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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대사와 훈민정음 그리고 세종대왕

장백산-1 2013. 7. 18. 17:18

 

 

속리산 복천암 | 훈민정음(信眉大師)

훈민정음 2011.12.12 14:15  http://blog.daum.net/siddham/94 

 

 

'복천암(福泉庵)' 湖西第一禪院.. 세종조 신미대사(信眉大師)가 한글 창제 주도적 역할을 했던 도량...마하연, 칠불암과 더불어 3대 선원 중의 하나...속리산에 자리 잡고 있는 명찰 법주사 입구에서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다 보면 호서제일선원 복천암이 나온다. 복천암(福泉庵)은 신라 성덕왕(720년) 19년에 창건된 천년 고찰이다.

 

조선조 세조가 피부병에 걸려 3일 기도를 하고 계곡물에 목욕을 하자 피부병이 다 낳았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복천암은 글자 그대로 약수로 전국에서 이름난 곳이다. 또한 왕조와 인연이 많아 고려 공민왕은 이곳에 머물며 극락전에 '무량수'라는 편액을 친필로 써서 하사하기도 했다.

 

두 왕이 福泉庵을 자주 찾았던 것은 아마 藥水 때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물거나 장마 때나 약수물은 줄어들지도 넘치지도 않고 항시 한결같았다고 한다. 또한 복천암은 금강산 마하연과 지리산 칠불암과 더불어 구한 말 3대 선방 중의 하나였다. 1882년에는 경허선사가 한동안 머물렀고, 1913년에는 법주사 선원으로 문을 열었다.

 

1922년 동산 스님이 33세의 나이로 복천 선원에서 하안거를 나면서부터 복천암은 본격적인 선원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는 전강스님이 복천선원 조실을 맡아 제방의 납자들을 제접했고, 1943년에는 성철, 청담스님이 정진, 수행을 하기도 했다. 6.25 때 폐원된 것을 1967년 금오스님이 법주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다시 복천선원 문을 열었다.

 

1970년 대 법주사 주지였던 탄성스님의 권유로 마지못해 복천암에 오게 된 월성 스님이 현재까지 복천선원 선원장으로 30여년째 주석하고 있다. 월성스님이 처음 복천암에 왔을 때는 고시생을 치르는 하숙방에 불과했었다고 한다. 월성스님은 호서제일선원이 다시 하숙집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현판을 달고 그 때부터 해마다 10여명의 납자들을 제접하며 선원장소임을 맡아오고 있다. 복천암은 한글 창제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도량이다. 복천암 사적비에"세종은 복천암에 주석하던 신미대사로부터 한글 창제 중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복천암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5백미터 가면 신미대사부도탑(보물 제 1416호)이 있다.세인의 관심을 다시 끌고 있는 세종의 왕사였던 신미대사(1403-1486)가 한글 창제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설은 그동안 종종 제기되어 왔었다. 한국 세종 한림원 총재 강상원 박사가 訓民正音의 創製의 主役은 집현전 학사 信眉大師였다는 책을 내면서 이 설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정설은 세종대왕이 명령으로 집현전 학자들이 이의 실무 작업을 맡았고, 구체적으로는 우리 입의 발음기관을 본 떴다는 것이었다. 현재 가장 유력시 되는 설은 범자(梵字/산스크리트語) 모방설이다. 조선초기 유학자인 성현(1439-1504)의 저서 용재총화나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도 언문은 梵字에 依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한글 창제의 분분한 설을 신미대사 친동생인 집현전 학사 김수온이 쓴 복천보강, 효령대군 문집, 조선실록, 영안김씨 족보 등 각종 자료를 근거로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의 산파역할을 했음을 제시하고 있는 스님이 바로 복천선원 선원장 월성스님이다. 월성스님은 세종이 한글 창제 후 불경을 언해하기 시작한 것도 신미대사의 영향이며 언해할 서책이 많은데 굳이 불경부터 한 이유는 신미대사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세종이 한글 창제의 초석을 다진 고마움의 표시로 복천암에 삼존불을 조성, 시주했으며 죽기 전에 유생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유언으로 신미대사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子)라는 긴 법호를 내렸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올라있지 않지만 신미대사의 속가 집안인 영산 김씨 족보에 스님이 집현전 학자로 세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월성스님은 여러 가지 문헌이나 기록으로 보아 한글 창제의 모델이 범어가 분명한데 그 당시 범어를 아는 스님은 신미대사 밖에 없었다고 했다. 신미대사가 실제 한글을 창제했다고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것은 세종이 한글을 오랫동안 지키고 스님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만 큼 신미대사에 대한 세종의 신뢰가 절대적이었다고 월성스님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