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착은 華嚴思想의 流行에 따라 화엄경이 설법되는 문수보살의 영장(靈場)으로 산서성의 오대산 혹은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머무르고 있다는 성지신앙(聖地信仰)이 있었으므로 문수보살을 만남으로써 진리를 깨우치려는 무착은 그 성지인 오대산을 순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그는 젊은 시절 문수보살을 만나보았던 것이다. 무착은 전국을 떠돌다 홍주(洪州)의 관음원으로 가 선승인 앙산 혜적 밑에서 공부하였다. 한눈에 무착이 법기(法器)임을 알아본 앙산은 무착에게 전좌(典座)의 소임을 맡겼다.
어느날 이상한 떠돌이 중이 찾아와 밥을 달라고 하자 무착은 자기의 몫을 내주어 배불리 먹였다. 앙산이 이를 알고서도 모른체하고 짐짓 물어 말하였다. "아까 떠돌이 중이 왔었는데 밥을 주었는가" 무착 " 제 것을 그에게 주어 먹여 보냈습니다" 앙산이 기뻐 말하였다.
"그대는 큰 이익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일찍이 인도에서 온 중으로부터 '작은 부처'라고 불린 앙산은 그 떠돌이 중이 文殊菩薩의 顯身임을 꿰뚫어보았던 것이다.그러나
제자 무착의 눈이 아직 열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무착이 그토록 보기를 원하는 문수보살이라는 事實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文殊를 볼 수 있음은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임을 앙산은 알고 있었으며
肉身의 눈(肉眼)은 다만 볼 뿐이며(視)
마음의 눈(心眼)이 열려야만 비로소 보고(見)
꿰뚫어볼 수 있음을(觀) 無着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문수보살이 말한 '前三三 後三三'의 말뜻을 모르고 지내온 무착이었다.
文殊, 普賢, 觀音 셋이 서로 主人이 되기도 하고 벗이 되어 出現할 때는 一時에 出顯한다.
하나가 곧 셋이고 셋이 곧 하나다.
이와 같이 깨달으면 비로소 부처님의 一大施敎와 祖師의 語錄을 볼 수 있다고 할 것이다.(임제의 설법)
無着은 아직 心眼이 열리지 많아 自己 마음속에 있는 문수를 보기보다
오대산이라는 이름에 매달리고 끌여서 마음 밖에서 문수를 만나려 虛事를 하였던 것이다.
만약 '하나가 곧 셋이고 셋이 곧 하나다'라고 설법한 앙산의 친구이자 지객이었던 임제스님의 法門을 깨달았다면
무착은 문수가 말한 '前三三 後三三'이라는 화두를 그 卽時 깨달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학은 문수를 친견하려는 소망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석가여래조차 문수보살을 친견하므로써 원만한 부처를 이루었듯 선(禪)이 곧 문수요 문수가 곧 선인 것이다.
선(禪)을 通해 見性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은 곧 석가의 스승이며 칠불(七佛)의 스승이신 文殊를 親見하여
그로부터 智慧의 빛을 증득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착은 문수를 親見하려는 所望을 포기할 수 없었다.
세월은 흘러 오대산의 절에서 노경(老憬)에 이르게 된 무착은 어느 날 부엌 앞을 지니다
행자들이 여러 대중이 먹을 죽을 쑤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갓 산문에 들어 온 행자들이라 죽을 쑤는 솜씨가 서툴렀으므로 무착은 주걱을 빼앗아 들고 죽을 젓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한동안 설명을 해준 뒤 혼자서 젓고 있는데 돌연 김이 무럭무럭 나는 팥죽 속에서 문수보살의 모습이 장엄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내게 양식을 나누어주신 문희는 그동안 안녕하신가" 옛전에 떠돌이 객승이 장엄한 모습으로 끓는 팥죽 위에 현신하여 나타내보인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평생을 두고 고대하던 문수보살이었건만 무착은 종을 치고 향을 피워 여러 대중을 운집시켜
이 사실을 알리지도 아니하고 그저 묵묵히 팥죽을 저을 뿐이었다.
당황한 문수보살이 입을 열어 말하였다 "이 사람 날세 문수일세" 그러자 느닷없이 무착은 주걱으로 문수보살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문수는 당황해 소리를 치면서 말하였다.
"이 사람 내가 바로 문수보살이라니까" 그러나 무착은 무릎을 꿇어 예배를 올리기는 커녕 다시 주걱을 들어 문수의 얼굴을
이리치고 저리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수는 문수고 무착은 무착이다 만일 문수가 아니라 석가나 미륵이 나타났더라도
내가 주걱으로 뺨을 때여줄 것이다.
이에 팥죽 위에 문수보살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쓴 약은 뿌리까지 쓰고 단 호박은 꼭지까지 단 법,
내 三智法을 修行하여 오는 동안 오늘에야 문득 노승의 미움을 받게 되는구나"
그러면서도 문수보살은 기쁨에 가득 차 다음과 같은 게송을 내리는 것이다.
"누구나 잠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항하사 모래알같이 셀 수 없이 많은
칠보탑을 세우는 것보다 낫다.
칠보탑은 끝내 부서져 티끌이 되거니와
한생각으로 충만한 청정한 마음은
바른 깨달음을 이루느니라"
若人靜坐一須臾 勝造恒沙七寶塔
寶塔畢竟碎微塵 一念淨心成正覺
무착은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짐으로써 비로소 문수보살을 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문희의 법호가 말년에 무착(無着)이 된 것은 老境에 이르러 모든 執着의 끈에서 完全한 解脫을 하였기에
그런 緣由로 無着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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