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흡은 보아서 무슨 이득이 있나 >
無心코 지나치는 길옆 잔디밭에도 꽃들의 잔치가 한창이다. 푸른 잔디 사이로 보라색 오랑캐꽃이 하나 둘 피기 시작하더니 꺾으면 하얀 젖이 나오는 노란 민들레의 후- 하고 불면 날아가는 투명한 민들레 홀씨 솜털이 여기저기에 피어나고 있다.
그러더니 어느 날 클로버 잎새로 삐죽이 뻗어난 반지꽃들이 하얀 눈밭을 이루었다. 이제는 이름 모를 좁쌀 꽃들이 길옆을 장식하고 있다. 조금 있으면 웃자란 풀을 베는 낫 놀림이 분주해지고 잔디밭은 또 다시 사관생도의 머리처럼 단정하게 정리되겠지.
男便이 요즘 조금씩 위빠싸나에 關心을 보이고 있다. 오랫동안 마누라의 잔소리에 질려있던 터라 쉽게 마음을 열 기세는 아니지만 오며 가며 조금씩 들려준 위빠싸나 수행법에 관심이 있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던 차에 선생님께서 주신 위빠싸나에 관한 짧은 팜프렛을 읽어보는 관대함(?)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어때요?”하고 묻는 나의 물음에 불쑥 한다는 말이 “호흡은 보아서 무슨 이득이 있는가”였다.
남편의 이 물음은 또 한번 나의 뒤통수를 치는 소리였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라고 생각되었다. 평상시에 말이 없고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은 탓에 자칫하면 순한 사람으로 오해받기 쉬우나 사실 그는 굉장한 고집쟁이다.
젊은 시절에는 남편의 이 속성을 잘 몰랐던 탓에 인문계와 자연계열 출신의 사고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이 잘 통하는 부부라고 착각하였다. 웬만한 말다툼 따위는 합리적인 대화를 통하여 충분히 이해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이것이 나의 엄청난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래되어 잊어버리고 있던 일이 그에게는 하나도 소화가 되지 않은 채, 아니 오히려 그 오해가 이상한 형태로 변질되어 나타날 때가 종종 있는 것이다.
음성적인 성격의 남편은 나에게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을 그 냥 덮어둔 채 깊은 내면의 상처로 집어넣어 두었던 것이다. 지난 일을 쉽게 털어 버리고 마는 나의 성격에 비하면 그는 마치 커다란 바위를 감추고 있는 고요한 호수와 같다.
그러나 어쩌다 말다툼 끝에 화가 나거나 혹은 술을 많이 마시는 경우에는 잠깐씩 본색을 드러낼 때가 있다. 그럴 때에는 평소의 태도를 바꿔 양순하게 참아주어야 한다. 때로는 그의 술친구들도 그의 당치 않은 주장을 몇 시간이고 들어주어야 한다.
그러기에 아이들은 아빠를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고 한다. 그는 떠오르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모두 호수 속에 감추어 두고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탓인지 그도 최근에는 물이 蒸發하여 바위가 드러나듯 숨겨진 性格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는데 이를 나는 좋은 徵兆라고 生覺하면서 그의
과격해진 성격을 받아주고 있는 터다.
그러나 호흡은 보아 무엇 하려는가 하는 그의 질문은 그간의 나의 숨은 노력이 조금도 먹혀들지
않았다는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 오늘, 선생님은 웬일인지 남편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 다음과 같은 말을 서두에 꺼내었다.
“첫째, 우리는 살면서 한번쯤 自己가 가지고 있는 旣存의 秩序와 價値觀을 되돌아보고
正直하게 마음을 열 필요가 있다. 旣存의 價値觀은 오래된 情報와 故定觀念에서 비롯된 것이다.
自身에게 있는 旣存의 秩序와 價値觀은 貪瞋癡의 마음에서 생긴 觀念덩어리 들이다.
바로 이런 5욕락(五慾樂)의 마음에서 비롯한 속세의 가치관에서 볼 때는 수행 을 한다는 것이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다. 한평생 그런 대로 순탄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조용히 그냥 살다 인생을 마감하면 되지 무슨 수행을 한다고 수선을 떨겠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인생의 괴로운 부분은 外面하고 자그마한 속세의 즐거움에 安住하고 싶은 생각이다.
그러나 修行을 한다는 것은 世間에서 出世間의 理致를 찾는 것이다.
修行을 하려면 旣存의 價値와 秩序를 깨고 俗世의 習慣을 뛰어넘어야 한다.
지금까지 해오던 思考方式의 틀을 깨고 마음을 열지 않는 限 修行의 當爲性을 認定하기 힘들다.
旣存의 秩序 價値觀 觀念으로는 對相/世上/삶을 바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探究가 필요한 것이다. 학문에서의 探究처럼 수행에서도 새로운 探究의 精神이 필요하다. 그래서 또한 수행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선 마음을 열고 正直해질 필요가 있다고 선생님은 말한다.
"오래된 情報에 의하여 굳어진 固定觀念이 出世間을 向한 修行의 價値를 外面하고 있음을 認定하여야 한다. 貪 瞋 癡의 마음에서 비롯된 잘못된 情報에 依한 價値觀이었음을 認定하고 열려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마음이 있어야 호기심이라도 생기는 것이다.
이는 특히 세속적인 知識에 물들은 학자들이나 權位를 가졌거나 專門的인 職業으로 名譽를 얻은 사람일수록 마음이 더 굳어있을 수 있다. 그들은 오히려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더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我慢心이다."
그러고 보니 男便의 質問은 지극히 定常的인 것이었다.
선생님의 말씀은 계속된다.
“부처님은 절대로 盲目的으로 自身의 가르침을 따르라고 하지 않으셨다. 부처님은 스스로 實踐하고 나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 수행 방법을 깨달으셨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이다. 결코 이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믿으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누구나 와서 가르침을 探究해 보고 經驗을 통해 判斷하고 選擇을 하라고 하셨다. 다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대상으로 삼아서 스스로 實踐해보고 判斷하라고 하셨다. 이것이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差異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한 예를 들어 주었다.
"부처님 당시 한 엄마가 아이를 잃었다. 부처님이라면 죽은 아이도 살릴 수 있다고 믿은 이 엄마는 부처님에게로 달려가 아이를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이 여자에게, 동네로 가서 사람이 죽지 않은 집만 골라서 穀食을 얻어오면 죽은 아이를 살려주겠다고 말씀하셨다.
마을로 간 이 여자는 집집마다 뒤졌지만 어느 곳에서도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 후에 풀이 죽어 돌아온 이 여자는 이미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事實을 認定하고 있었다. 그리고 人生의 無常함을 깨달았다. 만약 이때 부처님께서, '여인이여,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 것이니라. 人生은 原來 虛無한 것이니라' 하고 일러주었다면 이 여자에게는 또 하나의 情報가 入力되어 固定觀念만 한 가지 더 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理論이 아닌 經驗을 通해 깨달음을 얻게 하셨다. 그리고 無常이라는 智慧를 얻게 하셨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理論이나 觀念的인 것이 아닌 事實과 經驗을 土臺로 한 것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疑心하는 것은 當然하다.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當然하다고 해서 계속 疑心만 하면 發展이 없다. 지금 당장은 이 가르침에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일단 마음만은 열어두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智慧다.
부처님의 眞理는 五欲樂을 떠난 것이니 凡夫의 立場에서는 알아듣기 힘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배척하기보다 단 한번이라도 마음을 열고 알아차리면서 맛보고, 듣고, 느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다만 끝까지 해보지도 않고 의심만 하는 것이 문제인데 이것은 자신의 지혜와 선업의 공덕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수행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인연으로 지혜가 열리는 것이다.
둘째, 수행을 하다 보면 누구나 수행이 잘 안 되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들은 내가 있다는 生覺을 가지고 있으며 五欲樂의 價値에 물들어 있던 우리로서는 當然한 일이다. 그래도 계속하면 길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歲月을 富貴榮華와 地位, 돈과 같은 物質的 價値에 比重을 두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것을 뛰어넘는 수행을 하는 것이 재미가 없고 졸리기만 할 것이다. 旣存의 價値觀에 混亂이 올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混亂이 왔다는 것은 좋은 징조라고 보아야 한다.
旣存의 秩序가 흔들리고 있다는 징표이므로 오히려 잘 되어간다는 의미다.
수행을 한다고 하여 처음부터 대단한 것을 기대하는 것은 禁勿이다.
무언가 뻥하고 터지기를 바라거나 화끈한 징후가 보이기를 바라는 것은 도둑의 심보다.
努力도 안하고 얻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수행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기에 그까짓 呼吸을 알아차리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고 하찮게 보아서는 안 된다.
부처님도 바로 呼吸을 알아차리는 方法으로 成道를 하셨다. 그러므로 대단할 것 같지 않은
呼吸 알아차리는 것이 事實은 아주 重要한 結果를 가져온다는 事實을 알아야 한다.
呼吸 알아차림을 通하여 제멋대로 떠돌아다니는 마음을 잡고 便安함을 얻으며
苦痛의 原因과 結果를 알게 되면서 智慧가 盛熟되고 自然스럽게 苦痛으로부터 벗어나는
眞理의 길로 들어갈 수가 있다.
이와 같이 呼吸은 결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또 自己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呼吸이라고 해서 알아차리기가 쉬운 것도 아니다.
自己 몸에 있다고, 自己 마음으로 알아차리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잘 안 되는 여기에 問題의 核心이 있다.
그래서 呼吸이 알아차릴 만한 價値가 있는 것이다.
呼吸을 알아차리는 것은 欲望으로부터 벗어나는 출리(出離) 하는 것이다.
修行은 무엇인가 分明한 하나의 對相을 選擇하여 그것에 集中해야 한다.
그런 意味에서 呼吸을 알아차리는 것은 現在를 알아차리는 것으로 가장 탁월한 對相이다.
지금 여기 이 瞬間 現在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實在하는 삶을 사는 것이고 幸福이다.
生覺이 過去와 未來로 가면 바로 煩惱가 된다.
呼吸만큼 現在를 알아차리고 自身을 알아차리는 좋은 對相은 없다.
그래서 呼吸을 修行 對相으로 選擇하는것이다.
또한 呼吸 하나에 諸行無常과 一切皆苦와 諸法無我인 三法印의 智慧가 모두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처음부터 알 수는 없다.
셋째, 위빠싸나는 생활선(Life Meditation)이라고 이해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修行의
場所와 時間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日常生活 모두가 수행의 對相이 되기 때문이다.
수행이 잘되는 경우에도, 안 되는 경우에도 알아차리고만 있으면 모두가 수행이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수행의 길은 열려있다. 흔히들 수행은 자신과 먼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알아차리는 수행은 바로 내 앞에 있으며 당장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위빠싸나는 現實的이고
쉬운 것이며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생활선(生活禪)이다.
다만 어려움이 있다면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것을 해야하는 어려움이 있다. 무엇도 바라지 말고, 무엇도 없애려하지 말고, 알아차릴 對相은 恒常 自身의 몸과 마음이라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이상 3가지 事實을 念頭에 두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알아차림(싸띠)을 계속하면
결국 고요한 마음의 集中이 생기고 다시 智慧가 나서 涅槃(닙바나)에 들게 된다.
涅槃은 智慧가 없으면 이르지 못하는데 智慧란 三法印의 智慧를 말하고
이 智慧의 結果란 執着이 끊어진다는 것 하나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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