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9)이란 주제의 마지막 법문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이미 완성되어 있다"
|설법 녹취록 - - 법상스님
인본 | 조회 61 |추천 1 |2013.06.29. 04:50 http://cafe.daum.net/truenature/N0Zv/170
제가 그림에는 요렇게 좀 군대다보니까 적어놨는데, 제가 이렇게 보니까 많은 분들을 만나보니까 재미난 것을 좀 발견했는데요, 이를테면 이렇더라고요. 군대로 따지면 중위라든가 중사라든가 20대 초급간부들, 또 회사로 치면 사원들 대리. 20대나 요런 간부들. 이런 평사원들 10대 때 사람들한테 물어보니까, 20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요, 지금은 좀 희생되는 시기.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인생에서 지금은 다소 힘들지만 억지로 참으면서 내가 좀 고통스럽지만, 나중에 30대 40대 50대 됐을 때 빛나게 성공하는 그 시기를 위한 준비의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좀 힘들어도 괜찮다. 지금은 내가 조금 고통스러워도 괜찮다. 나중에 가서 성공하면 다 補償되니까. 그렇게 生覺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20대 들은 성공한 사람들 40대 50대 60대. 이렇게 成功해서 뭔가 딱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하신 그런 사람들을 한 없이 부러워합니다.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아주 열심히 일을 하고 그냥 지금 좀 힘들더라도 상관없이 그냥 일단 나는 하여간 성공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30대 40대 50대를 부러워하면서 달려가요. 그러고 또 30대가 되면 신기하게도 20대들을 보면서 야~ 저 때가 좋았는데. 내가 20대만 해도 몸도 참 좋고. 야, 20대라는 뭔가 참 그 젊은 패기가 있었고, 뭔가 힘도 더 있었던 거 같고, 무엇을 해도 괜찮았고. 지금 tv를 봐도 학생들을 봐도 20대 친구들은 몸은 정말로 어려보이고 정말 동안이고 너무 예뻐 보이는데 나는 이거 조금씩 조금씩 늙어가는 거 같구나.
그리 生覺하면서 20대를 부러워하거나 아니면 40 50대 나이 드신 분들을 보면서 야, 나도 저 정도까지 성공하려면 아직 멀었구나. 내가 이제 이 정도밖에 안돼서 앞으로 내가 이제 어떻게 하지? 하면서 40대 50대 安定的인 분들을 부러워하거나.
그런데 40~ 50대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하시는 분들은 거꾸로 야, 내가 20대 때 정말 돌도 씹어 먹을 나이였는데 30대만 해도 그래도 정말 그때만 해도 내 인생에 빛나는 시기였는데. 40대만 해도 참 괜찮다. 그런데 50 넘어가고 나니까 이게 뭘 해도 氣力이 빠지고. 뭐 그러더라고요. 술을 한잔 마셔도 옛날에는 밤새 마셔도 그 다음 날 끄떡없었는데 이제는 하룻밤만 밤을 새면 며칠 동안 그냥 힘들고, 축구 한 게임을 뛰어도 며칠 동안 힘들고,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이제는 어떤
生覺을 하시냐하면, 서서히 은퇴에 대한 준비를 하시고 그러면서.
“야, 정말 이 회사에 나는 이제 좀 있으면 갈 사람이고, 이 회사를 정말 이끌어 갈 사람은 젊은 사람들 아니냐? 너희들이 주인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더란 말이죠. “난 이제 곧 은퇴할 사람이니까 이제 너희들이 할 거야.” 이런 生覺을 해요. 가만히 보니까 돈을 버시는 분들이 은퇴 후 老後에 대해서 많이 고민을 하거든요. 老後를 공부하다보니까 기대를 하면서 돈을 많이 벌어놓고 安定的인 老後를 꿈꾼단 말이죠.
언뜻 生覺해보면 “야, 이 많은 분들의 꿈이 老後인가?” 이런 生覺이 들 정도로 老後를 向해서 달려가는 모습이라는 거죠. 그런데 저마다 自己의 그 時期가 가장 정말 適節한 時期라는 것을 누구나 놓치고 살더란 말이죠. 最上의 時期는
내 人생의 最上의 時期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것이 아니라, 언제나 지금 이 瞬間인 줄 모르고 언제나 다음 瞬間을 向해
쫓아가거나 지난 過去에 빛나던 때를 生覺하면서 그 때를 부러워하면서 우리는 한 平生을 보낸다는 거죠.
그래서 이 瞬間 지금 이 瞬間 나에게 주어진 時間 條件, 지금 이 瞬間 나에게 주어진 空間, 이것이야 말로 우리 人生 最高의 絶頂의 瞬間이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 瞬間이 내 人生에서 最上의 絶頂의 瞬間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人生에 絶頂은 오지가 않을 確率이 높습니다. 平生 곁가지만 돌다가 삶의 주변으로만 맴돌다가 생생한 삶을 살아보지를 못하는 거예요.
20대 때 왜 20대를 희생시켜서 30 40대 성공을 위해서 20대를 희생시켜야 될까요? 그렇지 않죠. 20대는 최대한 열심히 일을 하고 열심히 노력을 하지만, 이게 가장 뭐랄까 요즘 시대가 원하는 인재상은 어떤 것이냐 하면, 회사를 위해서 무조건 맹목적으로 온몸 다바치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제는. 自己의 삶이 幸福한 사람입니다. 내가 幸福해야 會社에서 더욱더 能率이 오르고 일만 계속 하는 사람이 능률 오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쉴 줄 아는 사람, 주말에 제대로 놀 줄 알고, 쉴 줄 알고, 마음의 平和를 찾을 줄 아는 사람이 일도 제대로 일 할 수 있는 거죠.
많은 사라들이 그러거든요. 내가 그때는 일밖에 모르고 일만 해서 돈 벌어다 주면 子息들 아내한테 할 수 있는 걸 다했다 生覺했는데 나중에 돌아보니까 애들이 중학생 고등학생만 되도 아빠하고 놀아주려고 안하고, 아들과 단둘이 있는 것이 그렇게 서먹할 수가 없고, 그러면서 한 생을 살아서 뒤늦게 後悔를 하는 境遇가 많은 거죠. 그런데 事實은 그렇게 살았다 할지라도 그래서 내가 지금 40대가 되고 50대가 되고 60대가 됐다 할지라도 그것에 對해서 後悔하는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後悔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다시 그 삶으로 되돌아가겠다는 얘기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만약에 지난 過去를 나도 그렇게 살았다는 거 같아. 라고 後悔하는 사람이 있다고 쳤을 때, 그 사람 後悔할 필요는 사실은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도 여러분이 지금까지 다 잘못 사셨으니까 지금부터 잘 사십시오. 하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시기도 우리 인생에서 필요한 거죠. 다소 未來를 向해서 犧牲되는 것 같은 일에만 빠져있는 뭔가 지금 이 瞬間을 最絶頂으로 살지 못하는 그런 意識으로 사는 人生도 필요합니다. 그렇게 살아보는 사람만이 “아, 그것이 아니었구나.”
每 瞬間이 最高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工夫의 過程이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虛妄했던 삶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좀 때로는 내가 後悔되는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後悔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後悔한다는 것은 벌써 過去에 얽매이고 있다는 것이거든요. 지금 이 瞬間 過去를 내려놓게 되면 懺悔하고 지금 이 瞬間을 새로운 絶頂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이 宇宙 法界를 法界라고 하는 理由. 法界. 다르마의 世界거든요.
眞理의 世界인 理由. 이거는 누구에겐 眞理인데 나에겐 眞理가 아닌 世界가 아닙니다. 모든 이에게 同等하게 眞理인 世界입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저마다 自己의 業이 다르고 因緣이 다르고 自己가 깨닫는 方式이 다른 거예요. 똑같은 方式으로 얘기했을 때 다 깨닫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도 어떤 사람에게 法門을 했을 땐 그 사람이 깨닫는데 어떤 사람에게 法門을 했을 땐 아무리 根機에 맞춰서 說法을 하려고 해도 그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단 말이죠.
저마다 根機가 다릅니다. 自身이 깨달은 삶의 方向이 달라요. 그러기 때문에 저마다 自身이 가야 될 삶의 方向이 다릅니다. 남들처럼 똑같이 닮아가서는요 결코 삶의 眞理에 있어서 成功할 수가 없습니다. 남들이 다 돈 잘 벌고 富者가 됐다고 나도 그 方向으로 가는 것처럼 미친 듯이 달려와서는 그 사람 뒷다리만 캘 수 있지 自己의 成功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成功은 自己다움을 認定했을 때 成功할 수가 있는 거죠. 나의 좀 못난 외모, 좀 떨어지는 能力, 좀 남들보다 못한 運動神經, 이런 것들을 認定하고 오케이. 알았다. 받아들이겠다. 허용하겠다. 그러고 나서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럼 무엇일까? 이것을 探究하기 始作하는 것, 지금 이 瞬間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를 살펴보기 시작하는 것, 그랬을 때 그 사람다운 그 사람의 가장 걸 맞는 깨달음이 옵니다.
왜냐하면 이 宇宙法界는 부처님께서 경전에 金剛經에 다 알고 다 본다. 이런 단 말이죠. 중생의 모든 根機와 마음을 다 알고 다 봅니다. 그래서 모든 중생에게 부처님께서는 이 宇宙法界는 正確히 그 사람에게 必要한 境界를 그 瞬間에 보내주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每 瞬間의 時空은요, 지금 이 瞬間이라는 이 지금 여기라는 이 時空은 나에게 이 宇宙에서 더 이상 適合할 수 없는 時間과 空間만이 나에게 登場합니다. 말 그대로 지금 이 瞬間에 나에게 最上의 絶頂인 時間과 空間만이 나에게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을 去否하게 되면 眞理를 거부하는 것이고 나의 삶 自體를 거부하는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가 도달 할 수 있는 唯一한 終着地는 결코 未來에 있지 않고 지금 이 瞬間에 있습니다.
지금 이 瞬間 잠시 存在하고자 했을 때 幸福을 느끼고 누리고자 했을 때 내가 느끼고 누리는 幸福이 나에게 올 수 있는 거죠. 그래서 벽암록에 보면 내 人生에서 가장 幸福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삶의 絶頂의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이 瞬間이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오, 來日은 다가오는 오늘이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를 삶의 全部로 느끼며 살아야 한다고 表現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恒常 끊임없이 다음에 올 것을 바라죠. 다음 瞬間이 올 을은 무언가 幻想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냥 맹숭맹숭하거든요. 다음 瞬間은 뭔가가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법회 가는 날이다. 하고 빨리 법회가야지 하고 막 서둘러 준비하잖아요. 준비할 때는 준비하는 그 瞬間에 마음이 없습니다. 마음이 어디가 있냐하면 빨리 法堂가야지 하는데 있어요.
그러니까 準備하면서는 法堂에 벌써 마음이 가 있습니다. 準備하는 그 瞬間에 마음이 存在하지를 못하죠. 차를 딱 탔을 때 目的은 뭐냐 하면 차를 타고 있는 그 自體가 目的인데 빨리 到着하는 게 目的입니다. 법당에. 법당에 도착하는 게 목적이라서 빨리 가야지 하는 마음을 가져요. 그런데 더 재미난 건요, 그 목적이 법당에 도착해서 법회에 참석하는 거거든요.
그거로 인해서 여러분이 여기 오셨단 말이죠. 그런데 법회에 참석해서 예불하다보면 빨리 예불 끝나고 법문 들어야지 이 生覺이 듭니다. 법문을 딱 시작하고 나면 한 10분 20분 듣고 나면 아이고 빨리 좀 끝나야 되는데. 그래서 빨리 끝났으면 하고 바란단 말이에요. 법문 끝나기를 바랍니다. 끝날 때 쯤 되면 빨리 가서 밥 먹기를 바라고, 밥 먹을 때 되면 온전히 밥을 못 먹고 밥 빨리 먹고 빨리 집에 갈 生覺을 해요.
그래서 빨리 집에 가야 되는데 이 生覺을 합니다. 집에 가려고 出發하면 집에 到着하기를 바라고 막상 집에 도착했어요. 집에 도착하면 목적이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이제 또 뭘 하지? 빨리 설거지해야지. 설거지하면서 빨리 끝내놓고 청소 끝난 깨끗한 狀態를 바래요. 깨끗해지면 끝인가? 아닙니다. 또 빨리 뭐 애들 뭐도 해야지. 뭐도 해야지. 끊임없이 다음
瞬間만을 바라며 살아요. 여기 교수님들 많으시니까 학생들 그렇잖아요 수업시작하면 수업 끝날 때를 바래요. 또 주중에는 주말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빨리 주중 빨리 가라. 주말만 되면 좋겠다. 그 주말에는 주중 주말이 이렇게 반복되는 시기에는 방학을 바랍니다. 빨리 방학만 와라. 그리고 좀 더 크게 보면 “야, 이거 빨리 졸업만 했으면 좋겠다.”
이걸 바래요.
卒業하고 나면 “야, 빨리 結婚이나 좀 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바래요. 그 結婚을 해서 막 열심히 결혼을 목적지로 달려갑니다. 결혼하고 나면 빨리 애 하나 낳았으면 좋겠다. 애 낳고 나면 애가 지 혼자 걸을 때만 됐으면 좋겠다. 이래서 자기혼자 걷고 나면 말길을 좀 알아들을 때만 됐으면 좋겠다. 그때쯤 되면 얘가 초등학교만 가면 좋겠다. 내 손 좀 안타는 중학교 때쯤 되면 괜찮지 않을까? 이렇게 生覺 한단 말이죠. 그때 되면 고등학교 빨리 가고 대학교 빨리 가서 빨리 졸업만 시켜서 출가 좀 시켰으면 좋겠다. 빨리 시집장가 좀 시켰으면 좋겠다 하는 사이에 또 南便이 요다음 進級을 빨리 했으면 좋겠다. 끊임없이 그 다음 것만을 바래요. 그 다음 것만을. 그렇게 언제까지 가느냐하면, 精神을 딱 차리고 나면
끊임없이 다음 瞬間을 바라고 未來를 바라다가 精神을 딱 차리고 나면 죽을 때가 다 되어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바랄 未來가 이제는 죽는 거 밖에 안남은 瞬間이 온단 말이죠. 그나마도 그 때라도 깨달은 사람은 정말 아름다운 거죠. 그래서 實際 그렇습니다. 定年退任을 딱 하시고 나서 그 일에만 목숨을 걸고 있던 분들 같은 境遇 옛날에 많이 그러잖아요. 일에만 목숨 걸든 분들 같은 境優 정말 그거 다 끝나고 나면 너무 空虛해가지고 이 空虛感에 어쩔 줄을 몰라서 당황하고, 그것도 심지어는 정년퇴직하고 얼마 안 있다가 돌아가시는 분들도 예전에 많이 계셨어요.
이제는 智慧가 全切的으로 社會的으로 智慧가 올라가다보니까 그거에 그렇게 목매지 않고 내가 또 다른 내 삶을 찾고 삶을 全切的으로 돌아보게 되죠. 그래서 지금은 정년퇴직을 하고 나면 그때부터 더욱더 삶이 이제 깊이가 있어진다고 그러더라고요.
實際로 저도 뵈면 삶의 意味를 追求하게 되는 거예요. 그동안은 막 成功成功 이렇게 달려갔다면 이제는 삶의 意味를 깨닫게 되고 삶을 깊이 있게 바라보게 되죠. 그러다보니까 제가 보살님들 만나 뵈면 그렇습니다. 남편이 이렇게 괜찮은 사람인 줄 이 사람 정년퇴직하고 나서 알았다고. 참 이렇게 이렇게 매력 있고 괜찮은 남자였는지 이제 알았다고. 이제 남편에게 마음이 열린다. 이런 분도 제가 봤어요. 이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다음 瞬間만을 바라고 未來만을 바라고 未來에 對한 막연한 幻想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름휴가 때 어디 예를 들어 외국에 해외여행 가고자 계획을 품고 있어요. 그럼 마음속에 엄청난 幻想에 사로잡힙니다. 야, 여름휴가만 대봐라. 그때가 엄청난 幻想일거다. 이렇게 生覺해요.
저도 印度가기 전에 “야, 인도만 가면 얼마나 좋을까?” 가기로 결정되고 나서 몇 달 동안 가슴이 설레는 거예요. 그런데 인도 가는 비행기를 딱 타니까 빨리 도착하고 싶고, 도착해서 인도에서 그 걸망을 무거운 걸 짊어지고 걷는데요, 온도가 40도가 웃도는데, 거기서 보러 다니는데 너무 더워 죽겠는 겁니다. “이게 야, 이거 幻想이었구나.” 旅行地라는 것이 아, 그거 있지 않습니까? 이 속에 存在하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하나의 幻想이구나. 그러나 旅行이 끝날 쯤 되니까. 두 달쯤 되니까. 그 前에는 “야, 3개월 너무 짧다. 6개월 1년 있으면 좋겠다.” 生覺했는데 한 2달쯤 지나서 갈 때가 되니까 이게 서서히 韓國이 그리워지고, “야, 이거 한국에 빨리 도착하고 싶다는 生覺이 들더란 말이죠.
막상 韓國에 와보니까 또 旅行地가 그리워지는 거예요. 이것처럼 이게 왜 그럴까요?
旅行地가 정말 幻想的인 걸까요? 韓國이 정말 幻想的인 걸까요? 그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世上에 幻想的인 거란 것은 固定된 實體로서의 幻想的인 삶은 없습니다.
어디 있느냐? 지금 여기 이 瞬間에 존재하더라는 거죠. 지금 이 瞬間에만 存在하면---
제가 히말라야에서 봤던 그 莊快한 어떤 莊嚴한 風光들. 그 풍광을 보고 너무 감동을 했는데 히말라야 갔다 와서
江原道 고성에 배치를 받았는데 江原道 고성에 갔더니요, 내가 히말라야를 왜 같지 싶은 겁니다.
히말라야보다 더 아름다운 風光들이 펼쳐져 있고요, 그냥 오히려 히말라야 갔다 와서 제가 느낀 것이 뭐였냐 하면
늘상 보던 꽃 한 송이 풀한 포기가 놀랍게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히말라야에 가야지만 그 광대한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언제나 우리에게는 히말라야가 우리 앞에 있고, 광대한 어떤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있었던 거예요. 다만 우리가 가슴을 열고 마음을 열어서 그것을 초대하지 못하고 언제나 未來에 對한 幻想만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잡으려고만 애썼던 겁니다 幻影과도 같은 것을.
여러분 轉役하면 幻想的인 삶이 펼쳐질 거 같죠? 전역하고 5년 10년 있던 우리 군 장병들이나 친구들 저한테 전화 와서 그럽니다. 전역만 하면 인생 끝내줄 줄 알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친구들 말이 뭐냐 하면 내가 人生을 돌아보니까 군 생활할 때가 第一 便했다고 그래요. 군 생활 때가 제일 속편했다고. 학교 다닐 때는 공부해야 되니까 스트레스였고, 군에 있을 때는 먹으라면 먹고, 하라면 하고, 크게 고민할 것도 없이 그냥 便安하게 살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대하고 낫더니 이거 공부해가지고 이거 합격은 해야 되겠고, 합격이 안 되니까 또 취직해야 되겠고. 취직 안 되니까 골치고. 취직하고 나니까 또 진급해야 되겠고. 또 결혼해야 되겠고 마누라랑 싸워야 되고, 자식 키워야 되고. 이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는 겁니다. 군 생활할 때처럼 행복할 때가 없다. 그런데 군 생활 하는 사람은 그게 진짜 행복한지를
알겠습니까? 모르죠. 사실은 군 생활이 問題가 아니고, 삶이 問題가 아니고, 진급의 問題가 아니고, 돈이 問題가 아니고 자식 대학교 좋은데 가는 게 問題가 아니고, 언제나 問題는 지금 이 瞬間에 내가 存在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瞬間에 充分히 내가 즐거워 할 것이 있습니다 幸福을 누릴 것이 언제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누릴 수 있는 그 행복을 지금 이 瞬間에 걷어차는 사람은 未來에 있는 지금 이 瞬間에 주어진 행복을 걷어차면서 未來에 올 幻想的인 幸福만을 쫓는 사람은 그 生覺의 觀念에 빠져서 그 旅行이라는 未來라는 幻想的인 觀念에만 언제나 빠져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죽을 때까지 未來만을 추구하다 끝나는 거죠 인생이.
아무리 좋은 때도 그 瞬間이 딱 되면 덜 좋습니다. 항상 하는 얘기가 병장들이 항상 하는 얘기가 병장 제대하는 친구가 항상 하는 얘기가 제대 하루 앞두고 물어보면 100이면 100 다 뭐라고 그러냐하면, 이 날만을 손꼽아 1년 동안 기다렸는데 지금 기분이 어떠냐? 그러면 이상하게 그렇게 기뿐 줄 모르겠다. 좋긴 좋지만, 이게 뭔가 막 확 와 닿는 뭔가가 있는 건 아니다. 이렇게 얘기해요.
그래서 우리가 정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지금 이 瞬間에 存在하지 않으면 지금 이 瞬間에 幸福하지 않으면 그 어떤 幸福도 올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처음에 말씀드렸던 뭔가 願하는 것을 얻었을 때 오는 幸福은 事實은 根源的이지 못하죠. 이렇게 지금 이 瞬間
바라는 것이 없더라도 지금 이 瞬間에 充分히 存在할 수 있는데서 오는 幸복 이것이야 말로 偉大한 幸福입니다. 그래서 삶은 언제나 完全합니다. 지금 여기 이 瞬間에서 우리는 幸福할 수가 있어요. 이미 우리의 삶은 언제나 完成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完成이 우리가 말하는 것처럼 돈도 願하는 데로 다 있고, 자식도 願하는 거 다 이루었고, 뭐든지 다 이루는 그 겉껍데기에서 드러나는 完成이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眞情한 完成이 아니죠. 오히려 그것이 하나의 더 큰 境界가 될 수 있죠.
돈 때문에 더 괴로움에 빠진 사람도 있지 않아요?
眞情한 完成은 뭐냐 하면 내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最適의 條件 속에 있을 때가 完成입니다 돈 많았을 때가 完成이
아니라. 그런데 이 삶은 언제나 自己에게 最適化된 最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條件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그 瞬間을 받아들였을 때 그 瞬間이 完成된 瞬間이 되는 겁니다.
그래 제가 전에 그 말씀 드렸죠? 일 년째 쉬엄쉬엄 오두막을 짓는 스님에게 “스님, 이 집은 언제쯤 完成됩니까?”
젊은 스님이 이래 왔어요. 그랬더니 스님이. “무슨 소리 하는 거냐? 일 년 전에 처음 시작할 때도 完成이었고, 한 달 전에도 完成이었고 지금도 이 自體로 完成이다.” 나는 이걸 다 完成된 다음에 여기 안에 들어가서 便安하게 修行하면 그때
가서 完成됐다고 生覺하지 않고 그냥 애초부터 벽돌 하나하나 쌓는 그 自體로서 完成이라고 生覺하고 그 自體로서 滿足하면서 벽돌을 쌓았을 뿐이다. 집을 짓고 나야 그때 가서 完成이라는 生覺이 없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인거죠.
뭔가 完璧하게 집을 짓고 완벽하게 내 想像 속에서 願하는 것들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야 完成이라고 生覺하는 사람은
그걸 이룬 다음에도 결코 完成을 맛보지 못합니다. 10億을 원하는 사람이 10억을 얻고 나서 完成이라고 生覺하겠어요? 20억 30억 50억 100억을 추구하죠. 100억을 추구하는 사람은 천억을 추구하고, 천억을 추구하는 사람은 1조 이상을 추구하고. 이렇게 끊임없이 추구하고 또 추구하는 것 밖에 못하는 거죠 그것을 完成이라고 生覺한다면.
그런 마음만 내려놓는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는 언제나 完成되어있는 겁니다.
지금 삶 이 自體로서 지금 이 瞬間이라는 것은 언제나 나에게 完全하고 完成된 瞬間이었던 겁니다.
우리의 目的은 그 事實을 깨닫는데 있는 거예요.
지금 이 자리가 完成의 瞬間이구나.
지금 이 자리를 내가 온전히 受容하고 받아들이게 됐을 때
지금 이 瞬間이 내 人生에 펼쳐지도록 許容하고 그 瞬間과 接觸할 때,
마땅히 마주해 주는 겁니다. 去否하지 않고 허용해 주는 거예요.
每 瞬間을 내 삶에 招待하는 겁니다. 우린 매 순간의 삶을 거부하거든요. 그 다음 순간이 더 좋아 보이기 때문에.
그것만 하지 않고 瞬間에 存在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이 놀랍게 진해집니다. 뭐랄까요? 삶을 느끼고 삶을 누리는 그 가슴이요, 더욱 더 이렇게 찐해집니다. 풀 한포기를 감상하면서도 놀라움을 느낄 수가 있어요. 우리 법당에 호국사 법당이 요즘에 숲이 초록이 우거지고 나니까요. 비 오는 날은 비 오는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햇볕 비추는 날은 햇볕 비추는 날 대로요.
마치 제가 미얀마의 어디죠?
고요하고 한적한 위빠사나 하는 도량에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이런 도량에 길을 이렇게 걷고 있는 것처럼, 문뜩 문뜩 이렇게 바라보면요, 제가 문뜩 바라본다는 것은 日常的인 生覺을 가지고 만날 보는 것처럼 보는 것이 아니라, 日常的으로 보든 觀念을 내려놓고요 내려놓고 낯선 視線으로 문뜩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게 되면요, 놀랍게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여러분 집안에 있는 화분하나가 집안 베란다에 있는 그 작은 풍경 하나조차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수 있어요. 그런 同一한 事物을 보고 어떤 사람은 놀라운 感動과 感謝와 幸福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그걸 느끼지 못한다면
느끼는 사람은 느낌으로서 더 많은 幸福을 내 삶으로 招待하고 있는 삶을 創造하고 있는 중인 겁니다.
그래서 지금 이 瞬間을 지금 瞬間에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는 것 許容하고 認定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幸福을 우리 삶으로 초대하는 幸福의 最上의 어떤 方式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每瞬間을 받아들이고 그 瞬間에 存在하는 것---
왜 받아들여야 될까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 宇宙法界는 언제나 우리를 돕고 있기 때문에. 어떤 方式으로 돕고 있느냐 하면, 우리가 가장 成熟해 지는 方法으로. 가장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方法으로 돕고 있습니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에게 無條件 도와준다면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니까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에게는 때때로 그 사람에게 果報를 보여줌으로서 힘든 일을 堪當하게 함으로서 그 사람을 깨닫게 할 수도 있겠죠.
宇宙法界는 多樣한 方式으로 삶을 깨닫게 해 줄 수 있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두려워 하지 않아야 하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라는 말씀을 드렸었죠. 여러분 이 말의 眞意味를 把握하신다면 여러분들 삶이 놀랍게 幸福해 집니다. 제가 그랬었으니까요. 未來에 대한 두려움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그 어떤 두려움도 가질 必要가 事實은 없다는 거죠 이 삶의 理致는 부처님 가르침의 核心은.
그럼 오죽했으면 그 眞理. 두려워해야 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그 眞理를 많은 대중에게 알려주는 것이야 말로 法施 - -
부처님 가르침을 布施하거나, 財施 - 物質로 보시하는 것보다 더 큰 보시다. 無外施라고 하지 않습니까?
두려움을 없애주는 보시. 이게 위대한 3가지 보시가운데 하나가 무외시인 이유가 그겁니다.
그 누구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삶은 未來에 대해서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설사 來日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또 다른 旅行 길에 불과한 것이다. 결코 우린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宇宙法界는
언제나 우리를 無限한 慈悲와 無限한 사랑과 無限한 智慧로 이끌어주고 있기 때문에. 無限한 慈悲로움으로서 우리는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가르침은 오직 사랑이고요.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慈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일어나는 나쁜 일이나 苦痛은 사실은 없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돕고 있는 거죠.
단지 우리가 괴로운 狀況이라고 生覺하는 것조차 사실은 괴로운 상황이 아니라 우리를 돕고 있는 상황이고
그것을 通해 우리는 成熟해지고 나아질 수 있는 겁니다.
아이유가 이런 얘기를 했데요. (...) 참 얼마나 智慧로운 이야기에요? 나에게 날 못생겼다고 많은 사람들이 악플을 달고 욕을 한다. 그래 이 세상 많은 사람가운데 이 60억 인구가운데 나를 못생겼다고 보는 사람도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어떻게 나를 다 좋다고 보겠습니까? 부처님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고, 예수님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뭐 당연한 거죠. 그것은. 나를 욕하는 누군가가 나를 욕하는 거는 문제 상황이 아니라 自然스럽고도 當然한 狀況인겁니다. 그것을 認定하는 거죠. 認定해버리면 괴로운 게 아닌 게 되죠. 그런데 정말 智慧로운 말이 뭐에요? 認定하면 된다.
못생겼으면 認定하면 된다. 그래 나 못생겼다. 그러나 나름대로 매력 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그래 모든 사람이 나를 다 아름답다고 生覺할 필요는 없지만, 나는 나다운 매력이 있다. 자기다운
매력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맹해 보이는 사람도 맹해 보이는 매력이 있거든요? 나름대로 매력이 누구나 있습니다. 그 매력. 그것을 가지고 스스로 認定하고 받아들이면 되요. 그래서 우리가 否定的인 내 性格이나 많은 점에 否定的인 점이 있다 할지라도 否定的인 데 자꾸 集中하기 보다는 肯定的인 部分에 자꾸 集中을 하면 그 部分이 더 啓發이 됩니다. 그래서 事實은요, 성공하려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것을 자꾸 없애가지고 성공하려는 것보다 부정적인 것은 그대로
認定하고 내버려두고, 肯定的인 것을 더 擴大하려고 노력했을 때, 그랬을 때 성공이 더 쉬워졌어요.
그때는 남들이 否定的이라고 生覺했던 部分이 오히려 그 사람의 長技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긍정적인 부분들을 더 擴大를 시키면 좋겠죠. 이와 같이 모든 經驗은 意味와 目的이 있습니다. 우리 삶의 遇然은 없어요. 우리가 經驗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를 돕기 위한 目的으로 나타나고 우리를 慈悲로 이끌기 위한 目的으로 靈的으로
成熟하게 하기 위한 目的으로 나타날 뿐인 겁니다. 언제나 이 宇宙는 우리를 돕고 있다.
우리 가수도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 아, 전 이 얘기 탁 들을 때요, 소름이 끼치더라고요.
야, 전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얘기 들으면서 누구든 음악이 되었든 미술이 되었든 예술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자기 삶의, 자기가 集中하는 部分에 깊이 몰두하고 매진하게 되면 그 자기가 集中했던 그것을 通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道에 가까워지는,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음악에도 음악에 집중하고 몰입하게 되면 거기서 삼매에 빠지게 되거든요. 이 얘기 보세요. 내가 살아왔던 길은 험난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도 다 하나하나 저마다 理由가 있었고 目的이 있었다. 理由 없는 삶은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나를
일깨워주고 깨닫게 하기 위한 어떤 理由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自己 自身과 친해지십시오. 라고 하잖아요. 나 自身과 친해진다는 게 뭐냐 하면 나 自身과 자꾸 接觸하는 겁니다. 우린 나 自身과 친해지는, 自身과 接觸하는 時間을 去否해버려요. 멀어지려고 하는 겁니다. 내 바깥만 보고 살잖아요 바깥사람, 바깥에 돈--- 뭐가 쉬는 시간 되도 나 자신과 함께 對話를 나누거나 冥想을 하지 않고, 조금의 여유 時間만 있으면 핸드폰을 보거나 TV를 보거나 무어라도 해야 되잖아요.
그게 무언가 하면, 내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구하고 다니는 거거든요. 自己 自身과 친해지지 못하는 겁니다. 內面과 마주하게 되지 못하는 거예요. 自己 自身과 直面하고 마주하는 時間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時間, 고요한 텅~ 빈 自己 自身과 그저 함께 하는 時間, 그래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핸드폰 귀에 꽂지 않고, 누구와 함께가 아닌 홀로 산길을 걷거나 홀로 산책을 하거나 홀로 여행을 떠나거나 하는 것들이 그대로 冥想과 連結되어 있구요, 삶의 智慧를 저절로 가져다줍니다. 저절로 삶의 智慧를 가져다 줘요. 그래서 저는 불교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와서 상담을 할 때 수행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물을 때 주로 산책을, 시간을 정해놓고 홀로 生覺을 많이 하지 말고 산책을 하라고 얘기를 많이 해주거든요.
그렇게 되었을 때 自己 自身과 만나게 되는 時間를 갖게 되는 겁니다. 심지어 나쁜 일이 일어났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를 돕기 위한 目的으로 나타났다고 했죠? 나쁜 일이 일어난 게 아니라 事實은 우리가 나쁜 일이라고 解釋한 것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感氣가 왔다. 감기는 우리를 돕기 위한 目的으로 늘 나타납니다. 病院에서 그렇게 얘기를 해요. 우리에게 만약에 感氣가 없다면 사람들은 안 좋은 어떤 에너지들이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한방에 터져서 갑자기 죽을 病이 온다거나 이럴 거랍니다. 그런데 感氣가 자주 옴으로써 渾濁한 에너지, 아주 안 좋은 氣運들이 몸에 쌓이면 感氣로써 툴툴 털어 내보내주는 役割을 한다는 거예요. 感氣가. 그래서 감기가 자주 옴으로써 한 번씩 옴으로써 내 안에 쌓인 것들이 탁탁 털어져 나가야 더 말끔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自淨作用, 내 몸을 돕기 위한 自淨作用인 感氣가 왔을 때 感氣를 去否하고 病院 가서 藥 타먹어서 빨리 감기가 낫기를 바라죠. 이 절집 안 에서는요, 이렇게 된통 감기가 오거나 이러면요, 우리가 입맛이 없잖아요. 입맛이 없어지잖아요. 그것은 宇宙 法界가 먹지 말라고 하는 信號라 그래요. 감기를 낫게 하기 위해서 먹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거라고 그래요. 그래서 절에서 스님들이 아프면요, 그냥 가만히 房에 들어가서 가만히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먹고. 일부러 안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싫으니까 그냥 안 먹는 거예요. 自然스럽게. 自然스럽게. 그리되면 내 몸 안에 있던 안 좋은 에너지 안 좋은 것들을 다 소모시키게 되는 거예요. 消化시키는 에너지를 쓰지 않고 안 좋고 濁한 氣運들을 빠져 내보내는데 소모시키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熱을 더 많이 내게 되요. 熱이 더 많이 나게 되고, 그러므로서 탁탁 털고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조금만 감기가 오면, 조금만 病이 있으면 藥 먹는 거 가지고 꽉꽉 내리누르면 몸은 좀 便하겠지만, 모처럼 안 좋은 氣運이 빠져나가려고 왔는데 藥으로 탁탁 막아놓으니까 健康해 지기가 어려운거죠. 그리고 自然治癒力은 자꾸 땅을 치게 되겠죠. 自然治癒力이 자꾸 낮아지는 겁니다. 그다음에는 아무리 藥을 먹어도 잘 안 낫는 몸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거죠. 이처럼 감기 몸살도 몸에 病이 오는 것도 事實 우리를 돕기 위해서 오는 거거든요. 태풍우 폭풍우가 오는 氣狀異變이 오는 것도 그렇다고 그래요. 이 바닷물이 아주 汚染되어 있을 때 기상이, 푹풍우가 한번 치고 나면 바다가 淨化가 되고 이 世界가 淨化가 된다 그럽니다.
이와 같이 우리 人生에 타나나는 모든 狀況들 괴로운 것 또한 우리를 事實은 돕기 위한 目的으로 나타난 겁니다. 요걸 마지막으로 이야기, 요 얘기만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이효리가 자신이 한번 표절시비 때문에 아주 충격적으로 괴로웠었는데 그 以後에 變化된 모습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있었어요. (...) 아, 그, 참 너무 정말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 아닌가요?
本人은 그 표절 시비 때문에 아주 너무 충격적으로 괴로워했었고 괴로움 속에 허덕였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이런 괴로운 일이 안생기고 계속 승승장구만 했다면 이렇게 自身의 삶을 돌아볼 餘有가 없었을 거예요. 계속 해서 성공 성공만을 向해서 끊임없이 달려갔을 겁니다. 그런데 충격적으로 괴로워하고 몇날 며칠을 집에서도 안 나가고, 때로는 술도 퍼 먹어보고 하면서 苦痛을 받다가 다 내려놓고 어느 瞬間, 그걸 탁 내려놓고 보니까. 아, 그것이 아니구나. 이 苦痛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던 겁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고마운 苦痛이에요. 나중엔 그래요. 표절 시비를 처음에 제기했던 사람에게 가서 절이라고 하고 싶은
心情이라고. 그때는 정말 너무 미워서 정말 너무너무 미웠지만, 지금은 너무 고맙다. 왜? 나를 바꾸어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나를 좀 이렇게 내려놓다 보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겉껍데기가 '나'인걸로 錯覺하고 사는 겁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화려할 때는. 그러니까 좋은 차가 있으면 내가 대단한 사람인 거처럼 느껴지고. 좋은 옷을 입고 명품 백을 매면 내가 대단한 사람처럼 느끼고, 보통 남자는 차, 여자는 백으로 이렇게 자신을 과시한다고 그러더라고요 我相을 드러낸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 것을 해야지만, 내가 대단한 것처럼. 그런데 정말 內的으로 꽉 찬 사람은 바깥의 것을 그렇게 크게 神經을 안 쓰더라고요. 왜 그러냐하면,
스스로가 當當한 겁니다.
바깥에 것을 크게 구하지 않아도 남들이 나를 알아봐주지 않아도 相關이 없는 거예요 그때는. 그러다보니까 야, 이거 내가 이런 것을 절실히 깨달은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차도 처분하고 비싼 차 좋은 집 처분하고, 그러고 日常的인 자꾸 소박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 꽃피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요, 겉의 치장하고자하는 마음,
我相을 擴張시키려고 하면서 돈과 名譽와 權力과 내 겉을 치장해서 남들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마음, 남들이 날 어떻게 볼지, 關心 가지면서 뭔가 나를 채워나가려고. 이런 마음들이 탁 내려놔지니까 탁 내려놔지니까 남들을 意識할 必要도
없어지고 나를 과시할 필요도 없어지는 겁니다. 마음이 비워지게 된다. 我相이 내려놔지게 되는 겁니다.
마음이 비워지게 되니까 어때요? 비워진 마음 마음이 텅 비워지고 나니까 어떻습니까? 작은 것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本然의 幸福의 것들이 本然의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수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게 됩니다. 옛날에는 꽃 한 송이 피는 게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는데, 어느 瞬間 自然의 꽃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하게 되는 거예요. 밤하늘의 별들 별 생각 없이 봤는데, 별 하나가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것이 그렇게 고맙고 감사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빗소리가 옛날에 비만 오면 짜증나는데, 이제는 빗소리가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소리가 가슴을 아련하게 만들어주고 너무나도 감사 소리로 들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좌판 깔고 일을 하고 계시는 할머니도 눈에 들어오고 내 주변에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오면서 이웃을 돌아보게 되고,
그러다가 이효리가 나중에 동물들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동물도 이렇게 보게 되고, 주변을 자꾸 돌아보게 된다는 거죠. 이것이 아주 중요한 점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깨달음을 苦痛을 通해서 우리는 얻을 수도 있지만, 修行하는 目的은 뭐냐 하면 마음工夫하고 불교 工夫하는 目的은 뭐냐 하면 智慧롭게, 智慧로 工夫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이 宇宙法界에서 깨닫게 만들어요 强制로. 苦痛을 탁 줌으로써. 그런데 꼭 苦痛이 와야지만, 깨닫는 사람에게는 그게 오겠죠. 그런데
불교의 目的은 뭐냐 하면, 꼭 고통을 받고 나서 그걸 깨달을 필요가 뭐가 있느냐? 지금 이 瞬間 미리 깨닫고 나면, 미리 깨달아서 미리 마음을 비우고 外的인 것에 치중하지 않고 內面과 친구가 되고나면, 이미 깨달았으니까 우주계가 그 고통을 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왜 그 고통이 오는 이유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우리를 깨닫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미리 깨닫고 나면 그 고통이 오니 않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절에 다니고 법문 듣고 마음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이 놀랍도록 중요하고 필요한 겁니다. 이것만을 하게 되더라도 저절로 마음의 意識이 바뀌게 되고요, 이 意識이 바뀌면 나에게 올 여러분에게 한 달 뒤에 와야 될, 1년 뒤에 와야 될 交通事故가 안 올수도 있고요. 3년 뒤에 와야 될 부도가 한 20년 뒤로
늦춰질 수도 있고요. 어디 병이 나야 되는데 그 병이 안날수도 있습니다. 가볍게 끝날 수도 있고요.
이와 같이 마음工夫 修行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直接的인 것이고, 重要한 点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苦痛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苦痛이 나에게 주는 깨달음을 받아들일 때 眞情한 幸福은 피어나는 거예요. 그리고 苦痛이 아닌 時期에는 나에게 주어져있는 이미 주어져있는 幸福에 마음을 集中함으로서 肯定的인 部分에 마음을 集中함으로써.
아까 이효리가 얼마나 잘하는 게 많아요.
그런데 항상 노래를 못하는 거, 라이브가 안 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 엄청 받았다 하잖아요.
그 많은 長点가운데 그 못하는 短点에만 우리는 더 마음을 集中하고 살거든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와 같이 우리가 每 瞬間 주어진 삶의 충실해서 나 自身과 친구가 되고,
그 나 自身과 친구가 되는 마음을 비우는 幸福을 누리고 추구하고.
지금 이 瞬間과 接觸하는 最上의 方法이 뭘까요?
그게 바로 冥想이고 修行이고 祈禱인겁니다. 지금 이 瞬間에 存在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까지 제가 이제 幸福,
願하는 것을 얻을 때 오는 幸福과
願하는 것을 내려놨을 때 오는 幸福
이 두 가지 幸福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을 마치도록 하고
다음 주부터는 또 다른 주제로 그 주, 그 주 다른 내용으로서 말씀을 드리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成佛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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