이 作動하는 方式과 强度에 따라 搖動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當然히 永遠不變한 아트만과 같은 自我가 存在한다는 注張은 語不成說인 셈이지요.
2. 수레 해체하면 수레 어디로 가나
서양 클래식 음악의 다양한 장르 중 현악사중주(string quartet)가 있습니다. 네 대의 현악기, 그러니까 제1 바이올린, 제2 바이올린, 비올라, 그리고 첼로가 모여 아름다운 화음을 연출하는 것이 현악사중주이지요. ‘종달새(Letchen)’라는 이름이 붙여진 현악사중주곡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현악사중주의 연주 형식을 완성한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이 작곡한 아름다운 곡입니다.
‘종달새’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 경쾌하고 익숙한 멜로디를 금방 어렵지 않게 흥얼거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어느 현악사중주단이 연주하느냐에 따라 ‘종달새’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줍니다. 또한 동일한 현악사중주단이라고 할지라도, ‘종달새’는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올라 연주자가 感氣에 걸렸거나 혹은 어떤 理由로 상심하고 있다면, 동일한 현악사중주단의 연주도 그만큼 달라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현악사중주의 비유만큼 싯다르타의 五蘊說을 說明하는 데 좋은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종달새’라는 곡은 우리의 日常的인 自我를, 그리고 네 대의 현악기는 五蘊을 想徵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한번 生覺해보세요. 두 대의 바이올린, 비올라, 그리고 첼로라는 악기가 自身만의 파트를 演奏하지 않는다면, ‘종달새’는 存在할 수도 없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네 대의 현악기가 함께 연주되지 않는다면, ‘종달새’는 존재할 수도 없는 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演奏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종달새’가 永遠不變한 채로 있다고 믿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事態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卽 여여(如如)하게 直視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演奏도 없는데도 ‘종달새’를 떠올렸다면, 이것은 우리가 過去에 있었던 演奏를 들었던 經驗을 떠올리고 그것에 執着한다는 事實만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드디어 ‘무문관(無門關)’의 여덟 번째 관문을 통과할 준비가 어느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이 관문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사람은 월암(月庵, 1079~1152) 스님입니다. 關門을 막고 서서 월암 스님은 話頭 하나를 던지며 우리에게 겁을 줍니다. 물론 자신이 던진 問題를 풀지 못하면, 여덟 번째 關門을 通過할 수 없다고 월암 스님은 우리를 닦달하면서 말입니다.
“해중(奚仲)은 百 개의 바퀴살을 가진 수레를 만들었지만, 두 바퀴를 들어내고 軸을 떼어버렸다.
도대체 그는 무엇을 보여주려고 한 것인가?” 중국의 전설적인 장인 해중(奚仲)은 수레 제조의 천재였습니다. 현재 좋은 자전거도 바퀴살이 40개를 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퀴살이 100개나 되는 바퀴를 만들었다는 것은 奚중이란 장인이 얼마나 實力이 탁월한지, 그리고 그가 만든 수레가 얼마나 高價의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하도록 합니다. 그런 고가의 수레를 天然덕스럽게 해중은 해체해버린 겁니다. 도대체 해중은 무엇 때문에 수레를 解體했던 것일까요.?
3. 인연 끝나면 존재는 신기루
해중이 수레를 해체했을 때, 그 고가의 수레는 어디로 갔을까요? 바퀴에 갔을까요? 아니면 축에 갔을까요? 아니면 기독교의 천국이나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에 갔을까요? 아무데도 가지 않았습니다! 만일 어딘가로 갔다면, 단지 그것은 해체하기 전 고가의 수레를 탐내며 보았던 사람의 마음속에만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에게 고가로 팔 수 있었지만 불행히도 잔해로 변해버린 수레는 안타까움과 슬픔을 자아낼 겁니다. 집착은 바로 이런 식으로 발생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해체되는 순간, 수레는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불행히도 이런 통찰은 있는 그대로 사태를 보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일 겁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고가의 수레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부수어 버릴 것이라면, 내게 주면 얼마나 좋아.”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중이 수레를 과감하게 해체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야 월암 스님이 여덟 번째 관문을 지키면서 해중이란 장인과 관련된 화두를 던진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월암 스님은 우리들에게 무아(無我, Ana-tma)의 가르침을 깨달아 불변하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촉구하고 있었던 겁니다. ‘구사론(俱舍論, Abhidharmakośa)’에서 말한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인연화합(因緣和合, sam. nives´a)’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나 우리가 보고 있는 사물이나 사건들은 다양한 원인[因, hetu]과 조건[緣, pratyaya]들이 조화롭게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치 하이든의 ‘종달새’가 네 대의 현악기가 조화롭게 결합되어 하나의 선율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일 현악사중주를 알았다면, 월암 스님은 이것을 비유로 채택했을 지도 모릅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것은 당시로는 바랄 수도 없는 일이지요. 그렇지만 해중의 비유도 현악사중주에 못지않게 절묘하기만 합니다. 아니 더 탁월한 비유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고가의 수레는 다양한 부속품들의 하모니로 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가르침뿐만 아니라, 동시에 고가의 수레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도 동시에 설명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가의 수레는 바퀴나 축을 포함한 다양한 부속품들이 모여서 발생한 표면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고가이기 때문에, 즉 너무나 희귀하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집착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법입니다. 월암 스님이 해중이 만든 귀한 수레를 화두의 소재로 삼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고가의 수레는 우리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 그러니까 자아, 생명, 건강, 사랑 등등을 상징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해중의 수레나 하이든의 ‘종달새’처럼 영원불변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여러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 함께 하나의 하모니로 울릴 때 간신히 존재하는 것들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당연히 인연이 다 끝난다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허무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종달새’는 지금도 어느 순간 멋진 현악사중주단을 만나 사람들을 감동시킬 것이고, 기후나 일조량 등 다양한 조건들과 만난 어느 멋진 꽃도 어디에선가 자신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테니까 말입니다. 인연의 마주침을 만끽해야 하지만 동시에 인연이 끝날 때 집착하지 말 것! 이것이 바로 이것이 바로 중도(中道, madhyamā-pratipad)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요.
강신주 contingen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