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마음의 법칙 - - - 마음의 그림자인 業

장백산-1 2013. 8. 4. 00:30

 

 

 

 

 


 

 

마음의 法則 - 제 4 화 : 마음의 그림자,業 (수미산을 넘다)


淸淨한 마음이 한 번 구르니
黃金은 빛을 더하는데
무수한 사람들         
빛을 쫒다 넘어지네
그 빛 남의 것 아니건만
밤낮으로 따로 求하니
하루하루 고단함이여!
業障은 須彌산 처럼  쌓이고,
輪廻의 물레방아는
멈추지 않네.                  

마음 밖에 따로 마음이 없다고 했습니다.
오직 마음뿐임을 믿는 것이 眞正한 부처의 種子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正確히 말하자면,

'마음의 그림자'라고 해야 옳습니다.

 


여러분은  自身과 不可分의 關係라고 할 수있는 이 이웃과

아주 오랜 同居를 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그림자' 라는 그놈은 심술도 잘 부리고,

화도 잘 내고, 慾心은 날밤을 새워도 그칠 줄 모릅니다.

웃고 울고 모난짓을  잘 하고,

어느때는 慈悲스런 積善도 하려 들고,
우쭐대기를 좋아하지만

感動이 넘치면 바다와 같은 아량이 넘치기도 합니다.

 


그것이 누구입니까? '마음의 그림자'라고 하는 그놈은

바로 " 업(業) " 이라는 親舊입니다.

 

깨달음이라는 말 보다 더 많이 듣게 되는 불교의 甘草,
아니 뜨거운 감자 아닐까 합니다.


業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業은 虛空처럼 모양과 빛깔이 없습니다

 

만질 수도 없고 묶어놓을 수도 없지만,

시시때때로 우리의 마음에 간섭을 하고 있으니

 

그냥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業에 관한 單語도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業障,

業力,

業風,

업권,

業識,

業報,

業海

등 한결같이 否定的인 말들입니다.

 


이러한 業이 어떻게 생겼는지 속시원한 대답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業을 알려면 마음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마음은 一切 모든 것을 만드는 創造主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러한 一切唯心造의 마음은 本來 광명(光明)그 自體입니다.

 


光明이란 밝음이라는 뜻인데 그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그런 빛이 아닙니다.
꿈 속에서 보는 빛이 색깔있는 빛이 아니 듯,

마음의 光明이라는 것도
어떤 色으로 나툰 빛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이란  밝게 아는 것,

卽, 지혜(智慧)를  意味합니다.
그 智慧가 밖으로 드러난 狀態를 光明이라 이름지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밝음 卽, 智慧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안으로 갈무리되어 있는 狀態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일컬어서

本來의 마음,

太初의 마음,

위음왕불(威蔭王佛) 以前의 마음, 
卽,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無明은  어둠도 밝음도 아닌 '本來 있는 그러한  마음'을 말합니다.
'무명(無明)'이 바로 業의 根源입니다
이 無明을 쌍암쌍명(雙暗雙明)  쌍차쌍조(雙遮雙照) 라고도 하는데, 

한 티끌 묻어 있지 않은 淸淨한 마음인 無明은 

가장 純粹한  어둠이자 同時에 가장 純粹한 밝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無明(淸淨한 本然한 마음)이 한 번 그 智慧의 能力을 굴리면 이 되고,
그 지혜의 能力을 거두면 어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無明은 마음의 손등과 손바닥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本來 있는 그러한  마음 스스로가 바로  智慧이자 能力인 것입니다.
청정법신(淸淨法身) 毘盧遮那佛은 바로 이러한 無明의 마음을 말합니다.

이제 이 생기는 過程을  알아 보겠습니다.
이 無明(마음)이 한 번 智慧의 能力으로 빛을 發할 때,
마음은 스스로 이 빛을 보고 즐깁니다.
그러다  그 빛을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다가 取하게 되고,
取할려는 마음이 愛着이 되면서, 
이 빛을  所有하고자 하는 貪心이 생깁니다.
貪心이 極에 달하면 이로 因해서 마음에 어떤 境界가 生起고,
그 境界를 마치 밖에서 온 것인양,
實在 있는 것인양 錯覺하는  貪心이  持續되고 거듭 反復되면
어느새 모양(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境界에 떨어진 마음은

淸淨한 自身의 本來 마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끝없이 輪廻를 거듭하면서 境界를 쫓고, 
수 없이 많은 境界를 쫒는 다른 마음들과 서로 다투고 돕고 주고 받으면서
이제 完全한(?)
형상(形像)을 만듭니다.
이것이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생기고 ,

이 우주(宇宙)가 생긴  最初의 原因입니다.

 


이란 이렇게 根本마음을 잃어버린 淸淨한 마음이

탐심(貪心)이라는 원인(源因)을 養分삼아

과보(果報)라는 結果를  나타내는 을  말합니다.


은 그 自體로 實體가 없지만  감싸고 도는 안개처럼

마음의 作用에 絶對的인 影鄕을 미칩니다.
따라서 業이 한 번 結定되면 좀처럼  業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고 이런
衣食住는 물론 喜-怒-哀-樂-愛-惡-欲등 人間의 모든 感情을 左之右之합니다.


人間關係가 꼬이는 것도 마음을 옥죄고 있는 사람들의 업력(業力)이
서로 强하게 作用하기 때문입니다.
結局  業은 마음이 짓는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의 거의 모든 部分에 影響力을  行使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業을 짓는 過程을  여러분은 날마다 體驗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말입니까?
바로 꿈을 꾸면서 마음의 能力이 어떻게 펼쳐지고 거두워지는지

꿈 속에서 體驗하고 있는 것입니다.
꿈 속에서 보는  빛은  이 아닙니다.

꿈 속에서 보는 어둠은 어둠이 아닙니다.
그 빛과 어둠이  實在하는 빛과 어둠이라면 여러분은 꿈을 깨고도 그 빛과 어둠을 봐야 하지만

꿈을 깨고나면 빛도 어둠도  더 이상 存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꿈속에서도 생시처럼

기뻐하고, 화 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내는 등의 온갖 일을 다 합니다.
단 5분을  꾸는  꿈속에서 한 달,
아니 1年의 긴 時間을 旅行하고 돌아 오기도 합니다.


꿈꾸는 단 5분간의 時間에  마음은 수 많은  業의 世上을 建立한 것입니다.
다만 꿈속에서 짓는  은 내 마음이 만든 世上이므로 果報는 없습니다.
꿈을 꾸는 것도 마음이 꿈을 펼칠 수 있는 能力이 있기에 可能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스스로  無窮無盡한 能力을 부릴 수 있다는 事實을
忘覺하고 살아왔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天地萬物을 創造했다고 믿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 좋아하고 愛着하는  마음으로부터 業이 始作된 것입니다.
마음이 스스로  펼쳐 놓은 智慧의 빛을  바깥 境界로 잘못알고 쫒다가
지금 이 몸에까지 온 것입니다.

 


중생(衆生)이란 淸淨한 本來의 마음을 등지고 사는 무리라는 뜻입니다.
부처에서 중생으로 떨어진 原因인
탐심(貪心)의 마음이 바로 業의 始發点인 것입니다.
貪心이 反復되어 관념(觀念)을 이루고, 

이러한 觀念이 反復되면서  굳어진 습관(習觀)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좋다 나쁘다, 더럽다 깨끗하다,그리고 利益이다 損害다 라고

是非 分別 比較 判斷하는 生覺을 하루에 몇 번이나 하십니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生覺으로  에너지를 浪費하고 있습니다.

生覺이 單純해지면 !!

精神이 맑아지고 生體리듬이 圓活해서 병(病)이 없어집니다.

 


몸의 病이란?,

마음이 中心을 잃고 갈팡질팡할 때 다른 業力이 뚫고 들어오는 過程입니다.
몸의 죽음이란? ,

業의 무게를 堪當할 수 없는  마음이 自己 스스로 지어 놓은 업보(業報)에게

白旗를 들고 降伏한 結果입니다.

 


生覺의 필름이 돌아가는 길목을 잘 살펴 지켜보십시요.
그러면 지금 이 瞬間에도 계속 짓고있는 業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業이란 形體가 없습니다.

마음을 따라 다니는 그림자 불과합니다.
그 그림자에 밟혀서 苦痛을 받고 있다고 生覺해보십시요.
幸福하게 살아도 不足할  時間이

業에 依해서 100분의 1로 줄어들었다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참나'를 알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이 質問을 던져 보십시오.

 


그리고 밖을 보는 마음의 눈을  內面의 스스로의 마음을 向해 맞추십시요.
밖으로 向하는 마음을 안으로 돌이켜서 보는 놈을 보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부터 왔으며,

이렇게 보고 듣고 生覺하는 이 實體는 무엇인가?"
"業으로 苦痛받기 以前의 나는 누구인가?"


 

성급하게 結論을 얻으려 하지 마십시요.

 斷定짓지도 마십시요.
다만 참나를 찾고자,

나를 알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바라 볼 뿐입니다.


이 간절한 물음이 계속되도록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십시요.
世上에 對한 外部로 向하던 關心을 이제

안으로 向하여 이 마음의 根源을 찾는 일에 集中하면 됩니다.
本來 내 마음은 더러움에 물든 적이 없습니다.
本來 내 마음은 生覺으로 複雜하지도 않았습니다.
本來 내 마음은 業으로 苦痛받은 일도 없었습니다.
本來 내 마음은 璨爛한 光明일 뿐입니다.
本來 내마음은 붙잡을 아무 것도 없습니다.
本來 내마음은 마음이 스스로 쉬어집니다.
本來 내마음은 蒼空의 새처럼 自由롭습니다.

 

 


그렇습니까?
부처님은 3독(三毒)이라 하여 탐진치(貪嗔痴) 세가지 마음을 없애라고 하셨습니다.

 

佛子라면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온 얘기입니다.
貪嗔痴 三毒心은  業을 키우고 살찌우는 영양분과 거름과 같습니다.
한마디로 마음을  矮小(왜소)하게 만들고 몸을 病들게 하는 독(毒)입니다.

 


根本의 本來 마음은 本來  業에 물든 적 없고

根本의 本來 마음은 本來  淸淨하다는 命題에 分明해야 합니다
顚倒된 삶을 淸算하겠다는 굳센 意志가 없다면
修行은 苦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도를 하든 참선을 하든 주력을 하든  淸淨한 本來의 마음을 回復할 수 있어야 합니다.

 

淸淨한 本來의 마음으로 歸鄕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 마음의 을 없애는 지름길이자 最後의 길입니다.

 


부처님이 보여주신 깨달음은!?,

初志一貫해서 마음의 根本 性稟을 깨달으면
누구나 本來 부처라는 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눈,귀,코,혀,몸,뜻으로 지어온 數億劫의 業을 어떻게 다 없앨 수 있겠습니까?
없애는 業보다 새로 짓는 業이 훨씬 더 많습니다.
雜草를 박멸하려면 돌로 눌러놔서는 어렵습니다.
눌린 雜草는 언젠가는 다시 뚫고 올라 옵니다.
뿌리를 뽑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을 뿌리 뽑아 없애려면,

業이 비롯된 마음의 根源으로 돌아 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根源에서부터 다스리지 않으면 어떠한 處方도 所用이 없습니다.

 

마음의 뿌리 根源을 벗어나서 나무가지나 붙드는 것을 修行으로 삼는다면,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기복(祈福)을 求하는 修行은 서리위에 눈을 더하 듯, 
業의 수레바퀴를 더 힘차게 굴러가게 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業은 눈덩이와 같습니다.

 

눈덩이가 자꾸 구르고 구르면

 

 
堪當할 수 없는 巨大한 山을 이루고 모든 生命을 덮어버리듯,

 

마음의 愛着에서 始作한  業은 어느새 須彌山을 덮고도 남습니다.

 

새해에는 業에 屈伏하는 人間의 삶이 아니라


業을 調伏받는 精進의 삶이 되기를 祈願합니다...

 

 

自性의 淸淨한 빛 보고싶은가?
하늘의 보름달 둥글고
처마끝에 고드름 길다.

 

 

 <동국대/혜원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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